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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폴 맥가 지음 | 책갈피
모차르트는 자신을 기본적으로 오페라 작곡가로 인식했다. 오페라는 그리스·로마 등 고전기 문화의 정수를 재발견하려했던 르네상스기의 시도 속에서 출발했다. 18세기가 되면서 이탈리아가 주도하던 오페라는 확연히 구분되는 두 가지 장르, 즉 오페세리아(비극)와 오페라 부파(희극)로 발전했다. 고대의 역사나 신화 체계에서 아무렇게나 줄거리를 빌렸고, 지배계급 출신의 등장인물, 즉 왕과 장군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모차르트도 몇 편의 오페라 세리아를 썼는데 지배계급이 주문하고 후원한 오페라 세리아는 풍부한 경제적 지원을 받아 완벽한 기교의 가수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 결국 묘기와 같은 과시적 창법이 등장하는 가창부를 가지게 되었다. 오페라 세리아가 성인 남성 소프라노, 즉 카스트라토에 의존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볼 때 오페라 세리아는 분명 가수 위주의 오페라였다. 노래가 성악적 기교와 꾸밈음이 덧붙여지면서 등장인물 사이의 갖가지 상호작용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음악과 드라마가 가수들의 요구에 종속되었다.



하지만 오페라의 진정한 변화는 오페라 부파에서 비롯됐다. 상류 계급은 하층 계급의 전형적인 특성을 의심 많고 인색하며 호색적이라고 간주했고, 오페라 부파는 이런 자질들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오페라 부파에는 하인들과 같은 중하층 계급의 인물만 등장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경 오페라 부파는 등장인물의 폭이 확대되었으며, 점차로 평범한 인간 개성이 묘사되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런 개성이 전례의 도식적인 인물 유형과 뒤섞여 등장하게 되었다. 음악의 발전 역시 이러한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스트라토의 부자연스러움이 배제되었고, 그 동안 무시되었던 저음 성부가 더 중요하게 되는 등 오페라 부파에 다양한 유형의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음악적 다양성도 확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의 왕성한 상호작용이 오페라 부파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진전을 바탕으로 모차르트는 자신의 위대한 오페라에서 진정한 음악적 연출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오페라는 대사와 음악이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이전의 어떤 오페라도 수행한 적이 없는 방법으로 놀라운 총체를 창출했다.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세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오페라 <피카로의 결혼>은 결혼을 앞둔 여자 종복의 육체에 대한 봉건 영주의 성적 권리, 즉 초야권을 되살리려는 백작과 백작의 하인 피가로와 동료 하인이자 아내가 될 수산나 그리고 백작의 부인이 계략을 꾸며 백작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이야기이다. 원래의 연극 작품은 귀족 제도와 봉건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기성 사회 질서의 핵심 측면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자 유쾌한 농담인 이 연극은 프랑스에서 일시적으로 상연이 금지되었다. 빈에서도 공연이 금지되기는 했지만 그 작품의 대본을 구할 수는 있었다. 그 결과 탄생한 최종 작품은 원래의 희곡과 비교해 볼 때 전복적인 정치학의 많은 내용들이 제거되었다.



프라하에서 <파가로의 결혼>이 성공하면서 모차르트는 새로운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이로써 탄생한 것이 모차르트·다 폰테 콤비의 두 번째 작품 <돈 조반니>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오페라는 돈 후안에 관한 흔해 빠진 이야기를 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농락하는 방탕한 귀족 난봉꾼이 벌을 받고 지옥으로 끌려간다는 내용을 상당 부분 차용하는데 이것은 드라마의 한 측면일 뿐이다. 도덕적으로 내놓고 훈계하는 이야기를 거부하며 돈 조반니라는 성격 자체에 대한 깊은 공감과 매력을 창조하기 위해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연극적·음악적으로 짜나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측면은 돈 조반니가 자신을 순응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시종일관 저항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 오페라 <마술 피리>를 살펴보자. 모차르트가 이 작품을 쓴 시기인 1790년 말부터 1791년 초는 요제프 2세가 죽고 그의 개혁도 종말을 고한 후였으므로 반동 세력이 기세 등등해있었고, 새로 부임한 황제는 혁명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 전쟁에 돌입할 태세였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은 자신의 계몽적 지지 성향과 조직의 비밀결사적 성격 때문에 탄압을 받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을 공개적으로 방어하는 오페라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성과 계몽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옹호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마술 피리>는 당대의 표준적인 작곡법 이외에도 더 통속적인 곡들을 사용하면서 엄청난 관객을 끌어 모았는데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연극과 함께 엄숙하고 심각한 음악이 오페라 전편에 등장한다. 줄거리는 복잡하고 때때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왕자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마술 피리를 받고 비밀 결사의 대제사장에게 납치된 밤의 여왕의 딸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되는데 몇 차례 시련을 겪고 나서 마침내 왕자와 공주는 하나가 되어 진정 악한 인물로 밝혀진 밤의 여왕은 패배하고 이성이 승리를 거둔다.

밤의 여왕은 반동을 상징한다. 프리메이슨 조직을 탄압했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가톨릭 교회가 이 캐릭터의 원형이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이렇듯 전체 오페라의 내용은 프리메이슨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이성의 신전을 지키는 최고 사제 자라스트로는 '신성한 프리메이슨'에 관해 노래한다. 음악과 관련해 특정한 조성과 음정, 노래를 동원하는 것 역시 프리메이슨의 의식·상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 오페라는 프리메이슨 사상에 존재하던 반여성적인 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많은 프리메이슨 회원들이 듣고 기분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1791년의 정세에서 이러한 주제 의식과 오페라의 인기가 반동으로 돌아선 지배계급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오페라를 완성하고 나서 겨우 두 달 후에 죽었다.



"사악함이 패배하고 떠오르는 지혜의 태양과 함께 불합리한 맹신이 극복되면서" 오페라는 끝을 맺는다. <마술 피리>야 말로 계몽의 문제를 가장 완벽하게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인 것이다.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는 강력한 봉건 지배자인 관구 대주교의 주재지로서 중요한 도시였다. 그 대주교는 이 도시의 영적이며 세속적인 통치자였으며,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최고위대주교였다. 당시 낡은 봉건적 질서에서 야기된 왕조 간의 끝없는 갈등과 전쟁으로 제국은 위태위태했다. 부의 원천이 토지와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봉건 지배자들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것이다.



빈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대대로 지배했던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하던 사회는 모차르트의 시대에 변하고 있었다. 봉건 사회는 지역적 생산과 소비에 기초한 사회였고, 당연히 지방분권적 정치 체제가 상부 구조를 이루었다. 가톨릭 교회가 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세력이었고, 그 자신이 주요한 토지 소유자이기도 했다. 왕과 실력자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무장력을 독점하고 있는 제후들의 불만을 조정해 주어야 했으므로 사실상 중앙집권화된 국가라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무역과 생산기술의 발달로 더 광범한 지역이 경제·사회적으로 통합되어 갔으며, 도시에서는 새로운 계급과 정치 구조, 그리고 사상이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새로운 계급, 즉 부르주아지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르네상스로 알려진 위대한 예술 문화 운동을 촉발시키기도 했는데 부르주아지가 촉발한 격변은 중앙집권적인 절대 군주제의 발전에 기여했다. 사회·경제 활동이 봉건주의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더 큰 규모의 국민 경제와 국가 탄생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절대주의의 등장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부분적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국왕은 봉건 영주의 독립적 권한을 제한하며 더 통일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지방의 봉건 영주들도 중앙의 절대 군주에게 종속되어 갔다. 대표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루이 14세의 프랑스였다. 절대주의 국가는 성장하는 부르주아지의 일부를 체제 안으로 편입시켰고, 그들은 국가 관료 체제에서 돈벌이가 되는 직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부르주아들이 사회의 특권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이렇듯 재구조화된 봉건적 정치 질서에서 부르주아지와 타협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포용하기도 한 것이 절대주의 국가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절대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프랑스에서의 내전, 프로드의 난과 같이 내전을 겪고 나서,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처럼 새롭게 등장한 사회·정치적 위기를 거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기타 유럽 지역에서는 절대주의 체제가 공고해졌으며, 부르주아지는 계속해서 경제적·사회적 힘을 키우면서 점점 더 변화를 요구하는 내부의 압력으로 작용했다. 외부적으로도 대륙의 절대주의 국가들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신흥 부르주아 국가와 경제적·군사적으로 격돌하면서 위태로운 봉건적 구조는 더욱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이러한 내·외부적 압력은 18세기 중·후반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계몽주의 사상이 뒷받침하는 위로부터의 일련의 개혁이 시도됐다. 계몽주의는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진행된 세계 인식의 혁명에 그 기원을 두고, 뉴턴 같은 인물들의 작업으로 절정을 이루었던 과학혁명과 과거 봉건사회를 지배했던 낡은 종교적 견해의 몰락으로 진행되었다. 계몽주의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는데 사회·정치·문화의 각종 문제들에 이성과 과학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계몽주의의 기본 의도였다.



미신과 구질서의 비합리성을 논박하고,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체제를 옹호한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 많은 계몽 사상가들이 산발적으로 당국의 탄압을 받았지만 18세기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들은 구질서의 이데올로기 장벽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절대 군주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빌려서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를 정당화했고, 더 많은 부르주아 세력을 끌어들여 사회를 재조직함으로써 군주제와 절대주의 국가로 대변되는 기성 정치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 그 개혁의 본질이었다.



가장 확고한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6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동 지배자로 등극한 요제프 2세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제국을 직접 통치하게 되자 매우 빠른 속도로 일련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도입했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개혁 기도와 뒤이은 정책 포기, 그리고 반동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성인 모차르트의 생애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요제프 개혁의 핵심 목표는 국가의 세입 증대와 통일성 확보였다. 이를 위해 구질서의 핵심 요소에 일련의 공격을 가했다. 가톨릭 교회와 유력한 지방 영주가 주요 표적이 되었다. 1770년대 그리고 특히 1780년대 초반에 요제프는 무서운 속도로 개혁을 단행했고, 이러한 개혁 조치들 때문에 훨씬 더 공개적이고 급진적인 문화적·지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요제프가 수구 세력들의 강력한 반대를 억누르면서 위에서 개혁을 진행해 사회를 재조직하려면 더 자유로운 지적·문화적 예외 권리가 필요했고, 자신의 개혁 정책을 지지해줄 계몽적 도시 부르주아 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각지에서 이러한 개혁은 심각한 저항에 부딪혔는데 이 와중에 요제프가 개혁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결정적으로 반동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는 1789년 프랑스에서 날아온 혁명 발발 소식이었다. 혁명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의 누이였던 것이다. 세 달 후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또 다른 무장 봉기 세력에 의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로 강제 압송되었다. 이 같은 프랑스 혁명의 추이를 접한 요제프는 수십 년 동안 추구해 오던 개혁 정책을 불과 몇 달만에 철회해버렸다. 검열이 부활했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경찰력이 증강되었다. 요제프 개혁의 핵심지지 세력의 다수를 이루었던 프리메이슨 단원들도 탄압을 받았다. 1780년대의 빈을 특징 지웠던 지적·문화적 자유는 전면적인 반동의 광풍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모차르트는 요제프의 위세 넘치는 개혁이 진행되는 시대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반동의 시기에 자신의 성인기를 빈에서 보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1781년 빈에 영구 정착했다. 요제프가 제국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로 등극한 지 1년 후다. 모차르트는 10년 후에 죽었다. 계몽적 군주가 되려고 했던 요제프가 죽고 그의 개혁 역시 종말을 고하고 난 직후였다.18세기의 프리메이슨은 기존 사회의 반동과 타락에 맞서 개혁과 진보의 편에 서 있었다. 모차르트는 적극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는데 그의 많은 음악이, 특히 그의 오페라 작품 한 편은 프리메이슨의 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프리메이슨 사상은 대륙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약간이라도 현실 참여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을 통해 말만 난무하는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합리적이고 계몽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모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이상한 의식을 치르는 사교 클럽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단호하게 개혁을 주장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혁명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프리메이슨이 거행한 다수의 의식과 사상의 중심에는 이성 숭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성질서와 이데올로기가 갖는 전제적·비합리적 본성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프리메이슨 - 비록 많은 프리메이슨 단원이 가톨릭 교도이기는 하지만 - 은 반동의 보수인 가톨릭 교회와 유럽 전역에서 충돌하고야 만다.



모차르트는 1781년 빈에 정착하기 전부터 이미 프리메이슨 단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빈으로 이사한 후 그는 프리메이슨 지부에 가입했다. 선배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은 물론 그의 아버지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모차르트는 빈에 위치한 각종 프리메이슨 집회소(지부)를 드나들면서 그들의 각기 다른 사상과 주안점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는 불발로 그쳤지만 한때 조직을 결성하려고 했고, 남녀 평등을 옹호하는 급진파 프리메이슨 사상가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여성은 프리메이슨 지부의 정회원 자격은 거부당하고 있을 정도로 프리메이슨 지부의 다수가 극도로 반여성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런 태도를 비웃으며 그의 작품 <마술 피리>에서 여성의 입회를 허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18세기의 음악가들은 대개 귀족의 궁정이나 성직의 위계에서 상당히 낮은 하인에 불과했다. 그들의 지위는 요리사 아래, 시종 위 어디쯤이었다. 독립적 음악가들은 아주 드물었고,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당시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작곡가 하이든마저 생애 대부분의 기간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하인으로 봉직했다. 거기서 봉직하는 내내 그는 내내 하인의 복장을 해야 했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여행도 할 수 없었다.



음악가들은 동시에 작곡가들이기도 했는데 온갖 행사와 의식에 필요한 곡들을 써야만 했다. 18세기에 교회 음악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가톨릭 국가에서는 여전히 작곡가들의 주요 임무였다. 그러나 성장하는 부르주아지가 점차 중요한 청중과 풍부한 시장을 형성하면서 공회당에서 거행되는 연주회가 대저택이나 교회, 귀족 가문의 연주회를 수적으로 능가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 음악가들은 작품의 상당수를 신구 청중의 특정한 요구에 부응하여 썼다. 그리고 음악적 교양을 쌓는 것이 귀족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자 부르주아지 역시 이를 곧 따라했고,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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