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정창권 지음 | 사계절
1575년 10월 미암은 벼슬을 그만두고 담양 인근의 창평 수국리로 내려왔다. 이번에 그가 벼슬을 그만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조정은 김효원과 심의겸 일파가 동·서 분당이 되어 서로 원수처럼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이때 미암은 율곡 이이처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또 이즈음 미암은 윗니가 모두 빠지고 한 개만 남아서 음식을 먹을 때면 입을 오므리고 부드럽게 우물거리기만 하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하부의 냉증과 침이 자꾸 마르는 소갈증까지 앓아서 덕봉이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결국 미암은 1575년 가을에 임금께 『사서오경』 등 경전에 토를 달아 바치겠다고 말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창평으로 내려왔다. 창평 집의 이름은 ‘삼벽(三碧)’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산·물·대나무의 세 가지 푸른 빛에서 취한 것이었지만, 모두 세 번에 걸쳐서 푸른 기와집 한 채를 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였다.이듬해인 1577년(선조 10년) 3월, 임금은 또다시 미암에게 정2품 자헌대부 홍문관 부제학을 제수하여 속히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고 한다. 미암은 차마 임금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 4월 하순에 아들 경렴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간다. 하지만 피로와 열이 크게 발하여 음식을 조금밖에 먹지 못하고, 소변이 붉은 데다 노랗기까지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병이 극히 위중하여 일기를 적지 못하고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미암이 세상을 떠난 지 8개월 뒤인 1578년 1월 1일 덕봉도 향년 5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갑자기 생을 마감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평소 잔병을 자주 앓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 ‘지우(知友)’라고 여길 정도로 금슬 좋게 지냈던 자신의 동료를 잃어버린 슬픔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미암과 덕봉은 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에 쌍분으로 나란히 묻혀 있다. 두 사람의 묘지 오른편 약간 아래에 첩 방굿덕이 잠들어 있는데 종가집 할머니에 의하면 첩 방굿덕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죽으면 영감 곁에 묻어서, 제사 지내고 남은 퇴주라도 부어줄 수 있게 해주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미암일기』의 내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집안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기록이다. 미암의 수입 내역으로는 관직생활의 대가로 받는 녹봉과 찬품(饌品), 지방관의 증여와 이웃들의 선물, 그밖에 임금의 하사품, 선상대립가(選上代立價), 노비신공 등이 있었다. 반면에 지출 내역으로는 무엇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식비를 비롯해 노비 월급과 의복비, 선물에 대한 답례와 살림 장만 비용, 첩과 서녀의 신공, 집세, 부조 등이 있었다. 특히 그는 서책을 좋아해 책값으로도 적잖은 비용이 지출되었다. 그리하여 미암의 녹봉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생활비로 쓰였다.
1568년(선조 1년) 겨울을 지나면서 미암은 종3품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하였고, 미암에 대한 임금의 신임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1월 28일, 아침에 광흥창으로 녹봉을 받으러 갔던 종들이 돌아왔다. 대공, 몽근, 치산 등 남종 다섯은 곡식을 담은 섬을 말에 나누어 싣거나 직접 등에 지고, 여종 유지와 부용은 삼베를 머리에 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미암은 그것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 얼마나 되더냐?” “예이, 쌀이 여덟 섬에서 한 섬을 감해 일곱 섬을 받았고, 콩이 일곱 섬, 명주베 한 필, 삼베 세 필을 받았사옵니다.” “아주 후하다 하겠다!” 대개 녹봉은 3개월 단위로 1·4·7·10월에 받았는데, 중국 사신이 오거나 흉년이 드는 등 나라에 일이 있으면 조금씩 감해지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머잖아 중국 사신이 올 예정이므로 쌀 한 섬을 녹봉에서 감한 것이다. 미암은 무슨 까닭에선지 송덕봉의 일가친척인 박명성의 녹봉을 대신 받아서 썼다. 그래서 미암의 1월분 녹봉을 모두 합하면 쌀 13섬, 보리 1섬, 명주베 1필, 삼베 3필 등이었다.
한편 찬품(반찬거리)은 그가 다니는 부서에서 매달 세 차례씩 보내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부패를 막기 위해 말리거나 절인 형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암은 각지에서 근무하는 지방관의 증여(贈與)에 의해 찬품을 해결하였다. 당시 지방관은 미암에게 매우 많은 물건을 보내주었는데, 고기, 생선, 채소, 양념 같은 반찬거리에서 쌀이나 콩 같은 식량, 칼과 가위 같은 살림도구까지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때로는 부채와 종이, 베 같은 고가의 물건도 보내주었다. 또한 미암은 반찬거리를 포함해서 그때마다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주로 가까운 사람들의 선물(膳物)에 의해 충당하였다. 이웃이나 동료, 친척, 문생 등은 거의 매일같이 선물을 보내 왔다.
그밖에 미암의 수입으로는 임금의 특별한 하사품, 선상대립가, 노비신공 등이 있었다. 먼저, 임금은 사신을 접대하거나 국가의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항상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또 나라에서는 관노비인 구종을 지급하여 관직생활의 편의를 제공했는데, 그들은 춘하추동으로 1년에 4회, 1회당 면포 3필씩을 납부하고 신역(身役)을 면제받고자 하였으므로 그 수입도 상당하였다. 끝으로 미암은 주인과 독립해서 사는 외거노비로부터 해마다 면포 두 필씩을 신공으로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규정에 불과할 뿐, 실제로 노비들은 다른 물건으로 대납하거나 때로는 몇 년씩 바치지 않기도 하였다.
미암은 노비를 불러다가 사역시키는 대신에 남종에게는 매달 쌀 다섯 말을, 여종에게는 세 말씩을 지급하였고, 철따라 옷을 지어 입도록 베 반 필씩을 주었다. 지금 부리는 노비가 모두 일곱이었으므로 그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사실 위와 같은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미암의 가계 사정은 매번 빠듯하거나 도리어 쪼들렸는데, 그것은 우선 엄청난 밥 량과 대식구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미암은 해남에 살고 있는 첩 방굿덕과 서녀 해성 등의 신공으로 매년 베 두 필씩을 그 주인한테 바쳐야만 하였다. 금년 2월과 3월에도 첩과 서녀의 신공으로 백미(白米) 열 말과 참깨 한 말을 그 주인집에 보냈다. 또한 가까운 사람들의 선물에 대한 보답도 큰 부담이었다. 미암은 이웃들이 선물을 보내올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다른 물건을 챙겨서 보내거나 밥과 술, 심지어는 부채로 사례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게 들어가는 비용도 많았다. 미암은 채소, 옷감, 땔감, 마초(馬草) 등 급히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종들로 하여금 쌀이나 보리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사오도록 하였다. 이밖에 그는 서울에선 남의 집을 빌려서 살았으므로, “포육 한 조각과 말린 꿩을 심봉원의 집에 보냈다. 달마다 반찬거리를 몇 번씩 보내니 집을 빌린 데 대한 보답인 것이다.”라는 기록처럼 매달 쌀이나 반찬거리로 집세를 대신해야만 했다.
결국 미암의 녹봉은 대부분 자신의 생활비로 쓰였을 뿐 별도로 모아 재산을 축적한다거나 고향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내주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거의 매년 해남에 있는 농장에서 벼, 보리 같은 양식을 배로 운송해서 먹어야 할 형편이었다.이처럼 적잖은 토지를 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담양 농장은 미암의 해남 농장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다. 하지만 미암은 주로 외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해남 농장을 누이 오매나 사위 윤관중에게 맡기고 노비 석정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미암과 덕봉은 상속과 자연 증식 및 매득에 의해 100여 명 가량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노비는 집 안팎이나 혹은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며 다양한 형태로 주인을 위해 일했다. 행랑채에 거주하며 각종 집안 일을 담당하는 일명 ‘가내사환노비(家內使喚奴婢)’가 있었고, 집 앞에 있는 노비집(호지집)에 거주하며 농사도 짓고 심부름도 다니는 ‘솔하노비(率下奴婢)’가 있었다.
대개 농장은 지주 혹은 그 대리인이 여러 노비를 부려 직접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병작(竝作)을 주어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물을 똑같이 나누었다. 이것이 16세기 대표적인 농업 경영 방식이었다. 당시 지주는 씨 뿌리고 김 매고 수확하는 데에 이르는 모든 농사를 직접 들에 나가 감독하였다. 덕봉도 집 안팎의 노비를 부려 직접 농사를 지었다. 다만 그녀는 직접 들판에 나가기보다 손자 등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였다.현대의 가족 개념은 17세기 이후로 변화된 개념, 곧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부계만으로 한정되어 있으나, 16세기까지만 해도 부계만이 아니라 어머니 쪽의 모계, 처가 쪽 일가인 처계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 사람들의 가족 개념은 ‘일가(一家)는 구족(九族)’, 즉 부·모·처의 형제 자매 등으로 대단히 폭넓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능력만 허락한다면 팔촌의 권속(眷屬)과 여기에 딸린 수십, 수백 명의 집안 노비까지도 거느리고 살았다. 미암과 덕봉 일가족을 보더라도 그들 부부를 비롯해서 딸과 아들 내외, 종손 유광문과 조카 송진 및 그 자녀들, 또 빈번히 집안을 들락거리는 주변의 일가 친척들, 기타 100여 명의 노비 등 실로 엄청난 가족이 더불어 살았다. 당시 가족은 오늘날 웬만한 기업체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사회였으며 따라서 집안 일도 엄연한 사회활동으로 간주되었다.
16세기 양반 가정의 여성들이 하는 일은 매우 방대했다. 당시에는 의식주를 비롯한 경제적 측면은 여성이 주도하고, 외부와의 접촉이나 관직을 통한 집안의 지위 상승 같은 대 사회적 측면은 남성이 주도하였는데, 이 시기 남성들은 근친, 수학, 관직, 유배 등의 이유로 자주 집을 비우고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여성들이 안팎의 집안 일을 거의 다 주관하였다.
덕봉의 경우를 통해 이 시기 여성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자. 첫째, 덕봉은 가족들의 일상생활을 책임졌다. 음식 장만을 비롯해서 집안청소와 빨래, 방아찧기 등을 주관하였다. 또 옷감을 구입해서 물을 들이고 옷을 짓는 의복수발도 하였다. 물론 실제 노동은 대부분 노비인 여종이 담당하였다. 둘째,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도 덕봉의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셋째, 덕봉은 장인을 불러 병풍을 만들거나 가마를 수리하는 등 각종 살림을 장만하였다. 나아가 덕봉은 “부인이 노비를 시켜 사랑방 동편에 토우(土宇)를 만들었다. 바로 세속에서 말하는 헛간이다.”라는 일기의 기록처럼 집을 짓기도 하였다. 특히 미암과 덕봉이 말년에 살았던 창평집은 순전히 덕봉이 설계하고 공사를 주도해서 지은 집이었다.
넷째, 덕봉은 가족 관리는 물론 미암의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담당했다. 평소 그녀는 딸과 아들 및 손자들을 기르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때로는 미암의 건강 관리와 친구 관계 및 관직생활까지 도와주었다. 심지어 미암의 서책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한편 저작 작업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섯째, 덕봉은 집안의 수입·지출과 재산 증식 등 갖가지 경제적 책임을 떠맡았다. 우선 그녀는 집안에 나고드는 물건을 관리했는데, 당시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선물경제 시대였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다. 여섯째, 덕봉은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구휼(救恤)을 통해 마을의 안주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여성의 집안 일이 생존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그런 만큼 충분한 대우를 받았다. 즉, 하는 일이 많은 만큼 존경도 받았다. 게다가 16세기까지는 여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여성의 권력은 남성 못지 않게 강했다.제사란 죽은 조상께 음식을 바쳐 정성을 표하는 의식으로 이 시기 양반 가정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하층민도 드물게나마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제사의 종류는 해마다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기제(忌祭), 철 따라 일 년에 네 번(2, 5, 8, 11월) 지내는 시제(時制), 무덤에 가서 지내는 묘제(墓祭), 명절이나 생일에 지내는 다례(茶禮) 등이 있었다.
미암은 대개 모든 종류의 제사를 지냈는데 다만 생일날의 다례는 아예 지내지 않았고, 명절의 다례는 형편에 따라서 지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시제는 조부모와 부모 2대에 한해서만 모시다가 뒤늦게 2품의 반열에 오르자 증조 이하 3대까지 모셨다. 기제는 부모만 모셨고, 외갓집 식구들과 돌아가면서 외조부모의 기제를 지냈으며, 처부모의 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16세기까지는 여전히 아들과 딸이 공평하게 재산을 분배받았기 때문에 제사도 서로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덕봉은 부모의 기제만 지냈는데 가풍에 따라 두 분을 함께 모셨다. 어머니의 제삿날에는 아버지도 함께 모시고 아버지의 제삿날에는 어머니도 함께 모셨던 것이다. 하지만 고향에 있을 때는 문수사란 절에서 불교식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미암은 기본적으로 자기 조상의 제사는 자기가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덕봉이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자신이 직접 주관해서 제사를 지냈고, 덕봉이 올라온 뒤부터는 지방과 축문을 쓰고 제례를 안내하는 역할은 자신이, 제사 음식인 제수를 장만하는 역할은 덕봉이 하였다. 미암은 제사를 지낸 뒤 항상 일기에다, “제물을 정결하고 풍족하게 갖추었으니 부인이 내조한 힘이다.”, “제물이 깨끗하고 풍비했으니 부인이 준비한 힘이다.”라고 기록하면서 부인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였다.
1568년 10월 14일, 이날은 덕봉의 친정어머니 제삿날이었다. 이 시기 제사는 주로 새벽에 일어나서 날이 밝기 전에 지냈다.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수와 제기가 많이 부족했지만 다행히 여기저기서 집안에 제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보내줘서 겨우 제물을 장만할 수 있었다. 제사는 주로 대청에서 지내는데 날이 아주 추우면 안방에서 지냈다. 한편 미암은 사랑방에서 재계를 하고 있었다. 재계(齋戒)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16세기의 일상 음식은 기본적으로 밥과 국, 김치, 장 그리고 생선과 고기 반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집안의 경제 사정이나 가족의 기호에 따라 반찬의 종류는 다소 달랐다. 이에 비해 제사 음식은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제사 음식에는 밥과 국, 김치 같은 기본 음식만이 아니라 떡과 술, 과일, 과자 등 온갖 음식이 올라갔다. 하지만 상차림에서는 평소의 밥상 차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제사는 제수를 진설한 뒤 초헌(첫 번째 술잔 올리기), 아헌(두 번째 술잔 올리기), 종헌(세 번째 술잔 올리기)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미암은 먼저 두 번 절을 하고 나서 다른 가족들도 두 번씩 절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첫 번째 술잔을 올리고 사위 윤관중한테 축문을 읽도록 하였다. 덕봉은 윤관중이 축문을 읽은 뒤에 두 번째 술잔을 올리고, 숟가락을 들어 밥그릇의 중앙에 꽂기도 하였다. 제사는 제물이 늦게 갖추어진 탓에 진시(오전 7~9시)에야 겨우 끝났다. 미암은 마지막으로 일제히 두 번씩 절을 하도록 하고 그만 상을 물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사에 쓴 음식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먹곤 하였다. 또 고기나 술, 과자를 집안 노비에게 나눠주었다.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므로 그것은 아주 큰 음식이었다.조선 중기인 16세기만 하더라도 비록 제한적이지만 신분 상승이 가능하였고, 유교 이외에 불교와 도교 사상이 공존하였으며, 여성의 권익을 존중하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 비교적 개방적인 사회였다. 그래서 남녀관계에서도 관습에 크게 구속당하지 않았고, 남녀 간의 애정 표현도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비단 호방한 남성과 특수계급 여성인 기녀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여항의 평범한 부부들도 자유롭게 애정을 표현하며 애틋한 부부애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