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색깔
이진 지음 | 개마고원
1. 현미경으로 본 노무현]
"꼭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찍어야 하나요?"2002년 6월 13일 오후 6시. 지방선거 결과 개표가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도 이미 분위기는 침울했다. 언론사들의 출구조사에서 참패가 예고되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실 맨 앞자리에는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앉아 있었지만 노무현은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이 자신의 침통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상황실에 내려오지 않자 대변인실 직원과 기자들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당이 지고 있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후보가 언론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림을 만들 수 없게 된 방송사 기자들은 특히 더 곤혹스러우면서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서성거리던 기자들이 다시 상황실로 내려간 사이 유 특보가 공보실 회의 탁자 앞에 앉았다. "8·8 보선 후보들 지원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 기자가 물었다.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지만 참패를 번연히 예상하고 있던 기자들의 관심사는 노 후보가 8·8 보궐선거 후보 공천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었다. 미니 총선이라 할 수 있는 8·8 보선이야말로 민주당 내에서 노 후보의 입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시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이나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다는 현실적 이유로 인해 노 후보가 지방선거 참패의 후유증과 재신임 문제로 지위에서 물러설 수도 있다는 환경은 상정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늘 나온 SBS여론조사에서 2% 차이로 노 후보가 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박근혜 씨가 나오면 1% 앞서고, 정몽준 씨가 나오면 2% 차이로 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뒤늦게 공보실로 들어온 한 기자의 설명이었다.
그때 공보실 밖 복도에서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노 후보가 보였다. 잠시 비서실에 갔다 후보실로 들어가는 중인 듯했다. 카메라 기자들은 얼굴 표정을 잡기 위해 순식간에 그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노 후보는 문고리를 잡고 선 채 기자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꼭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찍어야 하나요?" 그리고는 아주 좁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개표가 진행될수록 민주당의 초상집 분위기는 극에 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은 시각 한나라당사 상황실은 민주당 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회창 후보는 자리에 없었지만 여러 의원들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 10시. 상황실에 내려간 이회창 후보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는 뉴스를 봤다. 같은 시각에 노무현 후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두어 달 동안 자치단체장 후보들 지원유세를 하러 돌아다니며 새까맣게 타버렸던 그의 얼굴과 연신 '립밤'을 바르던 마른 입술,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와 지친 육신이 뒤엉켜 이 상황의 고문을 견디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석 생각도 났다. 서울 여러 곳에서 노무현과 잡은 손을 치켜올리면서 젊은 한국을 외치던 그가 간밤 명동에서 보였던 초췌한 모습도 떠올렸다. 그는 이미 자신이 패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쯤 지난 뒤에 노무현에게 13일에 왜 상황실에 내려가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한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나는 아직도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이 돈 먹고 잡혀가면서 당당하게 웃는 모습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도저히 그 표정을 이해를 못해요. 침통한 표정으로 검찰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거에 진 사람은 침통한 표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에 지고 아주 번들번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활짝 웃는 사람을 어떻게 국민이 신뢰할 수가 있겠어요? 난 그거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무슨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제가 그때 활짝 웃지 않아도 국민들은 희망을 가질 많은 일들이 있고, 내가 표정이 심각하다고 따라서 기죽을 국민은 아무도 없어요. 심각할 때는 심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좋습니다."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말하자면 대변인을 통해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말을 쏘아대면서도 또 어느 자리에서 마주치면 서로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웃음을 머금고 악수를 나누는 게 정치인인지라 나 역시 노무현으로부터 그런 정치인다운(?) 유들유들한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무현은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나 버렸다.
우리 나라 정치인들에 관해서 이러저러하게 단정하고 ‘그럴 것이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노무현은 얼마나 깨뜨려줄까? 나는 노무현 코드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게 될까?
가난했던 탓에, 그러나 가난했던 덕으로노무현에게도 가난은 시인 김지하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는 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오랫동안 인생의 화두였던 것 같다. 가난에 대한 노무현의 소감은 어떤 것일까? 그는 "가난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또 거짓말을 하게도 했다고 회고한다. 그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시절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직을 했을 때였다. 새 옷 살 돈이 없으니까 운동화에 교복을 입고 회사에 갔다. 그 '꼴'을 본 회사 상무가 교복 좀 벗고 다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단벌 신사 노무현은 결국 축 늘어진 친구의 스웨터를 빌려 입고 출근을 했다. 바지는 여전히 교복 차림이었다. 노무현은 그 바지 한 벌로 겨울을 났었다며, 허허허 웃었다.
그러고 보면 부모를 원망할 법도 하다. 노무현은 "그런 적 많죠."하며 다시 웃는다. "어릴 때 '왜 우리 아버지는 부자가 아닐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왜 우리 아버지는 일류 대학을 안 나왔을까, 대학을 안 나왔을까, 왜 고급 관리가 아닐까' 많이 생각해봤어요."
그래도 비뚤어지거나 반항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노무현은 어렸을 때에 동네에서 예의 바르기로 유명했었다. 20여 호 되는 마을에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가장 잘 하는 아이가 노무현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가난이 그의 성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인 듯하다. 그는 자신이 어릴 적에 우울하고 심각했다고 표현했다.
가난이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거짓되게 만들고, 그래서 우울했고 심각한 어린아이였다면 지금의 노무현은 자신을 낙천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게 다 잘 풀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사법고시 이후로 사실 꽤 잘 풀려온 사람이다. 시련이 많았다고 해도, 그의 한 참모의 말에 따르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번번이 낙선을 하면서도 별로 후회를 하거나 슬퍼해 본 일이 없다. 말 그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노무현에게는 가난이 빚어놓은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그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좀더 단호한 표정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과 소외에 무관심하고 이를 외면하려는 사회의 태도에 대해서는 분노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가난이 빚은 노무현의 또 한 가지 모습은 그에게 '외적 로열티'가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대단히 겸손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옆에서 구경해 본 노무현은 허장성세가 별로 없어 보인다. 어깨를 쭉 펴고 대대하게 걷는 정치인이기보다는 좀 몸을 숙이며, 사람들을 만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다.
그런 모습을 두고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대통령 후보로서의 권위가 없어 보인다고 공격한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던 날의 노무현의 모습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의 입에 꽤나 오르내렸다. 너무 심하게 몸을 낮추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실제로 자신이 윗자리에 앉아본 일이 없는 데다가 추기경을 하늘 같이 생각했고, 또 실제로 그만큼 되는 분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곧 저도 정치계 지도자로서 종교계 지도자와 대등한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저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노무현 연배의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게 그 시절 우리 나라의 전반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노무현의 가난은 인구에 회자된다. 이회창을 제왕적이라 하고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안 출신이라고 하다보니 그에 견주어 너무 보잘것없이 살았던 노무현의 성장과정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환경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노무현이 겪은 가난, 변호사 시절의 부, 인권운동가로서 접하게 된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험일 수 있다. 그가 서민적이라거나 그의 정치적 견해들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해주는 데에 많이 조준되어 있다는 것도 그의 성장 환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겠다.
2. 노풍연가 주인공 권양숙 스토리
"여보, 나도 도울게."노무현의 아내 권양숙 씨는 사생활과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철썩 같이 믿기에 집도 언론에 개방하지 않았었다. 종로 보궐선거 때에는 참모들이 가족 사진을 선거 캠페인용 포스터에 쓰자고 했을 때도 반대했다. 그뿐 아니다. 권씨는 노무현의 참모들에게 오랫동안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잘 나가는 법률가였던 남편이 운동권 아이들을 만나 신세 망쳤다'는 원망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전도양양했던 변호사 남편이 갑자기 인권 운동가로 변하더니 집이고 아내고 다 팽개치고 나가서 정치만 한다고 서운해했다. 덕분에 가정 살림은 온전히 권씨의 몫이었다.
노무현이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권양숙 씨는 한참을 망설였다. 권씨는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들의 모든 사생활과 가족생활이 사회에서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좋게 말하면 '검증'이고, 나쁘게 말하면 '난도질'이다. 그리고 권씨는 자식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아들 건호 씨가 LG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뒤 입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취직이 어려운 때인데 내가 입사한 것을 두고 행여 사람들이 아버지 빽으로 들어간 거 아니냐 할까 걱정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권씨는 "네 인생이니까 아버지 개의치 말고 살아라."고 조언했다.
"그 동안 인터뷰 거절을 많이 했어요. 정치는 남편이 하는 것이고, 나는 내조하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남편이 노출된 사람이라 사생활에 불편이 많더라고요. 속박이었어요. 그래서 거절을 했는데 지금은 나라 살림을 맡겠다는 사람은 낱낱이 검증받아야 하므로 알고 싶어하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드리겠다고 그래 마음먹었습니다."고 대답했다.
권양숙 씨의 영부인 후보로서의 '데뷔전'은 이인제 씨의 '노무현 장인 좌익 활동' 공격으로 뜻밖에 화려하게 치러졌다. 유권자들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부터 소개받은 셈이다. 권양숙 씨의 아버지가 좌익이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노무현을 괴롭힐지 모른다. 권씨 부친의 좌익활동은 노무현의 사상이 불순하다는 공격을 받는 데에 일조했다. 보수우익들은 집안에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이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는 공격을 퍼부었고, 「월간조선(6월호)」은 국민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최고의 직격탄을 날렸다. 「남로당 간부 노무현 장인이 주도한 창원군 학살 사건의 피살자 유족들 공개 증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권씨 부친 때문에 학살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유가족들의 절절하고 피맺힌 사연이 소개되어 있었다. "노무현 씨, 당신네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송곳으로 찌릅니다. 학살 지휘자가 시대의 피해자라고요?"라는 부제만 읽어도 그들의 한맺힌 사연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좌익 활동은 권양숙 씨가 세 살 때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기자들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 수도 없이 권양숙 씨에게 아버지 일을 물으려고 했고, 권양숙 씨를 수행하고 다니는 정무보좌 이은희 씨는 그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기자들은 꼭 그 부분을 묻곤 했다. 노무현 측으로서는 당내 경선 기간 동안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이인제 씨의 '권씨 아버지' 문제 제기였다. 노무현은 당내 경선에서 사상 문제가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그 당시 피해를 입은 가족들에 대해서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책임의 한계, 즉, 가족의 책임과 개인의 책임을 구별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은희 씨가 권씨로부터 캠프에 정황 보고할 설명을 듣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안 유세 지역을 이동하는 노무현의 차 안에서는 불이 났었다. 말 그대로 산지사방에서 난리가 나고 있는 동안 권씨는 침묵했다. 지금도 침묵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사진 찍어주는 아내권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딸 정연 씨의 사진첩을 본 일이 있다. "왜 사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없어요?"하고 물었더니 "그 사진들을 제가 다 찍으니까 그래요. 찍어만 주니까 제 사진이 없어요."했다. 권양숙 씨는 사진을 참 잘 찍는 이였다. 본인도 사진 찍기에 취미가 있었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것을 자기 영역으로 만들지 못한 이유는 카메라 살 '돈'의 문제였다. 노무현이 변호사 시절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써야할 우선 순위에서 카메라는 멀찌감치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가정주부이고 어머니로서 생각하기에 2002년 현재 우리 나라의 어머니 상은 어떤 것이고 어떤 식으로 변화, 발전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십니까?"
"나라 자체가 너무 어려웠고, 보릿고개도 있고 그러니까 어머니 하면 마음이 아프고 이런 것도 있고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 하면 부동산 투기 같은 것만 쫓아다니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비쳐지게 된 것 같은데요,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 개인적인 느낌이요.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게 우리 남자들도 중심이 있어야 하지만 가정이나 사회나 보면 여자의 생각, 여자의 행동이 바로 있어야 자녀도 바로 키우고 가정도 튼튼한 가정으로 꾸려 나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연인으로서, 한 가정의 부인으로서 우리 나라 여자들을 위해 국가가 바꿔줘야 할 것들은 어떤 게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요, 우리 나라 월급이 부인들의 통장으로 다 들어오잖아요. 우리 후보가 장관이 되시니까, 판사일 때는 월급 받아가지고 봉투로 이래 가져다줬는데, 이번에 장관 하니까 아, 내 통장으로 바로 들어와요. 되게 좋더라구요. 그런 부분은 아마 우리 여성들이 꾸준한 노력으로 조성이 되지 않았나, 이래 싶고. 딴 거는 내가 집에서 아들딸을 키우는데 우리 여성들한테 맞는 일자리가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여성들한테 맞는 일자리는 좀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가령 임신, 출산을 하고 아이가 어릴 때는 직장에서 시간을 좀 단축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아이를 다 키우고 나면 정상적으로 남자들과 똑같이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거. 그런 부분이 지금 우리 여성들에게 제일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2002년 현재 우리 나라 여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우리들이 원하는 대통령 영부인의 상은 어떤 것일까? 한국에서 사회의 주목을 받는 여자로 산다는 것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성상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시대이다. 한쪽에서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영부인 상을 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인천하가 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 영부인의 역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권씨가 선택한 입지는 겸손하고 조용한 내조인 듯하다. "여보,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고 나선 권씨의 일곱 번째 선거캠페인은 여전히 조용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지속적이다. 권씨는 "그렇게 일일이 손을 다 잡으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하던 남편의 안쓰러운 눈빛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직도 손을 흔들어 유권자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어색하기만 권씨는 대신에 허리를 깊이 숙이며 하는 말이 늘 이렇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여러분께서 힘이 되어주십시오." 노무현이 새벽에 일어나 집 나설 때의 힘은 그런 '부족함 많은 아내' 권양숙에게서 나오는 것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