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1. 전쟁의 서막정치는 즐길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 동시에, 그 결과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반드시 눈여겨 보아야 할 중요한 싸움이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정치싸움은 5년에 한 번 절정을 이루는데, 그것이 대통령 선거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모든 흥미로운 싸움이 그러하듯, 정치싸움에도 관중이 있다. 승패를 결정하는 최종적 권한을 가진, '유권자'라는 이름의 관중이다. 그러나 유권자 혼자 판정을 내리는 건 아니다. 그 판정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막강한 존재가 있다. 심판과 해설자 노릇을 하는 언론과 언론인이다. 우리는 지난해 봄 이후 유력한 대통령 후보와 자칭 '대한민국 1등 신문' 사이에서 벌어진 '정언충돌'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노무현과「조선일보」의 싸움이다.
이 싸움이 본격화한 것은 2001년이지만 그 서막이 열린 지는 이미 10여 년이 지났다. 노무현과「조선일보」의 싸움은, 박정희 시대 이후 4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을 역사의 시험대에 올려놓은 싸움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1987년 6월항쟁 이후 15년 동안 빠른 속도로 변화한 유권자 집단의 의식과, 세월의 흐름을 망각한 채 지속되어온 낡은 정치 지형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가 빚어낸 필연적 갈등이기도 하다.
2002년 대통령 선거가 몰고 올지도 모를 극적인 드라마의 최대 흥행요소는 노무현과 이회창이라는 두 인물의 충돌이 아니라 노무현과「조선일보」의 싸움에 숨겨져 있다. 노무현은「조선일보」와의 싸움을 통해서 개혁세력의 정치적 리더로 떠올랐으나,「조선일보」가 친 덫에 걸려 지지율이 하락하고 민주당 내 반대세력의 포위공격을 당하는 위기에 빠졌다. 링 위에 오른 상대는 이회창이지만 노무현이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는 주역은 바로「조선일보」다. 우선 싸움의 두 당사자를 간단히 살펴보자.
「조선일보」, 밤의 대통령?「조선일보」는 어떤 신문인가? 「조선일보」가 얼마나 막강한 정치적 존재인지는「조선일보」사람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1992년 11월 방일영「조선일보」회장 칠순잔치에서 계열사인「스포츠조선」 신동호 사장이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이 그 증거다.
"회장님을 남산이라고 부르고 싶다.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와 현재의 안기부 못지 않게 회장님이 계신 태평로 1가에는 모든 정보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이셨다."
그렇다면 일개 신문의 사주가 그런 아첨을 들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조선일보」가 많이 팔리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일보사의 2001년 매출액은 약 4천160억 원으로 10대 중앙 종합일간지 중에서 단연 톱이다. 2등인「중앙일보」는 3천850억 원, 3위「동아일보」는 3천590억 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사주가「조선일보」를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과 편집국장, 논설위원과 기자들이 사주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다면 힘이 있을 수 없다.「조선일보」는 국가적 현안이나 중요한 정치적 쟁점에 관해서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사주에서부터 경영진과 데스크, 일선 기자와 외부 필자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하게 그 입장을 따른다. 외부 필자 칼럼에는 "조선일보의 편집방침과 다를 수 있다."는 뱀다리가 달려 있지만, 그럴 만큼 튀는 칼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건 그야말로 쓸데없는 뱀다리에 불과하다. 한마디로「조선일보」, 정말 무서운 신문이다.
노무현, 돈키호테?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노무현은 자수성가한 남자다. 제도교육은 '부산상고'가 끝이고 잠깐 판사를 하다가 변호사 개업을 해 돈벌이에 열중한 평범한 변호사였다. 대학 나온 사람들은 학번으로 서열을 따지곤 하는데, 어떤 사람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노무현을 두고 '82학번'이라고 한다. '386세대' 대학생들이 다들 그랬던 것처럼 그도 80년대를 아스팔트 위에서 뛰었다. 부산민주시민협의회라는 재야단체 상임위원장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지냈고, 1988년에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부산 동구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1988년 '제5공화국 비리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정치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행로를 걸었다. 1990년 김영삼의 3당 합당을 거부한 후 무려 네 번이나 선거에 떨어졌다. 정치 입문 15년에 국회의원이었던 기간은 5년 반에 불과하며, 그밖에 공직경력이라고 해야 해양수산부 장관 8개월이 고작이다. 남성심리 전문가인 정혜신은 노무현을 이렇게 평가한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은 '무모'한 게 아니라 '대담'하다. 무모는 '앞뒤를 헤아려 생각하려 는 신중성이 없음'이라는 뜻이고, '대담'은 '일 대하는 태도가 용감하고 담력이 큼'이라 는 뜻이다. 대담한 사람을 무모한 사람이라고 욕한다면 이 세상에 누가 옳은 일을 위해 나서겠는가?"
내 말이 그 말이다. 무지를 배짱으로 아는 정치인은 수 없이 보아왔지만 나는 아직까지 노무현처럼 '진짜 배짱'이 두둑한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 노무현처럼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심리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의 불씨, 「조선일보」인물 프로필이 둘의 싸움은 11년 전인 1991년 9월 17일「조선일보」가 내보낸 인물 프로필에서 그 단초가 열렸다. 싸움을 건 쪽은 「조선일보」다. 문제의 그 프로필을 보자.
과거 5공 청문회 당시 돋보이는 활동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됐던 고졸의 변호사 출 신. 초선이지만 이번 야당통합 때의 기여도와 언변 등이 참작돼 본인의 고사 자세와는 상 관없이 대변인에 발탁. 원내 진출 이후 노사분규 현장을 자주 찾아다니는 등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서 제출 촌극을 빚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는 지적 도. 한때 부산요트클럽 회장으로 개인 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져 있다.
이 프로필 기사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청와대나 내각, 주요 정당 당직 인사가 있으면 언론은 새로 자리를 받은 사람의 프로필을 내준다. 지금은 좀 덜한 편이지만 그때만 해도 정치인 프로필은 주례사 첫머리 신랑 소개와 비슷했다. 약점이 있어도 좋은 점만 나열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유독 통합야당 대변인 노무현의 프로필만은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1991년 프로필 기사에 대해 노무현이 방어전을 벌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조선일보」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다음날 곧바로 방송사와 신문사 정치부에 해명서를 한 장 돌렸을 뿐이다.
부산요트협회장과 관련하여, 1982년경 요트를 취미생활로 탄 일은 있으나 척 당 가격이 2 백만 원 내지 3백만 원 정도의 소형 스포츠용이고, 요트 동호인 20여 명이 모인 동호인클 럽 회장을 한 적은 있으나 부산요트협회장을 지내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요트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인의 인식으로 요트라 하면 호화스러운 고가의 물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 사실을 밝힙니다. 상당한 재산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변호사로서 가난뱅이는 아니며, 그러나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부자 소리를 들을 수준 도 아니며, 사회적인 평으로서의 재력가는 더욱 아닙니다. 이런 보도가 또 다시 재인용되 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우려의 뜻에서 해명서를 보냅니다.
「조선일보」가 이 해명을 보도해주었을까? 그럴 리 없다. 조선일보사에서는「조선일보」 말고도 소위 '새끼매체'가 많다. 「주간조선」과「월간조선」이 대표적인 매체다. 1991년 10월 6일자「주간조선」은 해명서를 돌린 노무현의 반발을 '백 배 천 배로 응징'했다.
정가의 분위기는 그러나 한마디로 '노 의원의 해명이 과연 사실일까'하는 의아해 하는 눈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 의원의 재산이 상당하다는 얘기가 1년 전부터 파다했으며,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노 의원의 이미지가 실제 모습과 같지 않다는 말도 오래 전부터 있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정가에 나돈 얘기는 노 의원이 겉으론 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재에 밝아 재산이 상당액에 달하며, 인권변호사로서의 역할도 상당부분 과장돼 있다는 것이었다. 또 요트 타기를 즐겼을 뿐 아니라 노사분규 중재 과정에서 '재미'를 보았다는 말도 있었다. 그의 사생활과 관련된 얘기도 들렸다. 1년 전에 이미 '상당한 재산'과 '요트'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노 의원이 이번에 프로필 해명문제로 다시 한번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조선일보」, 펜을 든 폭력조직노무현은 1991년 11월 12일에 소장을 접수시키고 13일 아침 그 사실을 언론사에 알렸다. 그러나 주요 신문과 방송은 아예 기사거리로 취급해주지 않거나 토막기사로 처리했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대표로 일하고 있는 오연호 기자가 노무현과 우종창을 포함한 관련 인사들을 두루 취재해 월간「말」(1991년 12월호)에 쓴「노무현과 조선일보의 명예싸움」을 보면, 이것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 과정에서 터져 나온 노무현과「조선일보」의 대결을 예고한 간단치 않은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노무현은 이 싸움을 밀어붙였다. 서울민사지방법원 이진영 판사는 1992년 12월 4일 원고 노무현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선일보사와 안병훈 편집인, 그리고 우종창 기자가 연대해서 2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그러나 이 판결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주간조선」보도는 두고두고 노무현을 괴롭혔다.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총선. 노무현은 부산 동구에서 민자당 허삼수 후보와 두 번째 대결을 벌였다. 허삼수는 유세장에서「주간조선」을 읽어보았냐는 말로 입을 뗀 후 이 기사 내용을 근거로 들어 노무현을 인신공격하는 데 열을 올렸다. 노무현은 낙선했다. 1995년 6월 민주당 후보로 부산 시장 선거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자당 문정수 후보 역시「주간조선」기사를 남김없이 우려먹었고, 노무현은 또 떨어졌다. 2002년 3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에서도 이인제 후보의 공보특보였던「조선일보」기자 출신 김윤수가 같은 수법을 썼다. 그런데 오연호 기자의 인터뷰를 보면「조선일보」가 노무현을 '조진'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노무현 의원은 우리나라 299명의 의원 중에는 조금 다른 의원이라고 봐야 한다. 청 문회 스타이기도 하지만 차세대 지도자, 대권주자 얘기까지 하는데, 상당히 책임을 져야 하는 지도그룹이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시인해야 하는데 어물쩍 넘어가고…. 내 가 볼 때는 노 의원은 국민들이 다음을 맡겨도 좋겠다는 사람 중이 한 사람이었기에….
그런데「조선일보」는 상대를 잘못 골랐고, 또 잘못 건드렸다. 보내버리려면 그때 아주 확실하게 밟아서 보내버렸어야 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재산이 아주 많지도 않으려니와 불법적으로 축재를 하거나 뇌물을 받아먹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전혀 없는 정치인이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조져'봐야 흠집은 조금 내겠지만 '죽일' 수는 없었다. 노무현은 언론사 세무조사가 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한 2001년 2월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수구언론'에 대해 포문을 연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의 초점을 「조선일보」에 집중한다. 민주당이 국민경선을 치른 2002년 봄에는「조선일보」와의 전면전을 시작한다. 1991년「주간조선」보도로 일어났던 싸움은 그가 왜 이 시점에서 만만치 않은 역풍을 각오하고 '신문 그 이상의 신문'「조선일보」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결정적인 열쇠다.
특정 언론사는 자신들의 존재 근거, 삶의 정당성,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에 우리 와 같은 개혁정당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부당하게 편파 왜곡 보도하는 어느 언론사 에 1주일에 한번씩 찾아가서 절한다고 해서 시정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렇 지가 않다. 특정 언론사와 이런 관계가 형성된 데는 나름의 역사가 있다. 나는 피해자로 서 불가피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지, 내가 먼저 공격한 것은 아니다.
2. ' 조·한동맹'과 노무현의 선전포고2001년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을 언급한 후 국세청은 중앙 언론사 모두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시작했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이것을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정면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언론에 찍히지 않게 입조심을 하고 있던 민주당의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던 노무현은 거리낌없이 세무조사를 옹호하면서 '수구언론'을 개혁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독자들께서는 아마도 '언론과의 전쟁 불사' 발언 파문을 기억하실 것이다.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이던 2001년 2월 6일 출입기자들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언론과의 전쟁선포를 불사할 때가 됐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이틀 뒤인 2월 8일 처음 언론에 보도되자, 다음날인 2월 9일 아침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여기에는「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뿐만 아니라「한국일보」까지 가세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언론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말은 했다. 그 말은 권력이 언론과 전쟁을 하라는 뜻은 아니고 개인 시민이나 정치인이 너무 언론에 굽실거리지 말고, 눈치보지 말고,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는 말이었다. 거기서 전쟁이라는 말은 언론을 억압하거나 박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론의 횡포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다.
노무현의 언론관노무현은 1991년「주간조선」기사를 두고「조선일보」하나와 싸웠다. 그때 다른 언론사들은 구경만 했다. 10년 후인 2001년 2월 '언론과의 전쟁 불사' 발언 이후 세무조사와 언론개혁이 가장 뜨거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몇 달 동안 그는 조중동과 '패싸움'을 했다.「한겨레」와「대한매일」,「경향신문」등 소위 '한경대'는 노무현을 노골적으로 또는 넌지시 거들었다. 다른 신문사들과 방송은 최소한 적대적이지 않은 중립을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노무현은 다시「조선일보」하나하고만 싸우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노무현이「조선일보」에 대한 입장을 정리된 형태로 제시한 것은 2001년 6얼 7일자「미디어오늘」이영태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였다. 이 인터뷰에는 노무현의 '언론관'과 '조선일보관'이 잘 드러나 있다. 언론의 역할, 좋은 언론과 나쁜 언론을 가르는 기준, 언론개혁의 목표와 원칙에 대한 노무현의 생각을 들어보자.
언론에는 좋은 언론과 나쁜 언론이 있다. 정당을 나눌 때 보수와 진보로 구별한다. 그러 나 이를 나누기 전에 정당은 정통성 합리성 신뢰성을 갖춰야 하며 이는 언론도 마찬가지 다. 언론이 기본적으로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보도하는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가, 사실의 취사선택에 있어 합리적 균형을 유지하는가, 일관된 관점을 견지하는가 등이 중요하며 이 원칙을 지키면 좋은 언론, 합리적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사회에 미치 는 영향력이 크고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만큼 정확한 사실과 가치 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정치인을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 과거를 고백하고 사죄해 겸손하고 품위 있는 언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론이 달라지면 정치도 달라지고 국민도 달라진 다.
「조선일보」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노무현이「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은「조선일보」가 이회창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보도를 통해 그 의도를 실행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조선일보」를 "언론도" 아니라 "한나라당의 기관지"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나는 일찍이 "조선일보는 이회창 기관지"임을 선언한 바 있다.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내용도 여과 없이 대서 특필하고 사설, 칼럼으로 맞장 구 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 사설, 칼럼으로 공개훈수를 두기도 한다. 「조선일보」와 이회창 총재는 수구, 냉전, 특권세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