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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

롤프 하우블 지음 | 에코리브르
시기심

롤프 하우블 지음/이미옥 옮김

에코리브르/2002년 10월/416쪽/16,500원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기심

캐딜락 한 대가 지나가자 한 친구는 “나도 언젠가 저런 차를 몰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친구는 “저 인간도 걸어 다닐 때가 있을걸!”이라고 말했다. 이 유머는 시기심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건설적이다. 반대로 두 번째 방법은 파괴적이다. 이같은 시기심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 번도 남을 시기하지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사람들도 없다. 우리가 이런 성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온갖 형태의 자기애를 감추려는 위선 때문이다.

시기심은 우리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모든 재산을 가질 수 없다는 현실과 씨름하게 만든다. 시기심을 극복하는 길은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포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을까? 다음과 같은 속담은 새겨둘 만하다. “시기하는 사람은 죽지만, 시기심은 대대로 상속될 것이다.”

시기심의 특징과 형태

심리학 입장에서 보면 시기심은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우선, 매우 정열적인 감정에 해당된다. 그 다음으로, 시기심은 하나의 동인이 될 수 있다. 동인이란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다. 끝으로, 시기심은 개인의 특성일 수 있다. 이 경우 시기심은 지속적으로 동인이 되어버린다. 감정, 동인 또는 개인의 특성으로서 시기심이 가진 주된 특징은 적대감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어원에 ‘시기심(neid)'이라는 단어는 중세 독일어에서는 ’nit'였고 고독일어에서는 ‘nid'였다. 이 두 단어 역시 적대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시기심은 공격적인 인간의 감정이자 동인이며 개인의 특징에 속한다.

*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반응하면 시기심에 해당한다.*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화를 내고 분통을 터뜨리며 이 때문에 적대적으로 반응한다면 이것은 시기심에 해당한다.

대개의 경우 시기심에 불타는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간접적으로 달성하곤 한다. 이러한 경우 시기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지닌 다른 물건들을 손상시키는 방법이 선택된다. 이로써 시기심에 사로잡힌 적대감은 여러 유형으로 표출된다. 다음에 그 유형이 있다.

*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면 시기심에 해당한다. 이때 그는 그 재산을 포기할 수 없거나 또는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면 시기심에 해당한다.

*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면 시기심에 해당한다.*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면 시기심에 해당한다. 비록 그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개인적인 장점도 아니며,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개인적인 단점일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회심리적으로 시기심을 극복하는 세 가지 형태는 우울, 야심, 분노가 있다. 이것들은 다양한 시기심의 형태로 언급되는데, 무기력하게 하는 시기심, 고무적인 시기심, 논쟁적인 시기심으로 표현할 수 있다.

* 우울한-무기력하게 하는 시기심은 갈망하는 재산을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에 생긴다. 이런 형태의 시기심을 느끼는 자는, 시기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하며, 자신은 그런 재산을 획득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 재산을 가진 상대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이 금하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격분하게 된다.

* 야심에 찬-고무적인 시기심은 상대에 대해 진정으로 감탄하고 그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또는 그와 경쟁할 때 생긴다. 그는 자신도 갈망하는 그 재산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사회적 규범에도 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그는 분노를 노력으로 대체한다.

* 분노에 찬 -논쟁적인 시기심은 상대가 재산을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을 때 생긴다. 그는 정당성을 내세우며 자신의 분노를 재산의 공평한 분배를 위한 투쟁으로 전환한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시기심은 갈망하는 재산을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적대심을 통해 나타나며, 이는 적대적인-피해를 주는 시기심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유사어: 시기심과 질투

언뜻 보면 시기심과 질투는 거의 가까운 친척처럼 보인다. 일상적으로 독일어에서 이 두 단어는 흔히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언어상의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시기심과 질투는 개념상 서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시기심은 시기하는 사람과 시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라는 두 명의 인물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질투는 삼각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질투의 형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남녀 간의 질투는 질투심에 불타는 남자, 사랑을 받는 여자, 이 여자를 두고 경쟁하는 남자로 구성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소유관계로도 두 개념을 구분할 수 있다. 시기심의 경우 갈망하는 재산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고, 반대로 질투의 경우에는 누군가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질투와 시기심이 동시에 일어나면, 이 둘은 서로를 활활 타오르게 부채질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생기는 적대감은 드라마틱할 수밖에 없다. 질투와 시기심이 서로 뒤엉켜 있는 상태를 뛰어나게 묘사한 문학 작품이 있는데,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603년에 쓴 『오셀로』이다.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기독교적 이상

태곳적부터 기독교 문화는 시기하는 사람을 비난했다. 이들은 기독교의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십계명에서도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으로 경계했다. 이 계명은 시기심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시기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갈망으로부터 적대감이 끊임없이 분출하는 까닭에, 기독교는 시기하는 자의 영혼은 구제받지 못한다고 경고함으로써 시기심을 저지하는 데 온 힘을 쏟은 것이다.

성경에는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 원인이 시기심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악마가 뱀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서 자신의 시기심을 아담과 이브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에 영원히 낙원에 살 수 없는 운명에 처하였다. 즉 악마가 이들에게 신처럼 되고 싶은, 시기심에 가득 찬 욕망을 일깨웠던 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은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이다. 그래서 신은,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알려고 했을 때, 낙원에서 추방하고 죽는 운명을 내림으로써 특권을 방어한다. 그러면 과연 기독교의 신은 인간을 축복하지 않는 것일까? 그 역시 인간과 간격을 유지하려는 시기심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아닐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고대와는 전혀 다르다. 고대의 신들은 오류를 범할 때만 인간적인 특성을 보여주었으나, 기독교의 신은 절대적인 신을 대표한다. 그래서 이 신은 시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의 수많은 학자들은, 신을 시기심이 없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대(大)바실리우스(Basilius der Gross,330~379)는 그의 설교집 『시기심에 관하여』(370년 경)에서 죄인들에게 “타락한 악마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죄인들은 ‘선하고 시기심이 없는 신의 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기독교를 믿었던 중세 시대는 신적인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뚜렷하게 구분 짓지 않았다. 중세에는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인 관계가 바로 신이 원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상으로도 엄격한 신분의 차이가 있는 위계질서가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신분을 지키는 것은 중세의 질서에 있어서는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도덕적인 기본이었다.

카인 콤플렉스: 문명화의 기원으로써 시기심 극복

아담은 이브를 아내로 삼았고, 이브는 카인을 낳았다. 이때 그녀가 "나는 주인님(=신)으로부터 한 남자아이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그후 이브는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아벨이었다. 카인과 아벨은 낙원에서 살던 세대가 낳은 첫 세대이다. 따라서 이들은 역사적인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들과 더불어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는 세계 역사로 시작한다. 그것도 형제 살인으로!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주인님은 아벨이 수확한 제물은 흐뭇하게 바라보지만 카인이 가져온 제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점은, 왜 성경은 신이 아들을 편애하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인이 그 같은 냉대를 받고 동요한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서는 그가 수치심, 분노, 그리고 시기심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인이 냉대를 받을 만큼 나쁜 짓을 했다는 내용이 없기에 우리는 신의 심판을 자의적인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로써 누가, 왜, 어떤 성공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의 성공이 가치가 있는지를 주제로 삼는 게 아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정당하거나, 아니면 부당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인간의 삶에는 늘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를 - 정당성에 관한 문제와는 무관하게 - 존재의 근본적인 상황으로 소개하고 있고, 사람들은 인간성으로 이를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소개할 신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너희가 올바른 행동을 하면, 하늘을 쳐다봐도 되느니라. 만일 너희가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면, 죄는 악마의 모습으로 문에 웅크린 채 숨어 있게 된다. 악마는 너희를 노리지만 너희는 그를 능가해야 할지니!”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성 또는 문명화의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은 실망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카인이 분노를 자제하지 못했던 것처럼 만일 폭력으로 실망에 대응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또는 문명화된 기준을 갖추는 데 소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기심의 표현 형태

생물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감정이란 신경과 흐르몬이 자극을 받아 활성화된 상태를 말한다. 뇌의 특정 부분(변연계: imbic system)이 감정을 담당하고 있다. 이 변연계는 시상하부의 기능도 담당한다. 다시 말해서 감정을 관리한다. 뇌의 특정 부분이 관장하는 기본적인 감정으로는 공포, 분노, 기쁨, 슬픔, 수락, 역겨움, 기대와 놀람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시기심은 없다. 따라서 시기심은 파생된 감정으로 볼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이 배합된 색처럼 공포, 분노와 슬픔 같은 다양한 기본 감정들이 조합되어 나온다.

시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특별한 표현 형태가 있는 것일까? 만일 우리가 누군가 ‘시기심으로 창백해졌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의 혈관이 축소되었다고 간주한다. 그는 자신이 열망하던 재산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인지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기하는 사람들을 창백하다고 간주할 뿐 아니라, ‘시기심으로 노랗게 되었다’ 또는 ‘시기심으로 녹색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색깔은 상태의 심각성을 나타낸다. 고대의 체질학에 따르면, 노란색 혹은 녹색은 담석증을 앓고 있다는 표시였다. 이 학문에 의하면 쓸개는 시기심이 자리잡고 있는 기관이다.

실제로 빨간 혈색소는 노란색과 녹색의 담즙으로 분해 된다. 따라서 쓸개즙이 ‘과다하게‘ 나오는 사람들은 시기심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만일 쓸개즙의 흐름에 장애가 생기면, 쓸개즙은 다시 피로 흘러들어가 피부가 노랗게 보이며, 그로 인해 황달이 생긴다. 그러므로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중독증으로 고생하게 되고, 의학적으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말해, 다른 사람에게도 유독한 것이다.

또한 흔히, 시기하는 사람들은 ‘쌜쭉해 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가로 그은 선처럼 입술이 꼭 다물려 있다. 시기하는 자가 시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인정해주는 말을 하기보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혀를 꼭 깨물고 있는’ 모습이다. 때문에 시기하는 자는 표정이 ‘굳어 있다’라는 말도 듣게 된다.

상대가 시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정에 대해 계속 찾다보면 관상학이라는 분야와 마주치게 된다. 18~19세기에 관상학은 인간학의 한 분과로 상당히 촉망받는 분야였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스위스의 목사이자 의사였던 요한 카스파 라바터(Johann Caspar Lavater, 1741~1801)였다. 관상학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람의 인생은 그의 얼굴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다. 사람은 특정한 감정을 자주 느끼게 되면 이를 표현하는 경우도 많아져서, 그 사람의 얼굴은 이 감정에 상응하는 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관상학이라는 전통을 이어받아 방법론을 개선했다. 1872년 출판된 그의 책 『인간과 동물에 있어서 감정의 표현』에서 그는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은 타고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간의 표정에 관한 전문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아와 성인들의 표정을 직접 비교?연구한 결과 모든 ‘심적인 상태’에 상응하는 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정적인 표정이 있다고 믿었다. 그가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표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시기심이다. 그럼에도 시기하는 표정이 있다면, “눈을 통해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눈길을 통해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사악한 시선

사악한 시선 또는 악의에 찬 시선이 항상 시기심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선을 유발시키는 원인 가운데 가장 흔히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시기심이다. 사악한 시선의 특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스듬하게 쳐다보는 눈길의 방향이다. 로마 시대의 작가 호라즈(Horaz, 기원전 65~기원후 8)는 도시에 비해 시골에서 사는 생활의 장점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곳(시골) 누구도 내 행복을 흘겨보지 않는다.” 물건이 삐딱하게 서 있으면 줄질을 해서 평평하게 만들듯이, 흘겨보는 시선은 줄질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아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시기심으로 가득 찬 시선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봤던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악마와 악마를 도와주는 조력자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악이 가장 선호하는 도구는 여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마녀로 고발당했다. 이들의 사악한 눈길은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손상을 입힌다고 믿었다. 이렇듯 여자들을 적대시하는 편견은 훗날, 마녀 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 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마녀의 사악한 시선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날까지 미신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특이한 눈(사시, 외눈 등)을 가진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육체적?정신적 장애자들은 사악한 시선을 던지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들은 기득권자를 시기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결국 사악한 시선에 대한 두려움 속에는 기득권자의 공포, 즉 특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시에 기득권자들은 그 같은 위험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는 조처도 취했다.

시기심과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마음

오스트리아의 작가 알렉산더 로다 로다(Alexander Roda Roda, 1872~1945)에 의하면, 시기심은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할 기회가 부족한 까닭에 생겨난 분노”라고 한다. 실제로 시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쁨은 바로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기쁨이다. 특히 시기의 대상이 되는 자가 자신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해 피해를 당할 때 그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1788~1860)에 따르면,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마음은 잔인하고, 모든 정의와 인간애의 원천에 등을 돌리는 짓이다. 따라서 시기의 대상이 되는 자가 피해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기쁨은 도덕적으로 평판이 나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불행을 보고 즐거워하는 마음은 가장 대중적인 즐거움인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이 즐거움을 천국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신은 현생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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