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조선사
김형광 지음 | 시아출판사
인물로 보는 조선사
김형광 지음
시아출판사/2002년 11월/384쪽/10,000원
1. 새로운 왕조가 서다
새 시대를 꿈꾸며 조선을 설계한 무소불능의 천재 정도전
정도전은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략가이면서도 조선사에 있어서 부정적인 존재로 치부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건국과정에서 수많은 개혁을 주도하고 새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앞장섰지만, 품고 있던 포부를 채 펼치지 못하고 이방원 일파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 후 조선 시대 내내 반역의 원흉으로 매장되고 만다. 그는 모든 방면에 소양이 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천민 지역에서의 귀양생활과 긴 유랑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방향임을 깨닫게 되었다.
정도전은 고려 28대 충혜왕 3년(1342), 경북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한 그는 부친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밑에서 수학했는데,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당시 그와 함께 공부했던 동문들이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명석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 유교 경전과 성리학에 능통했다. 스물(1362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우왕 2년(1375)에 북원에서 명을 협공하자는 사절이 왔는데 이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친원파의 미움을 사 회진현(전라남도 나주 관하의 천민거주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삼각산(서울 북한산의 다른 이름) 아래에 초막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자신의 호를 삼각산의 모양을 본떠 '삼봉(三峰)'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정도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강력히 지원해줄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실세인 이성계의 밑으로 들어가 재기를 모색했다. 위화도 회군 후 구세력과 신진세력이 대결하다 이성계가 잠시 물러나자 정도전도 봉화현으로 유배되고 만다. 이성계 일파는 이방원이 선두에 나서서 구세력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는 등 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정국에 일대 반전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이성계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정도전도 유배지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개혁이 잇달았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다재다능한 식견과 특유의 돌파력을 가진 정도전이 있었는데, 이때가 정도전으로서는 최고의 절정기이자 자신의 경륜을 현실 정치에 펼칠 수 있었던 황금기였다. 제일 먼저 그는 군사력을 확충하고자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로 하여『오행진출기도』『강무도』등의 병서를 지어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하였고, 국가 제도와 운영의 근본이 되는『조선경국전』을 지었는데 이것은 이후 조선의 기본법전인『경국대전』의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고려국사』37권을 편찬하였고, 지방 행정 방법을 기술한『감사요약』을 만들어 지방행정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건국의 기초작업을 이끌었다.
명과의 관계가 표전문 사건으로 악화되자, 정도전은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요동정벌을 건의하게 되었다. 군관뿐 아니라 문관에 이르기까지 중앙 관료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지방에도 군사훈련을 감독할 관리를 파견하고, 진법에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처벌했다. 그러자 그 동안 정도전의 독주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불만이 겉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정도전이 자신들의 힘의 배경인 사병(私兵)을 관군으로 편입시켜 지휘체계를 통일하려고 하자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그 중에서도 이방원의 위기 의식이 가장 컸다. 사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개국의 최대 공로자인 자신을 제쳐두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불만이 많았는데, 그 배경에는 재상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에 대한 경계심과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이것은 결국 제1차 왕자의 난을 불러와 정도전은 이방원 일행에게 살해당했다.
2.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다
왕도정치를 구현한 위대한 임금 세종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으로 이름은 도, 자는 원정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충녕대군으로 봉해졌다. 1418년 6월,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함에 따라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두 달 후 즉위했다. 세종의 업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이 중 상당수는 세종 자신이 직접 관여한 것이다. 세종은 법전과 예제를 정비하여 『경제육전』과『오례의』를 편찬했고, 기존의 악보들을 정리했다.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유학의 기본 서적과 윤리, 농업, 지리, 천문, 음양, 측량, 수학, 약재, 가요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고 간행했다. 관료, 조세, 재정, 형법, 군수, 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하고 고쳤는데,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이외에 도량형, 활자, 화폐, 측우기, 천문도, 혼천의 제작, 역법 연구 등 과학 기술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조선이 건국된 후, 개혁에 대한 갈등과 방황은 태종대에 와서 대략 정리가 되었다. 어수선하던 집권층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며, 국가 제도는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인구는 늘었고 다양한 직업이 생겨났다. 이제 남은 일은 그것을 다듬고 마무리해서 그 열매를 충분히 섭취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태종이 넘겨준 조선 체제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소수 집권층들의 문제 의식이 약화되면서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세대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사회의 위계 질서를 생활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평민들과는 다르게 말이나 가마를 타고 다녔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폐단이 국가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세종은 정계를 개편하거나 체제 자체를 개혁하는 대신, 역사서와 경전을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한 후, 현재 문제가 있는 제도를 세부 사항까지 세밀하게 분석하여 관련 규정을 대폭 보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엄청난 학식과 정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만년은 병마로 인한 음울한 그림자로 덮여 있다. 30대이던 세종 9년부터 한쪽 다리에 풍을 앓았고 종기로 고통 받았다. 또 세종 13년부터 생긴 눈병으로 인해 10년 후에는 어두운 곳에서 걷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때문에 온천과 초정약수 등을 찾아다니며 요양을 했으나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신하들은 장기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세종은 민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두 달 이상은 같은 장소에서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세종은 요양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으며, 여러 가지 합병증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한 책들을 매일 수십 권씩 직접 검토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정력으로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돌보았던 세종은 마침내 제위 33년만인 세종 32년(1450) 2월 영응대군(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의 집 동쪽 별궁에서 사망하였다.
과학혁명을 이끈 천민 출신 천재 과학자 장영실
세종대에 이룬 찬란한 문화적 업적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과학 분야의 발전으로서, 장영실은 그와 같은 발전에 누구보다도 높은 기여를 한 뛰어난 과학자다. 장영실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당대의 엄격한 신분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뜻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세종은 나라가 바로 서려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농업의 발달과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아내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학적 지식을 가능하게 했던 사람이 장영실이다. 그는 조선의 과학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국가 경영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경제 발전과 민생 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1등 공신이었지만, 단 한번의 엄청난 실수 때문에 역사의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하고 만다.
장영실이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 12년(1412)으로 그 즈음에 이미 궁중에서 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대부터 전문 기술자로 활약하던 장영실은 세종 3년(1421)에 천문 기구의 제작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중국에서 돌아오자 세종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상의원 별좌에 그를 임명하여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종 6년(1424)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고쳐서 보완하자 장영실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장영실의 연구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자 세종 14년(1432)부터는 천문 관측 기구 제작을 위한 대규모 사업이 시작되었다. 천문대와 그곳에 필요한 각종 천문 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각종 천문 기구 제작 사업에는 공조참판을 역임한 이천이 실무 책임을 맡아 진행하였으며, 여기에 장영실이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작업에 착수한 지 1년 만에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일종의 천문시계인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고, 장영실은 독자적으로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5년 후인 세종 20년(1438)에는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어 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할 농사일까지 알려 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천문 기구 외에도 각종 실용 기구들을 만들었는데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세종 16년(1434)의 금속활자 갑인자와 세종 22년(1440)의 측우기이다.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정3품인 상호군으로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세종 24년(1442)에 그가 감독하여 제작한 가마를 세종이 사용하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나, 하루아침에 불경죄로 파직되고 만다. 세종은 곤장 100대의 형벌을 80대로 감해주었을 뿐 더 이상 구해 주지 않았으며, 이 사건 이후 장영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천재 과학자는 출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처럼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말년도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그것은 장영실이 워낙 혈통 없는 천민 출신이기도 하겠으나, 파직 이후 곧바로 사망하거나 스스로 완전히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 아니라면 역사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말년의 삶이 무시되어버린 탓이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3. 국난 극복의 시대
붉은 옷의 전설, 홍의장군 곽재우
선조 25년(1592) 4월 14일, 20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포를 침략한 왜군은, 거침없이 북상하며 조선의 국토와 백성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벼슬아치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조선의 온 산야는 백성들의 비명과 통곡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이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붉은 옷의 전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꼭 열흘째 되던 날부터 홍의장군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승전의 포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부귀와 공명을 탐내지도 않았다. “의병은 싸울 뿐이다. 결코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사심없는 그의 충정을 알 수 있다.
곽재우는 명종 7년(1552) 8월, 의주 목사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망우집』에 따르면 곽재우는 타고난 자질과 인품이 호탕하였고 침착하였으며,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보면 안광이 번쩍번쩍 빛나서 감히 마주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곽재우는 어렸을 때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을 배웠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남명의 외손녀와 결혼했다.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곽재우는 학문을 닦고 무예를 익히며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성장했다. 스물한 살 때는 의주 목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가 3년 동안 곁에서 모시는 한편, 틈틈이 군사에 관한 지식과 무술을 연마했다. 곽재우는 그다지 벼슬에 뜻이 없었지만 부모의 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서른네 살 되던 해에 과거를 보아 2등으로 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답안에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는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며칠 뒤에 합격이 무효가 되었다. 이듬해 부친이 별세했는데, 그는 죽기 전에 정3품 당상관의 관복을 곽재우에게 물려주며, “우리 가문을 이을 사람은 너뿐이다.”라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도 곽재우는 벼슬길에 오를 생각은 않고, 시와 술과 낚시로 풍류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곽재우가 불혹이 됐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김해 창원을 점령하고 현풍으로 들어오자 그는 가족을 깊은 산 속으로 피난시킨 후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노의『용사일기』와 이긍익의『연려실기술』등에 따르면, 처음에 곽재우는 집에 데리고 잇던 종 10여 명을 데리고 이불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붉은 관복을 입은 다음, 스스로 하늘에서 내린 붉은 옷의 장수라고 일컬으면서 집 앞 정자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산을 정리하여 곳간을 열고 사람들에게 곡식을 마음대로 퍼가게 하는가 하면, 자신의 옷을 벗어 그들에게 입힐 정도로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 마흔이 넘도록 변변한 벼슬 한 자리도 못하면서, 매일같이 술과 낚시를 즐기며 풍월이나 흥얼거리던 곽재우가 의병을 모은다니, 머슴 열두어 명만이 삽, 곡괭이, 낫, 도끼, 같은 것을 들고 따라 나설 뿐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구나 싶어 곽재우는 평소 눈여겨 봐두었던 지략과 담력을 갖춘 젊은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한 결과, 가까스로 수십 명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의병부대를 만든 지 보름이 채 못된 5월 4일, 임진왜란 개전 이래 첫 승리라 할 수 있는 거름강 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은 작은 전투였지만 승리의 파급효과는 대단히 컸다. 곽재우가 거름강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의 군세는 말 그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2천 명을 헤아리는 대부대가 되었다. 그의 의병 활동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는 정암진 전투에서 유인작전으로 2만 명의 왜군들을 무찌르고 만다. 그 뒤부터 왜군은 홍의장군만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이 나타났다!” 하면서 도망다니기 바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성주 목사 겸 조방장으로 임명된 곽재우는, 일단 의병을 해산시켜 일부는 관군으로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돌아가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는 경상좌 방어사로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적을 맞았다. 전략적으로 우세한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험한 지형에 의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곽재우는 성벽을 구축하고 보강한 다음 장작과 섶을 무더기로 쌓아 성이 함락될 경우 다 함께 불질러 죽기로 결의하고 적을 기다렸다. 그런데 일본 장군은 하루 낮밤을 성 밑에서 동정만 살피다가 승산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냥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
왜란이 끝나고 나서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사양했다는 이유로 영암에서 2년간 귀양살이를 한 곽재우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비슬산 기슭에 망우정을 짓고 은거하며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고 풍류를 즐기는 일에 전념했다. 솔잎으로 끼니를 때우고 책과 거문고, 낚시를 즐기면서, 만년을 풍류와 도술에 몰두하며 보내던 곽재우는, 광해군 9년(1614) 4월 10일, 망우정에서 66세의 일기로 세상과 하직한다. 생전에는 공신 반열에 끼지 못했던 곽재우에게 숙종 35년(1709)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追贈, 죽은 뒤에 나라에서 관직을 높여주는 것)되고 ‘충익(忠翼)'이라는 공신호(功臣號)가 내려졌다.
의술로 치도의 근본을 실천한 의성 허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