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 | 푸른숲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이덕희 옮김
푸른숲/2002년 12월/536쪽/20,000원
니진스키의 비극
Ⅰ
바슬라프 니진스키는 전설적인 명성의 절정에서 홀연 암묵의 신비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일기』는 이 양극단의 가파른 경계선에서 필사적으로 기록한 그의 ‘영혼의 자서전’이다. 이 기록은 소리 없는 영혼의 절규다.
니진스키는 1917년(28세) 9월 26일, 발레 뤼스의 남미 순회공연을 끝으로 바로 자신의 명성을 일궈낸 바탕이었던 이 발레단과 영원히 결별했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공연 며칠 뒤 몬테비데오의 적십자를 위한 자선공연에서 춤 춘 것이 결과적으로 대중을 위한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고 말았다. 아무도, 니진스키 자신조차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후 세계는 니진스키가 춤추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은퇴 후 종전(1차대전)을 기다리며 아내 로몰라와 세 살 된 딸 키라와 스위스의 생 모리츠에 머물던 시절 그의 정신이 붕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기』는 바로 이 시점에서 집필되었다.(1919년 1월 19일부터 3월 4일까지의 6주 반)
니진스키의 전기 작가 리처드 버클은 “10년은 자라고 10년은 춤추고, 그리고 나머지 30년은 암묵 속에 가려진 60 평생”이라고 니진스키의 생애를 요약했다. 요절한 많은 천재와 달리 니진스키는 61세로 장수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정신요양원을 전전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상적 삶’은 끝났고 이후 그와 세계와의 교통도 끊어졌다. 니진스키가 정신병원에 있을 무렵(1920년대) 발레 뤼스의 댄서들은 니진스키가 안무한 발레를 기억에서 지웠으며 1930년대 초에는 해석자로서의 니진스키의 명성마저 이들 사이에선 잊혀지고 있었다.
여동생 브로니슬라바는 1936년 자신의 걸작 발레 <결혼>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리바이벌하기 위해 뉴욕에 갔을 때 미국 신문들이 보인 니진스키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누이로서, 동료 예술가로서 니진스키에 대한 예술적 창조에 대한 진실된 모습을 집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녀의 『회고록』을 통하여 비로소 젊은 니진스키는 흔히 디아길레프에 의해 주조된, 말이 없고 시무룩한 둔한 젊은이가 아닌 본능적으로 예술적 목표와 방향을 모색해왔으며, 예술성과 창조성은 테크닉에 희생당하면 안 된다는 미학적 신조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정신분열증’이란 낱말을 처음 발명한 블로일러 박사를 필두로 프로이트, 융, 크레펠린을 포함한 세계의 가장 탁월한 정신병의들이 치료했지만, 끝내 그는 정상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의 충고는 한결같았다. “정신의학자의 간호 아래, 그에게 최상의 상태로 육신을 편하게 해주고 조용한 환경을 마련해주십시오. 그로 하여금 자신의 꿈에 잠겨 있도록 내버려두세요.”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고통 받았다고 자탄했을 만큼 니진스키는 자신에게 슬픔만 준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의 앞에 일상의 세계가 닫히고 불가지(不可知)의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그를 빨아들이고 있을 즈음, 이 두 세계의 경계선에서 그는 이 삶의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가 될 말을 남겨두고 갔다. “내 어린 딸은 노래하고 있다. ‘아, 아, 아, 아.’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애가 말하고자하는 것을 느낀다. 그 애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은 아! 아! 공포가 아니고 기쁨이라는 것을.”
Ⅱ
니진스키는 세계 무용사를 통틀어 어떤 무용가와도 공통된 점이 전혀 없었다. 그는 춤으로 존재를 표현했고 마치 자신에게 고유한 동작언어로서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공중에 날아오르는 방법은 불가사의해서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않고 공중에 머물러 있었으며 자기가 내려오고 싶을 때 땅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관객들은 그렇게 느꼈다. 그는 자기 고유의 인격을 표출하려고 하기보다 차라리 절대(예술)의 종이 되고자 자신을 선택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의 육체와 얼굴은 그가 연기하는(춤추는) 다양한 배역의 실체가 통과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무용가였던 양친의 혈통과 조국 폴란드를 떠나 러시아 황실 발레의 유산을 물려받은, 즉 환경과 전통의 영향은 니진스키가 출연한 모든 작품에서 발견된다. 한 사람의 육체가 역사적 선례와 흠 없는 기교, 그리고 그처럼 특이하면서도 보편적인 수법으로 현현되는 완벽한 예술성의 누적을 제시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문 일이지만, 니진스키는 단연 이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그의 허벅지와 다리의 근육은 비상하게 발달했지만 162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작은 키와 짧고 굵은 다리 등 완벽하지 못한 육체로 완벽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성 댄서가 발레리나의 시녀라는 위치로 전락한 19세기 즈음에 상트페테르부르크 학교에서 훌륭한 스승인 레가트 형제들에 의해 교육받은 니진스키는 드디어 남성의 안무의 역할을 바꾸어놓게 된다. 그는 남성 댄서를 발레리나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았고, 남성과 여성의 요소를 대등하게 만들어놓았다. 또한 니진스키는 그의 안무 전체의 지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자신의 예술적 해석대로 한 치도 틀리지 않고 공연되기를 요구한 최초의 안무가이기도 했다. 그의 몇 안 되는 발레를 통해서 볼 때 그에겐 최고의 음악성 못지 않게 탁월한 구도 감각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4차원의 세계(새롭고 독단적인 박자 처리에 의한 음악적 템포에 입각한)와 연결된 3차원의 영역에서 작업했다. <판>이나 <유희> 및 <제전>에서 서로 반대로 움직이는 댄서들의 대조적 의상은 후기인상주의라는 일반화된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Ⅲ
비록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결국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고 만 남미 순회공연을 끝냈을 때 니진스키의 나이는 스물 여덟이었다. 그는 서른 다섯에 은퇴하여 러시아에 일종의 예술적 실험소를 부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니진스키란 이름이 학교의 교장이나 페스티벌 디렉터로 기억되는 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었다. 1919년 3월 6일 오후, 취리히의 정신병원 의사 오이겐 블로일러와 면담하면서 그의 삶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니진스키는 정신분열적 혼란을 겪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블로일러는 아내 로몰라에게 그와 이혼하여 그를 가정의 의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로몰라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7년 전 그녀에게 니진스키는 그의 춤을 처음 목격했던 그 순간 운명이 되었던 남자였다.
로몰라의 계부와 모친 에밀리아 마르쿠스가 딸에게 이혼을 권고했으나 설득할 수 없자 그들은 니진스키를 요양원에 입원시키기로 작정했다. 에밀리아에 이끌려 로몰라가 산책을 나간 사이 니진스키는 호텔방에서 간호사들에게 의해 주립 요양원에 입원되었다. 로몰라가 황급히 바슬라프의 소재를 파악하고 찾아갔을 때는 ‘쇼크’로 인하여 긴장성 혼수에 빠진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니진스키와 더불어 하는 로몰라의 30년에 걸친 제2의 인생 역정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희망과 절망, 투쟁과 궁핍으로 점철된 영웅적인 도정이라 할 만 했다.
Ⅳ
니진스키의 생애에는 항상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모진 고뇌와 비애가 발목에 채워진 족쇄처럼 한평생 그를 질질 끌고 다니며 놓아주지 않았다. 바슬라프가 갓난애였을 때 두 살 반 된 형이 3층에서 떨어진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끝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일은 바슬라프의 잠재의식 속에서 일생 동안 그를 지배했다. 또한 섬세하고 민감했던 바슬라프에게 아버지가 다른 여자 때문에 가정을 버린 일은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유난히 강하게 만들었고, 부친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상태로 감정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비사교적인 데다 철두철미하게 묵고적인 기질이었던 니진스키는 교사와 급우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사람들과의 교감을 단념하고 자신의 방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고, 오직 춤 출 때만 자유를 느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이해받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정신의 파국을 향해 서서히 침몰해간 니진스키의 비극은 이때 이미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니진스키의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감정’이란 낱말은 그의 『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사상적 맥락에서 볼 때 본능, 다시 말해 무의식의 심적 충동을 의미한다. ‘생각’에 대응하는 ‘느낌’, 논리에 대응하는 ‘직관’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이나 논리를 거부하고, 사람들이 느낌과 직관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아내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그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좋으련만.” 혹은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 감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쓰려고 한다.” 등등. 그의 『일기』를 통독하고 나면 누구나 그가 무섭도록 강한 본능-직관의 소유자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Ⅴ
성년의 문턱에서, 그리고 성인이 된 삶에서 니진스키는 그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세 명의 인물과 차례로 조우하게 되는데, 즉 파벨 드미트리예비치 류보프 왕자와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디아길레프 그리고 로몰라 드 풀츠키가 바로 그들이다.
차르의 시종이요, 교통체신장관의 비서로, 수려한 용모에 서른다섯 살의 독신인 부유한 류보프 공과의 우정은 주변의 가십이 되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동성애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류보프 역시 단순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연인으로 니진스키를 선택했으며 니진스키도 이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자위행위를 중단한 이래로 수년 동안 금욕생활을 해왔으며 내심으로 사랑을 갈망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값비싼 보석과 선물을 받아들였으며, 왕자의 궁전 같은 저택에서 숙박했다. 언제나 니진스키는 류보프를 동반해 극장이나 사교적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류보프는 청춘에서 성인으로 성숙하는 결정적 시기 동안 니진스키의 아버지를 대신했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젊은이의 성적 억제를 완화시켜 주었다. 둘의 관계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지만, 여러 모로 이것은 니진스키에게 유익했다. 류보프로 인하여 니진스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란 인물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디아길레프가 창시한 러시아 발레의 첫 파리 시즌은 서구에서 ‘러시아 발레의 창세기’를 열어준 세계 예술사상 영원히 기념될 폭발적인 대사건이었으며, 이것은 곧 ‘현대 발레의 창세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디아길레프를 분수령으로 현대 발레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류보프는 니진스키의 장래에 디아길레프가 대단히 유익한 존재가 될 것이라 역설했고, 그와 관계를 맺으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리하여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가 묵고 있던 ‘호텔 유럽’으로 갔고 거기서 두 사람은 함께 잤다. 그리고 같은 날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두 사람에게 이것은 운명적 만남이었다. 디아길레프는 연인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 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곧 니진스키에겐 류보프와의 이별을 의미했다.
디아길레프는 여성과의 성적 관계에 혐오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항구적인 반려를 동성에서 찾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성적인 단계로 발전했다 해도 디아길레프의 흥미가 성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가 이끌린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 즉 재능이었다. 그는 니진스키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최상의 재료를 발견했다고 느꼈고 사실도 그러했다. 열아홉 살의 니진스키에게 서른다섯 살의 디아길레프는 예술과 삶의 선도자였고, 스승이요, 친구며, 연인이었다. 두 사람은 5년간 함께 살았다. 그러나 니진스키의 독립적 자기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디아길레프와의 피할 수 없는 파국이 닥쳤다. 마침내 니진스키가 그의 최초의 발레 <목신의 오후>에 의해 안무가로서 자신을 굳건히 구축했을 때 파국은 현실이 되었다.
디아길레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가 된 후 천성적으로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혼자가 되자 디아길레프와의 사랑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라고 성찰하게 되고, 차라리 시베리아로 가 수도승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춤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이러한 진퇴유곡 속에서 ‘결혼’이란 제3의 선택을 하게 된다. 베니스에서 니진스키의 결혼을 알게 된 디아길레프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슬픔, 분노, 당혹, 배신감, 복수심 등을 느꼈다. 그는 이후 니진스키의 앞날을 가로막는 온갖 책략으로 보복했다. “현재 니진스키가 서 있는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낮은 위치로 밑바닥까지 그를 떨어뜨릴 테다!” 이 같은 그의 예언대로 니진스키는 결과적으로 삶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운명의 아이러니에 휩싸였다.
Ⅵ
로몰라 루도비카 폴릭세나 플라비아 풀츠키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마 빛 머리와 푸른 눈을 한 아름다운 처녀로 니진스키와 결혼할 당시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아버지 풀츠키 백작으로부터 독립정신과 이상주의 및 예술에 대한 숭배열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로몰라는 아버지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몹시 폐쇄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고립적인 생활을 했다. 그녀를 염려하는 백모의 설득으로 영국과 독일에서 공부하고 프랑스에서는 드라마 수업을 한 후 다시 헝가리로 돌아온 그녀는 안정된 생활의 바람 때문에 어떤 남작과 약혼을 했다. 그러나 로몰라가 약혼한 그 해, 1912년 봄, 발레 뤼스가 첫 부다페스트 시즌을 갖게 되었는데, 이때 <사육제>의 아를르캥으로 출연한 니진스키의 춤을 본 순간 그녀에게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는 흡사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동행한 여자친구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저 남자는 내 남편이 될 거야.”
그 즉시 약혼을 파기한 로몰라는 발레 뤼스와 니진스키와 알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로몰라의 모친이 헝가리의 국민적인 배우였기에 그녀의 자택을 개방하고 있었고, 외국의 저명한 명사들이 부다페스트에 올 때는 그녀의 가정을 방문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발레 뤼스 단원들과 사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발레단의 단원들마저도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발레 뤼스 전 단원의 스승인 위대한 발레 마스터 엔리코 체케티 옹에게 접근했다. 그에게 쏟아부은 온갖 선물과 아첨 덕분에 늦은 나이였음에도 발레 뤼스 단원에 섞일 수 있었고 마침내 그녀도 단원들과 함께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니진스키가 가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갈 결심이었다. 그녀의 광적인 집착은 만약에 니진스키의 천재가 영속돼야 한다면 자신이 그의 불멸을 전달하는 매개가 되기를, 즉 그의 아이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운명은 로몰라의 편이었다. 그 해 여름 발레 뤼스가 최초의 남미 순회공연을 떠나게 됐을 때 남미행을 싫어하는 댄서들의 결원 때문에 체케티의 특별 추천으로 정식 단원이 아닌 로몰라도 공연단에 끼일 수 있었고 게다가 처음으로 니진스키의 곁엔 디아길레프가 없었다. 기막힌 행운이었다. 마침내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기 사흘 전 제3자의 중개로 둘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밤 갑판에서 로몰라가 혼자 있을 때 니진스키가 다가와 프랑스어로 청혼했다. 로몰라는 황망히 “네. 네, 그래요.”라고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결합했다.
결혼은 지극히 행복했다. 로몰라는 “결혼 생활이 너무 완벽하게 행복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했다.”고 후에 고백했다. 불완전한 우리들 인간에게 ‘완벽한 행복’은 영속하지 않는 법, 결국 5년 후 생 모리츠에서 니진스키가 서서히 정신의 붕괴를 겪으며 이 목가적인 가정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난다.
니진스키의 누이 브로니슬라바는 오빠와의 대화 도중 화제가 ‘춤’에 이르면 그에게서 돌연한 의식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예술’의 비전 속에 살고 있는 의식의 일부는 그렇게 보존되고 있었고, 바슬라프는 이 영역에서 완전히 제정신으로 남아 있었다. 니진스키에게 ‘무용’은 신앙이요, 생명이며, 영혼이었다. 그러나 극장이 없었으므로, 니진스키는 자기 속에 깊이 물러가 자신의 고유한 ‘무용’의 내면세계에서 살기 위해 삶의 현실로부터 문을 닫아버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