화학의 프로메테우스
섀런 버트시 맥그레인 지음 | 바다출판사
제1장 비누와 니콜라 르블랑니콜라 르블랑은 스타가 되길 꿈꾸며 기회를 기다리던 과학자였다. 그는 가난한 무명 시절에 값싼 비누와 직물, 유리, 종이 등의 제조에 쓰이는 순수한 세탁 소다를 공업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발명했다. 르블랑이 개발한 방법은 50년 동안 대규모 화학 제조 과정에서 핵심을 이루었다. 합성 염료가 개발될 때까지 그의 과정은 사실상 화학공 업과 동의어처럼 통했다. 르블랑의 발명품이 비누로 만들어졌을 때, 그것은 인류 발전의 척도가 되었다. 독일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한 국가가 소비하는 비누의 양은 그 문명의 척도"라고 말했다.
니콜라 르블랑은 1742년 12월 6일, 중부 프랑스의 부르주 근처 마을에서 태어났다. 주물 공장에서 말단 사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르블랑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친구이던 의사가 어린 르블랑을 맡아 키웠으나, 그 의사마저 죽자 르블랑은 열일곱 살 때부터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르블랑은 화학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화학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상류층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유한 귀족들은 화학을 공부했고, 거주하는 성에 실험실을 마련했다. 심지어 국왕인 루이 16세는 화학이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의학적,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과학 중에서도 화학이 가장 인기를 끈 이유는 제조나 의약품, 광업 등에 실용적으로 응용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화학에 국가적인 열정을 쏟은 덕분에 르블랑은 과학 경력을 쌓는 데 필요한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먼저, 그는 프랑스 최초의 화학 교수 중 한 사람인 장 다르세 밑에 학생으로 들어갔다. 다르세 교수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오를레앙 공작에게 르블랑을 유망한 화학자로 소개했다. 오를레앙 가족의 일원이 된 르블랑은 무엇보다도 국왕과 아카데미가 후원하는 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몰두했다. 루이 16세는 소금을 비누 제조에 쓰이는 세탁 소다로 바꾸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1만 2000리브르(오늘날의 가치로 따지면 약 6억 원)의 상금을 걸었다. 가난한 르블랑에게 그 대회는 부와 확고한 지위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명예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오늘날 탄산나트륨에 대해 감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 화합물을 흔히 '세탁 소다'라 부른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섬유 공업의 미래는 이 희귀한 산물에 달려 있었다. 제조업자들은 탄산나트륨을 세탁 소다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흰색 금'이라고 불렀다. 탄산나트륨은 수용액 상태에서 ph가 9 이상인 강염기성 화합물이다. 알칼리를 지방과 함께 끓이면 비누가 만들어진다.
화학적으로 비누에는 긴 탄화수소 사슬이 포함돼 있는데, 이것은 물에 반발력을 나타내지만 다른 지방성 물질에는 친화성을 보인다. 알칼리로 처리하면 지방성 사슬의 끝 부분이 변형되어 물에 끌려간다. 한쪽 끝은 지방 물질을 끌어당기고, 다른 쪽 끝의 물 속에서 잘 녹는 분자 구조는 때 입자를 둘러싸서 물 속으로 흘러가게 하는 데 적격이다. 비누는 부엌에서 생긴 찌꺼기나 고래 기름, 올리브유, 팜유 등 어떤 종류의 지방으로도 만들 수 있다. 화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바다 소금에서 탄산나트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업적인 규모로 소금에서 탄산나트륨을 얻는 방법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르블랑은 마흔두 살 때 여기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르블랑은 1784년부터 1789년까지 5년 동안 이 문제를 붙잡고 씨름했다. 르블랑은 황산나트륨을 목탄으로 가열하면서 CO3의 공급원으로 새로운 성분(석회석)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내 그는 소금을 순수한 알칼리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르블랑은 이렇게 해서 흰색 금을 만들었다. 그런데 첫 번째 단계에서 생기는 부산물 중 하나는 부식성이 매우 강한 염산으로, 심각한 오염 물질이었다. 그러나 르블랑은 탄산나트륨을 만든 것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그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불행하게도, 르블랑의 방법은 생산되는 소다만큼이나 많은 오염 물질을 만들어냈고, 지역 사회 전체를 황폐화시켰다. 세탁 소다를 1톤 만들 때마다 강산성 염화수소 기체 0.75톤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다. 그것은 염산이 되어 쏟아져 내리면서 나무와 산울타리를 황량한 몰골만 남게 만들었고, 농토를 오염시켰다. 공장 주위에는 수만 톤의 화합물이 쌓였다.
노동자들은 염화수소 기체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속에서 화학 물질이 든 통을 휘저었다. 그들의 이는 부식되었고, 옷은 타서 누더기가 되었다. 염화수소 기체를 깊이 들이마시면 정신을 잃거나 토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죽어갔지만, 대부분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르블랑 공장을 이로운 것으로 여겼다. 최소한 그 공장 근처에 살거나 거기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랬다. 면직물에 대한 수요가 누그러질 줄 모르고 계속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오염을 다수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진보의 징후로 여겼다. 르블랑 공장이 들어선 도시의 조건에 대응하여 환경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운동에 참여한 사회 개혁가와 작가 중에는 찰스 디킨스, 디즈 레일리, 개스켈 여사, 에밀 졸라도 있었다.
가장 효과적인 오염방지 조처는 르블랑 소다의 가격을 낮추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화학 폐기물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부산물인 황은 특히 상업적으로 중요한 황산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곧 유리, 종이, 황산, 염산, 질산, 표백분, 여러 가지 화학적 염을 비롯해 공업 약품을 만드는 공장들이 부산물을 이용하기 위해 르블랑 공장 주위에 들어서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르블랑 과정의 부산물 재활용은 다양한 공장들이 서로에게서 원료 물질을 제공받는 최초의 수직적 통합 산업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르블랑 공장들이 깨끗해지면서 사람들도 비누로 자신의 몸을 규칙적으로 깨끗이 씻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누의 사용을 수백 년 이상 피해 왔지만, 르블랑의 발견은 비누를 현대 생활의 일부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결국 비누는 개인의 청결에 혁명을 가져왔고, 모든 사람이 세탁 가능한 옷을 입게 하는 데 기여했다. 20세기 초가 되자, 개인의 청결은 미국 전역에서 존경받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고, 중산층과 씻지 않는 다수를 나누는 경계선은 비누 거품으로 덮이게 되었다. 르블랑의 세탁 소다는 비누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입을 수 있는 값싼 면직물도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자신들이 몸에도 비누 거품을 칠하게 되었다.
제2장 색과 윌리엄 헨리 퍼킨르블랑의 세탁 소다가 대규모 화학 공업을 탄생시켰다면, 퍼킨의 모브는 전 세계의 염료 및 의약품 산업의 씨를 뿌렸다. 그의 합성 염료는 과학 연구를 제도화하고, 화학자를 전문화시키고, 방대한 지역의 경제를 변화시키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독일을 세계 최고의 공업국으로 부상시킨 수많은 염료 중 최초로 개발된 것이었다. 퍼킨은 대학을 중퇴한 십대 청소년이었지만, 그의 연구는 과학이 지닌 기술적인 힘을 극적으로 보여주었고, 과학 중심의 현대 세계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퍼킨은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한때 화가가 될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결정이 생기는 간단한 화학 실험을 보여주는 순간, 13세의 퍼킨은 약제사 밑에서 도제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약학은 퍼킨이 생각할 때 화학에 가장 가까운 분야였기 때문이다. 퍼킨의 큰 관심을 안 토머스 홀은 소년을 강의 조수로 임명했고, 2년 후 홀은 퍼킨을 왕립화학대학에 추천했다. 화학 교육과 연구만을 목적으로 한 영국 최초의 교육 기관이던 왕립화학대학에서 만난 친구이자 스승인 호프만 교수도 그 당시의 많은 화학자들처럼 천연 물질에서 추출한 화합물을 분석하고 시험했다. 특히 그는 콜타르에 들어 있는 물질들을 연구했다. 콜타르는 코크스 제조와 석탄 가스 조명의 부산물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던 폐기물이었다. 초기의 화학자들은 콜타르에 큰 흥미를 보였는데, 콜타르는 오늘날 석유와 천연 가스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유기 화합물의 주원료였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맨스필드가 콜타르에서 얻은 화학 물질을 다른 원료에서 얻은 물질과 비교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콜타르의 구성 성분 중 일부는 파란색 천연 염료인 인디고(indigo)에서 얻은 물질과 비슷했다. 콜타르에서 추출한 탄화수소 벤젠 물질에는 인디고를 가리키는 포르투칼어에서 따온 아닐린(anilin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프만은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쓰이는 퀴닌 속에 들어 있는 원소들의 비율은 탄소 20, 수소 11, 질소 1, 산소 2로, 아닐린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호프만은 아닐린을 퀴닌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 흥미를 느낀 퍼킨은 더 간단한 염기를 산화시켜보기로 했다. 그는 콜타르에서 추출한 화합물인 아닐린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산소를 첨가하고 수소를 제거하자 검은색 침전물이 생겼다. 그것을 에틸알코올로 처리하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자주색 염료가 만들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퍼킨이 그 용액을 작업대에 엎지르면서 실크 천을 물들이는 것을 보고 합성 염료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그런 사고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 같진 않다.
천연 염료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염색된 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었다. 천연 염료의 원료 식물을 재배하는 사람들도 점점 증대되는 면직물 공업의 수요를 대느라 큰 압박을 받았다. 더 풍부하고 값싼 염료에 대한 수요는 전체 산업의 팽창을 위협하는 병목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섬유 공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면, 퍼킨처럼 잘 훈련받은 젊은 화학자가 아름다운 자줏빛 용액을 보고 염료의 가능성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런데 퍼킨 자신은 화학적 발견을 상업적인 생산으로 연결하는 것이 과학자의 품위를 손상시킬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결국 그 해 가을, 호프만 교수에게 사업을 시작한다고 이야기하자, 호프만 교수는 화를 내며 퍼킨을 나무랐다. 그러나 퍼킨은 굴하지 않고 대학을 중퇴한 뒤 염료 사업에 뛰어들었다.
퍼킨은 21세의 나이에 콜타르 산물에 기초한 산업을 시작했다. 모브는 완전히 새로운 유기 화합물을 다단계 공업 합성법을 통해 만든 최초의 사례였다. 온갖 찬란한 색들이 콜타르의 검은색 슬러지에서 나왔다. 대중은 색에 현혹되고, 회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가운데 깨끗한 공기와 물, 노동자의 안전과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다. 상황을 냉정하게 주시하던 퍼킨은 북새통 같은 산업현장에서 은퇴했다. 그는 소송과 화재, 폭발에 넌더리가 났고, 그의 눈에는 화학 경쟁에서 영국이 독일에 밀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퍼킨이 합성 염료를 발견하기 위한 국제적 경쟁을 시작한 지 20년 후, 사실상 승부는 끝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패자였고, 독일이 승자였다.
제3장 설탕과 노버트 릴리외노버트 릴리외가 태어날 무렵, 뉴올리언스는 조그마한 소도시였다. 8,000여 명의 주민 중 절반은 백인이었고, 2700명은 노예였고, 1,300명은 자유 신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노버트와 그 어머니처럼 혼혈이었다. 릴리외가 태어나기 몇 해 전에 루이지애나 주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경작되기 시작했는데, 키 큰 다년생 초본인 사탕수수는 열대 지방의 남부 아시아가 원산이고, 기원전 8,000년에서 기원전 6,000년 사이에 중동과 중국에 알려졌다. 아랍인은 설탕을 의약품으로 사용했고, 지중해 지역으로 사탕수수를 전해주었는데, 거기서 설탕은 아주 값비싼 사치품으로 통했다. 설탕은 곧 악명 높은 삼각 무역의 기초가 되었다. 남부 루이지애나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확대되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 빈센트 릴리외는 노버트 릴리외를 파리로 보내 공부시켰다. 로버트 릴리외는 근면하고 공격적이고 과학적 재능이 있었으며, 프랑스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프랑스는 열과 열이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다루는 열역학이 발달한 중심지였다. 프랑스는 열과 에너지 외에 설탕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프랑스인은 설탕 보일러에서 나오는 열을 이용해 진공에서 설탕즙을 가열하고, 그 용액을 낮은 온도에서 증발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진공은 물 표면의 기압을 낮추기 때문에, 물 분자는 낮은 온도에서도 증기가 되어 탈출할 수 있다. 물을 증기로 바꾸는 데 필요한 숨은 열은 물을 진공에서 가열하든 대기압에서 가열하든 거의 똑같다. 그러나 정제과정에서 일부 열이 주위 환경으로 빠져나간다. 물의 온도를 낮게 유지하면 이렇게 상실되는 열의 양을 줄일 수 있고, 전체 과정의 효율을 높여서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를 위해 릴리외는 갈수록 진공의 정도가 높아지는 세 개의 밀봉 용기를 서로 연결시킨 증발기를 만들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각각의 용기 속에 든 시럽은 갈수록 낮은 온도에서 끓을 것이고, 숨은 열은 한 용기에서 다음 용기로 흘러갈 것이다. 릴리외의 아이디어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지만, 실험실 규모의 실험을 공장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릴리외는 1833년 파리를 떠나 뉴올리언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루이지애나로 돌아오고 나서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릴리외는 이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스스로가 마련하던가 발명가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리외는 주다 벤저민을 만났다, 백만장자인 그는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유대인 중 하나였다. 몇 주일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릴리외는 자신의 기계장비를 농장에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가동이 시작되자 그 장비는 예상보다 훨씬 잘 작동되었다. 벤저민은 그 장비가 불순물이 섞인 검은 색 액체를 북부의 정제 공장에서 만든 어떤 설탕에도 뒤지지 않는, 눈처럼 하얀 반짝이는 결정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황홀해했다.
그들이 증발시켜 만든 설탕은 지방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심판관들은 릴리외의 방법이 "우리의 설탕 제조에 완전한 혁명을 가져온 것이다. 갈수록 더 희고 굵은 설탕을 얻으면 우리는 마침내 전 세계 모든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고 평했다.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루이지애나에서 서로 모셔가고 싶어하는 최고의 공학자가 되었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릴리외의 3중 효과 증발기를 '세계 최고의 발명'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미국 농무부의 저명한 설탕 화학자인 찰스 브라운은 "릴리외의 발명은 미국 화학공학 역사상 최대의 발명이었다. 내가 아는 한, 화학공학의 모든 분야에 그렇게 큰 절감을 가져다준 발명은 없었다."고 평했다.
제4장 깨끗한 물과 에드워드 프랭클랜드19세기에 콜레라가 여섯 차례나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갈 때, 배설물에 오염된 식수는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30년 이상 온 세상이 공포로 떨던 그 시절에 한 화학자의 결연한 용기가 공중 보건을 구해냈으니, 그가 바로 에드워드 프랭클랜드이다.
프랭클랜드는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의과대학에 다니는 것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벅찬 것이었다. 그래서 프랭클랜드가 14세이던 1840년, 어머니는 프랭클랜드를 그 다음으로 좋은 직업인 약국의 도제로 보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랜드는 친구를 사귀는 데 놀라운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프랭클랜드는 대수학조차 배운 적이 없었지만, 뛰어난 분석화학 기술 덕분에 여러 학교에서 교사 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영예로운 박사 학위를 받은 프랭클랜드는 1849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전문적인 화학자가 되었다.
프랭클랜드는 유기금속 물질을 연구하는 한편으로 이전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자연의 기본적인 규칙성을 알게 되었다. 원소마다 그 결합 능력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보가드로가 원자와 분자를 구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화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프랭클랜드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화합물 속에 포함된 원소들의 비율은 원자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 원리를 가리키는 '원자가'라는 개념은 화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좀더 현대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어떤 원자의 원자가는 다른 원소들과 결합할 때 결합 고리를 형성할 수 있는 수와 같다. 예를 들면, 수소는 다른 원자 1개하고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가가 1이다. 프랭클랜드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40세 때 그는 왕립화학대학에서 퍼킨을 가르친 바 있는 아우구스트 빌헬름 호프만이 차지했던 명망 있는 교수 자리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