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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혼 사마천

천퉁성 지음 | 이끌리오
역사의 혼 사마천

천퉁성 지음/김은희․이주노 옮김

이끌리오/2002년 10월/475쪽/16,000원



1. 용문에서 밭 갈며 공부하다

한나라 무제(武帝) 건원(建元) 5년(기원전 136년). 사마담(司馬談)은 본래 수도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지금은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는데 조정 관원의 휴가 관례에 따라 고향 집이 있는 한원(韓原)에 돌아와 머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조상은 일찍이 주나라 시절에 사관을 역임하였는데 사마담의 가장 큰 소망은 끊겨 있는 사관의 가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다. 󰡐공자가 『춘추』를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날렸듯 나도 공자처럼 한 권의 역사서를 써서 천고에 명성을 길이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불현듯 스친 이 생각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면서 자라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사마담은 이웃 마을의 아이들과 편을 나누어 싸움을 하고 있던 자신의 아들, 어린아이이긴 해도 눈썹 사이에 영특한 기상이 어려 있는 사마천(司馬遷)을 집으로 데려와 꾸짖으며, 대대로 뛰어난 인물을 배출한 사마씨의 내력과 사마천이 오제(五帝)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천관(天官), 즉 사관(史官) 집안의 후손임을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난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사관이 되기로 하였다.

이후 사마천은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쉬운 내용에서 어려운 내용으로 차근차근 『논어』, 『맹자』, 『초한춘추』, 『춘추좌씨전』, 『예기』등을 읽어나갔다. 민간에서 구할 수 없거나 혹 떨어져나가 완전하지 못한 책의 경우에는 사마담이 태사령이란 직책을 이용하여 황실의 서가에서 빌려와서 읽기도 했다. 주문(한자의 옛 자체의 하나)과 금문(今文:한나라 때에 간소화된 문자인 예서로 쓰인 책)도 익히게 됨에 따라 어떤 판본이든 모두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동안 이렇게 공부하자 젊은 학자로서 사마천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사마천이 읽은 책들은 그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고대 영웅의 신기한 세계를 보여 주었다. 또한 만년에 기이한 공로를 세운 전설적인 영웅인 강태공, 서로 양보하여 천고에 이름을 남긴 백이와 숙제, 춘추 시기에 널리 알려진 관포의 사귐과 안자의 도량 등 역사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면모의 인물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는 한 세대 한 세대의 뜻있는 선비의 피땀으로 얼룩져 있으며, 이 영웅들의 발자취가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데 모여 빛나는 역사의 물줄기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마천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무제가 자신의 능묘를 쌓게 한 무향(무릉현)으로 집을 옮겼다. 무제의 이러한 결정 이후 무릉은 장안 부근의 번화한 도시로 변모하였는데 무릉이 수도 부근에 있었으므로 수도에는 박학다식한 석학들이 매우 많았다. 사마담은 의식적으로 아들에게 이 학술의 대가들을 추천하고 이들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갖게 해 주려고 애썼다.



2. 스무 살, 길을 떠나다

올해는 원삭 3년(기원전 126년). 사마천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10년간 책을 읽으면서 사마천이 부딪힌 최대의 문제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던 지리 환경과 풍속이었는데 몇몇 문제는 사마담이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현지 조사를 시켜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고 드디어 원삭 2년 4월 사마천은 굴원이 물에 빠져 죽은 원상 지역을 시작으로 현지 조사를 떠났다.

사마천은 원상에서 굴원을 잘 아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한 노인을 만나 굴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굴대부는 젊은 나이였음에도 능력이 출중하여 금방 초나라 회왕의 눈에 들어 좌도라는 높은 관리가 되었으나 이를 시기한 주위 신하들의 간교로 한직으로 쫓겨나 결국 원상 일대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도 굴대부는 변함없는 충절을 가지고 있으면서 초나라 왕이 마음을 바로잡고 자신을 다시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초나라가 나날이 쇠락하는 것을 보고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사마천은 이와 같은 내용의 노인의 이야기를 꼭 글로 남겨 후세 사람에게 알리고 굴원의 빛나는 정신이 청사에 길이 전해지도록 하겠노라 다짐하였다.

그 해 가을, 사마천은 회음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초나라와 한나라가 패권을 다툴 때 이름을 날렸던 명장 회음후(淮陰候:한신)의 고향이자 그가 봉읍으로 하사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한신의 집에서 주방장을 지냈다는 한 주점의 주인으로부터 한신이 출세하기 전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던 빈곤한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공을 배우던 회음후가 보검을 차고 다니는 것을 보고 괜히 시비를 걸며 나를 찌르거나 그게 싫으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 보라고 말하는 젊은 백정 앞에서 그는 굽히고 펴는 데에 능해야 한다며 기꺼이 이를 실행하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대장군이 되고 초왕으로 봉해졌다. 금의환향한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과 모욕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각각 돈과 벼슬을 내렸다. 이 일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한신의 상벌이 분명하고 사람됨이 과연 비범하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한신의 이러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시야를 크게 넓혀 주었다.

또 사마천은 회수를 건너 위대한 성인 공자(孔子)가 태어난 도성에 도착해 성인 공자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두세 차례 치러지는 행사를 지켜보기도 했다. 사마천은 이 행사에서 주인과 빈객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더욱 가까워져 서로 친근하되 위아래가 분명한 전체로 맺어짐을 느꼈다. 또한 공자가 평생 분투했던 목표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사랑하며 높낮이가 구별되는 동시에 조화를 이루는 질서 그리고 공자의 영혼, 공자의 정수까지 인식할 수 있었다.



3. 사명을 받들어 남서 오랑캐를 설복하다

무제는 어려서부터 황제와 요순, 우 임금, 탕 임금 및 문왕과 무왕, 주공 등 고대의 성황에 대해 들려주는 유생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해와 달이 비추는 곳마다 다스려지지 않은 곳이 없는󰡑 통일된 천하를 꿈꾸어 왔으며, 󰡐형벌이 쓸모 없고 덕이 짐승에게도 미치며, 교화가 온 세상에 통하는󰡑 성인이 다스리는 사회를 그리워하였다.

원정 5년(기원전 112년), 남월(南越)의 재상인 여가가 중앙의 왕조에 복속하려는 남월왕과 왕태후를 살해하고 한나라에서 보낸 사자 등도 살해함에 따라 무제는 대군을 파견하여 남월을 정벌한 후 그들에게 여가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령하였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전쟁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해 근심에 싸여 있었다.

변방 너머 나라들이 알현을 청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을 황제가 잘 다스리고 공적을 이루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표지라고 생각한 무제는 즉위한 후 몇 년 간 대외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하고 주변 지역을 복속시킨 성과를 올린 적이 있다. 마침내 여가를 사로잡았다는 보고를 들은 무제는 크게 기뻐하고, 진군하다가 저지를 당한 치의후에게 또한 남서 오랑캐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서의 오랑캐 백성들에게 귀순을 권하는 무제의 뜻을 전하는 임무는 사마천이 맡게 되었다.

병사를 징집하는 과정에서 주변국인 저란국의 반대에 부딪혀 대립하던 치의후는 사마천이 무제의 명을 전하자 기뻐하며 당장 정벌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저란국의 선제 공격에 직면한 치의후는 사마천의 만류에도 뛰쳐나가 싸우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이를 본 사마천은 무제가 보낸 지원군인 여덟 교위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백성들을 학살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무제의 지원군으로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된 저란국의 왕은 백성들의 목숨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자결하였으며, 지원군이 저란의 백성들을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도록 함에 따라 저란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곧이어 무제의 지원군들은 남방 및 서방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이 일대의 정치 중심지가 된 공도를 정벌하고 나서 공도 병사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고, 사마천은 전쟁을 대비하여 공출하였던 식량을 나누어주는 혜택을 베풀었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이것이 모두 천자의 은혜임을 알렸다. 이러한 조치는 다른 주변국의 군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은 자발적으로 한나라에 복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4.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다

여러 나라를 돌다 장안에 돌아온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병이 위급한 것을 알게 되었다. 사마천이 아버지에게 찾아가자 사마담은 혼미한 정신 가운데에서 사마천에게 온 신경을 모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난 본래 천자께서 개제(改制:성을 바꾸어 천명을 받아 왕이 되면 태산에 올라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정삭과 복색(服色)을 바꾸며, 관명을 정하고 예악을 제정하는 일)를 완성하신 후에 역사서를 쓸 생각이었다. 공자의 『춘추』를 이어 최근 수백 년간 활약했던 명철한 군주와 충성스러운 신하의 공적을 기술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제 보니 할 수가 없구나. 내가 죽은 후에 네가 틀림없이 태사의 직무를 대신 이어받을 것이니 네가 태사가 되면 잊지 말고 내 사업을 완수하여라!"

사마담의 마지막을 지켜 본 사마천은 이제까지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었던 가르침과 교훈들을 되새기며, 아버지의 유언이 단지 역사서를 쓰라는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생명의 정수를 그에게 전수한 것이며, 사마씨 가족의 모든 희망을 그에게 전해준 것임을 깨달았다. 사마천은 왕명을 받은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상을 치르고 난 후 무제의 행차를 따랐다. 그리고 바닷가 행궁에서 무제를 알현하고 남서쪽 오랑캐를 평정한 경과에 대해 보고하였다.

한무제는 북방에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병기를 거둬들인 다음 제노에 도착하여 봉선(封禪:성을 바꾸어 왕이 되었을 경우 일정 시기의 통치를 거쳐 문무의 공적이 찬란한 성과를 얻게 되면 제왕이 태산에 올라 그 공덕을 하늘에 고하는 종교의식의 일종)을 준비했다. 하지만 봉선 의례를 어떻게 거행하는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의견만 분분하자 한 무제가 직접 의례를 제정하여 이를 치렀다. 그리고 무제가 제단에서 걸어 내려와 명당으로 돌아와 앉자 천하의 각 제후와 문무백관들이 순서에 따라 명당에 올라 천자에게 축하를 드렸다. 사마천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왕도 이상 정치의 서광이 비쳐오는 것 같아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절로 우러나옴을 느꼈다. 그는 태평성세를 창조해 낸 현명한 군주와 충성된 신하, 죽음으로써 의를 지켰던 선비들에게 더욱 감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그는 공자의 『춘추』를 잇겠다는 아버지의 포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거상을 벗은 후 아버지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태사령은 육백석 급(한나라의 관리는 봉록을 곡물로 셈하였으며, 석이나 곡으로 양을 쟀다. 관직의 높고 낮음은 한 해 봉록의 총량이 몇 석인가로 정해졌다)의 관원으로서 중앙 왕조의 상급 관리에 속하며, 이전의 삼백석 급의 낭중에 비하면 궁정 안에서 궁정 밖의 근무로 옮겨졌지만 직급은 상승한 셈이다.

그러던 것이 벌써 4년이 훌쩍 지나갔다. 4년 동안 사마천은 조정에서 태사령이 짊어지는 갖가지 직책을 수행해야 했으며, 천자를 모시고 천하를 순행하고 천지산천의 여러 신에게 제사지내야 했다. 일단 조정의 업무가 끝나거나 외지의 순행에서 돌아오면 사마천은 갖가지 도서 자료를 읽고 조사하였다. 민간에 수장되어 있던 도서를 조정에 바치게 되고, 무제에 이르러 유교를 떠받듬에 따라 책을 읽고 바치는 사람이 늘어나 사마천이 일하는 황실의 금궤석실은 각종 도서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지라도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사마천의 인생 목표는 주공이나 공자와 같은 문화 거인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몇 년 간 공무상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의 끊고 휴일까지도 금궤석실에서 죽간(竹簡)과 백서(帛書)를 읽고 가려내는 데 쏟아 부었다. 고금의 전적이라면 사마천은 거의 빠짐없이 읽은 편이었지만 지식을 늘리기 위한 독서와 책을 저술하기 위한 독서는 완전 딴판이었다. 저술을 위한 독서에는 더 많은 사색과 고증이 필요하고,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가운데에서 역사적 사건의 처음과 끝을 정리하고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총괄해내야 했으므로 지난 날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새로이 음미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을 때 정해야 하는 정삭(正朔:한 해가 시작되는 기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가운데 여러 신하의 건의에 따라 무제가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기로 하고, 사마천은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역법을 만드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무제는 조정의 대신들에게 여러 가지 역서들을 검토하게 한 끝에 등평의 『팔십일분율력(八十一分律曆)』을 택하여 󰡐태초력(太初曆)󰡑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사마천에게 새로운 정삭을 천하의 제후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색깔을 황색을 숭상하고, 숫자는 5를 사용하며, 관명을 정하고, 음률을 맞춤에 따라 개제가 완수되었다.

무제가 개제의 완수를 선포하자 사마천은 자신이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지난날 겪었던 갖가지 곡절과 고난을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얻어낸 영광스러운 업적을 음미하면서 득실과 성패를 총괄해 보기에는 지금이 바로 가장 알맞은 시기라 여겨졌다. 그래서 사마천은 바로 지금 역사서를 쓰는 일에 착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5. 붓끝을 따라 역사 속으로

최근 몇 년간 여러 책을 읽고 이것저것 정리한 끝에 그는 이미 저서를 저술할 방대한 소재를 축적하였으며, 역사 발전의 실마리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역사서술의 상한선은 공자의 『예기』를 참고하여 황제(黃帝)부터 쓰기 시작하고, 체례(體例)는 12편의 본기(本紀)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본기 다음에는 제왕의 팔다리처럼 충성스러운 신하와 몇몇 제후국들의 전기를 넣어 이 명신들이 군주를 어떻게 보필하여 나라를 흥성시켰는가를 󰡐세가(世家)󰡑로 이름 붙여 적기로 하였다. 덧붙여 예부터 지금까지의 충신 열사를 위해 전(傳)을 만들어 기록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월의 순서에 따라 역사의 연표를 만들어 연대순에 따라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천자와 제후의 가계를 보여주며, 재상과 장수, 명신들의 역사적 활동도 표 속에 집어넣기로 하였다. 그리고 서(書)에는 왕조마다 지닌 나름의 제도, 즉 성을 바꾸어 천명을 받아 왕이 되면 정삭을 바꾸고 복색을 바꾸며, 봉선을 행하고 도량형과 관명을 바꾸고 예악을 새로 만드는 등의 상황을 기록하기로 했다.

사마천이 역사서를 저술한다는 소식이 조정의 사대부 사이에 퍼지자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였다. 특히 공자의 『춘추』를 계승하겠다는 사마천의 의지가 전해지자 일전에 사마천과 함께 역서를 만들면서 친분이 쌓인 상대부 호수는 그를 방문하여 그 일의 지나침을 일러주려고 하였다. 상대부 호수가, 지금과는 달리 본받을 만한 군주가 없던 시절에 저술되었던 『춘추』를 잇겠다고 하니 혹 실효없는 글에 기탁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역사서를 쓰는 것이냐고 질문하자 사마천은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나라에 현명하고 재주 있는 이가 있는데도 등용되지 못한다면 이는 군주의 치욕입니다. 그러나 주상의 성덕이 온 천하에 널리 전해지지 못한다면 이는 관리들의 잘못입니다. 제가 황송하게도 태사가 되어 밝으신 군주의 성덕과 공신, 세가(世家), 현명한 대부의 업적을 서술하지 않고 선친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 감히 저의 역사서를 『춘추』와 나란히 놓을 수 있겠습니까! 역사서(太史公書)를 써서 『춘추』를 잇겠다는 것은 하나의 숭고한 목표를 세워 스스로 분발하겠다는 다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호수는 이제 사마천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계속 쓰십시오. 태사공, 누가 뭐라 떠들어대건 당신은 성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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