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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메리 풀브룩 지음 | 개마고원
1. 독일과 독일인



"독일인들이여, 그대들은 민족으로 결집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헛된 일이라네, 그대들 차라리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발전하기를…." 이 시구는 독일과 독일인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를 잘 함축하고 있다. 독일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이렇다. 독일 민족은 너무 늦게 통일을 달성한 늦깎이 민족이요, '철학자와 시인'의 민족이지만, 동시에 공적 영역 및 국가 권력으로부터 정신의 자유를 분리했던 민족이고, 문학과 음악에 대한 공헌이 얼마나 되었든 상관없이 궁극적으로는 유태인을 학살한 악의 화신 히틀러를 배출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독일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창조적인 문화와 파괴적인 정치사를 동시에 안고 있는 민족이요, 그 어느 민족보다 효율적이어서 모든 변동 과정에서 독특한 '모델' 역할을 하는 민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평가다. 이러한 평가 속에는 일정한 진실과 왜곡이 들어있다.

독일은 '유럽의 중앙'이라는 정치적·지리적으로 불안정한 경합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독일의' 역사와 정체성을 해석하는 열쇠로 간주한다. 이런 점으로 독일과 독일인을 정의하는 일이 다른 '민족사'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 책의 도달점은 20세기 후반에 존재했던 두 개의 독일이 결합된 1990년의 통일 독일이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과거 독립된 공국이나 기타 독립적인 정치체제였던 지역들로부터 형성된 나라다. 독일의 현저한 지역적 다양성은 지리적 조건보다는 정치적·문화적·사회경제적 역사 때문이다. 독일의 동·서의 지역적 다양성은 단순한 지형적 원인을 넘어서 숱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경제적으로 각 지역은 상이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개발되어, 각각의 특색을 보존한 채 보다 넓은 경제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종교개혁 이후 독일 국가들 내에 정립된 카톨릭 지역과 개신교 지역 간의 차이가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또한 독일사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는 지역마다 역사적 경험이 매우 다양하여 정치학적으로 연구의 매개가 되기도 했다.

2. 중세독일



오늘날 독일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 유명한 네안데르탈인은 바로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이다. 과거 로마제국은 독일의 서부와 남부에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제국은 제국의 속주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5세기에 들어오면서 로마제국은 위기에 봉착했다.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이 넓게 늘어진 취약한 서부 국경선을 넘어 침입해옴에 따라 몰락했다. 이때 로마의 땅에 정착한 게르만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결국 6·7세기에 로마화된 형태의 새로운 게르만 사회가 대두했다. 서쪽 지방에 게르만 공동체가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프랑크 왕국 때였다.

그렇다면 '독일'의 역사는 언제 시작된 것일까? 이는 역사가마다 다르다. 독일사를 유럽사의 일부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역사가가 있는 반면, 서쪽에 새로운 '로마'제국을 재건한 때를 독일사의 기원으로 삼는 역사가들도 있다. 샤를마뉴는 771년 프랑크의 왕이 되었고, 이어 롬바르디아와 바이에른과 작센을 병합시키고, 남동부 국경지대 및 '마르크'를 창설하고 오스트리아를 세움으로써, 프랑크 영토를 확장시켰다. 그러나 9세기에 제국의 통합과 분할을 놓고 지속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란이 종결되었다. 샤를마뉴 후계자들은 제국을 동부·중부·서부로 분할함으로써 장차 프랑스와 독일이 분리되어 발전하였다.

9세기 말까지 서프랑크, 동프랑크, 고지부르고뉴, 저지브르고뉴, 이탈리아 등 다섯 개의 독립된 왕국이 출현하여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동안 많은 외부의 침입이 있었고, '부족태공령'이라는 새로운 정치조직이 출현하였다.

919년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의 왕위 등극에서 1056년 하인리히 3세의 사망에 이르는 작센 왕조와 살리 왕조과 집권한 중세 독일은, 정치와 사회가 봉건화되고 기사 귀족들이 지배적인 힘을 가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신성로마독일제국'으로 발전이 이루어지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비교적 조화로웠다. 당시 사회는 주된 사회정치적 패턴으로서 봉건제가 발전하고 있었다. 정치적 차원의 봉건제는 봉사, 충성, 보호, 지원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비대칭의 상호관계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봉건제는 8세기의 내란, 폭력, 이민족의 침입 과정에서 대두된 뒤 수백 년 동안 발전·확산·변형되었다.

11세기에 유력한 가신들과 상속할 수 없는 봉토를 보유한 배신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1037년 배신이 보유한 봉토의 상속을 법적으로 허용한 '봉토에 관한 법'이 반포되었다. 이로써 하위 기사들이 고위 귀족과 농민 사이에 위치한 또 하나의 계급으로 자리잡게 된다. 11세기말 독일은 귀족 신분제가 한층 더 카스트적인 사회여서 왕의 권력을 제약했던 사회였다. 그럼에도 오토 왕조와 초기 살리 왕조의 왕들은 대단히 성공을 거두었다. 오토 1세는 초기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롬바르디아 왕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롬바르디아의 왕이 되었다. 그 뒤 그는 962년에 교황으로부터 황제로서 대관과 도유를 받아 독일이라는 군주국과 로마제국이 결합하게 된다. 이러한 결합관계는 1806년까지 지속된다.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정치적 갈등과 종교적 투쟁의 시기였다. 작센의 봉기는 1073년부터 1075년까지 이어졌고, 슈바벤의 루돌프 공작이 대립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거대 왕조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12세기말 독일 인구는 7∼8백만으로 증가했다. 인구 증가로 남부와 서부 독일에서는 농지의 개간이 있었고, 동부 지역은 새로운 촌락의 건설도 이루어졌다. 독일 사회가 그처럼 성장하고 분화되었음에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독일의 귀족들은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했고, 독일 문화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궁정문화와 기사문화는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만개했다. 이러한 문화와 함께 시민적인 사회도 대두해 근대 유럽의 기초를 놓았다.

독일 정치의 분권적 성격으로 그 어떤 도시도 런던이나 파리와 같은 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 도시의 경우에 따라 라인 연맹이나 슈바벤 연맹 같은 도시연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연맹의 구조적 성격상 경제 협력을 지향하는 도시동맹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한자동맹이다. 도시정부는 독자적인 시민적 세계관을 보유한 저명하고 부유한 소수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다.

인구 팽창의 압력 때문에 벌어진 동쪽 슬라브 지역으로의 식민화 운동은 13세기에 극히 중요한 흐름이었다. 튜튼 기사단의 수도기사들은 슬라브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작업의 일환으로 1226년부터 프로이센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기사단은 15세기 들어 쇠약해지더니 13년전쟁에서 완전히 패하여 폴란드의 봉건적 종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콘라트가 1254년 사망함으로써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었다. 대공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대는 1273년 합스부르크의 루돌프가 황제로 선출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하는 1806년까지 지속적으로 황제권을 세습했다. 그러나 카를 4세의 치세에 새로운 헌정 질서가 확립되고 추후 400년 동안 독일 정치를 규정짓는다. 제국의 중앙권력은 14세기 말과 15세기 초부터 연방제후에 비해 더욱 쇠약해져 두 개의 층위가 존립한다. 그 중 하나는 제국의회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분의회였다. 이러한 제후와 특권 계급이 협력하여 통치하는 체제를 역사가들은 슈텐데 국가라고 부른다.

1500년경,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된 제국은 7개의 선제후령, 25개 가량의 세속 제후령, 90개의 교회령, 1백 개가 넘는 백작령, 소영지와 도시 등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1500년경이면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의 중앙집권화된 군주정들과는 상이한 정치유형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는 비교적 넓은 면적, 지리적 범위, 권위가 지역적으로 위탁되는 방식이 서로 다른 정치적 결과를 낳은 것 등에서 기인한다.

3. 종교개혁의 시대, 1500∼1648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일련의 변화가 발생함으로써 이 시기는 유럽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메리카의 재발견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세계의 경제와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자본주의 발전은 무산 임노동 계급을 창출했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독일은 14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비교적 취약하고 넓은 제국의 틀 내부에서 지방분권주의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에서 찾을 수 있는 '근대성'의 여러 요소에도 불구하고 16세기의 사유방식과 신앙에는 중세적인 것이 많다.

중세 말부터 '신성로마독일제국'으로 불리게 된 독일의 제국적 틀은 이미 체제를 잡은 상태였다. 그 첫 번째 기관은 제국의회였고, 두 번째 기관은 제국법정이었다. 또한 제국의 지리적 경계도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1499년에 바젤 조약으로 스위스 연맹과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미 13세기부터 스위스는 제국으로부터의 분리작업을 가속화했다.

이렇게 제국적 패턴이 법적 체제를 갖추어가고 있음에도, 그 구조에는 상당한 긴장과 갈등이 따르고 있었다. 카를 5세는 명목상 유럽의 절반을 통치하는 군주였다. 그러나 이러한 팽창은 황제의 정치적·재정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황제를 항구적인 채무상태로 밀어 넣었다. 그는 독일 내부 문제는 물론 남동부 유럽으로 침입해 오던 터키를 상대해야 했고, 프랑스와 유럽 패권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러한 시기에 유럽의 종교적·문화적 통일성을 깨뜨린 새로운 폭발적 요소가 게재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1517년 마틴 루터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해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에 부착했다. 이 사건은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유럽 기독교의 분열을 초래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본다.

루터 신학의 요체는 우선 '오로지 신앙에 의한 의인'이라는 개념이다. 성직자가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그 자체로 은총을 불러오는 예식과 성사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도사로서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루터 교의가 다양한 사회 집단에게 수용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인쇄술의 발달로 루터의 교의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팜플렛, 만화, 삽화 등을 이용한 점, 사회경제적 불안, 기사·제후·도시·황제 사이의 정치적 긴장 등이 이유이다. 그리고 많은 제후들이 종교개혁을 지지한 것은 우선 교황의 사법권과 과세권을 벗어 던지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교회 재산을 세속화하는 것에도 매력을 느꼈다.

제네바에서는 프랑스인 칼뱅이 신학체계를 발전시켰다. 칼뱅주의는 '제2차 종교개혁'을 통해, 종교개혁 1세대가 부분적으로만 실천한 것으로 인식된 개혁 작업을 완성시킨다는 목표를 추구했다.

당시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은 기독교에 되돌릴 수 없는 분열을 일으킬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이교적이라고 생각한 교리와 종교적 행위를 교회에서 제거하려고 했을 뿐이다. 양자의 이견을 해소하고 타협하려는 시도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양측이 갈수록 비타협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전선이 고착되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는 카톨릭과 루터파가 확보한 기존의 지위를 동결시킴으로써 대내적인 정치적 분규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 종교화의는 제후가 자기 지배령의 종교를 결정하도록 규정했는데, 이러한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 제후의 자유를 의미했다.

16세기 유럽 경제 전체는 팽창하는 시기였다. 해외 탐험, 특히 아메리카 진출로 은을 비롯한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경제의 구조 역시 변동하던 시기였다. 유럽 교역이 대서양 연안으로 방향을 틀었고, 영국이 중요한 해군국으로 발돋움했다. 독일에서는 발트 해 연안의 도시들과 내륙 육로교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도시들은 비중이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16세기 말 독일에서는 사회적·정치적 긴장으로 농민봉기가 재발했고, 도시에서도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17세기 중반에 수많은 유럽 국가에서 봉기, 혁명, 내전 같은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독일의 경우,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긴장과 유럽의 국제적 긴장이 결합되어, 1618∼1648년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30년전쟁이다. 이 전쟁에는 제국 내부의 종파적 분열, 영방제후에 대한 지방 신분의회의 저항, 제국 권력에 대한 영방제후들의 저항, 독일지역에서 쟁패를 벌이면서 동시에 독일 내부의 갈등에 빠져든 여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갈등 등이 연관되었다. 전쟁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원인은 전선과 쟁점에 명확한 경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1648년 유럽의 갈등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다.

4. 절대주의 시대, 1648∼1815



영방국가들은 30년전쟁으로 제국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그 힘이 크게 강화되었다. 핵심적인 정치적 주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아닌 영방군주들이었다. 소국의 군주들은 다른 신분을 희생시키면서 권력을 집중시켰다. 상비군을 양성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징수하고, 영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관료제를 육성했다. 가장 중요한 정치 변화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부상했다는 점이다. 18세기 중반에 오스트리아의 지배적 지위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했고, 19세기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로 통일을 달성했다.

1684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도 독일에는 이러저러한 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그 전쟁들은 갈수록 제국 자체와는 무관해졌다. 이제는 왕위계승 전쟁이 문제였다. 또한 군주들과 그들의 궁정이 두드러진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은 30년전쟁으로 촉발된 사회경제적 발전과 연관된다. 영방 내에서 도시들이 누리던 자치와 자율성은 17세기 말에 크게 축소되었고, 여러 영방에서 토지 귀족들은 절대주의 국가에 종복으로 변신했다.

국가의 관료화와 군주의 절대주의적 권력의 강화가 동시에 진행된 가장 중요한 경우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었다. 이 나라는 '통일' 국가가 아닌 '복합체'였다. 호엔졸레른은 왕위 계승에 단절이 없어 승계를 둘러싼 시비가 벌어지지 않았고, 왕위를 계승한 군주들이 장수했다.

절대주의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였다. 1653년 그는 브란덴부르크 신분의회로부터, 평화시에도 소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재정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 대가로 선제후는 귀족들이 그 동안 구축했던 영주권을 승인해 주었다.

프로이센이 놀라게 성장하고 그 시대를 절대주의 시대라고 하지만, 나머지 다른 독일 지역의 사정은 천차만별이었으며, 그에 따른 발전양상도 제각각이었다. 서부 독일에는 도시가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엘베 강 서부에 편재했던 토지영주제 하의 농민들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러나 분할상속 지역의 농민들은 빈약한 농업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상공업에 종사해야 했다.

1648년부터 1815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독일의 사회와 문화에는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교육받은 중간계급이 성장해 관직이나 하급 궁정관직을 차지하였고, 새로운 사고방식과 실천이 모색되고 있었다. 사회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기독교의 지위도 변화하고 있었다.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조류가 대두하였고, 실천적 합리주의가 확산되었으며, 자연세계와 인간사회에 대한 관점이 변화했다.

17세기 말 독일 남부에서는 바로크 예술이 만개했다. 그리고 17세기말과 18세기에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 정통을 거스르는 경건주의 등의 흐름이 나타났다. 18세기에는 유태인들의 지위도 변하여 새로운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좀 늦게 대두했고, 독일만의 독특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문화적 상대주의와 합리주의가 신의 계시를 제치고 권위의 근거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기성의 종교와 권위적인 통치 형태에 보다 타협적이었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지만, 이전 시기에도 라이프니츠, 푸펜도르프, 토마지우스 등의 사상가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생각하고 알며 토론하는' 새로운 양상이 광범하게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독서하는 공중'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등장했다. 또한 새로운 토론 조직의 결성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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