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 평전
필리프 라트 지음 | 바움
드골 평전
필리프 라트 지음/윤미연 옮김
도서출판 바움/2002년 11월/726쪽/23,000원
세기말과 드골의 유년 시절(1890~1909)
1890년 11월 22일, 샤를 드골이 태어났다. 모계는 릴 지방의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아버지 앙리 드골은 파리에 위치한 이마퀼레-콩셉시옹 중등학교(카톨릭계 학교)의 교사였다. 드골은 이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샤를 드골은 상류사회의 문화와 거리가 먼 프랑스 북부의 중산층 가정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도시 릴 지방에 팽배해 있던 서민적인 성향, 실용적이고 단순명료한 사고방식과 노동을 중시하는 가치 풍조, 현실주의 등 프랑스 정치계에서 열렬히 선호하던 남부의 댄디즘(정신적 귀족주의)과 거리가 먼 이 도시의 특성들은 드골이 장차 자신의 명료한 사상을 구축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숨겨진 자질을 드러내다(1910~1925)
사관생도 시절(1910~1915) 드골이 훗날 프랑스 국가 원수가 되기까지의 토대는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부임해 군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구축된 것이었다. 1909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드골은 사관 서약과 함께 군인의 길로 들어선다. 이렇게 그는 프랑스의 운명을 구현하는 소명을 띠게 되었으며, 1911년부터 필리프 페탱 대령 휘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베르됭은 지금까지도 전몰장병들을 추모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는데 1915년 대위로 진급한 드골 역시 그곳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 이후 32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페탱 장군이 서명한(‘모든 점에서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상찬의 내용으로 직접 가필한) 육군 수훈보고서에 드골의 혁혁한 전과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전쟁을 생각하다(1916~1921)
포로 생활을 포함한 전쟁 체험을 통해 그의 사상이 완전히 형성된다. 불과 27세의 육군 대위가 주는 전략과 정책에 관한 교훈들에 많은 상급 장교들이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드골 대위가 자신의 사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화술과 논증력,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과 뛰어난 설득력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독일 내의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전쟁에 참여할 영광을 놓쳐버렸다며 낙담에 빠진 드골에게 수여된 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공화국 최고의 훈장)이 그의 진정한 가치를 마침내 인정해 주었다. 젊은 교관(30세)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부여된 교육자적인 자질을 발휘한다. 그는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그 능력을 발전시켜 고위급 장교들 앞에서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10년에 걸쳐 무르익은 경험을 토대로 그가 지닌 사상 자체의 대담성과 그 사상을 납득시킬 수 있는 설득력이 결합됨으로써 그는 확고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확립(1920~1925)
1921년은 샤를 드골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해로 시작되었다. 군 내부에서 역사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고, 군인이 아닌 개인으로서 결혼생활의 행복에 취해 있던 한 해였다. 4월 생시르 사관학교 역사학 교수로 임명된 서른한 살의 육군 대위는, 12월 아들 필리프가 태어나는 행복 속에서 ‘프랑스군 총사령관’ 드골 장군으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완성한다. 이 역사학 교수는 1922년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 학생 신분으로 공부한다(장 라쿠튀르는 이 시기의 드골에 관해 ‘반反 독재주의 이론가’라고 묘사한다). 군사업적에 대한 탁월한 분석학자인 드골은 당시 육군대학 내에서 강압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던 군사 이론에 맞서, 그 이론의 기본원리에 대한 비평에 관심을 갖는다. 자신이 중대한 전략적 실수라고 판단한 것으로부터 문제의 핵심을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그의 첫 번째 저서가『적의 내분』이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다(1925~1940)
인정(1925~1930)
드골을 군대 내의 사상가이자 문인 장교로 높이 평가한 페탱은, 1912년부터 청년 드골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신임함으로써 큰 이득을 얻는다. 1925년 드골 대위는 고등군사위원회 회의실에서 페탱 원수의 총애를 받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1927년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드골에게 강의를 의뢰해 온다. 페탱은 자신의 대필가인 드골이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기가 출간하려 했던 ‘프랑스 군인’에 관한 연구서의 변전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너그러운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페탱 원수(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드골에게 기대고 있었다)는 그 작품의 서문을 ‘공동으로 작성’한 사실에 대해 밝히면서, 연구서 저작에 대해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때부터 영향력은 완전히 전도되어 드골은 자신의 시대를 맞는다. 그런데 1928년 딸 안느가 장애아로 태어나는 비극은 민간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성숙(1932~1937)
드골은 자신이 맡은 직무들에 의해 강해졌고 크게 성장했다. 페탱 원수의 집무실에서 벗어나 야전부대의 지휘관으로 발령 받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휘관 드골, 그는 군부 실세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교수로서의 그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주어진 권한을 진실에 의해서만 이행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특성이 드골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 축이었다. 1931년 11월, 드골은 국방위원회SGDN 제3지부 사무국원으로 임명되었다. 국방위원회는 1933년을 위해 ‘국방 계획’을 갖추어야 했는데, 그 임무가 이 신참에게 이임된 것이다. 그리하여 1934년 5월『미래의 군대』가 출간된다. 이 책은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을 갖춘 소수 정예의 첨단 기계화 부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현 시점이 비상시국이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호소하고 있다. 사실상 1933년부터 독일은 대공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히틀러는 숨겨둔 자기 패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1937년 봄, 미래의 군대 제1기갑사단이 창설된다.
기계화부대 대령(1937~1940)
마침내 드골은 최고권력자들과 접촉하여 기계화된 장갑부대를 중심으로 국가방어계획을 재편성하라고 설득한다. 그는 메츠에서 창설된 507부대 제1기갑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2년 만에(1937년 9월~1939년 9월) 이 부대를 최정예 부대로 만들었다. 1939년, 독일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의 선전포고는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1914년의 페탱 대령이 그랬던 것처럼, 이 전쟁은 드골 대령의 앞날을 약속한다. 1934년에 그가 제안했던 내용들이 그대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꽃(1940)
‘나, 드골장군’(호소문, 1940. 6.18)
1940년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140대의 전차로 독일군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제4기갑사단은 조국을 위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군사령부는 드골을 임시 장군으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6월 6일, 폴 레노는 프랑스의 상징으로서 그를 내각으로 불러들인다. 프랑스의 정권을 쥐고 있는 의지 박약한 집단 내에서, 누군가 계속해서 의지를 구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비 효과는 더욱 분명하게 강화되어 그 시기 동안 내내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꽃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결국 레노의 사임에 이어 르브룅 대통령은 페탱 원수를 부른다. 그리하여 필리프 페탱의 비시 정부가 들어선다. 그러나 6월 17일 “나는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답답한 심정으로 이 전쟁이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라고 페탱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친다.
독일과의 휴전협상이 전혀 시작되지 않았을 때 발표된 궁극적인 무능력과 패배의식에 근거한 이러한 발언은, 6월 18일의 드골의 호소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는 군대를 새롭게 창설해야 한다는 것을 전쟁 와중에 확실하게 선언한다. ‘나, 드골 장군’이라는 말로 유명한 6월 18일의 호소문을 통해 드골은 위대한 지도자들 쪽으로 돌아선다. 1940년 8월 7일, 대영제국과의 협약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의 위대함과 독립성의 완전한 복원’을 추구해 나가도록 만드는 협약이었다. 그것은 외교적인 걸작이었다.
자유 프랑스(1940. 8. 7)
드골은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실질적으로 이 임무를 책임지게 된다. ‘자유 프랑스’라는 명칭은 하나의 선언이었다, 즉, ‘프랑스가 자유가 되기 위한’. 당시 자유 프랑스는 임대한 한 아파트 내에 한 명의 장군과 그의 부관, 그리고 몇몇 동지들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프랑스를 다시 한데 모을 모든 기회를 마련하려고 드골이 비시 정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유의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해외 영토들이 비시정부에서 탈퇴한다면 결국 자유 프랑스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의 지원에 의해 준비된 자유 프랑스의 이 식민지 독립은 프랑스령의 적도 아프리카(AEF) 전역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가게 된다. 그 이후 30년 동안 드골을 지지하게 된 민중들은 바로 아프리카 민중들의 형제자매들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가 그 자체의 구원에 대해 최초로 민중의 동조를 얻게 된 것은 카메룬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11월 17일, 드골은 국가 원수 자격으로 확고하게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국가적 결단(1941~1943)
국가위원회(1941. 9.24)
1940년 한 해 동안, 드골은 프랑스를 이끌 수 있는 활동의 토대를 만들고 다지는 데만 전념한다. 1941년은 프랑스가 가장 과소평가된 해였다. 점령당하고, 무장해제 된 프랑스 본토는 독일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비시, 북아프리카, 그리고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은 정복자에게 동조한 지중해의 완충지대를 이루었고, 다시 전쟁에 참여하게 된 프랑스가 중심에서 제외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드골은 프랑스의 신탁통치 하에 놓인 영토들에 관해 프랑스의 특권을 주장하면서 공화국과 자유 프랑스 사이의 연속성을 실질적으로 인정받게 하는데 이것은 훗날 드골의 합법성을 정당화시켜 준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바바로사 작전(독일이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독소불가침조약이 무효화된다)을 개시한다. 이로써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고, 독일에게는 비극적이며, 번복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41년 9월 24일의 법령에 의해 그는 정부 형태로서 국가위원회를 설립한다. 이 조직은 ‘집단지도체제의 형태 아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드골은 현실주의적 인물인 장 물랭(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 도지사에게 정당들과 연합회뿐만 아니라 모든 저항운동단체들을 레지스탕스 국가위원회의 이름으로 소집하라는 임무를 맡긴다. 런던과 레지스탕스를 결합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대내외적인 운명의 열쇠가 되었다. 국제무대 교섭과정에서 연합군과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들로 상황은 끝없는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화합에서 구원으로(1943~1945)
프랑스 해방의 길
1943년의 10개월간은 승리의 행진을 구가하는 정치적․제도적 행위들을 통해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인 드골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조직화시킨 시기다. 공식적인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CFLN)가 설립되는데 이 위원회는 1943년 6월 1일, 지로와 드골을 공동의장(지로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다)으로 추대해 알제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외교 업무를 수행해온 과정을 통해, 드골은 프랑스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나의 정부로 기능하는 국가자유위원회(CFLN)의 선두에서 드골은 불가능한 것을 성공시켰다. 즉, 1940년 6월의 짓눌리고 쇠약해진 국가를 세계대전의 중심 축으로 변모시켜 열강들의 협상 테이블에서 프랑스가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완전한 자격을 갖추고 참석한 것이었다.
1944년 4월 21일 알제에서, 프랑스 해방 이후의 권력 구조에 대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 주권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하기로 한다(이 투표에서 프랑스 여성들이 최초로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6월 2일,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는 프랑스 공화국의 임시정부로 탈바꿈한다. 그리하여 8월 9일, 법령에 의해 본국의 공화정의 합법성이 회복된다. 드골은 제도, 투쟁, 군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상호작용을 이루면서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던 결말에 다다르도록 만든다. 프랑스는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투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레지스탕스는 그 비밀조직들, 마키들(항독 운동을 한 프랑스 게릴라), 그 희생자들에 의해 프랑스 국민들을 그 전쟁에 복귀시킴으로써 역사의 기록에 새겨지게 되고, 그 민중 속에 피의 대가를 지불한다.
프랑스는 자기 대열에 당당하게 올라섰다. 연합군은 이제 적의 수중에 들어간 영토로 진군하는 게 아니라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땅,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영토를 향해 나아간다. 바로, 다음 목표는 파리였다. 드골은 역사적인 행동을 위해 파리에 입성한다. 8월 26일 토요일, 그를 암살하려는 적들이 매복하고 있는 곳에서, 샹젤리제 거리의 군중들 사이로 행진하는 것이었다. 이어 노트르담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연속적인 총성이 울리고,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려 몸을 피했다. 그러나 드골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것은 굴복할 줄 모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구원의 대가
레지스탕스는 국가를 위한 일등공신인 동시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정부 자체로부터 태어난 이 레지스탕스가 정부의 행정기구들 속으로 흡수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프랑스 공산당에 의해 의식화된 지도자 계급을 갖게 된다면 아주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었다. 10월 23일, 그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바로 그날, 그들을 정규군에 통합시키기로 결심한다. 국가가 아직 허약하기 때문에 이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레지스탕스 국가위원회에 의해 숙고된 경제적․사회적 프로그램이 그 뼈대가 된다. 국영화 사업, 사회보장제도 시행, 거대한 산업 개발정책의 실시, 각종 기업위원회의 창설 등 이러한 사회 변혁은 프랑스를 20세기 후반기의 강대국으로 만들게 된다. 주권을 되찾은 프랑스는 해방과 승리에 참여한 것에 의해, 세계의 충돌과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에 있어 행사한 프랑스의 권리에 의해 세계적 역할을 확보하게 된다.
바이외로부터 또 다른….(1944~1946)
호소에서 실제적인 노정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우방인 프랑스를, 얄타회담을 비롯한 전쟁을 종결짓는 모든 회담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외교적인 완력에서의 승리자인 드골에 의해 마침내 프랑스로 하여금 앞으로 태어날 연합국들 가운데 5대 강국 중 하나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드골은 자문의회 토론에서 프랑스 외교정책의 내용들을 정한 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가능한 한 많은 국가정부와 교섭하면서 주요 동맹국들의 국가원수와 접촉을 시도했다. 이러한 제스처들에 의해, 프랑스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 되찾게 된다. 1944~1946년만큼 드골식의 정치 혁신이 힘차게 추진된 적은 그 어느 때도 없었다. 드골은 평화적인 작업들 속에서 국민 화합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통합과 강화’라는 수단을 취한다. 그리고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은 헌법제정의회에 유리하게 분명한 결정을 내렸다. 헌법제정의회(이 기구는 6월 18일 이후로 모든 과거에 대한 결산 확인과 ‘국민에 의한 국가원수의 임명’을 동시에 행한다)에 의해 1945년 11월 13일 만장일치로 임명된 드골은 PCF(프랑스 공산당)에게는 내각의 단 한 자리도 내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1944년 11월부터 프랑스 인민공화파(MRP)의 창설과 더불어, 정치무대는 풍부해지기까지 한다. 이것을 보면서 드골은 폴 레노가 이끌던 시기를 다시 체험한다. 자신이 도모한 행동의 화합에 이어 곧 불협화음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