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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원주민

래리 J. 짐머맨 지음 | 창해
북아메리카 원주민

래리 J. 짐머맨 지음/김동주 옮김

창해/2001년 12월/198쪽/20,000원



북아메리카로의 이주

원주민 집단들은 스스로를 일컫는 이름과 영토, 언어 및 전통을 수천 년이나 고수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집단이 모여 북아메리카 대륙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정체성은 매우 강하고 배타적이다. 그런데 백인 선교사, 탐험가, 상인 등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부족에 이름을 짓는 실례를 하기도 했다. 예로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이누이트’족은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에스키모’는 오랜 숙적의 부족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라는 용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아시아인으로 오해했던 콜럼버스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잘못을 명목상으로나마 바로잡기 위해 대신할 말로 아메리카 원주민, 토착민(aboriginal people), 원주민(Native people), 최초의 민족(First Nations people)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스스로 결정한 명칭으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

성자들(holy people)에 의하면, 북아메리카가 비어 있는 땅이었던 적은 없었다. 북아메리카 문화의 기원을 찾는 고고학자들은 1만 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화덕과 동물 뼈의 잔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독특한 모양의 석기들을 발견했다. 이 유물들은 마지막 빙하기에 매머드와 다른 거대한 동물들을 따라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동했던 사람들을 조상으로 하는 수렵민들이 남겨 놓은 것이다. 빙하기 중에는 현재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잇는 땅이 드러날 정도로 해수면이 낮아졌는데, 과학자들은 그 땅을 ‘베린지아(Beringia)'라고 부른다. 베린지아가 바닷물에 잠겨 지금의 베링 해협이 될 때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어서 이후 아메리카 대륙 곳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결국 B.C. 약 8천 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대륙의 거의 모든 곳에 인간들이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간의 흔적은 아시아에서 발견된 것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북동 아시아 사람들의 신체적인 유사성과 함께 매머드 사냥꾼들이 서쪽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아메리카에 사람이 살게 된 과정에 대한 색다른 견해도 있다. 그것은 태초부터 사람들이 이 대륙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수많은 원주민 전승들에 나타나 있고, 오늘날까지도 종교적․정치적인 논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기원 설화는 부족의 생활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농경 정착 생활을 하는 집단들의 창조 설화에는 구체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땅으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또한 수렵 채취 생활을 하는 집단들의 창조 설화는 그들의 전통적인 삶, 사냥감과 계시(啓示), 환영(幻影)을 찾아다니는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유럽인 도래 이전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수천 년 동안 변화가 없이, 또는 고립되어 지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원거리 교역을 통해 석기의 재료가 되는 돌, 장식용 조개 껍데기 등과 같은 물건을 유통시켰다. 이 시기의 활동 규모는 같은 어족(語族)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들이 현재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서부의 나바호족과 아파치족의 언어는 알래스카와 유골에 살고 있는 수렵민의 언어와 같은 어족에 속한다. 따라서 유럽인 침입 이전의 북아메리카는 인류가 최소한 1만 5천 년 이상의 오랜 세월에 걸쳐 삶을 영위해온 곳이었다. 다만 백인 탐험가들과 이주민들의 눈에만 정복당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텅 빈 황무지로만 보였을 뿐이었다.



축출

유럽인들의 첫 북아메리카 침입은 대륙의 광활함 때문에 사소하고 미미한 것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땅에 깃발을 꽂기 시작한 이후로 400년 동안 그들은 모든 원주민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유럽인들의 침입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물리적(이주민들에 의한 영토 확보와 점령), 정신적(기독교의 강요), 물질적(총기나 술과 같은 상품의 도입) 침입이 그것이다. 백인들은 지키지 않을 계약으로 원주민들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술을 강권하여 그들을 파괴하고 종속시켰으며, 보호구역에서만 살도록 쫓아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파괴당하지 않았다. 사명감을 가진 지도자들의 능력과 가르침 덕분에 원주민의 전통 문화는 살아남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쫓아내는 축출 과정은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기성복, 주전자, 총기, 칼 및 기타 여러 유용한 상품들에 현혹되어 인디언들은 이민자들의 점진적인 침입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와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인디언 노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남부 해안에 살던 수많은 작은 부족들은 내륙으로 도피해야만 했다. 제한된 땅과 자원을 둘러싸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인디언 집단들은 서로를 약탈하다 못해, 교역품을 대가로 이주민들과 협조하기도 했다.

1787년 미국 의회는 “(인디언들의)토지와 재산을 그들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빼앗지 못한다“고 선언한 ‘북서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인디언들이 땅에서 살기 원하는 백인들에게는 무의미한 법령이었다.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이보다 더 나아가서 ‘인디언 이주법’을 선포하고 강제로 모든 원주민 집단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인디언들은 이론적으로는 자신들의 ‘인디언 구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지만, 실상 백인들의 서부 진출은 줄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주민들이 인디언들의 토지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인디언들은 다시 보호구역에 강제 수용되었다.

강제 이주는 악몽이었고, 그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은 무력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예를 들어 1850년대 나바호족이 저항하며 공격해오자, 뉴멕시코의 의용병들은 이들을 무참히 짓밟아 그들의 고향을 황폐화시켰다. 이후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 대부분이 산을 넘고 사막을 가로질러 480㎞를 걸어서 뉴멕시코의 섬너 요새로 끌려갔다. 몇 년 동안의 갖은 수모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만이 겨우 고향의 보호구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825년 미국 정부는 ‘인디언 문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 즉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활한 영역을 인디언들에게 내어준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공식적으로는 1834년 인디언 영역으로 알려진 그곳은 경제적 번영과 낮은 문맹률을 보이면서 정착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860년대에 미국 내전(American Civil War)의 혼란으로 인한 경제적 파멸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날 즈음, 북부에서 이주해야 했던 부족들에게 기존의 부족들은 땅을 넘겨주어 그곳은 65개 이상의 다양한 부족들이 한데 뒤섞여 방치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또한 백인들의 정착촌은 내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인디언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신성불가침’이었던 인디언의 영토들은 점차 미합중국의 주(State)로 설정되었고, 인디언 지역도 유명무실해졌다. 영역의 상실을 더욱 재촉한 것은 공동의 땅을 개인 소유자에게 할당한 조치였다. 이는 인디언들의 빠른 동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3천 8백만㏊의 보호구역이 사라졌다.

원주민들이 고통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독교를 권했던 사람들이 바로 고통을 야기했던 정착민들이었다. 그러나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의 본질인 전통적인 형태의 신앙과 의례를 거부하고 배격해야만 했다. 게다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정착민들은 순종을 얻어내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1662년 거의 노예로 전락했던 왐파노아그족은 안식일에 사냥이나 낚시를 했다거나, 전통적인 치료법을 사용했다거나, 단지 교회 이외의 장소에서 혼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았다.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서는 기독교를 거부하는 인디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결국 기독교는 먼 이국땅으로부터 전해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했던 사람들이 미친 영향이 결코 좋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디언들에게 그것은 본질적으로 낯선 이방인들의 교리로 남아 있다.

유럽인들의 대탐험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동기는 새로운 땅이나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정복자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던 유럽인들의 눈에 원주민 문화의 풍부함과 다양함이 보일 리 없었다. 다만 빈곤 속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았을 뿐이며 또한 이러한 시각으로 풍요로운 대지와 그 자원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교리는 자연을 단지 인류를 위해 정복되고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을 뿐, 결코 자연을 인간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19세기 중반에 발표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인디언들이 ‘비천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유럽인들의 생각을 더욱 굳건하게 했을 뿐이다. 인디언들은 한때 위대했던 인종의 퇴화한 잔존자들이거나 백인들보다 진화 단계가 떨어지는 집단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원주민과 백인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공통된 언어나 세계관이 있을 수 없으며 동일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바깥 세계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의 400여 년 역사를 백인들의 시각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876년 6월 25일, 미국 기병대 소속의 한 파견대가 몬태나의 리틀빅혼 강에서 대평원 인디언 복병을 만나 싸우게 되었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기병대원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커스터 장군은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한다. 이는 인디언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가 되었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 전설에 의하면 최후 항전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했지만 많은 인디언의 가족들이 살아있었다. 인디언들의 증언은 편향되어 있을 거라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전투에 대한 일관성 있는 그림을 보건대 기병대원들이 채 30분도 넘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도주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앙과 의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승에 의하면, 생명이 있건 없건 간에 조물주가 만들어낸 모든 것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모든 것은 성스럽다. 사람, 어머니 대지(Mother Earth), 그 밖의 창조물들, 그리고 조상들 사이의 관계는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대지는 ‘두발붙이(사람)’와 ‘네발붙이(동물)’를 비롯하여 모든 존재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베풀고 서로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전통 제례와 의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들은 대지를 끝없이 반복되는 생산․파괴 그리고 재생산의 원천으로서 존중하고 중요시하며, 모든 것들이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은 동물도 사람처럼 정령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식물․대지와 복합적인 호혜(互惠) 관계를 향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동물들이 흔히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데 있어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전설에 등장하여 주술을 부리고 장난을 치는 트릭스터들은 대개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자신의 이웃인 사람들에게 소중한 도덕적 교훈을 준다.

친족은 인디언 부족들에게 공동체의 안정, 통합, 생존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각자 독특한 고유의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에 대하여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디언들은 마을에 들어온 이방인들, 심지어 백인 포로들까지도 대개 ‘사촌’이나 ‘형제’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행을 통해 이들은 이방인의 사회적 위치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고, 집단의 완전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인디언 부족들은 대개 자신들의 공동체를 정령으로 가득한 자연계의 연장선상에서 인식하고 있다. 가족들로 구성된 집단인 씨족, 그리고 성스러운 결사들은 흔히 자신들을 동물 정령이나 토템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토템이라는 용어는 ‘마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오지브와 말의 ‘오뎀(odem)'이라는 단어를 인류학자들이 빌려다 쓴 데서 유래한 것이다. 토템 동물은 씨족의 시조가 되는 인물의 사냥을 돕거나, 그 인물이 집으로 돌아올 때 길을 인도해주었다는 동물이다. 씨족의 구성원이 토템으로 섬길 동물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경우도 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정령의 세계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 사이의 경계라는 것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으며, 아울러 그 사이에는 제3의 중간적인 세계(‘in-between' world)가 있어서 두 세계를 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는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세 세계 모두에 속하며, 그럴 만한 능력을 가졌거나 특정한 제의를 치렀다면, 인간 역시 다른 두 세계의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

이 같은 변신은 대개 ‘태초(beginning time)'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현함으로써, 즉 문화 영웅과 트릭스터들의 역할을 통해 세상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을 답습함으로써 가능했다. 의식을 치르는 중에 누군가가 특정한 형상으로 등장하면, 그는 정말 그 존재로 여겨졌다. 블랙풋족의 성자가 노란 곰 가죽을 뒤집어쓰면, 청중에게는 그가 바로 실제의 곰인 것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깊고도 복잡한 것이다. 많은 부족들은 스스로를 동물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거나, 최소한 동물과 친족 관계에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동물 역시 인간 친척과 동등한 권리와 존중받을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이 동물을 공경해야 하는 까닭은 기꺼이 스스로의 생명을 바쳐 사람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동물 정령에 대한 적절한 예우에는 수백 가지의 규칙과 금기를 지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사냥꾼의 행운을 좌우하기도 했다. 행운은 인간을 동물 정령과 묶어주는 강력한 힘으로, 이에 유의하여 동물들을 공경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행운은 도리어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부족들에게 식물은 사냥으로 얻을 수 있는 양보다 많은 식량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자원이었으며, ‘어머니 대지’의 선물로서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인디언 부족들은 특정한 식물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다.

북아메리카의 가장 중요한 작물인 옥수수는 BC 6천 년경에 중앙아메리카에서 재배되다가 1천 년경에는 캐나다 남부 지역까지 북상하여, 서리가 심하지 않고 강수량이 충분한 곳이면 어디든지 보급되었다. 옥수수는 선사시대의 도시인 카호키아에서 3만 명의 인구를 부양했다. 또한 옥수수가 주요 작물이었던 집단에서는 옥수수가 우주관과 의례 생활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많은 야생 식물을 의례나 치료에 사용했다. 인디언들은 샐비어를 태운 연기를 쐬어 정화 의례를 행하기도 했다. 몇몇 식물들은 약용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씹으면 목의 염증이나 두통에 효험을 보이는 뿌리도 있었고, 다양한 식물들의 잎으로 만든 차는 소화를 촉진시켰다. 담배는 야생종 및 재배종을 가리지 않고 제의에 널리 사용되었다.

많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세상의 리듬이, 고수가 북을 치는 한 끊임없이 새롭게 반복되는 지속적인 북소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리듬과 주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도 힘을 보태야 하는데, 이는 우주 순환 주기의 중요한 시점에 맞추어 열리는 제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대평원의 인디언들은 수많은 재생 의례와 관습들을 가지고 있다. ‘고리춤(hoop dance)'도 그중 하나인데, 춤꾼은 몇 개의 고리를 가지고 해․달․독수리․애벌레 등의 모양을 차례차례 능숙한 솜씨로 만들어낸다. 고리들은 자연의 영원한 주기와 모든 것을 연결하고 포괄하는 위대한 영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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