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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도 자원이라니까

전경수 지음 | 지식마당
사람만 먹고사는 것이 아니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미생물이나 식물 그리고 동물들이 다 나름대로의 밥을 먹고산다. 먹고산다는 것은 에너지의 흐름이고 물질순환의 과정이며, 생물계를 지탱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흐름이 궁극적으로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밥으로 간주된 것이 똥으로 전환되는 과정, 즉 밥과 똥의 연결상황과 그에 관련된 물질순환의 과정에 대해서 깊이 있게 관찰할 필요성을 느낀다.



밥 따로 똥 따로 생각해서는 우리의 삶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쌀'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인도네시아인들은 '삼블'이라고 불리는 밥을 먹는다. 멸치젓국 같은 것으로 맵게 만든 양념을 쌀밥에 비벼서 먹는다. 인도인들이 '커리'라고 불리는 것을 먹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남아시아로부터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주로 먹는 것은 비빔밥인 셈이다. 아마존의 투피카와히브(Tupikawahib) 인디언은 화전(火田)으로 일군 산언덕바지에 '만지오까'를 재배한다. 영어로 '매니억'이라고 불리는 이 구근류는 독성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나, 먹기 위한 처리과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동일한 종류를 베트남인들은 '산'이라고 부르며, 니우에 섬을 포함하는 남태평양 사람들은 '타피오카'라고 부른다. 우리로 치면, 마의 일종인 셈이다. 이런 종류의 구근류들을 세계식량기구(FAO)에서는 아예 식량의 항목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소위 야만인들이나 먹는 것을 "인간"의 식량분류에 포함할 수 없다는 상징적인 의지가 포함된 것이다. 먹는 것조차 서양인들 중심으로 조정되어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위계질서다. 남이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서 간섭하는 무언의 멸시인 것이다. 먹는 것으로 유언의 저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 먹는 것으로 투정하는 것도 볼썽 사납지만, 먹는 것을 탓하는 것은 반인간적이고 반문화적이다. 남이야 무엇을 먹든 간에 간섭할 일은 아닌 것이다.



밥은 궁극적으로 문화의 문제며, 그 논의는 보편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먹는' 대상으로서의 보편적 속성의 이면에는 계급특수적인 또는 지역특수적인 문화특수성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세 끼니를 고기만을 주식으로 먹는다고 해서 다 잘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이누잇(Inuit) 사람들은 아예 끼니라는 개념이 없다. 항상 고기를 먹는 행위와 관련되어 "에스키모"('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명칭)라는 명칭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 반드시 잘 사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밥은 인류와 생물종의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동시에 위계질서의 특수한 상황을 보이는 불평등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무엇을 먹었는지에 관계없이 모두들 똥을 눈다. 똥을 눈다는 현상도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생불학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밥은 계급적으로 불평등한 현상을 보이지만, 최소한 똥누는 일에 있어서는 계급이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밥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좋아한다. 친구에게 "밥 먹으러 가자"고 인사를 한다. "밥 먹었는가?"라는 인사도 한다. 먹지 않았어도 먹었다고 하고, 먹은 체하는 것이 위세경쟁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이게 다 밥 먹는다는 것이 권력관계와 지배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화적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내장을 통과한 밥이 똥으로 변할 즈음에는 모두가 동일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아서 엉덩이 두 쪽의 갈라진 부분을 완벽하게 "까고" 똥을 누고, 어떤 사람들은 의자같은 곳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아서 똥을 눈다.

밥과 똥은 이렇게 원래 하나의 공동체적 틀 속에서 이어진 물질들이다. 사람이 머릿속에서 그린 나쁜 인식이 밥과 똥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제1차 비극이 시작된 셈이다. 이것은 인식론의 대란이다. 더럽게 인식된 똥이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그리고 서양식의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물과 섞이는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이 제2차 비극이다. 생물 물리학상으로 똥은 물과 섞이면 안된다는 상식을 망각한 과학기술과 문명이 저지른 생태적 참극인 셈이다. 똥을 더럽다고 생각하고, 기피한 결과가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버렸다. 똥을 눔에 있어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원초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똥싼다"라는 표현이 "똥눈다"라는 것을 대체하는 삶을 살고 있다. "싼다"의 저질적인 표현이 똥에 달라붙어 있는 한 우리의 삶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가장 원초적이고 평등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저질적인 생각을 하는 한, 우리의 삶으로부터 배신당할 수밖에 없다. "똥눴나?" 또는 "똥누러 갑시다"라는 인사가 점심시간 동료들간에 성사되지는 않더라도, 똥을 밥 이상으로 존중할 줄 아는 풍토가 아쉽다.삼사십년 전에 非다윈적 진화론이라는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 담고 있는 허구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현재의 상태가 가장 온전한 것이라는 진화론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가장 진화된 상태는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눈이 얼굴의 전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뒤에 한 개 있으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적응하기 쉽지 않았겠는가 하는 자못 회화적인 내용이었다. 손가락 끝에 눈이 한 개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하는 식이다. 현재의 상태를 극상으로 보는 즉, 현재의 인간을 정점으로 생각하는 다윈적인 진화론이 담고 있는 논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비다윈적 진화론이 제기하는 차원의 문제 정도가 아니라 진화론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진화론이라는 것이 인류가 둘러쓰고 있는 굴레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인류학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혼자 영어 단어 하나 만들었다. 이른바 흄팬지(humpanzee)다. 인간이라는 human의 앞부분인 hum과 침팬지(chimpanzee)의 뒷부분인 panzee를 결합하여 만든 단어다. 잘못된 학생의 답안지에서 힌트를 얻어서 만든 것이었다. 유인원이라고 써야할 칸에 학생은 유원인이라고 잘못 썼다. 유인원이라는 것은 고릴라나 침팬지 그리고 오랑우탄 등의 원과(pongidae)를 통칭하는 실재하는 단어다. 이에 대해서 사람은 인과(hominidae)에 속한다. 당시에는 그것이 틀렸다고 채점을 하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은 사람인데 원숭이 종류에 가까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만든 말이 흄팬지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은 침팬지다. 생화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DNA 상으로 사람과 침팬지는 1.5%의 차이를 보인다. 고릴라는 사람과 2.1%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람과 침팬지는 98.5%가 동일한 생화학적 구조를 공유하고, 고릴라와 사람은 97.9%가 같다. 그런데, 숫말과 암나귀의 차이도 3%를 넘는다. 호랑이와 사자 사이에도 그렇다. 노새도 생산되고, 라이거도 생산되었다. 유전자상으로 97%밖에 동일하지 않은 두 개체 사이에서 교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흄팬지라는 존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실험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미 흄팬지를 생산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도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진화론과 자본주의를 양대 축으로 해서 성립된 서구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신화로 인하여 마음이 편안한 사람들의 숫자보다도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 신화로 인하여 대다수의 생물종들이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삶을 살고 있다. 그 신화로 인하여 물과 흙과 공기와 생물을 포함하는 생태권 전체가 존립의 위기상황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 인간만물영장론은 궁극적으로 영장인 인간마저도 폐기하는 구도 속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종말론과 진화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치밀한 분석을 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들 간의 관계가 만들어낸 허구를 낱낱이 지적하는 것이 새로운 밀레니엄의 역사를 만들어갈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임무다. 만물 위에 영장으로 군림하는 인간은 필요가 없고, 생태권의 구성요인들과 종들간의 매개 역할을 하는 인간이 필요하다. 그 길만이 사람도 살아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다.인구문제를 주제로 하여 쓰여진 글 또는 토론이 된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고 말한 맬더스(Tomas Malthus, 1766-1834)의 주장이 변호되거나 혹은 내용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맬더스의 견해를 "인구"라는 주제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인구과정의 긍정환류(肯定還流, positive feedback) 성향을 강조한 인구이론이라고 한다면, 매쓔 해일(Mathew Hale 1609-1676)의 추정은 전체 환경에 대한 인구과정의 부정환류(否定還流, negative feedback) 성향을 기초로 한 생태학적 균형 이론에 가까운 것이다. 즉 해일에 의하면, 서기 이천년, 삼천년 또는 사천년에 인구가 엄청나게 성장할 것이고, 그러한 인구성장은 전염병, 기근, 홍수, 전쟁, 열병 등의 억제요인에 의해 자연적으로 조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인구문제를 보는 맬더스의 기본적인 입장과는 다른 해일의 입장은 인구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연적, 사회문화적 환경을 인구문제와 함께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자연주의적인 입장에서 인구증가라는 압력이 농업이라는 형태의 식량생산혁명을 초래한 것인지, 아니면 인과론적인 설명으로서 기후조건이 좋아지고 식량생산에 의한 영양조건의 개선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고고학자, 인류학자, 농업경제학자 그리고 인류학자들에게는 큰 관심거리로 남아있다. 이렇듯 인구와 자연환경과의 관계는 초기인류로부터 현재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느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은 종합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볼 때, 인구증가와 자연보호라는 두 명제의 상호관련성은 인간과 자연이 맺을 수 있는 인연의 점괘들 중 최악의 상태인 것 같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인간번식이 저지른 실수인 "쓰레기"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인간은 자연과 최악의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인구증가가 곧 자연파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다.요즘 사람들은 입만 벌렸다 하면 환경, 환경 한다. 좀 안다는 사람들은 환경문제, 환경문제하고 떠들어댄다. 문제의식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이 없어서야 말이 안되니 유행하는 단어의 뒤편에 '문제'라는 요술방망이 같은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이다. 환경보존의 정신을 함양하고 자연보호를 부르짖기 위한 프로그램의 제작에 수 천 만원씩을 투자하는 텔레비전이 그 프로그램의 방영시간 앞뒤에 위장된 환경상품들을 광고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우린 살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도 다 마찬가지이다. 아이러니라기보다는 총체적 위선과 총체적 혼란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다. 가만히 있는 환경을 이리 꼬드기고 저리 꼬드기고 어르고 뺨치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따라서 환경에 문제가 있다면 사람이 그 문제의 원흉이다. 사실 환경이라는 것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전체를 말한다.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는 공기, 목을 축이게 하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물, 발을 딛고 살 수 있게 하고 식물생장의 원천이 되는 흙, 먹이가 되어주는 식물과 동물들, 이 모든 것들이 환경이다. 그리고 환경을 구성하는 요인들 사이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고 정교하게 돌아가게 하는 원리가 있다. 그 원리가 사실상 우리의 삶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이 원리들이 환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들이라고 이해한다.

-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 사람도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이 환경을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독안에 든 쥐이고, 환경은 독 전체와 그 외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환경을 다 안다고 나선다는 것은 주제넘은 얘기이다. 현재의 과학수준으로는 무리라는 점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과 땅이 아는 차원의 문제인 환경을 감히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실 사람이 제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나 그와 같은 대용물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 이렇듯이 인간이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뭔가 스스로를 비추어볼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이 풀, 동물, 곤충, 바람 등의 자연생태계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파괴 현상으로 인해서 사람이 스스로를 비추어 볼 수 있는 대상을 잃어가고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환상으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이 모든 것을 제일 잘 알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이 나타나면 자연에 맡겨야 한다. 그래야 자연도 살아나고 그 음덕으로 사람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태계는 잘 보여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궤적을 보면 사람이란 종은 결코 홀로 설 수 있는 종이 아니다. 누군가에 의존해서 누군가를 뜯어먹고, 죽어서도 누군가의 밥이 된다.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요인들은 커다란 하나의 먹이사슬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슬에서 떨어져 나가서 홀로 설 수 있는 독불장군은 없다.



- 고이면 썩는다 : 환경을 구성하는 요인들은 먹이사슬을 구성하는 연결고리를 따라서 계속적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물질이 순환하고 에너지가 유동하는 것이 생태계의 철칙이다. 전기가 만들어지면 빛을 내고 곤로를 쓰면 열이 되어서 그 에너지로 밥을 끓여먹게 되고, 이런 식으로 계속 흐르는 것이다. 흐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흐르도록 되어 있는 것을 고이게 하면 썩어버리는게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제 아무리 힘 좋은 권력과 돈이라는 에너지들도 고이면 썩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잘 연습하고 있지 않은가. 그 썩은 자국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고 있지 않은가.



-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 길 가다가 주운 돈은 빨리 써버리라고 들었다. 공짜가 생겼으니 좋다고 안고 있다간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 환경 속에서는 정확하게 공짜라는 것은 없다. 내가 숨쉬는 공기, 이것이 공짜인 것 같은가? 지금 당신이 운전하고 가는 차량은 이 공기를 이용해서 연료를 태우고 그 결과로 배기가스를 뱉어놓았다. 그러니 우리는 배기가스를 마실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감기가 걸리고 약을 사먹어야 하니 숨쉬는 공기를 공짜라고 말할 수는 없다. 환경생태계의 대차대조표는 항상 차변과 대변이 같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어느 쪽에서 덕을 봤다하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손해가 따르게 마련이다. 울산공단의 공업탑에는 "저 푸른 하늘에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를 때 우리는 잘 살게 될 것이다"라는 식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당시는 배가 고파서 앞일에 대한 사려분별이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연기 덕분에 잘 사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병들고 쫓겨난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악영향은 얼마나 더 밝혀질 지는 모를 일이다.



환경에 이상이 발생했다는 증거가 육안으로 감지된다는 것은 환경이 이미 중병을 앓고 있다는 얘기다. 먹이 사슬 속에서 '나만은 괜찮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썩은 물을 마실 조건과 더럽혀진 공기를 마실 조건을 나만은 피할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나'가 요행히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웃 아니면 내 자손이 분명히 '나'의 범주에 속하게 마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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