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에드워드 베르 지음 | 을유문화사
한편 일본에서는 1944년 1월 천황 제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고노에 왕자와 히가시쿠니 왕자가 패전이 확실시 되어가자 천황제 유지를 협의하기 위해 만났다. 과거 4년 동안의 전쟁에 대해 히로히토가 책임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당시의 내각을 유지하려 했다. 도조(東條英機, 일본의 군국주의자)가 사임하여 내각이 교체되면 도조의 책임은 희석되고 대신 히로히토와 황실의 책임이 무거워지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1944년 6월 15일, 미국의 사이판에 대한 공격이 3주가 넘어가자 황궁에서는 '민간인들도 전사한 군인들의 뒤를 따라 영광스러운 길을 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문은 전달되지 않았지만 그러기 이전에 이미 사이판의 일본 민간인들은 상어가 득실거리는 천길 낭떠러지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 광경에 놀란 미군은 집단 자살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이제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히로히토에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10월에 들어 필리핀군도 재탈환 작전이 시작되었다. 연료 부족 때문에 일본군 조종사들의 훈련 시간은 눈에 띄게 단축되었다. 11월 이후부터 도쿄에서 밤에 불타는 집을 보는 것은 이제 구경거리도 되지 못했다. 주민들은 이럼 밤거리의 불 소동을 '에도의 꽃'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황궁 생활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서예 강습과 중국 문화와 예의 범절에 관한 철학 강좌가 있었고, '전자파 무기(레이더)'에 대한 전문가들의 설명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천황이 폭격 현장을 답사하고, 천황비는 사기를 높이기 위한 조치를 하는 사이사이 이루어졌던 문화 생활이었다. 대신들에게는 천황제도 유지를 위해 히로히토는 교토에 있는 절로 들어가서 중이 되고 아들 아키히토를 천황에 봉하고 섭정 대리인을 세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한편 육군 강경파들은 천황을 보호하기 위해 후지산 근처 '마쓰시로' 지하에 벙커를 짓고 있었다. 심지어 황궁에서 마쓰시로까지 황족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특별 철판으로 제조한 장갑차까지 만들었다.
워싱턴에서는 황궁 폭격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폭격을 주장하는 이들은 천황을 정치 무대에서 제거해야 하며, 전쟁 도발과 필리핀 점령을 응징해야 한다는 미국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자는 이유를 내세웠다. 한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정보국) 전문가들에 따르면 천황의 지하 벙커는 공습을 충분히 견디어낼 수 있고, 천황이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천황제 유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서류는 황궁에서 이미 빼내었기 때문에 황궁 폭격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히로히토가 후에 중요하게 쓰일 것이며, 황궁폭격이 일본인들의 전의만 북돋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본토에 대한 미군 상륙이 다가오자 일본군은 또 다른 비밀 병기의 사용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것은 개발 중이던 원자 폭탄이었다. 1945년 8월 10일, 조선의 흥남 앞바다에서 핵폭탄 실험에 참가했던 일본인 과학자들의 목격담이 있다. 이는 전쟁 말기 일본이 독일에서 우라늄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잘 보여준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캐낸 소량의 우라늄만 보유하고 있었으나 절대량에서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일본이 독일에 부탁을 거듭하자 결국 독일은 3월 25일, U-234에 수은, 최신의 대공포탄, 제트 기관과 로케트의 부품, 폭탄 뇌관 등 새로운 병기들을 비밀리에 싣고 일본으로 보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컨테이너 2개에 들어 있던 우라늄 산화물 1120파운드였다. 원자 폭탄 두 개를 만들 수 있는 용량이었다.
그러나 1945년 5월 2일에 유럽에서 전쟁은 끝났고, U-234호도 5월 10일에 전문을 접수했다. 결국 독일 잠수함은 미국에 항복하게 되었고, 당시에 승선하고 있던 두 명의 일본 잠수함 기술자와 로케트 전문가는 수면제를 먹고 11일에 수장되었다. U-234호는 미국에 넘겨지고 이를 조사하던 미 해군 당국은 배 밑창에 숨겨 두었던 우라늄을 발견하였으나 당시 이 단어는 전문가가 아니면 생소한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이 정보를 듣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재촉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전해진다. U-234호가 일본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은 하였지만 히로히토도 물론 이 정보를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전쟁은 점점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5월에 들어 히틀러가 죽자, 연합군의 모든 병력은 일본 전선을 향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소련은 공식적으로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오키나와는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었고, 연합군의 본토 상륙도 시간 문제였다. 또한 일본의 수백만 명의 국민들은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었다. 전쟁의 승패가 점차 드러나자 천황제가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군부 내에 신속하게 퍼졌다. 그 결과 소련의 간섭이 무조건 항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게 되었다.
일본의 소련 간섭에 대한 바람은 소련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7개월 전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처칠과 루스벨트에게 독일이 항복하는 즉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7월 16일에 트루먼은 뉴멕시코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트루먼과 처칠은 이 사실을 더 이상 소련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 또한 일본이 제안한 내용에 대해서 미국에 말하지 않았다. 단지 스탈린은 소련 육군이 8월 초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에 대해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조건으로 세운 포츠담 선언 이후 트루먼은 약 일주일을 기다렸다. 그래도 도쿄에서 소식이 없자 8월 6일에 히로시마 상공에서 낙하산에 매단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평소 B-29의 공습에 익숙해 있던 히로시마 주민들은 정찰 비행으로 생각하고 대피호로 피하지도 않았다. 첫 번째 원폭 투하 이후 48시간이 지나도록 히로히토는 포츠담 선언을 수용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결국 두 번째 원폭이 8월 9일에 떨어지고 소련군은 만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어서야 세 번째 원폭은 도쿄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최고전쟁지도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의 결과는 일본의 항복이되, 이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이 기소를 당해 가면서까지 천황을 전쟁의 책임에서 보호하려 했던 조치의 첫 단계이다. "일본 정부는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우리는 이 선언문이 국가의 군주로서 천황의 특권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다."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본 국민은 처음 듣는 '학의 목소리(천황의 목소리를 비유한 것)'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천황은 '하늘의 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황실 용어로 연설했기 때문에 연설 후에 평이한 해설이 뒤따랐다. 해설이 끝나고 도쿄의 모습을 기록한 한 글은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는 공허감과 함께 안도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오랜 병석을 털고 일어나는 홀가분함 같은 것이었다,"라고 전했다. 천황의 종전 조서에서 애매 모호한 점이 드러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선언문에는 금기시된 '항복'이란 단어를 역사 교과서에 쓰지 않기 위해서 어떤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패배'라는 단어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는 만약 일본 군부가 미래에 역사를 다시 쓸 기회가 있다면 이 조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항복하지 않고 괌의 정글에서 22년 간 숨어살았던 일본군 병사 요코이 쇼이치의 전기를 썼던 러셀 브랜든도 이 견해에 동감했다. "천황은 무조건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요. 다만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했다거나 전투 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는 언급만 했을 뿐입니다. 천황의 조서에는 승전국의 전쟁 포로들이 항복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단어가 일체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요. 일본군들은 승전국의 포로들에게 집으로 들어가도 좋다고만 말했지요. 때리는 대신 절을 하고, 죽이는 대신 음식을 주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어리둥절한 상태로 보낸 처음 며칠 동안 히로히토의 주 관심사는 곧 닥쳐올 자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었다. 천황직을 박탈해 버리지나 않을까? 연합군이 추방하지나 않을까? 아니면 전범으로 기소하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들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특히 '관련된 조직에 큰 잘못이 발생하였을 때는 최고 책임자가 책임을 진다'는 불문율이 있는 나라에서 천황이 패전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천황직을 유지한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8월 15일 이전부터 기도는 천황이 천황직만 유지하고 있으면 기소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고, 사임 자체는 스스로 범법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천황의 그 이후 행동을 살펴보았을 때 히로히토는 이 점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소련, 네덜란드, 중국은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주장했던 반면, 프랑스는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영국 외무부는 미국무성의 그루나 스팀슨과 같이 히로히토의 미래는 트루먼의 수중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루먼도 명확한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이 여론을 반영하여 히로히토를 체포하고 전범으로서 재판에 회부하자는 합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영국 하원에서는 새로 당선된 노동당 의원(후에 수상이 됨) 제임스 캘러헌이 처녀 발언을 통해 히로히토의 제거를 호소했다. 중국의 장개석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다. 어떤 연합국보다도 일본과의 전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일본군이 직접 폭격까지 했던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친일본적인 자세에 극도로 분노하는 태도를 보였다.
몇몇 워싱턴의 분석가들은 천황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를 처벌하면 다른 전범들이 면죄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무성은 이런 논란에 해답을 내리기 위해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동원된 전문가들 중 일본 문예 권위자인 콜럼비아대학 교수 호머 더브스는 그루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히로히토는 천황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때부터 전해온 3가지 신기인 '칼, 거울, 목걸이'를 미국의 주관 하에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에서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단순히 인공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한편 히로히토와는 다르게 고노에는 맥아더 앞에서 하인처럼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다든지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행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 당시 고노에는 맥아더가 1941년 12월에 자기가 펼쳤던 반전 노력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믿어 같은 편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 사령부 기록에는 고노에가 1937년 중국에 일본군을 파견한 주모자로 분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의 주창자, 파시스트적 일당독재를 정착시킨 장본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노에가 히로히토와 도조에게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던 노력이나 진주만 폭격 직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려고 시도했던 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 직원들은 없었다.
히로히토와 멀어져 버린 고노에는 시골집에서 특이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쟁 중 독일에 머물면서 자기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던 음악가 동생과의 오해를 말끔히 씻고, 가족들 문제와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간단명료한 정치적 성명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12월 15일 새벽, 고노에는 자살했다. 황족들은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관습에 따라 그는 청산가리 캡슐을 씹어 먹었다. 고노에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천황은 물론 올 만한 사람들도 오지 않았고, 심지어 가까운 친척들에게 금족령까지 내렸다. 천황은 자기를 대신한 조문객은 말할 것도 없고 유가족들에게 애도의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시카고 선(Chicago Sun)」의 도쿄 특파원 마크 게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자신이 전범으로 처리될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히로히토는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 가지를 의존했던 고노에에게까지 일체의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의 오해가 두려웠던 것이다." 당시의 믿을 만한 보고서에 의하면 히로히토가 고노에의 자살에 대해 미군 당국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소외되고 무시당했던 고노에와는 다르게 기도는 12월 6일 이후에도 천황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형무소에 가기 5일 전 기도는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천황의 부름을 받았다. 기도는 처음에 자기가 전범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천황에게 누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전한 시종장에게 천황은 "미국인들에게는 기도가 전범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일본을 위해서는 헌신을 한 사람이니 만약 못 오겠다면 음식을 충분히 보내 주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천황과의 만찬을 위해 황궁의 차가 기도의 집에 가서 그를 데리고 왔다. 기도는 더 많은 선물을 받았다. 천황비가 손수 구운 도넛과 큰 테이블을 선물로 주었다.누군가 A급 전범으로 지목되어야 했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731부대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이시이다. 종전 직후 731부대를 조사하기 위해 도쿄에 파견되었던 미 육군 대령 머리 샌더스는 몇 년이 흐른 후에 회고하기를 "도쿄에서 일본군 대령 나이토 료이를 조사했더니 731부대의 조직도표를 보여주었다. 조직의 정점에는 천황이 있었고, 육군성·대본영·육군 의무감실 등 여러 갈래 방계 조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숨어 지내던 이시이가 나이토를 통해 샌더스 대령에게 731부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과학적인 자료를 넘겨줄 테니 대신 면죄부를 달라는 청원을 해왔고, 이 청원은 결국 이루어졌다. 1947년 미국인 과학자 두 명이 일본에 와서 이시이와 다른 관계자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보고서에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미국 내의 연구소들은, 인륜상 인체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도저히 이런 자료들을 구할 수 없다." 맥아더는 약속을 지켰고, 키난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 이시이를 필두로 731부대의 모든 관계자들 전원이 국제전범재판소의 재판정에 단 한 번도 서지 않았다.전후 천황이 보인 행동의 변화나 적응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군복과 하얀 군마는 자취를 감추었고, 일본 국민들은 완전히 새로운 천황을 보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태도에, 어색하지만 친절함까지 보이자 사람들은 천황에게 말을 걸어도 아무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궁내성은 서둘러 황족들의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식탁에 천황비, 왕자들과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천황의 모습이나, 「성조지(星條紙)」를 읽거나 정원에서 꽃에 물을 뿌리는 사진들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너덜너덜하게 해진 실내화를 신고 있는 사진까지 공개되었다.
그러나 냉소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외국 특파원들은 이러한 변화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장술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 전후 도쿄 주재 AP 통신의 특파원 러셀 브라인스 같은 기자들은 충분한 전전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진행되고 있던 여러 가지 사안들이 사실의 왜곡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인스는 히로히토 문제가 언론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미묘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전쟁 기간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익히 알고 있던 도쿄 주재 외국 특파원들은 전후 천황의 은밀한 행동이나 새롭게 펼쳐지는 국면에 대처하기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불신과 혹평으로 대응했다. 「시카고 선」의 마트 게인 기자에게 히로히토는 조그마하고 가련한 사람, 하기 싫은 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