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의 프로메테우스
섀런 버트시 맥그레인 지음 | 바다출판사
제4장 깨끗한 물과 에드워드 프랭클랜드노버트 릴리외가 태어날 무렵, 뉴올리언스는 조그마한 소도시였다. 8,000여 명의 주민 중 절반은 백인이었고, 2700명은 노예였고, 1,300명은 자유 신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노버트와 그 어머니처럼 혼혈이었다. 릴리외가 태어나기 몇 해 전에 루이지애나 주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경작되기 시작했는데, 키 큰 다년생 초본인 사탕수수는 열대 지방의 남부 아시아가 원산이고, 기원전 8,000년에서 기원전 6,000년 사이에 중동과 중국에 알려졌다. 아랍인은 설탕을 의약품으로 사용했고, 지중해 지역으로 사탕수수를 전해주었는데, 거기서 설탕은 아주 값비싼 사치품으로 통했다. 설탕은 곧 악명 높은 삼각 무역의 기초가 되었다. 남부 루이지애나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확대되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 빈센트 릴리외는 노버트 릴리외를 파리로 보내 공부시켰다. 로버트 릴리외는 근면하고 공격적이고 과학적 재능이 있었으며, 프랑스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프랑스는 열과 열이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다루는 열역학이 발달한 중심지였다. 프랑스는 열과 에너지 외에 설탕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프랑스인은 설탕 보일러에서 나오는 열을 이용해 진공에서 설탕즙을 가열하고, 그 용액을 낮은 온도에서 증발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진공은 물 표면의 기압을 낮추기 때문에, 물 분자는 낮은 온도에서도 증기가 되어 탈출할 수 있다. 물을 증기로 바꾸는 데 필요한 숨은 열은 물을 진공에서 가열하든 대기압에서 가열하든 거의 똑같다. 그러나 정제과정에서 일부 열이 주위 환경으로 빠져나간다. 물의 온도를 낮게 유지하면 이렇게 상실되는 열의 양을 줄일 수 있고, 전체 과정의 효율을 높여서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를 위해 릴리외는 갈수록 진공의 정도가 높아지는 세 개의 밀봉 용기를 서로 연결시킨 증발기를 만들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각각의 용기 속에 든 시럽은 갈수록 낮은 온도에서 끓을 것이고, 숨은 열은 한 용기에서 다음 용기로 흘러갈 것이다. 릴리외의 아이디어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지만, 실험실 규모의 실험을 공장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릴리외는 1833년 파리를 떠나 뉴올리언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루이지애나로 돌아오고 나서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릴리외는 이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스스로가 마련하던가 발명가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리외는 주다 벤저민을 만났다, 백만장자인 그는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유대인 중 하나였다. 몇 주일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릴리외는 자신의 기계장비를 농장에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가동이 시작되자 그 장비는 예상보다 훨씬 잘 작동되었다. 벤저민은 그 장비가 불순물이 섞인 검은 색 액체를 북부의 정제 공장에서 만든 어떤 설탕에도 뒤지지 않는, 눈처럼 하얀 반짝이는 결정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황홀해했다.
그들이 증발시켜 만든 설탕은 지방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심판관들은 릴리외의 방법이 "우리의 설탕 제조에 완전한 혁명을 가져온 것이다. 갈수록 더 희고 굵은 설탕을 얻으면 우리는 마침내 전 세계 모든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고 평했다.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루이지애나에서 서로 모셔가고 싶어하는 최고의 공학자가 되었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릴리외의 3중 효과 증발기를 '세계 최고의 발명'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미국 농무부의 저명한 설탕 화학자인 찰스 브라운은 "릴리외의 발명은 미국 화학공학 역사상 최대의 발명이었다. 내가 아는 한, 화학공학의 모든 분야에 그렇게 큰 절감을 가져다준 발명은 없었다."고 평했다.제6장 유연 가솔린, 안전한 냉동과 토머스 미즐리제7장 나일론과 월리스 흄 캐러더스제8장 DDT와 파울 헤르만 뮐러19세기에 콜레라가 여섯 차례나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갈 때, 배설물에 오염된 식수는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30년 이상 온 세상이 공포로 떨던 그 시절에 한 화학자의 결연한 용기가 공중 보건을 구해냈으니, 그가 바로 에드워드 프랭클랜드이다.
프랭클랜드는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의과대학에 다니는 것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벅찬 것이었다. 그래서 프랭클랜드가 14세이던 1840년, 어머니는 프랭클랜드를 그 다음으로 좋은 직업인 약국의 도제로 보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랜드는 친구를 사귀는 데 놀라운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프랭클랜드는 대수학조차 배운 적이 없었지만, 뛰어난 분석화학 기술 덕분에 여러 학교에서 교사 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영예로운 박사 학위를 받은 프랭클랜드는 1849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전문적인 화학자가 되었다.
프랭클랜드는 유기금속 물질을 연구하는 한편으로 이전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자연의 기본적인 규칙성을 알게 되었다. 원소마다 그 결합 능력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보가드로가 원자와 분자를 구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화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프랭클랜드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화합물 속에 포함된 원소들의 비율은 원자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 원리를 가리키는 '원자가'라는 개념은 화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좀더 현대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어떤 원자의 원자가는 다른 원소들과 결합할 때 결합 고리를 형성할 수 있는 수와 같다. 예를 들면, 수소는 다른 원자 1개하고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가가 1이다. 프랭클랜드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40세 때 그는 왕립화학대학에서 퍼킨을 가르친 바 있는 아우구스트 빌헬름 호프만이 차지했던 명망 있는 교수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프랭클랜드가 과학 교육을 개혁시키기 시작할 때, 런던은 심각한 비상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콜레라가 발생했던 것이다. 19세기에 전세계적으로 콜레라가 대규모로 발생한 사건은 모두 여섯 차례 일어났다. 50년 동안은 단 6년간을 빼고는 한 차례의 콜레라가 휩쓸고 지나가면 곧바로 그 다음 차례의 콜레라가 찾아왔다. 일곱 번째 콜레라 대재앙은 1961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하여 여섯 대륙에서 2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830년대 초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퍼진 콜레라로 영국에서만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도시는 특히 콜레라에 취약했는데,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수질이 크게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런던의 물은 가장 악명이 높았지만, 최악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프랭클랜드가 1865년에 런던의 물 자문위원을 맡고, 1868년에는 하천 오염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사실상 유일한 위원이 되었을 때, 질병과 전염병은 이미 인간 및 동물의 배설물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독일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1883년에 콜레라균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콜레라가 사람의 배설물에서 식수를 통해 다시 사람에게 흘러가는 전염 경로를 아무도 몰랐다. 런던의 물 분석관으로 일한 처음 2년 동안 프랭클랜드는 물 시료 속에 포함된 유기 질소가 하수나 거름에서 나온다고 추정했다. 곧 프랭클랜드는 물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물의 겉모습만으로 안전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세기에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하수로 오염된 물은 21세기가 시작된 지금도 많은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천형으로 남아 있다. 제3세계 국가 인구 중 25%는 아직도 하수가 섞인 물을 마시고 있다. 과학자들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물을 단순히 천(사리천처럼 아주 값싼 것이라도)에 여과시키기만 해도, 콜레라균이 들어 있는 물벼룩을 대부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배설물로 오염된 물은 이제 인간의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에서 사라졌다.공기 중의 질소에서 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프리츠 하버는 수백만의 인명을 기아로부터 구했다. 20세기에 전 세계 인구가 네 배로 늘어났지만, 공기를 빵으로 바꾼 기술 덕분에 대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프리츠 하버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질소 고정법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하버는 1868년 12월 9일, 그 당시 독일 영토였던 실레시아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하버는 화학자가 되길 원했으나, 아버지는 가업에 종사하라고 강요했다. 아버지 회사에 들어간 지 여섯 달만에 하버는 거액의 회사 자금을 투자했다가 날려버렸다. 결국에는 아버지도 아들은 상업보다는 과학 연구에 어울린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하버는 곧 새로운 분야인 물리화학의 엄밀함과 명료함에 매력을 느꼈다. 전통적인 유기화학자가 화합물을 기술하고 분류하는 일을 한다면, 물리화학자는 실제 화학 반응을 조사하면서 그것을 설명하는 일반적이고 정량화가 가능한 법칙을 제안했다. 결국 하버는 자신의 물리화학 지식을 그 당시 최고의 과학적·사회적 문제 중 하나에 응용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 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로 만드는 것이었다.
화학자들은 125년 동안 질소와 수소로부터 암모니아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질소 분자를 이루고 있는 두 질소 원자는 가장 강한 화학 결합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암모니아를 다량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질소 분자를 분리할 수 없었다. 열을 가함으로써 질소 원자와 수소 원자를 잠깐 동안 결합시킬 수는 있었지만, 암모니아는 금방 질소와 수소로 도로 분해되었다. 정교한 열역학 연구를 통해 하버와 르 로시뇰은 수소와 질소는 200도의 온도와 200기압이라는 아주 극단적인 조건에서만 결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과정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는 촉매, 곧 기체가 들러붙을 수 있는 금속 표면이 필요했다. 금속을 하나하나 시험하던 그들은 오스뮴과 우라늄이 그 과정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10년, 자신의 발견을 발표하고 나서 두 달 후에 하버는 베를린에 새로 세운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제의받았다. 1914년 7월 28일, 하버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6주간의 여름 휴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독일은 중립국이던 벨기에를 침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기술이 대규모로 이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쟁 말기에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법은 폭약 제조를 위해 독일에서 생산되는 질산의 절반을 공급하고 있었다. 하버는 조국을 위해 단지 질산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다급한 처지에 몰린 군부는 하버에게 재래식 무기를 대체할 수 있는 화학 무기를 개발하라고 요구했고. 하버는 화학 무기를 개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미 군대에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염소는 역사상 최초의 대량 살상 무기이자, 과학적으로 개발된 화학 물질과 기술과 보호 장비를 최초로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전쟁에 사용한 사례였다. 독일의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프리츠 하버가 독일에서 화학전을 시작하고 조직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이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전쟁 후에도 가능성 있는 전쟁 수단과 그 분야의 연구를 위해 화학전의 사용을 옹호했다."
독일이 항복한 지 일년 후, 전쟁 기간에 대한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대부분의 수상자는 독일인이었다. 하버는 질소를 암모니아로 만드는 방법을 개발한 공로로 1918년도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되었다. 암모니아가 폭약으로 사용된 것이나 하버가 독가스를 연구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제9장 무연 가솔린과 클레어 C. 패터슨토머스 미즐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미국인의 생활 방식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50년 동안에 걸쳐 유례 없는 개인적 기동성, 값싼 가솔린, 강력한 자동차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미즐리의 유연 연료 덕분이었다.
미즐리는 1889년 5월 18일 성공한 발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동차 바퀴에 대한 특허를 얻었고, 장인은 접톱을 발명했다. 아버지가 발명가로서 걸어간 전철을 밟기 위해 미즐리는 뉴욕 주 북부에 위치한 코넬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얼마 후 미즐리의 가까운 친구이자 스승이 된 찰스 케터링과 힘을 합친 때는 대량 생산된 자동차가 나온 지 10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미즐리가 데이턴 공학실험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직후, 케터링은 한 가지 과제를 주었다. 그것은 바로 노킹이었다. 노킹이란, 내연기관에서 피스톤이 최대 효율로 움직일 때 일어나는 이상 폭발 현상으로, 금속이 충돌하는 듯한 소리가 난다. 노킹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면 엔진이 파손될 수도 있었다. 미즐리는 조기 폭발과 노킹을 방지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미즐리는 노킹을 일으키는 엔진의 연료에 요오드를 첨가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노킹이 사라졌다. 그러나 요오드는 실용성이 없었다. 가솔린 1갤런에 요오드를 첨가하는 데에는 1달러나 들었고, 요오드는 엔진을 부식시키고 막히게 했으며, 배기가스는 악취를 풍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오드는 미즐리에게 연료 속의 화학 반응이 노킹 문제를 해결해주고 노킹 방지제를 발견하는 열쇠가 화학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공학자 미즐리가 화학자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즐리의 연구에 획기적인 돌파구가 열린 것은 MIT의 한 화학자가 새로운 원소 주기율표를 알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주기율표는 1913년에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발표한 원자 모형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미즐리는 이미 알려진 노킹 방지 물질들이 거의 모두 주기율표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 모여 있는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가장 무거운 금속인 납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사에틸 납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예측했다."라고 미즐리는 회상했다. 사에틸 납의 양을 점점 줄이면서 실험을 계속한 그들은 0.05%만으로도 연료를 천천히 부드럽게 연소시키고 노킹을 방지하는 데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꿈꾸어오던 일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었다. 납은 가장 싸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노킹 방지 화합물을 만들었다. 3년간에 걸친 미즐리의 연구는 이제 완성되었고, 32세의 미즐리는 이제 엄청난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다.
미즐리는 노킹 방지제를 찾는 데 3년이 걸렸지만, 냉동에 관련된 공중 보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단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즐리는 호주머니에서 주기율표를 꺼냈다. 노킹 방지 물질을 찾을 때에는 미지의 성질을 지닌 특정 물질을 찾았다. 이번에는 그 반대로 그 성질이 잘 알려져 있는 미지의 물질을 찾아야 했다. 낮은 온도에서도 증발하는 휘발성이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몇 시간만에 그들은 잠재력이 있는 새로운 화합물 집단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훗날 CFC라는 별명과 듀퐁 사에서 생산한 프레온이라는 상표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클로로플루오로카본(염화불화탄소) 화합물이었다. 대량 생산과 제품 광고에 경험이 많은 자동차 공학자들은 마침내 냉동 산업관계자들을 설득시켜 CFC를 사용하게 했다.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안전한 냉장은 백신을 효과적으로 생산하게 하고, 식중독과 설사병을 감소시킴으로써 의학 분야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것은 수백만의 인명을 구했다. 오늘날에도 모든 백신은 반드시 냉동 보관한다.스스로 '절망의 소용돌이'라고 표현한 상황에서 월리스 흄 캐러더스는 20세기 최고의 기술적 진보 중 하나를 이루었다. 작은 분자들을 이어 거대 분자를 만듦으로써 합성 고무와 폴리에스테르, 그리고 상업적으로 최초로 성공을 거둔 합성 섬유인 나일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1896년 4월 27일에 태어난 그는 아이오와 주의 데스모인스에서 자랐고, 미주리 주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일리노이 주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땄다. 캐러더스는 일리노이 대학 최고의 유기화학도로 인정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