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즘의 문화
노암 촘스키 지음 | 이룸
중앙아메리카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면 미국의 도덕적·지적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에 비해 니카라과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은 편인데, 그 이유는 국가테러리즘이 실패해 미국이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국이 대리군대를 지원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미국의 일차적인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미국 내 엘리트들 사이의 논쟁은 주로 전술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며, 테러리즘 문화 풍토에서는 폭력의 성공만이 중요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대리군대가 계속 지원을 받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은 폭력행사의 성공이라는 사실은 미국 내 모든 정파를 통해 두루 인정되고 있다. 테러리즘 문화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공공연히 이런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올바른 인식도, 양심의 가책도 없다. 비슷한 사고방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미국의 국제테러리즘은 결코 중앙아메리카에 국한되지 않았다. 1986년 국제테러리즘의 최악의 단일사건은 미국의 리비아 폭격이었다. 당시 레이건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인을 일삼는 국가가 응징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열을 올리며 주장했다.
레이건 독트린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산출한 결과를 둘러싼 여러 해석을 살펴보면 테러리즘 문화의 본질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들은 미국 역사에 바탕을 두고 카터 행정부가 만든 프로그램의 연장으로서 야만성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백악관 내에서 회람된 서류들은 미국 정부에 의해 조작된 콘트라 군대는 '대리군대'로서 니카라과 내에 "정치적 토대"를 건설해야 하지만, 이 과업은 "민주 저항 세력"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1986년 후반에 콘트라가 저지른 살인, 강간, 납치와 그 밖의 만행에 대해 열거하고 있는 보고서는 주목을 끌지 못했다.
공식적인 미국 정책의 최고수준은 현지주민을 억누르기 위해 현지 군대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무기상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은 콘트라를 "펜타곤의 심리전 부서와 언론이 만들어낸 합작품"으로서, "미국인이 자신들을 위해 군인이 되어주고 민주주의에 관한 헛소리를 늘어놓도록 돈을 많이 주는 한" 싸울 의사가 있는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주된 문제는 "콘트라가 미국에 의해 인위적으로 급조되었다."는 점인데, 미국이 "콘트라의 핵심으로 내세운 사람들은 니카라과 사람들이 거부한 소모사 국민군이었다." 콘트라의 민간인 지도부는 "정치적·도덕적 원칙도 없고 니카라과 빈민들의 사정을 헤아릴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넘쳐나는 자원과 초강대국 미국의 직접적인 가담에도 불구하고 콘트라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콘트라의 공식 지도부는 니카라과의 과거 기업가와 지주 계층을 대표하는데, 미국의 관리들과 기업가들이 상대하기 좋아하는 부류의 제3세계인이다. 이 점이 워싱턴이 그들을 지도부로 발탁한 이유이다.
미 정부의 분석에서도 거론되듯이, 미국은 군사적으로는 강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취약하다. 대중조직의 말살과 함께 이데올로기 기구, 군대, 산업, 상업과 재정이 미국이 인정한 집단의 수중에 있지 않은 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지도, 정치적 경쟁에서 살아남지도 못한다는 것을 거듭해서 보게 된다. 무력에 의한 지배, 외국 지배자의 이익에 따라 위에서 하달되는 "개혁"에 집착하는 정신문화에서는 이러한 무능력이 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이 모든 기술적 수단을 동원한 것은, 대리군대의 민간 지도부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대중의 지지와 정치적 역량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국가테러리즘을 변호하는 온갖 말을 미국이 동원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 문제를 미국은 남베트남과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겪었으며, 중앙아메리카에서 직면하고 있고, 또 다른 고통받는 땅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미국 정부의 견해는 1986년 10월 10일 국제인권일 기념으로 국무부와 국방부가 공동으로 작성한 「중앙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에 드러나 있다. 지난 7년 동안 니카라과에서 미국과 대리군대가 공격의 강도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민간인이 화를 입었다. 이 모든 만행을 뒤에서 밀어주거나 혹은 직접 꾸민 것이 바로 미국이다. 그러한 참극에 책임이 있는 워싱턴과 중앙아메리카의 당국자들은 처벌은커녕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리 끔직한 만행이라도 "우리편"에 의해 저질러졌다면 얼마나 쉽게 용인할 수 있는가를 본다.제3세계와 관련해서 미국은 군사력은 강대하지만 정치력은 취약한 문제를 겪는다. 그 결과 "대중조직들"을 파괴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해야 하는 한편 외교적 해결을 회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인정할 수 없기에, 특히 외교 기록은 그 누구든 적은 믿을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이때 보통 미국의 적을 뜻하는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기술적 명칭을 얻게 된다) 정치적 해결보다는 폭력을 정당화하도록 개작되어야 한다. 인도차이나에서 있었던 일은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미국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기한 다음 '정치적 기초'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1954년의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 1960년대 초에 남베트남에서 전쟁을 확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적대의 종식을 뜻하는 1973년 파리 협정의 서명을 회피할 수 없게 되자 똑같은 이유로 협정을 무효화시키고 폭력적으로 최후의 시도를 했다.
미국이 외교기록의 왜곡으로 역사공학을 활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사실들을 무시 혹은 은폐하고,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법들이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1986년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1984년까지 콘타도라 협정안은 미국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1984년 6월 레이건은 의회에 콘트라 지원이 계속 되어야 한다고 통고하고, 9월 중순 '콘타도라 평화협정에 조인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니카라과에 대한 어떠한 경제원조도 불가'함을 주장하는 전문을 보냈다. 1984년 9월 니카라과는 콘타도라 안(案)을 조건 없이 수용했으며, 미국은 갑자기 조약의 실행을 불만스러워하면서 동맹국들에게 조약을 거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의회가 콘트라에 대한 지원을 의결하고 난 직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뉴욕 타임스」는 1986년에 니카라과가 미국이 분노를 야기하면서 콘타도라 계획을 수용했음에도, 오히려 그것을 훼방 놓았다고 비난한다.
1987년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은 새로운 평화계획을 내놓았는데, 이 계획은 니카라과를 특별히 언급하지도 않았고, "모든 민족이 자유롭게 자신의 경제, 정치, 사회 체제를 선택할 권리"를 요구했을 뿐이다. 이 아리아스 계획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레이건 행정부가 "만약 미국의 입장과 이익이 반영되지 않았다면,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에 의해 도달된 합의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게 계속 자금을 지원할 것이다."고 한 사실에 대해서는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다. 테러가 은폐하기 곤란할 정도로 되면, 그 책임은 알 수 없는 실체나 혹은 미국이 지원하는 암살단, 마르크스주의 게릴라에게 전가된다. 만약 목표 달성에 성공한다면, 미국의 지지가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자유선거"는 국가 테러에 의해 필요조건이 마련되기만 하면 시행될 수 있으며, "공산주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언론자유"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테러리즘 문화에서는 얼마든지 허용되는 일로, 중앙아메리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노력을 좌절시키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레이건 행정부는 1987년 8월 5일 "평화계획"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8월 6일로 예정된 중앙아메리카 대통령회담을 훼방놓고 콘트라 지원을 재개하기 위한 포석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이 대리군대의 운영을 중단할 것이라는 무의미한 "맹세"의 대가로 니카라과의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극적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과테말라에서 열린 대통령회담에서 아리아스 계획을 본떠 만든 협정이 조인됐는데, 이것은 레이건의 제안과는 "상당히 달랐다." "미국이 전면에 나선 것이 오히려 서로 적대적이던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을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레이건-라이트 계획은 "외교도 아니었으며",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이 레이건의 제안을 거부하고 미국이 싫어하는 아리아스 계획의 수정안에 찬성함으로써 "빗나간 시도"가 되고 말았다. 백악관 관리들은 레이건-라이트 계획의 제출 이유가, 그들의 예상대로 레이건-라이트 계획을 거부할 때 "의회로부터 니카라과 반군, 콘트라에 대한 지원을 얻어낼 전망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987년 8월 이 사건들이 발생한 동안 미국의 피해방지 작전은 계속되었다. 그 작전을 통해 달성하고자했던 목표는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니카라과의 "민주화"에 대해서만 주의가 집중되도록 하고, 둘째, 사실이든 조작이든, 협상의 결렬 책임을 니카라과에 전가하며, 셋째, 역사를 적절히 변형하는 것이다. 피해방지를 위해서는 레이건 계획을 워싱턴이 좌절시키려 했던 아리아스 계획과 동일시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국가권력의 요구에 부응할 목적으로 충성스런 언론들이 각색한 역사기록이 잘 활용되고 있는 사례를 보자.
1973년의 파리평화협정은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대해 1954년의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 협정대로 베트남의 독립과 주권, 통일과 영토의 통합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두 "남베트남의 정당들"을 인정했는데, 즉 미국의 지원을 받는 GVN과 NLF(민족해방전선, 미국식 선전선동의 용어로는 '베트콩'이라 불리는)에 근거를 둔 PRG(베트남남부공화임시혁명정부)이다. 이 두 정당은 "남베트남의 국내문제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일이 없는" 상태에서, 평화적 수단에 의해 민족적 화해를 이룩할 터였다. 그런데 백악관은 협정을 거부한다고 발표했으며, 언론은 멋대로 되살려낸 '베트남 경험'을 미국이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평화계획을 무산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해석하는 데 뒷받침된다.
니카라과 정부는 즉각 "(콘타드라 국가들의) 제안을 지지하고", 만약 미국이 콘트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면, 비상사태를 해제할 것이며, 과거 반군지도자들이 공개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니카라과로부터 외국 군사고문단을 철수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평화협정의 조문 이상"으로 나아갔다. 과테말라 협정은 중앙아메리카 5개국에 대해 민주화를 담보할 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8월 25일 니카라과는 이 협정을 준수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위원회 구성에 속임수를 썼으며" "라틴아메리카 평화조약에 말로만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비난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이 니카라과 내 반군들에 대해 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면,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을 위한 지역평화계획은 실행될 수 없도록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평화협정을 거부하기 위해 미국이 쓰고있는 수법은 정반대되는 해석을 내놓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실제협정은 무효화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적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레이건은 니카라과 정부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근거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앞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결정적인 조건이며, 그 기초작업이다.레이건 행정부가 중앙아메리카와 관련해서만 대중의 저항에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세계 차원의 미국 개입정책을 핵우산으로 보호하는 펜타곤 체제를 고집하는 데 있어서는 단합되어 있다. 따라서 소련의 핵실험 금지에 대한 미국의 동참, 지중해에서 미국과 소련 함대의 철수, 나토와 바르샤바 동맹체제 해체, 바다에서 발사되는 크루즈 미사일의 금지와 같은 조치들을 요구한 1986년 초의 고르바초프의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대중적인 외교는 워싱턴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했던 것이다. 미국은 "미래의 군비 축소에 관한 협정으로 비축하게 될 자금을 제3세계의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데 사용하기 위한 방안 검토"를 요구한 유엔의 뉴욕회의 참석을 홀로 거부했다. 그리고 미국 국무부는 엘살바도르 인권위원회의 한 지도자에게 비자발급을 거부하여, 그가 대표로 참석해야 할 유엔회의의 참석을 방해했다. 그러나 미국이 외면한 고르바초프의 제안은 오히려 미국의 안보와 정책의 목표달성에 유리했을 것이다. 걸프 지역에서 초강대국 군대의 주둔을 줄이자는 1987년 중반에 나온 소련의 제안도 마찬가지인데, 이 시기는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콘트라 청문회의 타격을 만회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이란과의 대결을 결정했던 무렵이었다.
뒤이어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유럽에 배치된 미사일의 감축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이 제안은 원래 소련의 거부를 예상하고 내놓았던 것으로서, 미국 일반대중의 여론을 달래는 한편 군비 경쟁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을 피해가려 했던 작전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단계적으로 긴장과 적대를 고조시키는 작전을 동반했다. 일본 오호츠크해에서 미국 전함의 통솔로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1986년 여름 "소련이 이 지역에서 최근에 대규모로 실시한 훈련"에 대한 대응으로 수행되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군비경쟁의 전 역사를 통해 입증된 결론을 지지해 주는 증거다. 펜타곤 체제는 무엇보다 국가의 경제관리에 유용하며(첨단기술산업을 위해, 국가보조를 받는 '민간기업'이 이윤을 목적으로 인수하기 전까지 비용이 많이 드는 연구와 개발단계에서 공적 보조를 얻어내고, 사실상 국가보호의 시장을 유지하는 것 등), '핵 억제' 역할을 수행한다(미국이 세계개입정책에 대해 핵우산을 제공한다). 미소정상회담(미국에서는 이 회담을 레이건의 커다란 승리로 선전했는데)이 열린 후, 미국 정보국에서는 나토 동맹국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를 보면 회담실패 책임이 레이건에게 있다는 의견이 훨씬 많았다.해외에서 지역적 규범을 회복하는 일은 후방기지가 안정되어 있을 때 효과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테러리즘 문화를 방어하는 일은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국가가 주민을 무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와 교리체계와 같은 미묘한 장치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테러리즘 문화는 경제적, 정치적 제도와 대중문화 속에 상당한 권력구조를 형성하고 있지만, 교화 및 통제 체계는 내부적인 균열이 없지 않다. 의회와 식자층의 지지 및 승인 아래 국가 당국이 비밀스런 테러리즘에 의존하는 것은, 국내의 적에 의해 조성된 지속적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특권 엘리트 계층이 대중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지적 자립의 징후와 함께, 도덕적 가치에 대한 헌신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두려운 '60년대'에 학생과 대중부문에서 이루어진 지적·도덕적 분위기, 즉 지배적인 테러리즘 문화에 대한 진정한 '반문화'가 성장하고 있다. 지적인 자립과 도덕적인 엄격성보다 위험한 것은, 대중의 정치 및 사회 생활 참여의 도구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조직적 틀이다. 그래서 엘리트 그룹은 대중조직의 성장을 방해하는 데 우선적으로 노력해왔다. 이러한 모든 위험한 것의 발전을 제약하는 데 성공을 거둔 것이 바로 미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대외정책에도 적용되어 제3세계에서 악명 높게 수행되었으며, 제2차세계대전 후 국가자본주의사회를 재구축하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적은 결코 제압되지 않았다. 중앙아메리카에서의 테러는 이전보다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