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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폴 맥가 지음 | 책갈피
1. 변하는 사회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는 강력한 봉건 지배자인 관구 대주교의 주재지로서 중요한 도시였다. 그 대주교는 이 도시의 영적이며 세속적인 통치자였으며,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최고위대주교였다. 당시 낡은 봉건적 질서에서 야기된 왕조 간의 끝없는 갈등과 전쟁으로 제국은 위태위태했다. 부의 원천이 토지와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봉건 지배자들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것이다.

빈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대대로 지배했던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하던 사회는 모차르트의 시대에 변하고 있었다. 봉건 사회는 지역적 생산과 소비에 기초한 사회였고, 당연히 지방분권적 정치 체제가 상부 구조를 이루었다. 가톨릭 교회가 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세력이었고, 그 자신이 주요한 토지 소유자이기도 했다. 왕과 실력자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무장력을 독점하고 있는 제후들의 불만을 조정해 주어야 했으므로 사실상 중앙집권화된 국가라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무역과 생산기술의 발달로 더 광범한 지역이 경제·사회적으로 통합되어 갔으며, 도시에서는 새로운 계급과 정치 구조, 그리고 사상이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새로운 계급, 즉 부르주아지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르네상스로 알려진 위대한 예술 문화 운동을 촉발시키기도 했는데 부르주아지가 촉발한 격변은 중앙집권적인 절대 군주제의 발전에 기여했다. 사회·경제 활동이 봉건주의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더 큰 규모의 국민 경제와 국가 탄생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절대주의의 등장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부분적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국왕은 봉건 영주의 독립적 권한을 제한하며 더 통일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지방의 봉건 영주들도 중앙의 절대 군주에게 종속되어 갔다. 대표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루이 14세의 프랑스였다. 절대주의 국가는 성장하는 부르주아지의 일부를 체제 안으로 편입시켰고, 그들은 국가 관료 체제에서 돈벌이가 되는 직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부르주아들이 사회의 특권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이렇듯 재구조화된 봉건적 정치 질서에서 부르주아지와 타협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포용하기도 한 것이 절대주의 국가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절대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프랑스에서의 내전, 프로드의 난과 같이 내전을 겪고 나서,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처럼 새롭게 등장한 사회·정치적 위기를 거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기타 유럽 지역에서는 절대주의 체제가 공고해졌으며, 부르주아지는 계속해서 경제적·사회적 힘을 키우면서 점점 더 변화를 요구하는 내부의 압력으로 작용했다. 외부적으로도 대륙의 절대주의 국가들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신흥 부르주아 국가와 경제적·군사적으로 격돌하면서 위태로운 봉건적 구조는 더욱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 개혁과 혁명, 그리고 반동



이러한 내·외부적 압력은 18세기 중·후반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계몽주의 사상이 뒷받침하는 위로부터의 일련의 개혁이 시도됐다. 계몽주의는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진행된 세계 인식의 혁명에 그 기원을 두고, 뉴턴 같은 인물들의 작업으로 절정을 이루었던 과학혁명과 과거 봉건사회를 지배했던 낡은 종교적 견해의 몰락으로 진행되었다. 계몽주의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는데 사회·정치·문화의 각종 문제들에 이성과 과학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계몽주의의 기본 의도였다.

미신과 구질서의 비합리성을 논박하고,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체제를 옹호한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 많은 계몽 사상가들이 산발적으로 당국의 탄압을 받았지만 18세기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들은 구질서의 이데올로기 장벽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절대 군주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빌려서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를 정당화했고, 더 많은 부르주아 세력을 끌어들여 사회를 재조직함으로써 군주제와 절대주의 국가로 대변되는 기성 정치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 그 개혁의 본질이었다.

가장 확고한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6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동 지배자로 등극한 요제프 2세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제국을 직접 통치하게 되자 매우 빠른 속도로 일련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도입했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개혁 기도와 뒤이은 정책 포기, 그리고 반동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성인 모차르트의 생애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요제프 개혁의 핵심 목표는 국가의 세입 증대와 통일성 확보였다. 이를 위해 구질서의 핵심 요소에 일련의 공격을 가했다. 가톨릭 교회와 유력한 지방 영주가 주요 표적이 되었다. 1770년대 그리고 특히 1780년대 초반에 요제프는 무서운 속도로 개혁을 단행했고, 이러한 개혁 조치들 때문에 훨씬 더 공개적이고 급진적인 문화적·지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요제프가 수구 세력들의 강력한 반대를 억누르면서 위에서 개혁을 진행해 사회를 재조직하려면 더 자유로운 지적·문화적 예외 권리가 필요했고, 자신의 개혁 정책을 지지해줄 계몽적 도시 부르주아 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각지에서 이러한 개혁은 심각한 저항에 부딪혔는데 이 와중에 요제프가 개혁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결정적으로 반동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는 1789년 프랑스에서 날아온 혁명 발발 소식이었다. 혁명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의 누이였던 것이다. 세 달 후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또 다른 무장 봉기 세력에 의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로 강제 압송되었다. 이 같은 프랑스 혁명의 추이를 접한 요제프는 수십 년 동안 추구해 오던 개혁 정책을 불과 몇 달만에 철회해버렸다. 검열이 부활했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경찰력이 증강되었다. 요제프 개혁의 핵심지지 세력의 다수를 이루었던 프리메이슨 단원들도 탄압을 받았다. 1780년대의 빈을 특징 지웠던 지적·문화적 자유는 전면적인 반동의 광풍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모차르트는 요제프의 위세 넘치는 개혁이 진행되는 시대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반동의 시기에 자신의 성인기를 빈에서 보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1781년 빈에 영구 정착했다. 요제프가 제국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로 등극한 지 1년 후다. 모차르트는 10년 후에 죽었다. 계몽적 군주가 되려고 했던 요제프가 죽고 그의 개혁 역시 종말을 고하고 난 직후였다.

3. 프리메이슨



18세기의 프리메이슨은 기존 사회의 반동과 타락에 맞서 개혁과 진보의 편에 서 있었다. 모차르트는 적극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는데 그의 많은 음악이, 특히 그의 오페라 작품 한 편은 프리메이슨의 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프리메이슨 사상은 대륙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약간이라도 현실 참여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을 통해 말만 난무하는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합리적이고 계몽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모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이상한 의식을 치르는 사교 클럽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단호하게 개혁을 주장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혁명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프리메이슨이 거행한 다수의 의식과 사상의 중심에는 이성 숭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성질서와 이데올로기가 갖는 전제적·비합리적 본성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프리메이슨 - 비록 많은 프리메이슨 단원이 가톨릭 교도이기는 하지만 - 은 반동의 보수인 가톨릭 교회와 유럽 전역에서 충돌하고야 만다.

모차르트는 1781년 빈에 정착하기 전부터 이미 프리메이슨 단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빈으로 이사한 후 그는 프리메이슨 지부에 가입했다. 선배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은 물론 그의 아버지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모차르트는 빈에 위치한 각종 프리메이슨 집회소(지부)를 드나들면서 그들의 각기 다른 사상과 주안점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는 불발로 그쳤지만 한때 조직을 결성하려고 했고, 남녀 평등을 옹호하는 급진파 프리메이슨 사상가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여성은 프리메이슨 지부의 정회원 자격은 거부당하고 있을 정도로 프리메이슨 지부의 다수가 극도로 반여성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런 태도를 비웃으며 그의 작품 <마술 피리>에서 여성의 입회를 허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4. 음악, 음악가와 사회



18세기의 음악가들은 대개 귀족의 궁정이나 성직의 위계에서 상당히 낮은 하인에 불과했다. 그들의 지위는 요리사 아래, 시종 위 어디쯤이었다. 독립적 음악가들은 아주 드물었고,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당시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작곡가 하이든마저 생애 대부분의 기간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하인으로 봉직했다. 거기서 봉직하는 내내 그는 내내 하인의 복장을 해야 했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여행도 할 수 없었다.

음악가들은 동시에 작곡가들이기도 했는데 온갖 행사와 의식에 필요한 곡들을 써야만 했다. 18세기에 교회 음악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가톨릭 국가에서는 여전히 작곡가들의 주요 임무였다. 그러나 성장하는 부르주아지가 점차 중요한 청중과 풍부한 시장을 형성하면서 공회당에서 거행되는 연주회가 대저택이나 교회, 귀족 가문의 연주회를 수적으로 능가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 음악가들은 작품의 상당수를 신구 청중의 특정한 요구에 부응하여 썼다. 그리고 음악적 교양을 쌓는 것이 귀족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자 부르주아지 역시 이를 곧 따라했고, 직접 연주하는 음악이 사회와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환대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신진 작곡가라면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집에서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건반악기용 독주곡(보통 소나타라고 부른다)을 발표하여 자신의 경력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차르트의 초기 발표곡들 역시 이런 종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악보 베끼기가 폭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사상 최초로 악보로 기록된 음악이 널리 이용되었고, 작곡가 개개인도 청중, 즉 대중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연주자들도 돈을 내고 대가의 연주를 듣게 되면서 이러한 연주회의 가능성과 요구 또한 증대했다. 이 모든 발전 과정은 피드백 과정을 거치면서 확대되었는데 놀라운 속도로 악기가 개량되었고, 이는 곧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8세기에 전개된 이러한 음악상의 혁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피아노의 도입이다. 피아노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부르주아지임을 입증하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피아노가 악기로서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음악적 가능성 때문에 작곡가들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제작한 교습 지침서의 발행, 고용주의 경제력 향상도 작곡되고 연주되는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대도시의 부유한 궁정만이 많은 수의 전문 음악가들을 장기적으로 고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음악은 더욱더 세속적으로 되었고, 지배 질서의 규범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음악가들과 작곡가들 역시 중세의 하인 신분에서 벗어나 스스로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부르주아적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은 철저하지도 못했고, 상호 모순되는 경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이 과정을 또렷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갖가지 특징을 극단적 형태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삶이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음악가들은 대개 귀족의 궁정이나 성직의 위계에서 상당히 낮은 하인에 불과했다. 그들의 지위는 요리사 아래, 시종 위 어디쯤이었다. 독립적 음악가들은 아주 드물었고,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당시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작곡가 하이든마저 생애 대부분의 기간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하인으로 봉직했다. 거기서 봉직하는 내내 그는 내내 하인의 복장을 해야 했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여행도 할 수 없었다.

음악가들은 동시에 작곡가들이기도 했는데 온갖 행사와 의식에 필요한 곡들을 써야만 했다. 18세기에 교회 음악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가톨릭 국가에서는 여전히 작곡가들의 주요 임무였다. 그러나 성장하는 부르주아지가 점차 중요한 청중과 풍부한 시장을 형성하면서 공회당에서 거행되는 연주회가 대저택이나 교회, 귀족 가문의 연주회를 수적으로 능가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 음악가들은 작품의 상당수를 신구 청중의 특정한 요구에 부응하여 썼다. 그리고 음악적 교양을 쌓는 것이 귀족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자 부르주아지 역시 이를 곧 따라했고, 직접 연주하는 음악이 사회와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환대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신진 작곡가라면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집에서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건반악기용 독주곡(보통 소나타라고 부른다)을 발표하여 자신의 경력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차르트의 초기 발표곡들 역시 이런 종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악보 베끼기가 폭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사상 최초로 악보로 기록된 음악이 널리 이용되었고, 작곡가 개개인도 청중, 즉 대중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연주자들도 돈을 내고 대가의 연주를 듣게 되면서 이러한 연주회의 가능성과 요구 또한 증대했다. 이 모든 발전 과정은 피드백 과정을 거치면서 확대되었는데 놀라운 속도로 악기가 개량되었고, 이는 곧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8세기에 전개된 이러한 음악상의 혁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피아노의 도입이다. 피아노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부르주아지임을 입증하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피아노가 악기로서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음악적 가능성 때문에 작곡가들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제작한 교습 지침서의 발행, 고용주의 경제력 향상도 작곡되고 연주되는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대도시의 부유한 궁정만이 많은 수의 전문 음악가들을 장기적으로 고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음악은 더욱더 세속적으로 되었고, 지배 질서의 규범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음악가들과 작곡가들 역시 중세의 하인 신분에서 벗어나 스스로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부르주아적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은 철저하지도 못했고, 상호 모순되는 경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이 과정을 또렷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갖가지 특징을 극단적 형태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삶이기 때문이다.

5. 중세의 하인에서 독립적 음악가로



모차르트는 신동이라는 환호를 받으며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면서 부자들과 명사들의 연회를 빛냈다. 십대의 모차르트는 유럽의 거의 모든 주요 지배자들 앞에서 연주했는데 눈을 가리고 연주한다거나 즉흥 시제에 곡을 붙이는 등 묘기와 같은 연주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또한 여행을 통해 당대의 다양한 음악 양식을 흡수했다. 모차르트의 후기 음악을 보면 그가 이러한 흡수와 종합을 통해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창조해 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 모차르트에게 유럽의 궁정에서 장기적으로 봉직할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았으며, 신동의 후광이 사라지면서 진정한 음악가임을 입증하는 것이 미래의 문제로서 더 절박하게 다가왔다. 또한 모차르트는 중세적 하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큰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 어리석고 무능한 귀족들의 지배에 매우 큰 굴욕감을 느꼈다. 콜로레도 백작의 빈 방문을 수행하던 도중 이런 불만이 폭발하여 그는 대주교에게 사임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굴욕적인 절차를 거쳐 모차르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황제 개혁의 중심지 빈에서 모차르트는 독립적 음악가로서 불안정한 삶의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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