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그 역사와 현재
다테야마 료지 지음 | 가람기획
분쟁의 '질적인 전환'과 유합적인 접근은, 구체적으로는 니카라과와 캄보디아의 분쟁해결의 과정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물론, 니카라과와 캄보디아의 경우 해결의 제1단계로서 선거가 실현된 배경에 냉전의 종식이라는 국제 환경의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같은 시대적인 변화를 이용해가면서 당사자 또는 중개자가 분쟁해결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구축하는 것이 평화실현을 향한 첫걸음이 된다. 또, 이스라엘과 PLO의 상호승인과 잠정자치의 개시는 아랍과 이스라엘간 대립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평화조약에 조인하고, 이스라엘과 그 밖의 아랍국들의 사이에서도 각종의 협력관계를 낳고 있다. 이러한 변화 또한 분쟁의 '질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쟁을 정의와 권력에 관한 것으로부터 조정 가능한 이해대립으로 전환하고, 상호 이익 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기도 하고, 다른 시각을 시사하는 것이야말로 제3자가 행해야 할 분쟁해결을 위한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시작된 평화로의 기회를 보다 공정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현실에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1994년 10월 26일 아카바 만에서 이스라엘, 요르단의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요르단은 이집트에 이어 이스라엘과 공식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은 두 번째의 아랍 국가가 되었다. PLO를 포함하면 세 번째로, '늦은 평화'를 목표로 해온 후세인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경제개발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평화는 요르단에 급속한 '평화에 따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밝은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르단 내에서는 '이스라엘 경제에 종속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상존한다.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이슬람 원리주의가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두고 갈등을 겪어왔다. 시리아는 친 서방주의를 표명하고 PLO와 요르단이 평화로 발을 내디딘 만큼 그 흐름을 역류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또한 시리아와의 평화 없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다른 아랍국가와 관계를 정상화할 수는 없다. 여러 교섭이 진행되고 있어서 결국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되지만 양국 사이에는 레바논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레바논은 정말로 15년 이상에 걸친 내전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일까? 1920년 프랑스는 마운트 레바논과 남부 레바논, 베카(알비카) 고원을 합쳐 '대 레바논'으로 하고 시리아에서 분리하여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것이 현재의 레바논이다. 레바논은 종파에 따른 인구비에 따라 정부와 의회의 권한, 지위를 배분하는 '종파제도'라는 독특한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 다양화에 대응하는 자유로운 사회를 낳았고, 1970년대 중반까지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른 인구비의 변화는 필연적인 갈등을 낳았고 1975년 마침내 내전으로 비화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이해가 얽혀져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어 '중동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레바논의 재건을 기대하는 소리가 강하나, 그 한편으로 국내 각파와 시리아 및 이스라엘이라는 두 지역 대국의 속셈이 여전히 소용돌이치고 있는 실정이다. '레바논 문제'에는 중동평화 과정의 복잡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아랍권은 다양한 접촉을 통하여 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있다. 모로코와 튀니지가 이스라엘과 영사관계를 맺는가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페르시안 걸프 6개국 협력회의(GCC)는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을 해제하기도 했으며 라빈은 오만을 갑자기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평화 정착 노력이 진행된다 해도 예루살렘 문제를 포함한 근본적 해결 없이는 이슬람교도의 이스라엘 거부 분위기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도 아랍국들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 한, 진정한 화해는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이스라엘, PLO간의 잠정자치합의의 내용이 명확해지자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반대 시위가 빈발했다. 난민 문제에 관해, PLO는 귀환권과 귀환권을 행사하지 않는 자는 잃어버린 재산에 보상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한편, 이스라엘은 귀환권을 인정하지 않고 수용국으로의 동화를 주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랍 난민에게는 어떤 선택이 가능할 것인가? 하나는, 최종적 지위가 어떠하든 서안·가자로 이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대인의 이스라엘로의 이민은 자유롭고 이스라엘 정부는 '귀환'을 장려하고 있지만 서안·가자의 아랍인 인구증대를 위협으로 간주하여 아랍인의 이민을 제한하는 부당한 방침을 구사할 것은 뻔한 일이다. 다른 가능성은 수용국에 그대로 남는 것인데, 레바논 정부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정주하는 것에 절대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쨌든, 팔레스타인 난민이 내거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은 자결권을 포함한 정치적 권리를 서안·가자에서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난민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귀환권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
정착지 문제가 평화교섭의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쌍방간 정신적, 감정적인 문제에 기인한다. 토지를 빼앗긴 아랍인이 볼 때, 정착지는 시오니즘의 영토확장 주의의 구현이기 때문에 타협은 용납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 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가자의 정착지 전부를 철거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한편, 이스라엘에겐 정착지는 대 이스라엘주의와 메시아주의 등과 관계되어 있다.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하는 명령을 거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병사는 정착민을 철거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할 것이다'라는 말에서 그들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대칭성의 관점에서 정착지 문제에 접근하려는 미국의 중동학자 레시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랍측이 유대인 정착촌을 인정하는 대신에, 이스라엘측도 이스라엘 국내에서 아랍인들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는 균형거래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일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1993년 1월에 발족한 클린턴 정권이 워싱턴에서 교섭을 재개할 즈음, 하마스의 존재에 놀란 이스라엘과 PLO는 오슬로에서 비밀교섭을 시작했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라빈 정권이나 아라파트 지도부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라빈 정권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득세를 견제하여야 했고, PLO 지도부 역시 주도권에 위협이 되는 하마스 등의 평화반대파의 세력을 차단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심각한 재정난도 한몫을 했다. 1993년 9월 13일 백악관 정원에 마련된 회의장에서 이스라엘과 PLO는 '잠정 자치에 관한 제원칙 선언'에 조인했다. 이스라엘 건국으로부터 45년, PLO의 발족으로부터 29년 만에 상호 승인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적대적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잠정자치는 크게 3단계로 나뉘어 있다. 제1단계는 가자와 예리코에서 우선 자치를 실시하는 것이다. 제2단계는 예리코 이외의 서안지구에도 자치를 확대하고, 서안·가자의 아랍 주민 전원이 자치정부의 관할 하에 들어간다. 아랍인에 의한 선거가 실시되고, 자치평의회가 선출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제3단계는 5년간으로 되어있는 자치기간 종료 후 서안·가자의 최종적인 지위를 결정하기 위한 교섭으로 '늦어도 3년째가 시작되기 이전'에 교섭을 개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치수준이지만 아랍인이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스스로를 통치하는 선행자치는 '초미니 팔레스타인 자치'로 시작된 셈이다.평화를 향한 힘겨운 여정이스라엘의 변화아랍, 이스라엘 대립의 변용잠정자치의 과제팔레스타인 경제의 행방방치된 문제공존의 틀을 만들기 위해1896년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유대국가』라는 저서를 통하여, 참된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그의 의견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유대인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재건하려 하는 것은 신의 의사에 반하는 모독행위라는 종교적 열성파 유대인의 비난에 직면했다. 그러나 헤르츨은 유대 민족주의 그룹을 규합하여 스위스의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회의를 개최했다.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민족을 위한 공적인 법으로 보증된 향토의 창설을 목적으로 한다'고 서술한 '바젤 강령'이 채택되었고 비로소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근대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약속의 땅'에 돌아온 유대인은 16만에 불과했다. 이는 세계 각지의 유대인 인구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다. 그것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건 시오니즘 운동의 한계였다. 1930년대 후반 대량 이주가 실행되지만 그것도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미증유의 비극이 계기가 된 것이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중 같은 시기에 아랍 문제에 관한 세 가지의 서로 모순된 조약을 체결했다. 그 첫째가 프랑스는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 중부와 남부 및 요르단,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을 각각의 세력권에 둔다고 프랑스와 체결한 '상크스-피코 비밀 조약'이다. 둘째는, 메카의 태수 후세인에게 전후 동부 아랍 지방에 아랍의 독립왕국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이른바 '후세인-맥마흔 왕복서한'이고, 셋째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 수립을 지지한다는 시오니스트들과 맺은 '벨푸어 선언'이다. 딜레마에 빠진 영국은 프랑스와 협상하는 한편,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와 타협하기에 이른다. 팔레스타인의 동쪽 반은 1921년 트란스요르단 수장국이 되고, 압둘라는 초대 수장에 올라 이듬해 정식으로 영국의 위임 통치령인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경계는 이렇게 확정되었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이고 과거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었기에 현재까지도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1920년대 말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불만이 표출된 '통곡의 벽' 충돌은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에서 3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발생시켰고, 그 후로도 잦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쳐서 '아랍의 대봉기'라고 불리는 격심한 반시오니즘 운동이 펼쳐졌는데 이를 계기로 대립은 되돌리기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홀로코스트가 남긴 상처는 구미에서 시오니즘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홀로코스트는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문제라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시각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시오니즘에 격렬히 저항하게 하고 끊임없는 충돌을 야기시켰다. 결국 영국은 UN에 팔레스타인을 맡긴다는 선언을 하고 경영을 포기하였다. UN은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나라로 분리하고, 예루살렘을 UN 관리 하에 둔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된 1948년 5월 14일 UN 결의를 근거로 신생 이스라엘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아랍권은 물론 반대했다. 시오니즘의 승리였고 아랍권의 패배였다. 그로부터 41년 후인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1947 UN 결의에 기초해 팔레스타인 국가 독립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분할이라는 쓰디쓴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무려 4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새로운 국가의 탄생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여 시리아, 레바논, 트란스요르단, 이집트, 이라크 각 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듬해인 1949년 이스라엘의 우세 속에서 휴전협정이 진행되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지역이 3분의 2가 넘었다. 이웃으로 피난한 아랍인이 귀환하지 못한 채 이스라엘 국가 탄생의 폭풍 속에서 난민이 되고 말았다. 이미 230만 명을 넘어선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스라엘령으로 되어 있는 그들의 고향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스에즈 운하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한 영, 불 양국은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국유화 조치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스라엘 역시 가자지구에서 빈발하는 나세르의 게릴라 공격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랍 단결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나세르에 대한 영, 프, 이스라엘의 혐오가 '나세르 타도'를 목표로 공동작전을 실행케 했다. 1956년 10월 29일 발발한 스에즈 전쟁(제2차 중동전쟁)의 동기였다. 중동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소련과 소련의 영향력을 우려한 미국의 이해가 묘하게 일치한 것은 전쟁을 의도대로 이끌던 영, 프에게 강한 압력이 되었다. 2개월 후 양국은 이집트에서 철수했고, 다음해 3월 이스라엘 군도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했다. 이 전쟁으로 영, 프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고, 미국과 소련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세르는 아랍과 제3세계의 새로운 리더로 떠오르며 민족주의, 반식민지주의를 AA(아시아, 아프리카)연대의 슬로건으로 삼아 영향력을 펼쳐나갔다. 그 영향으로 1962년 알제리가 피투성이 끝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격변하는 주변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지로 흩어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차츰 민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각성과 함께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리더가 시오니즘에 얼마나 무력했는지 비판하고, 주변 아랍국이 '형제'라고 부르는 자신들을 실제로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성찰했다. 해방을 목표로 1950년대 말 PLO집행위원회 의장 야시르 아라파트가 진두 지휘하는 최대조직 파타(Fatah)가 결성되었다. 파타는 1964년 군사조직 '앗시화'를 결성, 1964년 12월말 이스라엘에 대한 첫 번째 게릴라 공격을 행했다.
아랍, 이스라엘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1967년 나세르는 홍해와 아카바 만을 잇는 티란 해협을 봉쇄했다.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조치였다. 이스라엘은 즉각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해 선제 공격을 개시했다. 3일 후 요르단이 정전을 수락했고 마침내 6일째 되던 날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 골란고원과 이집트령 시나이 반도,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여 마침내 팔레스타인 전역이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지배 지역은 개전 6일만에 4배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유대교 성지인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의 탈환은 승리의 의미를 더했다. 정전 성립 3일 후 이스라엘 수상 에슈콜은 "1주일 전의 상태로 이스라엘이 돌아갈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며 철수할 생각이 없음을 명백히 했다. 이스라엘 노동당이 현재까지 견지하고 있는 정책의 기초는 이미 그 때 그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4차 중동전쟁은 개전 17일째 되는 날 UN안보리의 결의가 채택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어느 쪽도 승리한 전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불패'의 신화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에 의하여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비록 전장에서의 전쟁은 끝났지만 석유시장을 무대로 한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OPEC(아랍 석유수출국기구) 10개국은 이스라엘 원조국인 미국과 네덜란드에 전면적 수출금지를 결정했다. 석유무기화 전략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서방은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아랍 산유국이 발동한 석유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이스라엘은 거의 고립되었지만 경제개발에 따른 나쁜 여파도 만만치 않았다. 방대한 오일 머니는 중동 여러 국가에게 군비 확충 경쟁을 초래해 중동은 국제 병기산업의 큰 시장이 되었다.
1977년 11월 19일 이스라엘 벤 구리온 공항에 사다트의 전용기가 착륙했다. 제4차 중동전쟁의 '대승리'를 발판 삼아 사다트는 중동평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사다트는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연설에서 장벽을 없애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한 평화 정착에는 실패하고 양국 간의 단독평화에 만족해야 했다. 사다트와 베긴의 견해차이는 상존했다. 이러한 정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