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의 길
안정효 지음 | 들녘
정복의 길
안정효 지음
들녘/2002년 9월/335쪽/12,000원
사극의 유형
사극(historic film)이라는 개념은 역사와 연극의 결합체로서, 역사적인 시대와 사실에는 비교적 충실하면서 인물 설정은 흔히 낭만적 상상력에 의존한 고유 분야이다. 문학에서는 대표적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그러하며, 우리 나라 영화에서는 궁중 사극이 여기에 해당한다.
환상은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해서, 영화를 보고 얻은 환상을 실천으로 옮긴 ‘왕’ 때문에 역사가 생겨나고 그 역사가 영화로 기록된 예도 있다. 1956년 <백조>에서 알렉산드라 역을 맡은 그레이스 켈리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는 결국 그녀와 결혼한 모나코의 레이니 대공을 놓고 당시 사람들은 신데렐라 얘기가 현실로 이루어졌다며 전 세계가 떠들썩했고, 결혼식은 프랑스에서 기록영화(The Wedding in Monaco)로 제작되어 우리 나라에서는 <세기의 왕비>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걸리기도 했다. 훗날 다이아나 황태자비의 결혼식만큼이나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했던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은 나중에 어느 기록영화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몰락해 가는 도박 왕국 모나코의 경제난 해결을 위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사건’을 만들려는 계산과 복선의 정략이 배경에 깔렸었다고 하는데, 역시 환상과 현실에는 거리가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서사극(epic picture)
사극의 원조는 그냥 ‘사극’이라고 하면 저절로 머리에 떠오르는 서사극이 주류이다. 흔히 ‘스펙터클’이라는 영어 단어를 동원하여 선전하던 대부분의 사극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성격상으로 구조는 서사시의 형태를 취하고, 주인공은 보통 위대한 인물이나 호걸로서 사랑도 열렬히 한다. 대표적 서사극으로는 <벤허>, 세실 B. 드밀과 D.W 그리피트의 대작들,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리고 MGM 대형 사극(epics)을 꼽는다.
서사시적 작품으로는 ‘뮌히하우젠 남작’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가 좋은 표본이다. 이 영화들은 러시아, 터키, 베네치아 등지를 휩쓸고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공주들이나 황후들과 뮌히하우젠이 사랑을 나눈다는 현실 도피적 내용이다. 뮌히하우젠 모험기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물론이요, 주인공이 얼음 섬(Island of Ice)같은 온갖 환상적인 곳을 돌아다니며,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이어진 다리나 물고기 여인(Fish-woman) 같은 다양하고 희한한 구경거리도 접하게 해주어서 책과 영화로 수많은 서양인들의 상상을 자극해 왔다.
운명의 여인들
춘희(椿姬)의 춘(春)은 단순한 봄이 아니라 나무 목(木) 변이 붙어서 동백(椿)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춘희(椿姬)는 이미자의 노래에 등장하는 ‘동백 아가씨’와 같은 이름이다. 『춘희』는 뒤마의 작품으로 애인은 많아도 참된 사랑에 굶주린 창녀의 고독, 또는 ‘소속감 없는 자유가 주는 외로움’이나 ‘댄서의 순정’이 주제이다. 『춘희』를 가극으로 만든 작품이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이고, 미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전설적인 프랑스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1880~82)의 순회 공연을 통해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1937년 서월영, 맹만식, 복혜숙 등이 중심으로 조직된 극단 중앙무대가 공연했다. 제목까지도 한국적인 <여자의 일생>은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좋지도 않고, 또 그처럼 나쁘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관객이 화가 날 정도로 무기력한 여주인공 잔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끝없이 손해만 보면서 시달리는 19세기의 여성의 삶이 동양이나 서양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1962년 제작되어 동남아에 수출까지 되었으며, 6년 후 신필림에서 다시 영화로 만들어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재차 동남아에 수출되기도 했다.
검열의 잣대
마치 군사독재 박정희 정권을 위한 국가홍보용 영상극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정도였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1962년에 발표한 이만희 감독은 그가 만든 영화 <7인의 여포로>가 “적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만희 감독은 풀려 나온 후 작품의 많은 부분을 수정하고 삭제하여 <돌아온 여군>이란 제목으로 바꿔 상영하였다. 고문을 당하고 나와서 그 작품을 수정 촬영해야 했던 영화감독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상상이 된다.
하지만 검열이 한국에서만 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유분방한 나라라고 여겨지던 미국도 검열의 경직성은 대단한 정도였다. 미국의 검열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큰 화젯거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일 듯 싶다. 레드 버틀러가 싫증난 스카렛 오하라에게 “솔직히 얘기해서, 나 이젠 관심 없어(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버린다. 이 말에 나오는 단어 ’damn'이 문제였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나(swear) 욕하지(swear) 말라, 그러니까 하느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종교적인 계명으로 인해서, 본디 ‘저주하다’라는 종교적인 표현을 단순히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damn)가 영화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검열 당국의 고집에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니크는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살리겠다’며 소송을 제기해 2년 만에 승소하여 그 단어를 살려내기까지 하였다.
메이 웨스트와 셜리 템플의 닮은 점
‘성을 상징하는 원조 여배우‘였던 메이 웨스트(Mae West, 1892~1980)는 가슴을 깊이 판 옷 따위로 몸을 노출하여 남성 관객의 눈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메이 웨스트는 귀를 자극하는 재능이 비상한 여자였다. 키가 6피트 7인치라는 청년에게는 “6피트는 잊어버리고 우리 그 7인치에 대해서나 얘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거나,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녀에게 십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인사를 하자 “나 오늘은 좀 피곤하니까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은 집으로 가야겠다”고 했다는 메이 웨스트는 실제로 보여 주는 대신 혀로만 자극하는 명수였던 셈이다. 하지만 <난 천사가 아니에요>와 <나쁜 짓을 한 여자>가 빛을 본 다음 해인 1934년, 검열이 실시되어 웨스트의 이런 농염한 대사는 화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종합예술을 종교의 잣대로 가늠하여 이렇게 메이 웨스트의 입을 막아 버린 검열 제도는 언론 쪽에서 상당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1930년대에 과잉 노출로 가위질을 당한 첫 희생자 가운데 하나는 셜리 템플이 여섯 살 때 주연한 <곱슬머리 아가씨>였다. 이 영화는 깜찍한 셜리 템플이 온갖 재롱을 부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가족용 오락물이다. 하지만 셜리가 훌라춤을 추는 장면이 문제가 되어 삭제를 당하고 말았다. 아직 가슴이 전혀 자라지 않은 셜리였지만 상반신이 나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 여인 잔혹사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여성 학대의 당위성이 훨씬 인습화되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벙어리 3년,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의 시집살이가 전통이 되었다. ‘한 많은 인생’은 아마도 한국 영화에서 가장 자주 다루어진 주제라고 여겨진다. 이상현 각본, 신상옥 감독의 <이조 여인 잔혹사>는 “여필종부, 출가외인, 궁중비색 등의 봉건적인 인습에 얽매어 희생되어 간 조선 여인들의 모습을 엮은 토막물”이라는 작품 소개에서 보듯이 여권주의 논문의 표제 비슷한 제목에 걸맞게 과거 우리의 사고방식을 요약식으로 공부하는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
설화(또는 전설)를 다룬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는 성 착취의 대상인 기생뿐 아니라 남성 위주의 인습을 섬기는 사회 구조의 희생자도 자주 선을 보였다. 신분의 차이 때문에 머슴과의 사랑을 숨겨야 하고, 남성인 홀아비와는 달리 여성인 과부는 수절하고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인습에 얽혀 자식을 자식이라 부르지 못하는 ‘과부(황순원 원작으로 2년 후 <열녀문>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영화로 만들어짐)’의 경우가 그렇다.
‘꽃영화’의 존재 이유
“십 년 수도한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벽계수를 시조 한 수로 도취시켰다”던 황진이의 이야기는 가히 여성에 의한 남성의 정복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도 곰곰이 따져보면 ‘남자만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제법 남자를 정복할 줄 안다’는 식의 시각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황진이의 이야기는 남성 쪽에서 여자에게 허락한 만큼만의 정복일 따름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자웅을 갖추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면서 여성을 주인이 아닌 대상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자칫 기생영화에서 재현하는 여성상이 오도된 기준 노릇을 하기가 쉽다. ‘꽃영화’라는 명칭이 잘 어울릴 듯한 화류계 영화가 바로 그런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 영화에는 기생이 큰 몫을 차지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황진이였다. 대표적인 영화는 당대의 육감적인 배우 도금봉이 주연을 맡았던 전기물 <황진이(1957)>가 있고 몇 년 후 윤봉춘 감독의 <황진이의 일생>이란 영화가 있었다. 그 후 정진우가 감독하고 김지미, 김진규가 주연한 작품이 나왔고, 1980년대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랑‘으로 고뇌하는 기생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힘으로는 어려워도 글쓰는 솜씨만은 기녀들도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상대적인 신분 상승을 용납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남존여비의 남성적 오만함이다. 기녀들에게 글과 소리를 배우게 했던 까닭은 분명 남자와 같이 자리를 하게 함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하를 가리는 ’같은 자리‘였다. 결국 그들의 ’예술‘은 역시 성적인 희롱의 대상을 남성의 마음에 들도록 좀 더 가꾸기 위한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김승호 풍속화
한국 영화에서 기생의 여성상처럼 두드러지게 유형화된 가장 대표적인 남성상은 김승호라는 배우의 존재 그 자체이다. 김승호가 출현한 많은 영화는 훌륭한 시대극 노릇을 한다. 산업화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인 1960~61년에 등장한 김승호의 영화들은 전환기 한국인의 생활 및 사고방식을 입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1961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8회 아태영화제에서 김승호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김영수 원작, 조남사 각색의 <박 서방>에서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
헐렁한 적삼에 흰 고무신을 신고 박 서방이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는 첫 장면에서 눈에 띄는 엿장수, 아이스께끼, 금붕어 장수, 골목에 노출된 하수도, 복덕방 영감의 시원한 잠방이, 강변에 꽃이 핀 한남동의 ‘시골’ 풍경, 부르주아 계층으로부터 고급 가구로 대접받았던 등나무 의자, 마루에 걸터앉아 대야에다 발씻기 아니면 ‘목간값’ 아끼려고 마당에서 목물하기, 미루나무가 늘어선 경인가도, ‘원효로요, 원효로!’ 남자 차장이 호객하던 소형 버스 합승, 널빤지 울타리와 문짝에 달린 설렁줄의 딸랑이 종, 젓가락 두드리는 막걸리 집의 주전자와 사발, 짚으로 묶어서 들고 가는 고등어 등 화면에 가득한 이런 삽화는 요즈음 영화에서 아무리 열심히 고증을 하더라도 김승호가 나오는 풍경화처럼 사실적이지 못하다. 한 시대의 초상 역할을 했던 김승호(1918~1968)는 동양극장 전속 청춘좌에 입단한 1935년부터 25년 동안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에 영화를 시작하여 <지게꾼>, <인생차압>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하여 고달픈 서민들의 삶과 애환들을 푸근하게 대변했다.
프랑스의 고달픈 사람들
작가 빅또르 위고(1802~1885)는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문학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자유, 평등, 인도주의(박애)라는 지극히 프랑스적인 정신으로 19세기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활동한 국민적 작가이다. 이 작가의 삶이 폭넓게 녹아 들어간 작품이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레 미제라블』로서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평생을 망친 사람‘의 본보기 노릇을 하는 장 발장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다룬 소설이다. 소설과 영화를 통해 유명해져서 흥미가 퇴색해 버렸어야 할 장 발장의 이야기는 훔친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으로 시작되어 19년으로 불어난 옥살이와 미리엘 주교의 촛대, 그리고 전과자의 힘겨운 개과천선 과정을 거치며 꼬제뜨를 구원하는 정의의 사도로 앞세워져 극적인 소구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뜨 크리스또 백작』못지 않게 장대한 역사적 사건과 다양한 등장인물을 구사하는 『레 미제라블』은 인도주의 사상이 눈부신 대작이며, 박진감 넘치는 워털루 전투 장면 그리고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구출하기 위해 장 발장이 빠리의 하수구로 도망치는 장면이 가장 압권이다. 특히 하수구 속에서의 추격전은 그래험 그린과 캐롤 리드가 만들어낸 걸작 <제3의 사나이>와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를 위시한 여러 영화에서 오랜 세월동안 재활용되었고, 얼마 전부터는 빠리 하수도의 장 발장 도피로가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기까지 했다. 『레 미제라블』은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32편이나 되는 ‘공인’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61년에 <쟌 발쟌>이라는 제목에 김승호 주연으로 한국에서 만든 조긍하 감독 및 각색 작품은 그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돈 후안과 ‘형제’들
‘여자를 정복한다’는 표현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이지만 역사란 워낙 많은 착오의 연속과 반복이기 때문에 확인 차원에서 잠시 덮어두기로 한다. 돈 후안(Don Juan)은 14세기 경 에스파냐의 방탕한 귀족의 이름으로 전설적인 호색한이다. 훗날 프랑스의 발몽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을 유혹하고도 전혀 뉘우침이 없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오만한 인물인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며,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유렵의 여성관과는 배치된 사라센 이교 문명에서 유래한 인물상이다.
돈 후안의 전설은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전해져 몰리에르의 희곡 「동 후앙, 또는 석객」이 되는데 여기에서는 레비르라는 등장인물과 결혼까지 했다가 레비르를 버리는 대목도 나온다. 몰리에르 시대의 호색한들을 희화화한 이 작품은 나중에 비에르 꼬르네이유의 동생 또마가 시극으로 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메리메, 두마 뻬르, 뮈세, 발작크, 프로베르도 돈 후안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다루었고, 러시아의 뿌시킨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화려한 역사(이력)을 자랑하는 돈 후안은 결국 호쾌한 검객의 모습으로 1926년 할리우드 영화에서 첫 선을 보인다. 명우 배리모어가 주연한 이 무성영화는 최초의 음성방식(Vitaphine) 실험작으로 유명하다. 1979년 조세프 로지가 만든 <돈 조반니>는 가장 정교한 돈 후안 영화로 알려졌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작품이 늘 그렇듯이 돈 후안의 주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석 방법이 다채롭게 달라졌다.
라 만차의 돈 끼호테
쎄르반테스(Saavedra Miguel de Cervantes, 1547~1616)가 썼다는 『기발한 시골 선비 돈 끼호테』는 세계적으로 가장 여러 번 영상화된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이지만 지금까지 선보인 어떤 영화도 원작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까닭은 아마도 문학적인 천재성을 대사만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화상을 보는 집단 관객을 대상으로 영상화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고, 수십 시간이 걸릴 이야기를 두세 시간으로 집약하는 제한의 부담일 듯 싶다.
꽁뀌스따도르
새뮤얼 셀라바거(Samuel Shellabargar)의 소설이 원작인 <정복의 길>은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지 26년 된 1518년 무렵이 시대 배경이다. 부모가 독재자인 총독 디에고 드 실바의 모함 때문에 이단으로 몰리고 여동생이 고문을 당하다 죽은 다음, 감옥에서 탈출한 주인공 빼드로가 쫓기는 몸으로 결국 꼬르떼즈의 원정군에 합류하여 공을 세운다는 줄거리다. 당대 오락영화계를 풍미했던 헨리 킹과 타이론 파워의 이름에 걸맞게 <정복의 길>은 대표적인 검객 활극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정작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빼드로가 아니라 멕시코 정복에 나선 에르난 꼬르떼즈(Hernan Cortez, 1485~1547)이다. 에스파냐뿐 아니라 유럽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분명히 정복자(conquistador)였다. 그러나 아즈텍의 황제 몬테주마와 그 백성들에게는 단순히 ‘인도(India)'의 황금을 빼앗으러 군대를 끌고 온 약탈자요, 학살자일 따름이었다. 아직까지도 제국주의의 시각을 전통으로 삼아온 할리우드에서 1940년대의 영화에서 ’정복자의 영광‘이라는 낭만적인 미화작업에 대해서 수정주의적인 양심과 소극적인 자아비판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정복의 환상은 히틀러 주의가 무너진 패전 후의 신독일 영화에서 지극히 독창적이고 집요한 베르너 헤르초크의 시각에 입각해서 진지한 해부를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