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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그 역사와 현재

다테야마 료지 지음 | 가람기획
팔레스타인 문제의 발생



1896년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유대국가』라는 저서를 통하여, 참된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그의 의견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유대인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재건하려 하는 것은 신의 의사에 반하는 모독행위라는 종교적 열성파 유대인의 비난에 직면했다. 그러나 헤르츨은 유대 민족주의 그룹을 규합하여 스위스의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회의를 개최했다.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민족을 위한 공적인 법으로 보증된 향토의 창설을 목적으로 한다'고 서술한 '바젤 강령'이 채택되었고 비로소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근대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약속의 땅'에 돌아온 유대인은 16만에 불과했다. 이는 세계 각지의 유대인 인구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다. 그것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건 시오니즘 운동의 한계였다. 1930년대 후반 대량 이주가 실행되지만 그것도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미증유의 비극이 계기가 된 것이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중 같은 시기에 아랍 문제에 관한 세 가지의 서로 모순된 조약을 체결했다. 그 첫째가 프랑스는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 중부와 남부 및 요르단,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을 각각의 세력권에 둔다고 프랑스와 체결한 '상크스-피코 비밀 조약'이다. 둘째는, 메카의 태수 후세인에게 전후 동부 아랍 지방에 아랍의 독립왕국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이른바 '후세인-맥마흔 왕복서한'이고, 셋째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 수립을 지지한다는 시오니스트들과 맺은 '벨푸어 선언'이다. 딜레마에 빠진 영국은 프랑스와 협상하는 한편,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와 타협하기에 이른다. 팔레스타인의 동쪽 반은 1921년 트란스요르단 수장국이 되고, 압둘라는 초대 수장에 올라 이듬해 정식으로 영국의 위임 통치령인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경계는 이렇게 확정되었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이고 과거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었기에 현재까지도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1920년대 말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불만이 표출된 '통곡의 벽' 충돌은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에서 3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발생시켰고, 그 후로도 잦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쳐서 '아랍의 대봉기'라고 불리는 격심한 반시오니즘 운동이 펼쳐졌는데 이를 계기로 대립은 되돌리기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홀로코스트가 남긴 상처는 구미에서 시오니즘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홀로코스트는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문제라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시각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시오니즘에 격렬히 저항하게 하고 끊임없는 충돌을 야기시켰다. 결국 영국은 UN에 팔레스타인을 맡긴다는 선언을 하고 경영을 포기하였다. UN은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나라로 분리하고, 예루살렘을 UN 관리 하에 둔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된 1948년 5월 14일 UN 결의를 근거로 신생 이스라엘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아랍권은 물론 반대했다. 시오니즘의 승리였고 아랍권의 패배였다. 그로부터 41년 후인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1947 UN 결의에 기초해 팔레스타인 국가 독립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분할이라는 쓰디쓴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무려 4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고조



새로운 국가의 탄생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여 시리아, 레바논, 트란스요르단, 이집트, 이라크 각 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듬해인 1949년 이스라엘의 우세 속에서 휴전협정이 진행되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지역이 3분의 2가 넘었다. 이웃으로 피난한 아랍인이 귀환하지 못한 채 이스라엘 국가 탄생의 폭풍 속에서 난민이 되고 말았다. 이미 230만 명을 넘어선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스라엘령으로 되어 있는 그들의 고향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스에즈 운하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한 영, 불 양국은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국유화 조치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스라엘 역시 가자지구에서 빈발하는 나세르의 게릴라 공격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랍 단결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나세르에 대한 영, 프, 이스라엘의 혐오가 '나세르 타도'를 목표로 공동작전을 실행케 했다. 1956년 10월 29일 발발한 스에즈 전쟁(제2차 중동전쟁)의 동기였다. 중동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소련과 소련의 영향력을 우려한 미국의 이해가 묘하게 일치한 것은 전쟁을 의도대로 이끌던 영, 프에게 강한 압력이 되었다. 2개월 후 양국은 이집트에서 철수했고, 다음해 3월 이스라엘 군도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했다. 이 전쟁으로 영, 프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고, 미국과 소련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세르는 아랍과 제3세계의 새로운 리더로 떠오르며 민족주의, 반식민지주의를 AA(아시아, 아프리카)연대의 슬로건으로 삼아 영향력을 펼쳐나갔다. 그 영향으로 1962년 알제리가 피투성이 끝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격변하는 주변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지로 흩어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차츰 민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각성과 함께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리더가 시오니즘에 얼마나 무력했는지 비판하고, 주변 아랍국이 '형제'라고 부르는 자신들을 실제로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성찰했다. 해방을 목표로 1950년대 말 PLO집행위원회 의장 야시르 아라파트가 진두 지휘하는 최대조직 파타(Fatah)가 결성되었다. 파타는 1964년 군사조직 '앗시화'를 결성, 1964년 12월말 이스라엘에 대한 첫 번째 게릴라 공격을 행했다.

아랍, 이스라엘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1967년 나세르는 홍해와 아카바 만을 잇는 티란 해협을 봉쇄했다.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조치였다. 이스라엘은 즉각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해 선제 공격을 개시했다. 3일 후 요르단이 정전을 수락했고 마침내 6일째 되던 날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 골란고원과 이집트령 시나이 반도,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여 마침내 팔레스타인 전역이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지배 지역은 개전 6일만에 4배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유대교 성지인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의 탈환은 승리의 의미를 더했다. 정전 성립 3일 후 이스라엘 수상 에슈콜은 "1주일 전의 상태로 이스라엘이 돌아갈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며 철수할 생각이 없음을 명백히 했다. 이스라엘 노동당이 현재까지 견지하고 있는 정책의 기초는 이미 그 때 그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머나먼 평화로의 길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4차 중동전쟁은 개전 17일째 되는 날 UN안보리의 결의가 채택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어느 쪽도 승리한 전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불패'의 신화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에 의하여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비록 전장에서의 전쟁은 끝났지만 석유시장을 무대로 한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OPEC(아랍 석유수출국기구) 10개국은 이스라엘 원조국인 미국과 네덜란드에 전면적 수출금지를 결정했다. 석유무기화 전략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서방은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아랍 산유국이 발동한 석유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이스라엘은 거의 고립되었지만 경제개발에 따른 나쁜 여파도 만만치 않았다. 방대한 오일 머니는 중동 여러 국가에게 군비 확충 경쟁을 초래해 중동은 국제 병기산업의 큰 시장이 되었다.

1977년 11월 19일 이스라엘 벤 구리온 공항에 사다트의 전용기가 착륙했다. 제4차 중동전쟁의 '대승리'를 발판 삼아 사다트는 중동평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사다트는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연설에서 장벽을 없애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한 평화 정착에는 실패하고 양국 간의 단독평화에 만족해야 했다. 사다트와 베긴의 견해차이는 상존했다. 이러한 정체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카터가 중재를 시작했고 캠프데이비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합의 성립을 제1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애매한 점도 많고, 베긴의 주장에 근접한 결과가 되어 실효성이 없었다.

캠프데이비드 합의 예정기한보다 3개월 늦게 백악관에서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이집트 사이의 전쟁 상태는 마침표를 찍었다. 아랍의 국가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회복했다. 그러나 아랍권은 반발했다. '배신자' 이집트는 여러 아랍 지역기구에서 제명당하고 단번에 '아랍의 고아'가 되어버렸다. 1981년 10월 6일 평화조약이 난관에 부딪혀 흐지부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다트는 열병 도중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날은 사다트가 최대의 공적이라고 자인한 제4차 중동전쟁 개전 기념일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베긴과 샤론은 레바논에서 PLO의 세력을 궤멸시키고 친 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 주영 이스라엘 대사가 저격당한 사건을 빌미로 레바논에 주둔하고 있던 시리아군을 공격하여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PLO는 타격을 받고 아라파트 의장은 튀니지로 철수했다. 이때 레이건은 '새로운 출발'이란 신중동평화안을 발표했다. 대부분 캠프데이비드 합의를 답습한 것에 불과했다. 다만, '예루살렘은 영구히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이스라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은 점이 다를 뿐이었다. 아랍과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했다. 레이건 발표 9일 후 '페스 제안'이 아랍 수뇌부에 의해 채택되었으나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보류되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의 최대 피해자는 물론 팔레스타인 난민과 레바논 국민 자신이다. 지금 레바논에서는 종교 각파가 대화보다는 무력으로 대립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 제국의 대립, 아랍 제국 간의 알력이 레바논에서의 힘의 대립으로 반영되는 구조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베긴과 샤론의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레바논에서의 비극적 역사를 더욱 더 진행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두 차례의 전쟁이 끝나고 - 냉전의 종언과 걸프전쟁



이스라엘로 향한 새로운 이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오림 하시딤'이라고 하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계 속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재결집하게 한다'라는 시오니즘의 정신과 직접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유대인의 출국제한이 풀린 것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 때문이었다. 그로 인하여 수 년간 이스라엘은 2할 가까운 인구가 증가했다. 방대한 이민을 흡수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자 '우리는(제3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했던) 영토를 계속 확보해야 한다'고 이츠하크 샤미르 수상은 주장했다. 곧이어 예루살렘을 포함한 점령지 내의 정착촌에서 유대인 주택건설이 활발해졌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불안이 가중되었고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점령지는 혼란에 빠졌다. UN긴급안보리가 아라파트와 협상안을 제시했지만 이스라엘의 반발에 동조한 미국의 거부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87년 말 가자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를 계기로 아랍인의 주민봉기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또 다시 문제해결을 바라는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미국 국무장관 베이커와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PLO의 대화를 중재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거부로 중단되었다. 미국이 아라파트 의장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고, 안보리에서는 이스라엘의 의견대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이스라엘 편에 서자 아랍측의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 개발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하여 저지되었다는 예측이 급부상했다. 이스라엘과 이라크의 긴장이 지속되었다. 유대인 이민 문제와 아랍 측의 통일적인 대응책을 검토하기 위한 긴급 아랍 수뇌회의가 바그다드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결론은 없었다. 그 대신 '이스라엘에 대응하여 대량파괴 무기를 사용하겠다'는 후세인의 강경 연설이 행해졌고,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의 영웅' 사담 후세인의 이미지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PLO와 요르단이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비공식회의에서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OPEC 할당량 이상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전쟁을 암시했다. 1990년 8월 2일 날이 샐 무렵, 쿠웨이트는 침공을 받았고 엿새 후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걸프의 위기가 진행되자 서안·가자의 정세도 긴박해졌다. 아랍 군중과 이스라엘 경찰이 충돌해 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테러 사건이 빈발했다. 걸프 위기와 팔레스타인 문제는 확실히 연계되고 있었다.

걸프 위기, 전쟁은 냉전의 종언과 병행하여 발생했기 때문에 중동의 정치상황에 큰 충격을 주었다. 팔레스타인의 문제해결의 필요성은 인식되었지만 이라크에 기울었던 PLO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저하되었다. 게다가 아랍은 크게 분열하였다. '아랍의 단결'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은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

마드리드 평화회의



이슬람과 유대 양 사회의 발자취가 지금도 짙게 남아있는 기독교 국가인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1991년 분쟁 당사자가 얼굴을 맞대었다. "문제는 토지가 아니다.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샤미르 수상은 '팔리어(따돌림을 다하는 사람)국가'로 취급되는 것에 분노를 표했다. 아랍 대표 압둘 샤피는 아랍인은 몇 세대에 걸쳐 팔레스타인에 살아왔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며 존재가 부정되었다고 시오니즘의 부조리를 규탄했다. 이렇듯 중동 문제의 역사는 서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역사이다. 그러나 걸프 전쟁은 새롭게 팔레스타인 문제의 중요성을 분명히 했다. 그 결과 마드리드 평화회의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었다.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측의 네 당사자들(팔레스타인 아랍,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은 워싱턴으로 무대를 옮겨 거의 2개월에 한 번 꼴로 직접 교섭했다. 그러나 아랍측과 이스라엘과 미국이 마련한 조건들로 뒤엉켜 교섭은 그것에 구속되어 있었다.

진전이 없던 평화교섭에 더욱 통탄할 만한 문제가 발생했다. 한 명의 이스라엘 병사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415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남레바논으로 추방당한 사건이다. 이스라엘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이슬람 지하드 성전'에서 활동하던 단원이었다. UN안보리는 이스라엘의 조치를 비난하고 귀환요구 결의를 채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거부했다. 라빈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 특히 하마스의 진출에 강한 위기감을 느껴 그 활동기반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라빈의 목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든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싶다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심리가 경제의 악화와 평화교섭이 난관에 이르렀다는 현실적 움직임으로 촉발되어, 하마스 등의 지지기반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세계의 매스컴은 연일 눈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레바논의 난민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서안·가자의 팔레스타인 사회에서도 난민 동포에 대한 지지가 고조되었다. 아라파트와 지도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스라엘과 평화교섭을 해야 하지만, 추방 문제에 눈을 감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관 돌파 - 이스라엘, PLO 합의



1993년 1월에 발족한 클린턴 정권이 워싱턴에서 교섭을 재개할 즈음, 하마스의 존재에 놀란 이스라엘과 PLO는 오슬로에서 비밀교섭을 시작했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라빈 정권이나 아라파트 지도부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라빈 정권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득세를 견제하여야 했고, PLO 지도부 역시 주도권에 위협이 되는 하마스 등의 평화반대파의 세력을 차단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심각한 재정난도 한몫을 했다. 1993년 9월 13일 백악관 정원에 마련된 회의장에서 이스라엘과 PLO는 '잠정 자치에 관한 제원칙 선언'에 조인했다. 이스라엘 건국으로부터 45년, PLO의 발족으로부터 29년 만에 상호 승인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적대적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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