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에서 후지모리까지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아메리카는 크게 앵글로·색슨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로 나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멕시코로부터 칠레의 최남단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왜 '라틴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됐을까? 먼저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18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신대륙을 가리켜 '인디아스(Indias)'라고 불렀다. 17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힘이 약해지면서 스페인은 계속 '인디아스'라는 표현을 고수했지만, 대다수 다른 국가들이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지역이 '라틴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프랑스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다. 18세기 이후, 국제관계에서 앵글로 색슨의 영국에 맞서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루마니아 등 카톨릭·라틴 세계의 대표임을 자임한 프랑스에 의해 라틴아메리카로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라는 표현은 라틴족이 지배한 아메리카라는 뜻으로, 북쪽의 앵글로 색슨아메리카에 대비되는 문화적 개념이다.아메리카에는 몽골 계통의 북아시아 인종, 오스트랄리아 계통, 말레이-폴리네시아 계통의 남아시아 인종 등 다양한 종족들이 수만 년 전부터 이주해 살고 있었다. 이후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이후 백인과 흑인까지 이주해 왔으니, 지구상의 세 인종이 모두 모여 살게 된 셈이다. 그렇게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살다보니, 혼혈 역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메스티소, 물라토, 잠보 등의 혼혈인종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스페인어로 혼혈인이라는 뜻을 가진 '메스티소'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인종이라 할 수 있다. 백인과 원주민인 인디오간의 혼혈인을 메스티소, 백인과 흑인간의 혼혈인을 물라토, 인디오와 흑인간의 혼혈인을 잠보라고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그냥 메스티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는 민족 이전에 인족을 단위로 결합되었다.
백인은 아이티를 제외한 중남미 전 지역에 고루 분포해 있다. 중남미 국가들이 유럽인 이민을 정책적으로 적극 받아들인 결과이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인구 98%가 백인인데, 이는 그 지역에 안데스나 멕시코 고원지대에 있던 잉카나 아스텍과 같은 고도로 문명화된 제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백인들은 숫자적으로 전체 중남미 주민의 1/3정도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든 국가에서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 부를 독차지하고 있다. 백인이 주인인 지역인 것이다. 그런데도 중남미의 백인들은 그들 나라의 메스티소나 인디오와 동질성을 느끼기보다 다른 나라의 백인, 특히 유럽의 백인들과 더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이중사회'가 굳어지고 이는 중남미 발전과 통합에 커다란 저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종속이론가 카르도소의 변신살리나스와 세디요'제2의 체 게바라' 마르코스지금도 살아 있는 에비타 페론카를로스 메넴의 '마이 웨이''칠레의 황제' 피노체트'발견'이란 말은 이 세상에 그 전까지 존재하지 않아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란 무슨 말인가? 이 말 속에는 그곳에 모여 잉카제국, 아스텍 제국 등을 이루고 살던 7∼8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유럽인의 오만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콜럼버스 이전에는 정말 아메리카대륙에 대해 아무도 몰랐을까? 그렇진 않았다. 콜럼버스보다 앞선 10세기경, 에릭이란 인물이 이끌던 바이킹 무리가 법을 피해 도망다니다 북쪽지방에 도착 그린랜드라고 명명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세 척의 범선에 약 90명의 선원을 태우고 마르코 폴로가 얘기했던 황금의 나라 카타이(중국)와 치팡고(일본)를 향해 지구를 거꾸로 항해하는 미지의 여행을 떠났다. 그 해 10월 12일, 항해 끝에 한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이를 '산 살바도르'라고 이름붙였다. 그리고 산토 도밍고와 쿠바를 차례로 '발견'하고, 산토 도밍고에 '나비다드'라는 성채를 구축했다. 이는 아메리카에 세워진 최초의 유럽 거점지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이후, 세계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에게는 지리적으로 세계가 엄청나게 더 넓어졌으며,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정복은 정치적·경제적·인종적·종교적 측면 등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서유럽 해양 국가들이 세계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경제적으로는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갔고, 세계무역이 급증하고 농업의 급진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신대륙으로부터 대량의 금과 은이 유입되어 초기 유럽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카톨릭 세계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카톨릭을 국교로 하는 스페인의 종교 정책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종교를 통한 교육에 카톨릭이 많은 공헌을 하게 했다. 끝으로 세계의 서구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세계지배가 공고히 되고, 유럽 중심의 시각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콜럼버스 이후 스페인 왕국은 본격적인 신대륙의 정복에 나섰다. 신대륙 정복자의 면면을 보면,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왕국을 정복한 알마그로, 칠레를 정복하고 산티아고 시를 설립한 발디비아, 남미 북부의 칩차 왕국을 정복한 께사다, 아르헨티나를 탐험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를 건설한 멘도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아스텍 제국을 정복한 코르테스와 아메리카 최대 왕국인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피사로이다.
이들에 의해 신대륙의 정복이 1560년대를 끝으로 일단락되자 이후 스페인 왕실의 직접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거대한 제국들은 불과 50년 안에 정복, 파괴되었다.
스페인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유럽에서 종교개혁으로 힘이 약해진 카톨릭을 수호하고 신대륙에 구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카톨릭 전파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강요와 폭력에 의한 일방적인 것이었다. 개종의 강요와 무참한 살육이 행해졌다. 교회는 신앙활동 등 본래의 업무 외에도 사적 업무와 교육·공공복지 문제들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수백 명에 불과한 스페인인들이 아스텍·잉카 등 거대한 제국을 그토록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스페인 무기의 우월성이다. 둘째, 말의 존재였다. 셋째, 원주민 사이의 분열을 이용한 스페인군의 피지배 종족과의 연합전술이다. 넷째, 아스테카족의 종교적 믿음을 들 수 있다. 다섯째, 잉카 제국의 내전이다. 여섯째, 전염병 때문이다.1876년 멕시코의 대통령이 된 디아스는 1911년 혁명으로 쫓겨날 때까지 34년간 권좌에 있었다. 그는 8번에 걸쳐 대통령에 재선되면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35년간에 걸친 디아스의 장기 집권과 무자비한 탄압, 외국인과 소수 대토지 소유자 위주의 경제정책, 인디오·농민·노동자의 경제적 빈곤,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1910년의 전면적 선거 부정 등은 국민들의 반발을 점차 거세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1910년 마데로는 강제로 빼앗은 농지를 인디언에게 되돌려줄 것과 공정선거와 대통령 재선 반대를 혁명의 기치로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혁명은 멕시코 전역을 뒤엎었고, 디아스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에 일어나는 쿠데타, 혁명, 정변 등 모든 중요한 사건에는 항상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되어 있다. 멕시코는 혁명 이후 1970년대 초까지도 수동적 외교정책을 펴왔다. 대외정책에서 '까란사 독트린'과 '에스뜨라다 독트린'에 근거해 불간섭, 주민자결,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 전통적인 원칙을 수호하는 데 주력했다.
까란사 독트린은 이후 멕시코의 대외정책의 초석이 되었다. 모든 국가는 평등하며, 각국의 법과 국권, 그리고 제도는 상호 간에 존중되어야 하며, 또한 어떤 나라도 타국의 국내 문제에 어떤 이유에서건 어떤 방법으로라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기본 정신이다.1835년 11월 미국의 사주를 받은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분리를 선언했다. 이 선언을 좌시할 수 없었던 멕시코는 1863년 2월 텍사스의 알라모 요새를 공격했고, 이에 항전하기 위해 급조된 텍사스 수비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요새가 파괴되자, 이를 계기로 텍사스는 곧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미국은 곧 바로 텍사스를 승인하고 상호 방위동맹을 맺었다. 멕시코는 4월 다시 텍사스를 공격했으나, 이번에는 미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은 산하신또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멕시코는 잃어버린 텍사스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결국 미국과 멕시코 양국 간 전쟁을 벌였고, 결과는 의외로 쉽게 끝났다. 조직이나 명령체계 등에선 미국과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에 패한 멕시코는 미국과 '과달루뻬-이달고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는 텍사스를 미국의 영토로 주어야 했고, 전쟁 배상금으로 325만 달러를 물어야 했다.
삼국동맹전쟁은 1864년부터 6년간에 걸쳐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3국의 연합군과 파라과이가 싸운 라틴아메리카 최대 유혈전쟁이다. 전쟁발발의 표면적 요인으로는, 우선 독재 통치를 했던 로뻬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개인적 야욕을 들 수 있다. 그는 '남미의 나폴레옹'으로 자칭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라과이를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로 만들려고 했다. 전쟁의 내면적 원인은 파라과이의 경제발전과 성장이 영국의 이 지역 지배에 방해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전쟁은 세 나라의 집중적인 공격을 맞아 파라과이가 자국의 영토 안에서 방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6년간의 전쟁은 1870년 로뻬스 대통령이 전사함으로써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는 국가통일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파라과이는 보상금 지불, 식민통치 등의 참혹한 결과를 겪었다.쿠바는 19세기 초 아메리카의 모든 식민지가 독립할 때도 스페인의 식민지로 남아있었다. 19세기 말 쿠바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에 의해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지만, 그는 스페인 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독립은 미국이 이 지역에서 세력확대를 꾀하면서 이루어졌다. 미국은 세력확대를 위해 쿠바의 독립을 노골적으로 지원했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개시하여 5개월만에 승리하였다. 결국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다시 미국의 실질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카스트로는 1953년 산티아고에서 무장봉기하여 몬까다 경찰서를 습격했으나 실패하여 잡히고 말았다. 이후 바티스타에 의해 사면된 그는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체 게바라와 만나 1956년 새로운 혁명을 위해 다시 쿠바에 잠입했다.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독재에 항거해 게릴라전을 계속했고, 마침내 1958년 11월 하바나에서 벌어진 시민봉기와 맞물려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은 무너졌다.
1959년 반미 성향의 피델 카스트로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지난 37년간 쿠바의 운명은 그에 의해 결정되었다. 혁명을 통해 쿠바를 현대 소비에트사회로 탈바꿈시켰으며, 아메리카의 급진적 사상들을 쿠바식으로 변형된 사회주의 속에 용해시켰다.흔히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는 '한 마리 고양이와 스무 마리의 쥐'에 비유된다. 이는 미국과 중남미는 서로 불편한 관계라는 것, 한편의 일방적인 공격만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은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미명으로 54년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파병한 바 있으며,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해 피그만에도 쳐들어갔다. 또 도미니카공화국의 보쉬 정권을 전복시켰고 브라질의 군사 쿠데타에도 개입했다. 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킨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CIA가 개입되기도 했다.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하면 미국의 상품이 도처에 있고, 또 많은 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으며, 미국과 빈번한 접촉을 갖는 관계여서 서로 친한 나라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남미인들의 반미감정은 대단하다. 이는 주로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신생 독립국의 내정에 직간접으로 군사적·경제적·외교적 간섭을 하면서 나타난 것이다.브라질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 중 빈부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이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생겨난 것이지만, 장기간의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브라질은 군부가 굴라르 정권을 전복시킨 이래로 돌아가며 대통령직을 맡았다.
사르네이 치하에서 정부 형태와 대통령 임기를 정하기 위해 구성된 제헌의회는 임기 5년의 대통령중심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다. 바로 이를 통해 콜로르는 29년만에 처음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다. 그는 정치 개혁을 강하게 부르짖었다. 인플레를 잡고 부정부패를 단호히 척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당시 '브라질의 지미 카터'로 불릴 만큼 청렴결백한 이미지였다. 그의 인기는 계속 치솟았다.
그러나 그는 1992년 비리 스캔들에 휘말리는데, 그의 재정 담당 참모인 파울루세자르 파리아스가 부정 혐의로 기소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재판 증인으로 출두한 대통령 동생 페드루 콜로르는 형이 비리 사건에 깊이 관여하여 수백만 달러를 착복했으며 젊은 시절 코카인을 복용했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콜로르게이트'라고 하는데, 의회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에 들어가 이 스캔들의 전모는 곧 밝혀지게 되었다.
콜로르는 비리의 일부가 드러났음에도 자기 기만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브라질 국민은 상파울루의 중심가를 가득 메우며 콜로르의 축출을 요구하였다. 대규모 시위 1주일 후 하원은 대통령의 탄핵을 결의하는 투표에 들어갔고, 탄핵에 찬성했다. 이 '콜로르게이트'는 브라질 민주주의의 승리를 말해준다.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게 쿠바를 스페인의 전제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쿠바 민중에게 미국의 지배는 스페인의 지배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민중을 착취하고 미국의 이익만을 보장했으며, 주요 산업은 미국인 소유였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 피델 카스트로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착취당하는 농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혁명을 꿈꾸었다. 아바나 법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규합해 1953년 혁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19년의 형량을 선고받았고, 2년 후 특별사면으로 석방돼 멕시코에서 혁명 동지들을 규합해 유격훈련을 하게 된다. 카스트로의 집념은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이끄는 게릴라들은 59년 1월1일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혁명에 성공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4세였다.
카스트로는 혁명 당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외세의 착취를 거부하는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휴머니즘'으로 규정했다. 카스트로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건 쿠바를 고립시켜 소련과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미국의 근시안적인 외교정책이었다.페루는 후지모리의 독재를 용인할 만큼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은 나라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인종적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내란으로 이어졌다. 중남미 대부분의 좌파들이 혁명보다는 개혁의 길을 택하고 있는 데도 페루에서는 무장투쟁이 격화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992년 9월 13일 페루의 무장 게릴라 조직 '빛나는 길'의 최고 지도자 아비마엘 구즈만이 체포되었는데, 페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즈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1935년 페루 남부 아레키파 지방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중국 문화혁명에 깊은 감명을 받고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했으며, 모택동에 빠져들었다. 충실한 모택동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 구즈만은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카톨릭 마을 아야꾸초에서 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모택동주의 그룹을 결성했다. 그의 투철한 모택동주의는 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