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 루시
도널드 요한슨 지음 | 푸른숲
루이스 리키는 1903년에 케냐에서 영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럭비 경기 도중 여러 번 머리를 다쳐 들쭉날쭉 교육받으면서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과 화산 같은 정력을 가진 총명한 젊은이였다. 선교사의 아들은 대개 가난했는데, 루이스 리키는 가장 가난한 아이들 중의 하나였으며, 대학을 다닐 때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 무일푼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아프리카의 선사 시대에 대한 깊은 애착으로 케냐에서 고인류학이나 고고학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다.
그는 한번의 이혼 후 고고학도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메리 니콜과 재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성공회 목사인 아버지와 성직자들과 결혼한 두 여동생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식민지 상류 사회의 완고함을 지니고 있는 나이로비의 상류 사회에서도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루이스의 스캔들은 일상사뿐만 아니라 업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그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호미니드 화석을 두 개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네안데르탈인이나 북경원인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뭔가 특별한 것을 발굴했다고 믿었다. 이렇게 성급한 비약으로 치닫는 것은 그의 기질인데, 자신의 화석이야말로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결론 내리고 다른 것들은 대가 끊겨 현생 인류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비약적인 주장은 곧 깨지고 말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리키 부부가 중요한 화석을 발견한 것은 1959년의 탐사 때였는데, 루이스 리키는 말라리아에 걸려 텐트에 누워 있었으므로 메리 혼자서 탐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메리가 발견한 두개골을 보고 루이스는 실망했다고 한다. 루이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니라 호모를 발견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루이스 리키는 강박 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호모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랄로피테신은 흥미로운 대상이기는 하지만, 사람(호모)이 아니므로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고 리키는 주장하였다. 북경원인과 네안데르탈인도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고 리키는 믿었다.
리키는 그 화석의 이빨이 다른 로부스투스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 화석은 새로운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름을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Zinjanthropus boisei)라고 지었는데 'Zinj'는 동아프리카를 뜻하는 아랍어에서 따온 것이며 '보이세이'는 리키의 연구를 초기에 재정적으로 지원해준 사람인 찰스 보이스(Charles Boise)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나 리키에게 그 두개골은 언제나 '디어 보이(Dear Boy)'이었고, 어금니 때문에 'Nutcracker Man(호두 까는 사람)'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진지(Zinj)'라는 애칭으로 통용되었다. 진지는 그 해에 레오폴드빌에서 열린 4차 선사시대연구 범아프리카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베일을 벗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원시적인 존재가 올두바이 계곡에 흩어져 있는 도구들을 사용했다는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지의 나이를 정확하게 밝혀내는 데 사용된 방법 ―오늘날에는 칼륨아르곤 연대측정법이라 부른다 ―은 지질학과 고인류학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후 올두바이 계곡 바닥의 응회암들에 대해 많은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아주 미소한 오차 범위 안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 실험은 똑같은 결과를 나타냈다. 층위Ⅰ은 약 180만 년 전의 것이었다. 따라서 진지의 나이 역시 약 180만 살인 셈이다. 호미니드 화석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나이가 매겨진 것은 진지가 세계 최초였다.
한편 메리는 현장에서의 삶을 즐겼지만 루이스와 견해 차이가 점점 커졌고, 리키가 순회 강연으로 자리를 자주 비우고, 다른 여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됨에 따라 공동 연구는 지속되지 못했다. 루이스 리키가 이룬 최대의 업적으로 꼽히는 올두바이 계곡을 리키가 말년에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메리는 그 지역을 책임졌으며 마침내 영구이주하여 오늘날까지 그 곳의 연구소 옆에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다.리처드 리키는 깡마른 체격에 조심스러운 성격의 젊은이였다. 자신의 방식대로 하는 고집스러움을 빼고는 아버지의 거친 기질을 전혀 닮지 않았다. 리처드 리키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 인류학을 충분히 접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지긋지긋해 하는 편이어서 대학을 가지 않고 사냥을 하면서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이러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5년에 클라크 하웰, 루이스 리키, 프랑스 발굴 팀이 주축이 되어 에티오피아 오모강의 탐사단이 꾸려졌다. 그런데 루이스는 걷기도 힘들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리처드 리키가 대신 가게 되었다. 1967년에 첫 현장 탐사를 시작한 오모 탐사는 국제적인 협동이 이루어진 최초의 인류학 탐사로 선전되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에티오피아와 가장 관계가 좋은 프랑스 팀이 오모강을 따라 가장 넓은 퇴적층 지역을 할당받았다. 그러나 리처드가 할당받은 곳은 생성 연대가 젊어 관심을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칫 오모 탐사에서 들러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헬리콥터를 타고 남동쪽을 향해 케냐 쪽으로 날아갔다. 투르카나 호수의 동쪽 연안을 따라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퇴적층 지대에 내려보니 플라이오세-홍적세의 지층에 화석들이 널려 있었다. 아마추어인 리처드 리키조차도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헬리콥터 여행은 화석 사냥꾼이 행한 것 중에서 가장 극적인 것이었다. 리처드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팀을 만들어 투르카나 호수를 향해 불쑥 나와 있는 곶인 쿠비포라(Koobi Fora)에 항구적인 캠프를 설치했다. 그가 거기서 몇 년 사이에 발굴한 것들은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서로 다른 네 종의 호미니드우리는 인간이 처음에는 유인원과 비슷한 원시적인 형태에서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점차 유인원을 닮은 모습이 사라지고, 점차 인간답게 변해왔다고 볼 수 있다. 돌연히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그 중간에 유인원과 인간, 어느 쪽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모호한 상태, 즉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모든 종들을 하나로 묶어서 호미니드(Hominid)라고 부른다. 이는 사람과 사람에 가까운 집단을 일컫는 것이다.
나 도널드 요한슨은 호미니드이고 또 인간이다. 나는 호모속(屬) 사피엔스종(種)에 속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도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가 있는 사람)가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을 지하철에 태운다면 아무도 그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 또한 표를 사고 표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지녔다. 네안데르탈인은 이보다 더 복잡한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6만∼10만 년 전에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그러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지하철에서 약간 수상하게 보일 뿐이며 호모 하빌리스는 지하철의 사람들이 다른 칸으로 옮겨갈 것이다. 호모 하빌리스 위로는 인류의 계통이 완전히 사라진다. 아마 그 위에 루시와 같은 무리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이상의 모든 종들은 호미니드이고 모두 직립보행을 했다. 그러나 호미니드의 계통선상에서 초기의 것들은 너무 원시적이어서 인간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며, 루시도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루시는 두개골이 소프트볼보다 그리 크지 않으며 키도 다 자란 것임에도 불구하고 1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다. 루시의 성장은 사랑니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랑니는 완전히 자라 있었고, 수 년간 사용해서 닳은 흔적이 있었으므로 사망 당시 25∼30세로 추정된다. 그리고 척추에 변형이 일어난 것을 보아 그녀는 관절염 또는 다른 뼈 질환을 앓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루시는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뼈에는 어떤 이빨 자국도 없었고 한 곳에 가지런히 모인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 곳은 오래 전에 호숫가이거나 호수의 물이 차 있던 곳이다. 그녀의 주검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천천히 모래와 진흙에 덮여 점점 더 깊이 파묻히게 되었다. 이는 또 계속 쌓이는 퇴적층의 무게에 암석으로 변했고, 루시는 철옹성 같은 이 무덤에서 수 백만 년을 누워 있다가 하다르의 폭우에 의해 다시 땅 위로 노출된 것이다. 내가 루시를 발견한 것은 운이 좋았다. 루시가 표면에 노출된 것이 기껏 1∼2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5년 전이나, 5년 후에 그곳에 갔더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루시의 두개골의 앞부분은 이미 어디론가 씻겨가고 없어서 우리는 루시의 정확한 두뇌 크기를 알 수 없다.
루시가 특별한 이유를 들자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루시는 지금까지 발견된 어느 것과도 다르다. 매우 오래되고 매우 원시적이고 매우 작은 호미니드이다. 우리는 그녀를 호미니드 역사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두 번째는 가장 오래 되면서 가장 완벽한 뼈라는 것이다. 이전에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호미니드의 화석은 파편뿐이기 때문에 7만 5천년 전의 것인 네안데르탈인이 가장 오래된 호미니드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오래 된, 그리고 완전한 모습이 루시인 것이다. 세 번째는 루시가 약 350만 년 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시는 지금까지 발견된 직립보행을 한 인간의 조상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완전하며, 가장 보존이 잘 된 화석이다.오모 탐사대에 떨어져 나와 쿠비포라에서 스스로 탐사를 시작한 다음부터 리처드 리키는 밀림을 배회하던 무명의 젊은이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촉망받는 현장 인류학자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케냐 정부는 그의 연구를 지원해주었으며, 나중에는 케냐 내에서의 모든 고인류학 연구 활동에 대해 책임을 맡도록 했다.
지질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 외에도 리처드 리키는 쿠비포라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조직적인 업적을 세웠다. 그는 케냐의 원주민들을 훈련시켜 뼈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게 했다. 카모야 키메우의 지휘 아래 이들은 쿠비포라 지역에서 발굴된 유명한 화석들 대부분을 발견했다. 키메우는 오늘날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호미니드 화석에 관한 최고의 발굴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1972년에 리처드 리키는 KBS 응회암층 아래에서 보존 상태가 아주 훌륭한 두개골을 발견했다. 그 응회암층은 칼륨-아르곤 연대측정법으로 약 26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으므로, 화석은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생긴 것이다. 이 화석은 KNM-ER 1470이라 이름 붙여졌다.
1470은 리처드 리키가 쿠비포라에서 발견한 가장 극적인 화석이자, 전 세계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호미니드 화석 중 하나이다. 오래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사람에 가깝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화석들은 150만 내지 180만 년 전의 것인데, 두개골의 용량은 평균 640㏄였다. 그렇지만 1470은 두뇌 용량이 775㏄일 뿐만 아니라 어떤 호미니드 화석보다 더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시기도 1백만 년이나 더 앞선 것이다. 최근의 연대측정에 따르면, 1470의 나이는 2백만 년 미만인 것으로 밝혀졌다.
1470을 발견한 해가 1972년이었다는 것은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호모 하빌리스를 하나의 종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루이스의 마지막이자 가장 절실한 기대를 아들의 발견으로 입증하게 되었으며, 루이스는 이 발견을 보고 바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루시를 발견한 나, 도널드 요한슨은 1972년 박사 학위 논문을 끝내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강의를 할 수 있는 자리도 얻지 못했고, 돈도 없었다. 지나친 연구 일정과 현장 탐사로 오랫동안 가정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2년쯤 된 결혼생활은 이미 파경 직전이었다. 그러나 오모에서 만난 프랑스인 모리스 타이에브가 지질학 박사 학위를 위해 아와시강 계곡에서 함께 조사하자는 제의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1972년 4∼5월에 탐사 여행을 위해 타이에브와 함께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로 갔다. 그곳에서 하다르를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하다르는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하다르의 말라붙은 협곡은 모두 지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많은 화석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전 합류한 이브 코팡이 이 퇴적층이 3백만 년 정도 되었다는 확신을 주자 정식으로 탐사대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우리 탐사대의 1차 탐사 시즌은 나이로비에서 열리는 중요한 인류학 회의가 끝난 직후인 1973년 가을에 시작하기로 했다. 그 회의의 스타는 리처드 리키였다. 쿠비포라에서 발견한 화석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 회의에 참석했지만, 아직 화석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별로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리처드 리키가 나에게 다가와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하다르에서 진행할 탐사에 대한 기대를 말해주었다. 그가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거기서 호미니드 화석을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하나요?"
"당신이 발견한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을 발견할 겁니다. 와인 한 병을 내기로 걸죠." 나는 대담하게 말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일을 도와줄 진 돌과 톰 그레이와 함께 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이 첫 해에 나를 골치 아프게 한 것은 국제적 관계가 아니라 화석이었다. 탐사기간의 절반은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 호미니드의 화석은 단 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러한 걱정에 사로잡혀 탐사를 하던 어느 날 오후, 나는 모래 사이에 삐죽 나와 있는 하마의 갈비뼈 같은 것을 무심결에 툭 찼다. 그것은 작은 영장류의 정강이뼈 상단부처럼 보였고, 몇 야드 떨어진 곳에서 대퇴골(넓적다리뼈)하단부를 발견했다. 이들 뼛조각은 모두 같은 크기에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세 개의 뼛조각은 완전하게 들어맞았다. 보기 드문 일치였다.
그것을 살펴보던 나는 원숭이의 정강이뼈와 대퇴골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의 뼈대는 무릎에서 정강이 부분이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는데, 이것은 직립보행을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뼛조각들을 맞추어보았더니 일직선으로는 맞추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이것은 호미니드의 화석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한 달 내내 내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인류학 연구사상 어느 누구도 3백만 년 전의 무릎관절을 본 적은 없었다. 만약 내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면, 이것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나는 이빨이나 턱뼈를 발견하는 것을 기대해 왔다. 아주 운이 좋으면 두개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과학계에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화석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정부와 약속한 탐사에 관한 협정에 따라 국외로 반출할 만큼 중요한 화석은 반출 전에 기자 회견을 거쳐 충분히 설명해야 했다. 만약 무릎관절에 대한 설명을 부정확하게 한다면, 내가 처음 맞이한, 화석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피력하는 기회를 망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무릎관절과 비교하기 위해 톰 그레이와 함께 주변 부족의 공동묘지에서 대퇴골을 가지고 와서 화석과 비교했다. 크기 외에는 모든 것이 똑같았다.
나는 그것을 반출하기 위해 기자 회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부의 유물국 직원들은 매우 오래 된 호미니드의 화석이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었다는 데 흥분했으나, 나는 그들을 설득해 기사는 에티오피아의 신문들에만 실리도록 했다. 다음 날, 나는 나이로비로 날아가 리키 부부에게 무릎관절과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