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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메리 풀브룩 지음 | 개마고원
1918년 11월 의회주의 공화국이 선언되었다. 이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회적 타협 위에 건설된 진보적인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공화국은 혼란과 패전 속에서 탄생했고, 독일인들이 정부 형태로서의 민주주의를 거부하여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결국 공화국은 14년을 넘긴 시점에 아돌프 히틀러가 합헌적으로 총리에 임명되면서 몰락했다.



초기 바이마르 공화국은 불안정 속에 있었지만 1924∼1928년 시기엔 분명히 안정되어 있었다.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발전과 몰락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매우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발생한 매우 복합적인 과정이다.



1924년, 공화국 초기 혼돈이 정리되고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프랑스·벨기에가 기존의 국경을 무력으로 변경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을 담았다. 독일은 1926년 국제연맹에 가입함으로 국제무대에서도 제자리를 찾았다. 배상금 문제는 도스 안으로 잠정적인 해결을 보았다. 프랑스 군대가 1925년 7월에 철수하기 시작했고 라인란트 일부 지역도 돌려주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경제적으로도 화해했다.



그러나 바이마르 문화와 생활방식의 '데카당스'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또한 좌파는 좌파대로 자본주의의 악폐와 노동계급의 궁핍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의 불안정성은 공화국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월 스트리트 주가가 폭락하는 1929년 10월 이전에 독일에는 바이마르 의회 민주주의를 깨뜨리려는 계획이 무성했다. 사민당이 1928년 선거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성과를 얻어낸 뒤, 뮐러 내각은 장갑전함의 도입 문제를 놓고 벌어진 사민당 분열 상태도 극복했고, 영 안의 채택을 둘러싼 광범한 정치적 위기도 이겨냈다. 그러나 윌 스트리트 위기는 치명적이었다.



브뤼닝 대통령 내각은 1930년 3월에 성립되었지만, 이 내각을 출범시킴으로써 권력을 의회로부터 빼앗아 구엘리트에게 되돌려 주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1930∼1933년까지 두 가지 정치적 요인이 동시에 출현하고 중첩되면서,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몰락으로 향했다.



1924년 출옥한 히틀러는 1925년 나치당을 재건했다. 1929년에 나치당은 우익의 언론 재벌 후겐베르크가 이끄는 민족국민당과 연대해 영 안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나치당의 약진은 1930년 9월 선거와 함께 이루어졌다. 제2정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1932년 가을 독일은 내전의 문턱에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치명타는 나치의 인기가 처음으로 하락의 기미를 보였을 때 가해졌다. 1932년 12월 총리가 된 인물은 슐라이허였다. 그는 각 계열의 노동조합과 나치 급진파도 끌어들이려 하여 기업가와 대지주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독일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반의회주의를 목표로 하되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 머물겠다는, 소위 '합법 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정당의 당수였다. 나치 운동은 대중운동의 성격이 강했고, 반근대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이며, 반공산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이며, 원민족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모호한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 나치의 약속은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민족적 치욕, 경제적 재앙, 사회적 갈등, 개인적 불안정 등과 동일시하던 많은 독일인들, 절망 속에 있는 독일인들에게 인상적인 비전이었다.



'통폐합 조정작업'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벌어졌다. 나치는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관리들과 유태인 관리들을 숙청했다. 또한 군대는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선서를 하기에 이른다. 또 1934년 7월에는 법 하나를 제정해, 집단 학살을 사후적으로 '합법화'하기에 이른다. 나치 국가는 '이원적'이었다. 국가 조직이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당 조직들이 국가 기구를 모방하고 그와 경쟁하며 그 업무를 침탈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1930년대 대외전략은 외교적 수단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는 동시에 재무장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것이었다. 군대의 규모를 확대하고, '메포어음'으로 군수자금을 동원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고, 1934년에는 폴란드와 10년 간의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1936년 히틀러는 독일이 4년 안에 전쟁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936년 7월에 발발한 스페인 내전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결속시키더니, 이를 계기로 '로마-베를린 축'이 놓여졌다. 1937년이 지나면서 히틀러는 영국과의 동맹구상을 포기했고, 대신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또 일본을 '축'의 세 번째 국가로 편입시켰다. 이 때에 이르면 독일이 더 이상 군비 경쟁을 벌일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빠를수록 좋았다. 1938∼1939년에 오스트리아와의 긴장은 고조되어갔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무혈 침공하여 승리했다. 또한 히틀러는 스탈린의 러시아와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1939년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약속을 지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3주가 채 되지 않아 폴란드를 정복했다. 1940년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진군했다. 1941년 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했다. 히틀러는 1941년에 러시아 침공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전선이 지나치게 확대되었고 독일군 장비도 시원치 않았다. 더구나 러시아의 겨울이 닥쳐와 독일은 패하게 된다. 독일군이 1944∼45년 겨울에 반격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봄, 패전을 확신하게 되었다.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자살했다. 베를린이 5월 1일 함락되었고 5월 7일 무조건 항복이 조인되었다.1945년 독일은 폐허였다. 그 누구도 독일의 장래를 알 수 없었다. 이후 40여 년 동안 독일은 아주 다른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다. 4대 강국이 통제하고 있던 베를린에 각 지구의 정책을 조율하기 위한 연합국통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각 승전국은 자기 점령지구에서 배상금을 확보하기로 합의했다. 포츠담 회담은 느슨한 자구로 이루어진 '의사 프로토콜'에 합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령지구들 간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소련 점령지구는 가장 과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하에 역사적인 융커 계급이 몰락했고, 대자본가들이 물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농업과 공업의 구조적 재편이 이루어졌고, 소련 군정이 지원하는 공산주의자 위주의 통사당이 정치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점령국들은 서부 지역에 과격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꺼려했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수취해 갔고, 영국과 미국은 독일 경제를 파괴하기보다 재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독일의 분단을 촉진한 것은 서부지역에서의 정책 변화였다. 1947년 전후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미국의 새로운 국제적 역할을 강화하고 공산주의의 파고와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1947년 1월에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구가 양 지구로 통합되고, 1948년에는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다. 화폐개혁은 소련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이를 명분으로 베를린으로 통하는 육로와 해로를 봉쇄하였다.



분단은 몇 단계를 거치며 고착화되었다. 동·서독은 각기 1950년대에 동구권과 서구권에 조직된 경제·정치·군사 동맹체제에 편입되었고, 1955년에는 양국 모두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으며, 1961년 8월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도피하는 마지막 통로를 봉쇄하기 위한 조치로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어 분단체제가 문자 그대로 굳혀졌다. 1970년대 초반 서독의 동방정책은 1972년 동·서독 상호 인정과 1973년 국제연합 가입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양국 관계가 두 개의 독자적인 주권국가 간의 통상적인 관계와는 아주 다르게 발전했다. 그러더니 1989년 가을 동독 혁명과 베를린 장벽의 개방으로 독일의 분단은 극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5. 산업화의 시대, 1815∼19186. 민주주의와 독재, 1918∼19457. 두 개의 독일, 1945-19908. 독일사의 패턴과 여러 문제들"독일인들이여, 그대들은 민족으로 결집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헛된 일이라네, 그대들 차라리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발전하기를…." 이 시구는 독일과 독일인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를 잘 함축하고 있다. 독일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이렇다. 독일 민족은 너무 늦게 통일을 달성한 늦깎이 민족이요, '철학자와 시인'의 민족이지만, 동시에 공적 영역 및 국가 권력으로부터 정신의 자유를 분리했던 민족이고, 문학과 음악에 대한 공헌이 얼마나 되었든 상관없이 궁극적으로는 유태인을 학살한 악의 화신 히틀러를 배출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독일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창조적인 문화와 파괴적인 정치사를 동시에 안고 있는 민족이요, 그 어느 민족보다 효율적이어서 모든 변동 과정에서 독특한 '모델' 역할을 하는 민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평가다. 이러한 평가 속에는 일정한 진실과 왜곡이 들어있다.



독일은 '유럽의 중앙'이라는 정치적·지리적으로 불안정한 경합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독일의' 역사와 정체성을 해석하는 열쇠로 간주한다. 이런 점으로 독일과 독일인을 정의하는 일이 다른 '민족사'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 책의 도달점은 20세기 후반에 존재했던 두 개의 독일이 결합된 1990년의 통일 독일이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과거 독립된 공국이나 기타 독립적인 정치체제였던 지역들로부터 형성된 나라다. 독일의 현저한 지역적 다양성은 지리적 조건보다는 정치적·문화적·사회경제적 역사 때문이다. 독일의 동·서의 지역적 다양성은 단순한 지형적 원인을 넘어서 숱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경제적으로 각 지역은 상이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개발되어, 각각의 특색을 보존한 채 보다 넓은 경제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종교개혁 이후 독일 국가들 내에 정립된 카톨릭 지역과 개신교 지역 간의 차이가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또한 독일사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는 지역마다 역사적 경험이 매우 다양하여 정치학적으로 연구의 매개가 되기도 했다.오늘날 독일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 유명한 네안데르탈인은 바로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이다. 과거 로마제국은 독일의 서부와 남부에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제국은 제국의 속주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5세기에 들어오면서 로마제국은 위기에 봉착했다.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이 넓게 늘어진 취약한 서부 국경선을 넘어 침입해옴에 따라 몰락했다. 이때 로마의 땅에 정착한 게르만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결국 6·7세기에 로마화된 형태의 새로운 게르만 사회가 대두했다. 서쪽 지방에 게르만 공동체가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프랑크 왕국 때였다.



그렇다면 '독일'의 역사는 언제 시작된 것일까? 이는 역사가마다 다르다. 독일사를 유럽사의 일부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역사가가 있는 반면, 서쪽에 새로운 '로마'제국을 재건한 때를 독일사의 기원으로 삼는 역사가들도 있다. 샤를마뉴는 771년 프랑크의 왕이 되었고, 이어 롬바르디아와 바이에른과 작센을 병합시키고, 남동부 국경지대 및 '마르크'를 창설하고 오스트리아를 세움으로써, 프랑크 영토를 확장시켰다. 그러나 9세기에 제국의 통합과 분할을 놓고 지속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란이 종결되었다. 샤를마뉴 후계자들은 제국을 동부·중부·서부로 분할함으로써 장차 프랑스와 독일이 분리되어 발전하였다.



9세기 말까지 서프랑크, 동프랑크, 고지부르고뉴, 저지브르고뉴, 이탈리아 등 다섯 개의 독립된 왕국이 출현하여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동안 많은 외부의 침입이 있었고, '부족태공령'이라는 새로운 정치조직이 출현하였다.



919년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의 왕위 등극에서 1056년 하인리히 3세의 사망에 이르는 작센 왕조와 살리 왕조과 집권한 중세 독일은, 정치와 사회가 봉건화되고 기사 귀족들이 지배적인 힘을 가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신성로마독일제국'으로 발전이 이루어지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비교적 조화로웠다. 당시 사회는 주된 사회정치적 패턴으로서 봉건제가 발전하고 있었다. 정치적 차원의 봉건제는 봉사, 충성, 보호, 지원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비대칭의 상호관계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봉건제는 8세기의 내란, 폭력, 이민족의 침입 과정에서 대두된 뒤 수백 년 동안 발전·확산·변형되었다.



11세기에 유력한 가신들과 상속할 수 없는 봉토를 보유한 배신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1037년 배신이 보유한 봉토의 상속을 법적으로 허용한 '봉토에 관한 법'이 반포되었다. 이로써 하위 기사들이 고위 귀족과 농민 사이에 위치한 또 하나의 계급으로 자리잡게 된다. 11세기말 독일은 귀족 신분제가 한층 더 카스트적인 사회여서 왕의 권력을 제약했던 사회였다. 그럼에도 오토 왕조와 초기 살리 왕조의 왕들은 대단히 성공을 거두었다. 오토 1세는 초기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롬바르디아 왕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롬바르디아의 왕이 되었다. 그 뒤 그는 962년에 교황으로부터 황제로서 대관과 도유를 받아 독일이라는 군주국과 로마제국이 결합하게 된다. 이러한 결합관계는 1806년까지 지속된다.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정치적 갈등과 종교적 투쟁의 시기였다. 작센의 봉기는 1073년부터 1075년까지 이어졌고, 슈바벤의 루돌프 공작이 대립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거대 왕조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12세기말 독일 인구는 7∼8백만으로 증가했다. 인구 증가로 남부와 서부 독일에서는 농지의 개간이 있었고, 동부 지역은 새로운 촌락의 건설도 이루어졌다. 독일 사회가 그처럼 성장하고 분화되었음에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독일의 귀족들은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했고, 독일 문화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궁정문화와 기사문화는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만개했다. 이러한 문화와 함께 시민적인 사회도 대두해 근대 유럽의 기초를 놓았다.



독일 정치의 분권적 성격으로 그 어떤 도시도 런던이나 파리와 같은 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 도시의 경우에 따라 라인 연맹이나 슈바벤 연맹 같은 도시연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연맹의 구조적 성격상 경제 협력을 지향하는 도시동맹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한자동맹이다. 도시정부는 독자적인 시민적 세계관을 보유한 저명하고 부유한 소수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다.



인구 팽창의 압력 때문에 벌어진 동쪽 슬라브 지역으로의 식민화 운동은 13세기에 극히 중요한 흐름이었다. 튜튼 기사단의 수도기사들은 슬라브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작업의 일환으로 1226년부터 프로이센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기사단은 15세기 들어 쇠약해지더니 13년전쟁에서 완전히 패하여 폴란드의 봉건적 종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콘라트가 1254년 사망함으로써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었다. 대공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대는 1273년 합스부르크의 루돌프가 황제로 선출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하는 1806년까지 지속적으로 황제권을 세습했다. 그러나 카를 4세의 치세에 새로운 헌정 질서가 확립되고 추후 400년 동안 독일 정치를 규정짓는다. 제국의 중앙권력은 14세기 말과 15세기 초부터 연방제후에 비해 더욱 쇠약해져 두 개의 층위가 존립한다. 그 중 하나는 제국의회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분의회였다. 이러한 제후와 특권 계급이 협력하여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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