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반대한다
하워드 진 지음 | 이후
Ⅰ. 기억
학살된 역사이 글은 유명한 보스턴 대학살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기억해야 할 대학살들이 미국 역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글은 중요한, 종종 당혹스러운 - 즉, 이 나라의 기록이 깨끗하게 보존되어야 한다고,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신화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다른 나라와 다르고 더 좋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당혹스러운 - 에피소드들을 생략함으로써 역사 자체가 어떻게 '대학살' 됐는지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1770년 3월 5일 영국 군대가 다섯 명의 식민지 이주민들을 살해한 보스턴 대학살은 많이 기억된, 사실 너무나 많이 기억된 사건임이 분명하다. '대학살'이라는 단어조차 약간 과장이다. 이 사건은 독립을 향한 분위기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지만 나는 다른 대학살들에 관해 논하고자 했다. 보스턴 대학살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면 애국적 열정을 손쉽게 연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국혁명과 그것의 모든 상징들을 지지하는 것보다 미국 역사에서 인종과 계급의 깊은 분할을 확실히 은폐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이 무시당한 에피소드들은 인종차별적 히스테리와 계급 투쟁에 관해, 우리의 대륙과 해외 식민지에서 있었던 부끄러운 순간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며, 그 결과 우리가 스스로를 좀더 투명하고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예컨대 '타이노 대학살'이라 지칭할 수 있는 사건, 즉 콜럼버스와 그의 동료 정복자들이 이스파뇰라의 원주민들을 절멸시킨 사건(1550년에 이르면 그 섬 -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 에 살던 수백만 명의 원주민 가운데 5만 명 정도만 살아 남게 됐다)을 다루는 심포지엄은 왜 하나도 열리지 않는가? 존 메이슨 선장이 이끈 원정에서 우리의 청교도 선조들이 롱아일랜드 해협의 코네티컷 주 쪽 해안에 있는 피쿼트 인디언들의 마을을 불태워버린 1636년의 '피쿼트 대학살'은 어떤가? 미국 군대의 인디언 대학살 - 1864년 콜로라도, 1870년 몬태나, 1890년 사우스다코타 - 은 대학살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수백 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들을 대규모로 살육한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들은 셀 수조차 없으며, 바로 그 때문에 집중적인 조사 주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건들에 관한 조사 결과는 보스턴 대학살 이야기가 고무적인 만큼이나 미국 젊은이들에게 냉정을 되찾아 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국가의 죄악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것은 큰 교훈을 가져다 줄 것이다.
공식적 행위이든 백인 폭도들에 의한 것이든, 정부 관료들과의 협력 아래 이뤄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학살의 경우는 어떤가?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일리노이 주의 가난한 도시,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백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고용되어 있었는데, 그 탓에 히스테리가 뿌리를 내렸다. 이스트세인트루이스의 흑인 지역은 백인 폭도들의 공격 목표가 되어 6천 명이 집을 잃고, 대략 2백 명의 흑인이 사망했으며, 미시시피 강에서는 토막 살해된 시체들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1921년 오클라호마 주 털사에서는 36개 블록으로 이뤄진 흑인 상업지구에 비행기들이 니트로글리세린을 떨어뜨려 수백 개의 점포와 가옥 천여 채, 스무 곳의 교회, 병원 한 곳, 도서관, 학교 등을 파괴했다.
우리의 역사책들은 경찰과 군대가 살해한 노동자들에게도 주목하지 않는다. 미국이 해외에서 저지르는 잔학 행위들은 역사책에 실릴 가능성이 더욱 적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역사책들은 3개월만에 끝난 스페인-미국 전쟁을 장황하게 다루는데, 미국이 쿠바를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시켰다고 묘사하거나, '의용 기병대원'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업적을 찬양하는 식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베트남전쟁과 유사한 유혈 사건, 즉 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해 벌인 8년 전쟁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미국은 이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필리핀인을 살해했지만, 미국측 사상자 수는 5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1906년에는 어느 미국 파견대가 남부 제도 한 섬의 산악 분지에 살고 있는 필리핀 회교도들('모로')의 마을을 공격했다. 6백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가 모두 살해됐다. 이것이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미국의 반제국주의자들을 분노케 한 '모로 대학살'이다.
만약 '대학살'이라는 단어가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살육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 그 외에도 도쿄 소이탄 공습과 드레스덴을 비롯한 독일 도시에 대한 파괴도 '대학살'이라 부르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우리의 정부, 우리의 언론, 우리의 학교가 몇몇 사건들은 기억할 만한 것으로 선별하고, 나머지는 무시할 때, 우리는 누락된 정보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Ⅱ. 코소보와 유고슬라비아
저들의 잔학행위, 우리의 잔학행위우리는 대중을 기만하는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말장난에 익숙해져 있다. 이 칼럼은 유고슬라비아 폭격 당시 「보스턴글로브」를 비롯한 전국 곳곳의 신문들에 실렸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폭격을 수행한 주체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였지만, 현실(또 다른 혼미함)을 보면 주체는 미국이었다.
해외에서 벌어지든 자국에서 벌어지든, 제트 폭격기로든 경찰에 의해서든, 모든 공식적 테러리즘은 여느 테러리스트들과는 달리 항상 언론에 자신을 설명할 기회를 갖는다. 당시 주지사 넬슨 록펠러의 명령으로 31명의 죄수가 학살되고 9명의 간수들이 죽은 애티카 폭동, 28명에 달하는 MOVE(존 아프리카가 1973년경에 결성한 흑인들의 생태혁명주의·생태무정부주의 그룹)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필라델피아 경찰에 의해 집이 폭파되어 불길에 휩싸인 채 죽어 간 사건, 클린턴 행정부가 명령한 공격으로 웨이코에서 86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들이 죽어 간 사건, 뉴욕에서 한 무리의 경찰관들이 어느 아프리카계 이민자를 살해한 사건 등은 모두 '설명'됐으며, 아무리 불합리하다 하더라도 충직한 언론들에게서 시간과 공간을 할애받았다.
이런 설명들은 상대적 수치에서 위안을 찾기도 한다. 일구이언하는 데 있어서 클린턴과 쌍벽을 이루는 나토 대변인 제이미 셰이는 우리가 세르비아인들을 죽인 것보다, 세르비아 보안대가 더 많은 알바니아계를 죽였다고 말하면서(하지만 공습이 증가함에 따라 그 차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유고 민간인들에 대한 폭격을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유태인 대학살을 언급하면서 1945년의 드레스덴 불기둥 폭격(10만이 죽었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을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다. 잔학행위를 저지르면 잔학행위를 당해도 좋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잔학행위로 잔학행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만약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온갖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의 사상자들을 낳은 각국 지도자들을 그 국민들이 '암묵적으로' 용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정의로운 하느님은 당연히 인류를 절멸시킬 게다.
물론 결코 무시되어선 안 되지만, 알바니아계 난민들의 비통한 사진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우리의 폭격으로 야기된 인간적 고난의 전체적인 모습은 제대로 보여주는 법이 결코 없다. 알렉시나치에 퍼부어진 대대적인 공습 사건, 중국 대사관 오폭 사건, 남南 모라바 강의 다리를 건너던 민간 열차가 폭격을 받은 것도, 코소보 남부의 한 도로에서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폭격을 받은 것도, 민간인 버스가 전파되어 네 명의 아이를 비롯해 24명이 죽은 것도 '사고'였듯이 말이다.
나토와 미국의 관리들이 진지하게 확언하는 것처럼, 이 모든 게 '사고'일까? '사고'라는 단어는 극악무도한 행위에 무죄를 언도해 주는 데 사용된다. 내가 아이들이 가득 찬 거리를 시속 80마일로 질주해서 열 명의 아이를 죽인다면, 그걸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유고 공습으로 야기된 인명 피해는 사고가 아니라 이 나라 국민들에게 가한 의도적이고 잔인한 군사작전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의 잔학행위와 그들의 잔학행위, 이 두 가지의 잔학행위(두 종류의 테러리즘)는 둘 다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둘 다 그 존재가 밝혀져야 한다. 만약 한쪽은 집중적으로 극악한 관심을 받는 반면에, 공식적 설명으로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는 또 다른 한쪽이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면, 균형 잡힌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게 힘들어진다.
양쪽 모두의 잔학행위를 마주할 때 우리 미국인들이 고려해야만 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우리는 그 상황에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인들을 상대로 벌인 잔학행위의 경우, 전면적인 지상전에 착수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우리의 개입 능력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전면적인 지상전을 벌였다면 이미 벌어진 비극보다 훨씬 더 끔찍한 대혼란만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미국인들은 우리 정부가 유고의 무고한 시민들에 가하고 있는 잔인한 행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양쪽 모두에서 폭력을 영속화하지 않으려면, 우리 지도자들에게 마초 같은 오만("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밀로셰비치는 패배할 것이다!" "우리는 초강대국이다!")을 버리라고, 폭격을 중단하고 대화를 시작하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유고의 폭격이 협상으로 중단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양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하고 끔찍스럽게 죽어 갈까? 그건 우리 미국인들이 얼마만큼 신속히 우리 정부의 행동에 반대해 강력한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는가에 달려 있다.
Ⅲ. 이라크
이라크 폭력미국이 이라크에 폭격기를 보내려고 하고 있던 1998년 2월, 세 명의 지도적 정부 선전가들 -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 국가안보 자문역 새뮤얼 버거 - 이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의 한 공회당에서 미국이 왜 이라크를 폭격해야만 하는지 연설을 했다. 그러나 어느 폭격 반대론자가 올브라이트에게 질문을 하면서 주최측이 통제를 위해 안간힘을 썼던 질의응답 시간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라크 폭격이 비논리적이고 부도덕하다는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사용 잠재력을 파괴한다는 공언된 목적이 달성되리라는 아무런 확실성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게 분명한 것이다. 심지어 이라크에 그런 무기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으며, 설령 있더라도 그 위치를 확실히 알지도 못한다. 이라크 무기 사찰 업무를 부여받은 유엔특별위원회는 이라크가 화학무기나 생물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담 후세인에게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수의 이라크 민간인들을 죽이려하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조차 없는 폭력의 고삐를 풀어헤치려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정부에게서 연유하는 것이다.
미국 대중들은 우리의 이름으로 엄청난 부도덕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는 전에도 베트남에서 이런 일을 겪지 않았던가? 클린턴, 코언, 올브라이트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의회의 공화당원과 민주당원들이 모두 위선을 저지르고 있다. 전 세계에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많이 있다. 사담 후세인 같은 폭군이 이끄는 나라들 -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중국 - 도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의 군사 동맹국이든 수익성이 좋은 시장이든 그들이 '친구들'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더한 위선도 있다. 이 대량살상무기들을 전 세계 곳곳의 포악한 정부들에 공급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정부이다.
우리가 유엔의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유엔은 사찰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유엔은 일방적인 공습을 할 권한이 없다. 그런 공습은 자위를 위한 명백한 경우에만 폭격 같은 공격행위를 허용하는 유엔헌장을 사실상 위반하는 짓이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공습은 우리가 이미 제재 정책으로 이라크에 자행한 끔찍한 참사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아무리 주장을 내세워도 전쟁으로 돌진함으로써 모두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공습은 명백한 전쟁 행위다). 소수의 정치 지도자들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국가적 논쟁도 없이, 충분히 쟁점을 공표하지도 않은 채 미국인들을 전쟁으로 몰아넣게 놔두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만약 미국인들이 사실을 충분히 접하고, 다양한 시각에 귀기울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면, 폭력을 갈망하는 우리 지도자들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Ⅳ. 리비아
트리폴리에 대한 테러1986년 4월, 서베를린의 한 디스코텍에서 폭탄이 터져 미군 병사 한 명을 포함해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테러행위였다. 리비아의 포악한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테러행위에 관여한 기록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책임 소재를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상공으로 폭격기를 보내라고 명령해 거의 대부분 민간인인 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는 한 종류의 테러리즘과 또 다른 테러리즘 사이의 도덕적 선택을 내리도록 요구받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그렇게 지칭하지는 않지만, 테러리즘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이라면, 베를린의 혼잡한 디스코텍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 - 누가 했든 간에 - 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리비아의 북적거리는 도시를 폭격한 것도 그 정의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리가 만약 디스코텍 폭탄사건의 배후에 카다피가 있다고(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트리폴리 공습의 배후에 레이건이 있다고(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완벽하다) 가정한다손 치더라도, 둘 모두 테러리스트이지만 레이건은 카다피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을 죽일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성서를 훨씬 앞지른다. "눈에는 눈"은 눈 하나에는 백 개의 눈, 아이 한 명에는 백 명의 아이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벌거벗은 도덕을 미국 국기로 감싸려 했다. 그러나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부끄러운 짓을 감출 만큼 커다란 깃발은 어디에도 없다. 그 목적이 테러리즘을 저지하는 거라면, 공습을 지지하는 이들조차 성공하기 힘들 거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 목적이 미국에 대한 존경심을 얻는 것이라면, 결과는 그 반대일 뿐이다.
서방의 민주주의는 중동의 독재보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더 많단 말인가? 설령 우리가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런 면허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나라의 전국 정치판에는 베트남 통킹 만 사건 시기에 용감하게 목소리를 높인 두 인물 - 웨인 모스와 어니스트 그루닝 - 을 뒤따를 정치인들이 없단 말인가? 우리의 자랑스런 '자유 언론'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제 테러리즘은 전세계적으로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됐다. 하나는 카다피다. 다른 하나는 레이건이다. 사실 이것은 조잡한 단순화에 불과하다. 카다피나 레이건이 사라지더라도, 테러리즘은 계속될 것이다. 테러리즘이란 광신자들의 매우 오래된 무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가 오늘날의 정치인, 언론인, 나대는 애국자들과 광신자들이 바꾸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어리석음을 몸소 보아온 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은 훨씬 현명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자. 아마 그들은 전 세계에서 길길이 날뛰는 폭력을 그보다 더한 폭력으로 막을 수 없음을, 우리가 보복을 멈춘다면 테러의 악순환이 여기서 멈출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