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마이클 루스 지음 | 청년정신
도태는 적합한 것인가?도전받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기독교를 설명하는 다윈주의찰스 다윈은 생명이 하나 혹은 소수의 물체에서 진화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그가 진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주 신중한 태도였다. 『종의 기원』은 루이 파스퇴르가 지렁이가 진흙에서 나오듯이 생명이란 자연적으로 무생물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한 자연발생이론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던 그 시점에 출간되었다. 따라서 다윈은 이러한 움직임들이 진화에 대한 일반적 이론에 관한 비판과 냉대를 막아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 되기도 하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종의 기원』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논의의 초점이었다. 다윈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 침묵했지만, 그 문제가 진화론자들에게 짐이 되는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후일 단백질이 어떻게 온갖 종류의 암모니아와 인염이 들어있는 따뜻하고 조그마한 연못에서 전기 작용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진화를 다루고 있는 교재나 일반적인 논의 중에서 이 주제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종의 기원』에서는 궁극적 기원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찾아볼 수 없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맹목적 시계 제조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과 마찰을 빚는 문제는 없을까?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설은 거의 개연성이 없는 한낱 가설이라고 믿고 있는 플란팅가는 그것은 '대체로 어리석고 오만한 허세'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다윈주의자의 입장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적절한 것이며 타당한 것임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선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다윈주의자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상황이 이처럼 비관적인가?기독교인들은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한낱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우 특별한 동물로서 신의 사랑과 돌봄과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존재이다. 이 사실은 기독교인들에게 우리 인간이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우리가 그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 중심이자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 특히 다윈주의적인 진화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닌가? 분명 다윈주의의 진화론은 인간이나 그 밖의 것들이 진화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향성과 진보성이 없다. 다윈주의적인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나 인간과 유사한 피조물이 진화하였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인간의 진화에 대한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진화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상 전체적으로 볼 때 돌연변이들은 대부분 불필요하며 비정향성을 지닌 것이어서 주목받지 못한다. 한편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다.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그는 일어날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비록 진화의 정상적인 과정이 인간의 출현을 보장해줄 수는 없지만 인간의 출현을 의도했다고는 볼 수 있다. 인간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으며 인간을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신은 시간의 밖에 존재하며 따라서 창조의 행위 가운데서 인간의 출현을 의지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시간을 통해 세계와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기적은 일반적으로 신에 의해서나 그의 대리자에 의해 이루어진 법칙의 위반 또는 예외로 간주된다. 예수가 실제로 물 위를 걸었다면 그것은 분명 기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적을 포함하여 모든 기적이 이와 같은 기적은 아니다. 가톨릭의 화체설은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 즉 성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성체는 육안이나 정교한 현미경을 통해서도 예전처럼 빵이나 포도주처럼 보인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을 깨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것을 알아챌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까지도 기적의 개념을 사용하려고 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기적들이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데, 기적의 본질은 법칙의 위반이 아닌 의미나 의의에 있는 것이다. 성서의 모든 기적(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5천 명의 무리에게 빵을 먹이고, 나자로를 부활시킨)은 그 순간에 생겨난 열정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가 한 말과 태도로 인해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서로 음식을 나누게 됨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넘쳐흘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적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다거나 또는 법칙을 벗어난 것(법칙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자연적인 것이라면, 마리아의 난자가 저절로 세포 분열한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아이는 XX염색체를 갖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여자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탄생을 초자연적인 법칙 파괴적인 현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즉 진화론적인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기독교의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을 반대하는 자유주의 신앙인들의 주된 이유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고 반과학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다윈주의자든 기독교인이든 법칙을 주장하여 자연주의자가 되면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는 유물론을 주장하게 되며 이것은 결국 기독교를 배격하는 무신론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자연주의 철학의 절정이라 볼 수 있는 다윈주의는 기독교가 거짓임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앨빈 플란팅가는 방법론적인 자연주의가 필연적으로 신(형이상학적 자연주의로 우겨넣은)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무신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으며 왜 무신론으로 귀결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연주의로서의 다윈주의는 기독교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플란팅가는 과학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의 지배를 강조하는 과학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주의적 과학 대신 법칙은 물론 기적까지도 허용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대체하고자 한다. 그러나 플란팅가는 감각과 이성의 능력은 신이 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계의 본성을 밝히기 위해 감각과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 신앙에 수정이 가해질 수 있지만, 이것을 본질적으로 비종교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칼뱅주의자인 플란팅가는 이 같은 사안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칼뱅 자신이 창조주가 어떻게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파괴자는 다름 아닌 기독교인이 된다. 만약 기독교인을 과학의 파괴자라고 할 수 없다면 다윈주의자 역시 과학의 파괴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지적인 설계영혼은 바윗덩어리와 같은 실체가 아니다. 실제 인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 즉 진흙덩어리를 활성화하고, 형상화하고, 정보를 입력하고,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영혼을 토미스트적인 방식으로, 즉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영혼의 가장 두드러진 인간적 측면을 도덕적 선택의 자유와 연결된 지성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다윈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연도태를 통한 진화와 잘 부합한다는 점이다. 다윈주의에 따르면, 영혼은 불변의 법칙을 통해서 보다 저급한 유기체에서 진화했다. 다시 말해서 동물의 영혼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천천히 진화했다는 것이다.자기논박적인 자연주의제6장 설계
목적론적 논증진화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는 가설에 대해 그것을 반박하는 글을 쓴 칼뱅주의자이자 미국의 저명한 종교철학자인 앨빈 플란팅가의 다음 말을 생각해 보자. "주의 깊게 신앙심을 가지고 성서를 연구해 보면 성서를 통해 전달되는 주님의 말씀은 진화론의 증거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실상 지구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통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근거로 다윈주의를 배척하지 않는다. 이 같은 판단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바라보는 20세기 미국적인 시각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논의를 시작할 때 다윈주의는 문제가 없다고 가정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같은 가정 하에서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창조론자들은 종종 사실로서 진화의 과정이나 원인으로서의 진화 사이에 놓여 있는 애매성을 악용하여, 후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전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고 주장한다. 플란팅가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그의 지적은 애매하고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플란팅가가 말하는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은 다윈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세기의 비유적 해석이 허용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드시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어떤 결론이 나든 새로운 문제가 야기될 것이며, 분명 이들 문제는 다윈주의와 기독교가 의견을 달리하는 문제들이다.종교를 설명할 수 있는가?기원학 연구의 출발점은 영국인 홀데인과 러시아인 오페린의 견해이다. 나중에 마르크시스트가 된 그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생명의 창조를 일으킬 수 있는 유사한 시험 방안을 제안했다. 첫째는 유기체의 분자가 번개와 같은 자연적 작용을 통해 무기체의 분자에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그러한 기초 성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고분자(단백질이나 아미노산과 같은)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고분자 연쇄가 복제를 시작하여 진화의 첫 단계가 되는 연못의 상태로 있는 생명 이전의 수프(Prebiotic soup)를 형성하게 된다.
현재 오페린-홀데인 가설의 첫 단계는 가능한 것임이 확증되고 있으나 두 번째 단계는 실험적인 면과 이론적인 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분자가 자기복제를 하게 되는 가설의 세 번째 단계는 아직도 실험 단계에 있지만 이미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화학자들은 RNA 분자가 혈관의 오른쪽 중막에서 복제된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분자가 자람에 따라 어떻게 변형이 이루어지는가를 알아냈다. 또한 이 분자가 다른 분자를 촉매하는 생물학적인 기능에 있어 어떻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가도 알아냈다. 우리는 최초 돌연변이와 자연도태를 알게 되었다. 복제 기능을 지닌 RNA 분자가 DNA 분자를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새로운 세포성분을 생산해내고 다른 세대에 유전정보를 전달하는지를 알게 될 때 마침내 한 연구자가 말한 것처럼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제7장 고통
공리성에 기여신앙과 합리성제8장 외계인
외계인에 대한 다윈주의적 견해다윈주의적 견해에 대한 반박대안들에 대한 평가제9장 기독교 윤리학
복음불행히도 비헤는 자연도태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존재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증은 단지 무지와 부적절함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과학을 초월해 있는 존재들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자이며 순교자인 본 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 가운데서 신을 찾아야 하며 알지 못하는 것에서 신을 찾아서는 안 된다."윌슨은 다윈주의가 종교를 환상의 일종, 즉 효율적인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환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적으로 우리는 당연히 무신론자가 되어야만 한다. 윌슨은 종교에서 정서적이며 사회적인 기능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영적인 종교를 일종의 세속적 종교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 세속적 종교가 다름 아닌 다윈주의이다. 다윈주의자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으며 다윈주의자는 다윈주의자일 뿐이다.
다윈주의는 종교적 신념의 형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기에 그것이 종교의 문제점을 드러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종교는 비록 상이한 형태(즉 유일신교, 다신교, 물활론 등등)를 취하고 있지만 집단의 응집력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종교가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적절한 대안이라고 한다면 다윈주의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종교적 신념을 잠식한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은 분명하다. 기독교인들은 분명 윌슨과 동료 사상가들이 기독교에 대해 내린 경험적 주장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야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도출되는 신학적인 결론들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떠한 건전한 논증도 다윈주의가 무신론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무신론이 몰래 잠입해 들어와서 그것에 진화론적인 포장이 입혀졌을 뿐이다. 따라서 책의 제목이 되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내릴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신의 자유는 '창조 때에 행사된 신의 자유'와 '창조 후에 행사된 신의 자유'로 구분한다. 일단 동물과 인간을 창조한 이후에는 신 역시 고통과 고난을 방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에 대해 응답하는 가운데서 그의 자유가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최초에 이루어진 신의 창조가 전적으로 자유롭고 자애로운 행위였다는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 주장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선한 신이 과연 고통과 고난의 불가피성을 알면서도 우주와 생명체를 자유롭게 창조했을까? 참혹한 물리적, 심리적인 질병으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어떤 돌연변이가 있다. 강박적으로 자신을 가학하는 어린아이들은 행복감이나 정상적인 삶의 기회를 빼앗아가는 정신적 질병이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우리(그 어린아이나 교황, 또는 마더 테레사)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축복이 과연 어린아이의 고난을 보상할 수 있을까? 신의 궁극적 본성과 존재와 관련해 기독교인은 신앙과 신비로 응답한다. "계시는 인간 생명의 신비가 알려진다면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준거점으로 역사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같은 지식은 항상 인간 정신이 밝힐 수 없고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밖에 없는 신의 신비로 귀결된다."(John Paul Ⅱ,1998)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깊이 있는 이슈들(물리적인 고통이나 도덕적인 악)과 씨름하고 있는 기독교를 다룰 때, 다윈주의자이기에 당연히 그 체계가 의심과 신비에 빠지는 경우 동정적이어야만 한다. 다윈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윈주의자이기에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무엇보다도 신이 인류라는 돌연변이가 요구될 때 올바른 양자적 사건에 슬며시 개입할 수 있었다면, 왜 그렇게 심한 고통과 불행을 야기하는 돌연변이가 일어나려고 할 때 그것을 방지하는 데 개입할 수 없었는가? 신은 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은 적혈구 빈혈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대안은 더 궤변적이다. 왜 사물이 현재와 같이 존재하는지와 상관없이 인간이 진화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모든 종류의 임의적 요인들과 연계된 법칙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생존의 성공을 임의성에 대한 승리로 생각하든 아니면 진화론적 과정을 임의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과정으로 생각하든, 인간의 진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의 작품인 것이다. 이들 문제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어떤 방식으로든 기독교인들이 답변해야 할 문제이다.기능이나 설계와 관련된 다윈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은 실제로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음이 입증되었고 다윈주의는 종교 자체가 바로 인간본성에 설계되어 있는 적응력의 일부분임을 보여 주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