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지음 | 들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지음
들녘/1998년 10월/464쪽/10,000원
1대 태조실록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도 간도 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는데 1355년 이성계와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가 99년 만에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자춘이 1360년에 병사한 후에는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형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 물려 죽고 없었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1392년 7월 공양왕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제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첫째 부인 한씨 소생의 불만이 높았는데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째인 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 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인 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으나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그러나 결국 방원이 보낸 무학의 설득으로 1402년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2대 정조실록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 때문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 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강씨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방원의 압력으로 태조는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2대 왕으로 등극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종조 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 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우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게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3대 태조실록
‘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방원의 동복 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특히 넷째형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방원은 이들 형제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박포는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한 장본인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했음을 불평하다가 도리어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평소 방원에 대해 품고 있던 원망을 이 기회에 풀기 위해 박포가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자 방간은 그 말의 진위도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방간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형제들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방원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 대한 반대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또한 방원의 심복 하륜의 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방간의 난이 수포로 돌아간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 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적어도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방원의 강한 형제애의 발로였을 것이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4대 세종실록
태종은 재위 기간 중 네 번에 걸쳐 선위 파동을 일으킨다. 태종이 마흔도 안 된 나이에 계속해서 선위 표명을 한 것은 건강에 대한 불안감과 조선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태종이 세자인 양녕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4년 만에 폐위되었다. 이는 태종의 뜻으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 아들 충녕이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4대 왕인 세종이다.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 대에는 개국 공신 세력이 거의 사라졌고, 그 덕분에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와 국왕이 만나 왕도 정치를 꿈꿀 수 있었다. 또한 세종은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쳤다. 또 언관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없었다.
세종대의 이러한 업적은 집현전의 효율적 운영에 따른 것이었다. 집현전은 이미 고려시대에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 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조 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집현전에서는 인재의 양성과 새로운 문화의 정착에 목적을 두고 있어 『농사직설』과 훈민정음 연구에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세종은 비단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와 같이 천부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성 그리고 넓은 덕을 바탕으로 조선 왕조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기틀을 닦아놓은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6대 단종실록
세종의 31년 치세로 문종은 29년 동안 왕세자로 있다가 2년간 재위한 후 아들 홍위, 즉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문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는 홍위를 낳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고 8살 되던 해인 1448년(세종 30)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후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은 자신과 세자 향(문종)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는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혈기왕성한 자신의 둘째 아들 수양을 염려한 것이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12세의 나이로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스무살 이하의 미성년으로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시 궁중에는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왕비도 없었다. 단종의 모후 권씨가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의 후궁으로 두 사람이 있었으며,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을 키운 혜빈 양씨가 있었으나 후궁들은 내사를 돕는 정도이지 정치적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단종은 수렴청정조차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즉위하였다.
단종이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였다. 인사 문제도 조정에서 인사 내정자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단종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모든 정치 권력이 문종의 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받든 황보인, 김종서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세가 이렇게 되자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등의 왕자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자신의 심복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 황보인을 피살하고 조정이 수중에 들어오자 영의정에 올라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이 와중에 단종은 1454년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수양대군이 자신의 심복과 의논하여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그리고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능은 장릉으로 왕릉으로는 예외적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7대 세조실록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다. 그리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반면에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기간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 강화책으로 안정기에 들어서자 세조는 왕도 정치의 기준이 될 법제 마련에 박차를 가하여 왕조 일대의 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또 세조는 민정 안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또한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원’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이 같은 비서실 중심의 측근 정치는 모든 정무를 세조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힘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1468년에 탄생한 것이 원상제였다. 이는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9대 성종실록
예종이 14개월의 짧은 치세를 끝으로 요절하자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 월산군도 있었으니 이는 왕위 세습의 관습에서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정희왕후는 이에 대해 세조의 유명이라고 했지만 설득력이 없었으며 월산군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변명을 했으나 이 또한 근거 없는 얘기였다. 결국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정치적 결탁에 의해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이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13세의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이는 왕권을 안정시키는 길이었다.
정희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임을 알고 예종이 죽던 날 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왕실 세력의 중심인 구성군을 유배시켰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아들로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했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고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이때 구성군의 나이가 불과 28세였다. 그래서 예종이 죽자 그는 위협적인 인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결국 1470년(성종 1)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구성군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은 성종 초의 왕권이 불안정하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이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비록 수렴청정으로 다져진 왕권이었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 같은 성종의 행동으로 왕비 윤씨가 투기하고,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되었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