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에드워드 베르 지음 | 을유문화사
1. 열강의 대열히로히토가 태어났던 1901년 당시의 일본은 오랜 기간의 수면 상태에서 벗어나 약 5년 동안의 격변을 치르고 있었다. 어린아이 히로히토는 일본 최초의 지배자인 조부 메이지(明治) 천황의 황궁에서 자랐다. '대약진운동'이 일어났던 것도 메이지 시대였다. 그 이전의 약 270년 동안, 천황은 명목상의 수반에 불과했으며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이며 세습 권력자인 '쇼군(將軍)'들의 포로에 지나지 않았다. 천황들은 당시 '에도(江戶)'라고 불렀던 도쿄(東京)에는 살 수조차 없었고, 종교적인 수도라 할 수 있는 교토(京都)에 살면서 신도주의(神道主義)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을 뿐 실질적인 권력은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1868년 이후 일본은 나폴레옹식의 프랑스와 터키를 흉내낸 근대화 작업을 숨가쁘게 추진했다. 젊은 천황은 에도에 자리를 잡자마자 동쪽의 수도라는 뜻인 도쿄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869년에 들어서는 외국의 야만인들을 추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서양의 기술습득에 나서서 항만, 학교, 철도 등을 운영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고용하였다. 일본인들의 해외 여행 금지도 많이 완화되었고, 근대화 작업에 한층 박차를 가하여 각 지역마다 내무성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지방장관 제도가 설립되기도 했다. 1870년에는 서양 복장이 유행의 물결을 탔으며, 칼을 휴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한 반면, 일본이 성공한 밑바탕에는 부분적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붕괴시킨 일본 지도층의 선견지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1912년 종말을 고한 열세 민족 청조에 대한 불신 때문에 중국정부는 사분오열되어 통일된 형태를 취하지도 못했다. 일본 또한 비슷한 처지에 놓일 운명이었지만 지배계급들이 막부를 전복시킨 뒤 자진해서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줌으로써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천황에 대한 지대한 충성이 없었다면 메이지 천황의 권력은 단명에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일본 또한 은둔국에서 잠을 깬 이후 그렇게 빨리 세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내 지배계급들의 이런 정치적인 결단의 이면에는 또 다른 중국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한편, 중국 영토의 할양을 서방 강대국들만의 잔치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히로히토의 친구들은 언제나 성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국수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만주 전쟁이나 바다에서 전개되었던 전투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고, 가끔 근접 거리에서 천황에게 승전보를 바치던 장군이나 제독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존경심도 키워 나갔다. 또한 전쟁의 후유증이 몰고 온 맹목적 애국주의 기류는 '일본은 불가피하게 특수한 역할을 해야 한다'거나, '우수한 무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고를 키워 주었다.
외부인이 황태자를 교육시키는 것은 황실의 전통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신변 보호상의 문제 때문이었지만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강인함을 함양시키고 주위의 아첨을 떨쳐 버리기 위함이다. 히로히토는 생후 70일만에 생모와 격리되어 은퇴한 제독 가와무라 쓰미요시 백작 집에서 유모에게 양육되었다. 1904년에 백작이 작고했을 때 히로히토는 네 살도 안 되었다. 황태자인 아버지가 살고 있는 아카사카 궁으로 돌아온 히로히토를 반겨준 것은 가족이 아니라 독립 가옥이었다. 그는 조신들과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황족어린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녀야 했다. 이 유치원에서 히로히토가 일생 동안 해양 생물들에게 보인 열정을 가지게 한 쓰지야 마사나오 선생을 만나게 된다. 또한 부모를 대신하여 정신적 지주가 된 노기 원장을 만나서 구부정한 자세와 근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그래서 10세 이후에는 히로히토는 육상, 수영, 골프, 스모에도 익숙해졌고, 겨울철의 냉수욕이 계속되는 육체 훈련과 학문 수련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더불어 노기 원장의 청교도적 절약 정신과 육체적 쾌감을 멀리하는 태도는 히로히토의 평생 습관이 되었다.
2. 2·26폭동1936년 일본의 평화로운 모습 내에는 큰 불안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큰 논란을 야기했던 '천황기관설'에 대한 논쟁은 모든 국수주의자들의 모임이나 비밀결사단체들로 하여금 '붉은 판사, 분홍색 교수'들에 대한 공격을 선도하도록 자극했다. 이런 분명한 목표들 이외에도 국수주의자들과 육군 맹동파들의 분노는 일반적으로 넓게 퍼져 있어서 온건주의 여론을 겨냥하고 있었다. 특히 황궁과 정부 내의 온건파들에 대한 불신은 한층 컸다. 비밀경찰 정보원들이 끝없이 암살 음모에 관한 소식들을 전하자 전반적인 분위기는 암울했다.
폭동의 원인은 사회 정의의 부재와 물밀듯이 다가오는 국수주의 충격만큼이나 큰 빈부간의 격차였다. 그러나 폭동의 시발점은 정치적 암살에서 비롯되었다. 히로히토의 펜싱 교관이었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령이 육군성 건물 내에서 유혈이 낭자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아이자와는 나가타 장군을 히로히토의 육군성 내 첩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나가타 장군은 충동적인 아이자와를 대만으로 전속시킴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결국 이틀 후 아이자와는 황궁 바로 외각에 있던 나가타 장군의 사무실에서 장검으로 나가타 장군을 살해하였다. 1936년 2월 25일 밤, 황궁의 해자(垓子, 성(城) 밖으로 둘러서 판 못)와 가까운 육군 병영에서 젊은 장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자기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만 하면 다수 장교들이 참여하여 '쇼와유신'의 회복을 위해 뜻을 같이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만 되면 천황을 정상으로 하는 군사 정권이 사회 개혁을 실시하여 자본주의자와 재벌들이 지배하는 정치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2·26폭동은 히로히토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부딪히는 대규모 국민적 재난이었다. 그는 자기의 미래는 물론, 잘못하다간 생명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히로히토는 해군성 대신에게 함대를 움직이라고 명령했다. 필요하다면 육군의 쿠데타 세력을 분쇄하는 데에 해군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동 4일째인 29일 아침 히로히토는 반군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오전 8시 계엄 사령부의 지휘관은 확성기를 통해 반군들에게 투항을 종용했다. 탱크들이 쏟아져 나오고 도쿄의 하늘을 낮게 나르는 비행기들은 전단을 살포하고 있었다. 반군들은 조용하게 투항한 뒤 곧바로 형무소로 이관되었다. 그들이 투항한 이유는 재판을 장기간 끌면서 재판 과정에서 재판관들을 설득시키면 예전의 사례들처럼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신성한 쇼와 시대'의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생각했던 히로히토는 가차없이 반란군을 처벌하였고 일본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2·26폭동은 일본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폭동 이후 국내에서의 더 이상의 반란을 봉쇄하는 유일한 길은 호전적인 육군에게 '해외'라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롭게 탄생할 공산국가인 소련과의 중립적인 관계 유지 모색에도 불구하고, 강경 반공주의자들이 공산주의의 위협이 소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점차 공산화되어 가는 중국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3. 남경학살, 그리고 731부대2·26폭동으로 국내의 시선을 해외로 돌리려는 일본 정계는 그 대상으로 중국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진주만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교두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쟁 준비를 가속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은 국내에서 생산하거나, 점령지인 조선이나 만주에서 공급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원자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특히 거대한 해군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석유의 필요성이 매우 절실했다.
1937년 11월부터 12월까지 발생했던 상해에서 남경에 이르는 남쪽 지역에서의 만행은 '남경학살'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10만 명이 넘는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 2만 명의 중국 여성들에 대한 난행, 그리고 전 시가지를 휩쓸었던 약탈은 일본군의 명예를 크게 더럽혔다. 남경에서 대규모로 시작된 일본의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은 언론에는 전혀 공개되지 않았고 군부 성층권이나 내각에서만 '중국에 대한 응징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일본이 공식적으로 표방했던 광범위한 선린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일본은 중국이 장개석을 제거하고, 만주국을 인정하며, 중국 전역에 걸친 일본의 우선적 지위에 관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모든 관계가 순탄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압력을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가장 잔혹한 사건이었던 남경학살이 천황도 모르는 사이에 발생했다가 마무리되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대본영, 외무성, 육군성이 천황에게 이 참상을 감추려고 아무리 애썼다고 해도(물론 그런 확증을 찾기도 어렵지만) 천황이 남경학살에 대한 아무런 보고서도 읽어보지 않았다거나, 중국에서 군을 지휘하기 위해 떠났던 아사카 왕자가 예상외로 빨리 돌아온 데 대해 아무런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남경학살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1937년 11월 히로히토는 왕궁 내에 자기만을 위한 전쟁 상황실을 설치했다. 모든 전투 상황을 꼼꼼히 챙겨 보기 위해 공들여 만들었으며 정치인들은 물론 심지어 수상까지도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모든 군사 정보가 빠짐없이 천황의 최신판 오락실인 이 전쟁 상황실로 전달되었고, 남경학살은 1938년 1월과 2월 내내 일본군 참모들과 외교관들의 주요 화제거리였다.
중일전쟁은 화학무기와 생물무기가 대규모로 사용되었던 첫 번째 시험장이었다. 일본은 이런 형태의 무기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던 국가이기도 하다. 히로히토가 히로타 수상에게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의회의 승인을 받으라고 독촉했던 1936년도 거대한 규모의 국방 예산 속에는 그 해 천황의 문장이 새겨진 명령서에 의해 설립된 생소한 이름의 '전염병 수질 정화 부대'에 대한 예산도 배정되어 있었다. '731부대'의 기능에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 많았다. 각 야전사단에 파견된 부대원들은 실제로 수질 정화 작업을 하여 일본군들에게 식수를 제공했으나 이러한 임무는 지엽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임무는 일본의 중견 군사 전략가들이 주장했듯이 모든 전쟁을 일본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한 생물학 전술의 개발에 있었다. 이러한 전술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자료의 수집이 불가결한 요소였는데, 이는 곡물·동물·인간에 대한 실험을 뜻했다. 때를 맞추어 731부대가 필요로 했던 실험실과 연구실이 싱가포르, 랑군, 남경까지 자리를 잡았고, 필수 요원들은 일본의 유명한 민간인 과학자들, 초빙된 전문가들 아니면 1936년 이후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 유능한 인력으로 충원되었다.
731부대는 타고난 과학자인 이시이 시로 장군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그는 북만주 하얼빈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핑파오(平房)에 주둔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3천 명의 과학자·실험실 연구원과 경비병들이 병영에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청결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부대와 구별하기 어렵지만 거대한 실험용 용기에는 발진티푸스, 탄저병, 파상풍, 식중독을 일으키는 살모넬라균이 숙성되고 있었다. 이 실험의 인간 모르모트는 전쟁 포로, 범죄자, 걸인, 스파이 혐의자 등등으로 '마루타(丸太 : 포로를 이용한 인체 실험 도구)'로 불렸다. 731부대 창시자인 이시이의 걱정은 박테리아 무기들의 '효과적인 수송'이었다. 결국 병원균을 가진 쥐를 이용하게 되었고 1936년부터 시작된 중일전쟁 기간 동안 병원균에 감염된 쥐를 공중 살포하는 공습이 다반사로 이루어져 끝내 장개석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내각에까지 이런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731부대의 활동 상황은 도쿄 신주쿠의 육군 병원 의사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 병원에는 수백 구의 '절인 인간 표본'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일본이 항복한 직후 미 점령군이 진주하기 전에 전부 폐기하였다. 더불어 전후에 큰 병원을 소유하고, 연구소나 대학에서 일하게 된 이시이 장군을 위시한 731부대의 중견 간부들이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고, 3만 개에 달하는 국제전범재판소의 파일들이 731부대에 대해서는 간략한 언급만 함으로써 여러 가지 반론을 위축시키려 했던 분위기는 참으로 궁금증을 더하게 하는 괴이한 일이다.
'731부대'라고 알려진 이 조직의 병사들은 천황의 칙령에 의해서 창설된 유일한 부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의회도 731부대에 배정된 대규모 예산의 자세한 용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 731부대 이야기는 일본의 전쟁 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면을 장식할 것이다. 더불어 이 부대는 뒤에서도 언급되겠지만 전범들에 대한 도쿄재판을 날조극으로 만들었음은 물론 맥아더 장군에게도 지울 수 없는 불명예를 남김으로써 미국 역사에도 똑같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4. 진주만 기습2·26폭동, 1937년 이후 약 7년 동안 일본은 강경 우익 군국주의자들이 일본을 휩쓸게 되었다. 따라서 '핫코 이치우('세계는 한 지붕'이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천황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신도주의적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힘과 영향력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킨 슬로건이 되었다. 1940년 9월 27일, 이탈리아, 독일, 일본간에 '추축국 동맹'이 탄생하면서 전쟁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유럽의 지배체계가 붕괴되어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가 독일과 이탈리아로 넘어가자 일본도 아시아에 대한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1년 천황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고 전쟁의 돌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7월 29일 중국 해남도의 전함들에서 발진한 해군 비행 편대들이 인도차이나 남부에 세워진 새로운 기지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일본은 예상하지 못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일본의 1급 암호 해독법을 알게 되어 일본이 평화를 운운하지만 실제로 7월 2일 어전회의 결과에 따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태평양 함대의 야마모토 제독은 '니다카 산을 오르라. 1208'이란 전신문을 받았다. '도쿄 시간으로 12월 8일 새벽 진주만을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더불어서 함대 항해 도중 이동을 목격하는 선박들은 일본을 비롯, 국적을 불문하고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스파이들은 미 해군들이 주말이면 대부분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알아냈다. 토요일 저녁 술에 만취되어 일요일 오전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을 선포한 이 순간에도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천황에게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동인도제도 사람들을 달래 주기 위해 그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줄 것을 개인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서양 세력의 아시아 간섭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전문을 빨리 전송하기 위해 암호부호도 간략하게 하여 워싱턴을 떠났으나 같은 시각, 일본 시간으로 12월 6일 오전 6시 30분에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에는 14항으로 구성된 일본 전신문이 도착하였다.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후에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진주만 폭격이 있기 최소한 30분 전에 워싱턴이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했다고 하나 사실은 진주만 폭격이 끝난 다음에 전달되었다. 일본은 소수 외교관만이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으며 또 영문으로 전환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다.) 마침내 10시 30분에 일본의 선전포고가 미국측에 전달되었다. 이 시간 이후 일본군이 미군기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마셜 장군은 샌프란시스코, 필리핀 파나마 운하에 있는 미군 기지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나 일기 불순으로 인해 하와이 기지에는 경계령이 전달되지 못했다.
5. 그림자 없는 지휘관, 히로히토진주만 전쟁은 1942년 6월 미드웨이(Midway) 해전을 정점으로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닫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진주만 전쟁은 일본군의 작전 실패와 미군 암호 해독 전문가들이 일본 함대의 행선지와 편대 구성을 사전에 파악한 데 기인하여 야마모토의 태평양 함대는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가 큰 역할을 하였으나 이 폭격기가 아무런 손상 없이 미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자 미국에서는 이보다 더 발전된 '헬캣(Hellcat)'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태평양 함대의 함장인 야마모토는 기도를 통해서 히로히토에게 상황이 점차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게임의 끝을 보지 못하고 전투 중에 유명을 달리했다. 야마모토는 손수 기른 해군의 엘리트 조종사들이 전쟁의 포연 속으로 사라져 가자 깊은 슬픔에 잠겨 차라리 죽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야마모토가 남긴 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