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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명과 예술

키릴 알드레드 지음 | 대원사
고대 이집트의 농부들은 가장 많고 오래된 인구 구성비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글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농부의 일은 강 가장자리 늪지를 배수시키며 경작지를 확장하고 관개 수로를 청소하며, 땅 위에 있는 모래를 제거하고 고지대 농지에 손으로 물을 대야 하는 고된 작업들이었다. 이 외에는 아마포나 양털을 짜는 직조공, 백정, 양조자, 광주리·돗자리·로프 제조자, 목수의 일이 있었다.



노동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은 농노들이나 노예들로서, 중왕국 말기부터 신왕국이 끝날 때까지 그 수가 많았다. 그들은 주로 아시아나 쿠시 출신 외국인들로서 노예로 팔려왔거나 전쟁에서 붙잡혀 온 자들이다. 이들은 어떠한 특전도 누리지 못하고 부정하다 하여 사원의 뜰에도 출입할 수 없었다. 또한 가난하여 무덤이나 가족 매장지를 얻을 수 없었기에 그들의 주검은 나일강에 던져져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죽은 자를 먹는 자'에게 먹이로 제공된다고 한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면 평생 동안 그들이 합리적으로 잘 대우받을 필요가 있었다. 음식과 거처 외에 그들에게 해마다 의복과 기름, 아마포가 지급되었고, 날씨가 더워지면 근무시간도 줄었다. 포로들은 사원과 사유지 및 전장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군대 사관들의 가정에 노예로 할당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예와 시민의 구별은 유동적이었다. 이집트 상류사회의 사노비는 대부분의 원주민 농부보다 부유하였을 것이다.



또한 농부와 노동자 보다 더욱 비참한 사람들은 범죄자들로서 이들은 국경 요새로 추방되거나 시나이와 누비아의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는데 코를 베는 형벌을 받고 난 후 그렇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파라오의 제1왕비는 호루스의 어머니인 하토르 여신의 화신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제1왕비는 하토르 여신의 특징인 암소뿔, 태양표면, 기다란 깃털 따위를 왕관에 장식물로 덧붙여 썼다.



신성한 혈통의 파라오를 잉태했던 왕비는 왕가 여인들 중에서 왕의 어머니로서 예외적인 특권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이들의 장남은 파라오의 명백한 상속자가 되었고, 장녀는 왕의 여상속인이 되었다. 따라서 왕가의 남녀 상속인인 형제자매 관계 속에서 결혼하는 일은 곧잘 있었으며 왕이 자신의 상속녀인 딸과 결혼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한편 왕가의 남성 상속인이 없을 때는 왕족인 상속녀의 남편이 그 역할을 맡았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으면 상속녀인 왕비들이 자신들의 직권으로 직접 통치한 적도 있었다. 핫솁수트와 트오스레는 둘 다 분명하게 왕비 지위의 형식과 규범을 벗어 던져버리고 의상과 명칭들을 적절히 변경하여 남성적인 파라오로서 통치하였다.



왕가의 아들들은 고귀한 집안의 유모들의 손에 길러졌고 그들의 젖형제들과 강한 유대감을 가져 젖형제들은 종종 청·장년기의 친구들이 되어 왕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왕가의 아들들은 노련한 퇴역 군인들로부터 무예를 배웠고 군대 문관들에게서 읽기와 글쓰기를 배웠다. 왕녀들 역시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배웠다.이론적으로 보면 모든 통치가 왕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왕은 관리들을 통하여 통치한다. 초기 왕조시대엔 이러한 관리들은 왕의 친족의 몫이었는데 권한이 신들로부터 나온 이상,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하위 규정에 따르는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자리를 상속인에게 임명하는 이집트인들의 이상이 일반화되면서 공직이 세습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신왕국 시대에는 두 가지 관직이 중요하다. 첫째는 쿠시의 총독으로 누비아와 제4폭포까지 이르는 하 수단 지역에서의 왕의 대리자이고, 다른 하나는 제1예언자 또는 테베의 아문 대사제였다. 예언자는 감사해 마지않는 파라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과 선사품을 받았으므로 네 명의 수석 예언자들이 그 상당한 수입을 관리해야 했다.



그러나 왕의 휘하에서 최고 장관은 재상으로서 그 직위는 역사의 먼동이 틀 때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4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일반적으로 두 명의 재상이 있어 한 명은 상 이집트에 봉직하였고 다른 한 명은 하 이집트에 있었다. 재상의 임무는 서기관들, 청지기들, 연락병 및 수비대들의 도움을 받아서 국가의 상황에 대해 국왕에게 일일 보고를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접견실에서 판결을 내리고, 중앙통치의 여러 지부에 지시사항을 접수하고 발행하기도 하며, 임명권을 행사하고 철회하는 등의 업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대 이집트인들의 주요 작물은 여름밀과 겨울밀, 보리 등이 있는데 이는 빵과 맥주의 주원료였다. 이집트에서는 병사 1인당 하루 4파운드(2.25㎏)의 빵을 지급했는데, 이런 이유로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을 '빵을 먹는 사람들'이란 뜻의 'Artophagoi'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식 외에도 채소류로 부추, 양파, 상추, 멜론, 오이, 강낭콩이 있고, 대추, 무화과 및 대추야자 등의 과일도 생산되었다. 포도는 선사시대부터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역사시대에는 델타와 오아시스 지역의 새로운 땅에 포도밭이 생겨났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식물성 상품 외에 방대한 양의 가축도 기르고 있었다. 주요 제사에 바쳐지는 육류는 대부분이 쇠고기이다. 종교적 전통에 따라 황소를 제외한 가축은 봉헌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돼지, 염소, 양, 나귀 등이 하층계급의 일상적인 주요 식품이자 가축으로 키워졌다.



나일강과 그 지류엔 물고기가 많았다. 이집트인들은 돼지고기와 마찬가지로 물고기 또한 제식상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노동자 계층에겐 중요한 식료품이었으며 케베에서 왕의 무덤을 깎아 새기고 장식하는 장인들은 그들 집단에 소속된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10일마다 18㎏씩 먹을 수 있었다.

나일강의 범람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던 몇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 이집트는 풍요의 땅이었다. 잉여 곡물은 메렌프타하(기원전 1211년) 재위 시 기근이 들었을 때 히타이트족에게 원조했고 1,000여 년이 흐른 뒤 로마시대의 도식폭동 때도 도와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바로 질 좋은 목재였다. 이집트의 자생 나무들은 아카시아, 무화과나무, 능수버들 등이 있다. 이 나무들은 지나치게 마디가 많고 뒤틀린 데다 탄력이 없어서 목재로서 부적합하므로 목재는 레바논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생활 소품인 탁자, 스탠드, 상자 등은 골풀과 갈대로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이집트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명은 파피루스 골풀 줄기에서 종이를 제조해 낸 것이다. 파피루스 종이의 발명은 이집트를 가장 조직적인 국가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기원전 1000년경까지 이집트는 다른 문명 국가와 무역을 할 때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수출하고 있었다. 펜과 잉크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자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서 사용해 왔던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새겨 넣는 귀찮은 방법을 쓰지 않게 되었다.



또 다른 가치 있는 식물성 작물은 겨울철에 자라는 아마였다. 줄기를 적당한 웅덩이 물 속에 담그면 섬유질이 분리되고, 물의 소용돌이에 의해 여러 무게의 실이 자아진다. 이는 모든 옷과 침구류의 필수적인 재료였다. 사람이 죽으면 그 침대보를 찢어서 미라를 동여매는 천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왕의 무덤을 약탈하던 도둑들도 금과 은만큼이나 아마포로 만든 의복을 중요하게 여기며 찾아 나서곤 하였다.



나일 계곡을 경계로 한 사막의 동부에는 홍옥 석류석, 벽옥, 아마존석과 같은 보석 원석과 금이 있었는데 특히 금과 은이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혼합된 합금인 호박금도 생산되었다. 금이 포함된 암석을 채굴하여 잘게 부순 다음 당나귀에 실어 나일강으로 수송하는 과정이 신왕국시대에 아주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당시 아시아의 국가들 사이에는 '이집트 땅의 티끌도 금이다'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이집트는 놀랄 만큼 석재가 풍부해서 나일강 양쪽 제방에서 다양한 품질의 석회암과 사암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쉽게 채굴되고 나일강을 이용한 수송도 용이하여 건축물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집트인들의 석재 다루는 솜씨는 일찍이 발달하여 이집트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왕들에게 초대되었다.이집트의 자연 환경은 정치와 사상, 종교 등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농업용수의 관리로 통치자의 능력이 검증되었고, 황폐한 사막과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세계관과 종교적 개념 수립에 영향을 끼쳤다.



농업 경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토지 개발은 둑과 제방을 세우고 늪지의 물을 배수시키고 수로와 수문을 만드는 등 물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관개 공사에 동원되는 노동력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은 나일강의 홍수 조절과 함께 정치력의 일부분으로 여겨졌다. 즉 고대 농업 국가에서 비와 홍수는 농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고 통치자인 파라오는 비와 홍수를 조절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또한 비와 홍수를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을 만들어야 했으며, 여기에 동원된 노동력의 통제도 파라오의 능력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나일강의 풍요로운 진흙지대를 벗어나면 대부분이 불모지대인 사막이다. 이로 인해 경작지와 황무지, 비옥함과 불모, 생과 사, 선과 악으로 확연히 대조되는 현실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의 이원적인 사고로 자리잡았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나일강의 범람에 분해되었다가 물이 빠지고 새로운 땅이 드러나면서 자신들의 세계도 다시 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 후 물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여겨서 새로운 세계의 시작은 땅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의 기원이 미완성의 형태로 혼돈의 물 속에 있다가 그로부터 원시의 언덕이 솟아났다.



이 같은 해마다 새로운 땅의 생성의 반복은 수많은 신앙의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고대 종교의 바탕이 되었다. 이집트의 '혼돈의 물에서 새로운 땅의 솟아남'이란 사상은 선사시대의 다양한 인종의 정착민들도 자신의 신앙과 신화를 버리고 이집트의 창조신화에 동화되게 만들었다. 이로써 기원전 4,00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통일국가가 형성되어 다양한 소수 종족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융합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왕은 이집트의 수호자로서 국내에선 화합을 이루고 대외적으론 국가의 적을 그 발 아래 꿇게 만드는 존재였다. 실제로 파라오는 치안과 군사문제에 관한 한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어느 지방 군대보다도 강한 이집트인 및 누비아인 군대로 이루어진 근위병이나 호위부대들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징병된 군사들의 의무는 주로 국경지역의 치안대와 관련되거나 시나이, 와디 함마메트 및 기타 지역의 채석작업, 그리고 펀트로 가는 교역 원정대에 참여하기도 했다.



파라오의 중심 군대는 바로 봉건적인 징병들의 결합체였으나 왕의 개인적인 가신들을 주축으로 하고 누비아의 요충지대에 주둔시키고 정규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등 예전의 군대보다 훨씬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고왕국 및 중왕국의 군대들은 전차부대, 보병, 정찰병 및 해병 등을 갖춘 신왕국의 대규모 전문 군대와 비교하면 완전히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했다.



한편 전차가 출현함에 따라 새로운 갑옷과 무기류, 새로운 전투방식 그리고 군사 귀족계층이 탄생하였다. 고왕국 및 중앙국의 소규모 상비군은 각기 운전자와 전사로 구성된 전차대대를 구비한 대단위 조직으로 확장되었고, 혼합식 활, 무거운 청동언월도, 전투용 도끼 그리고 투창병이 쓰는 가벼운 창과 같은 신무기들로 무장된 전문 조직이었다. 왕이나 그 아들이 군대나 전차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유년기에 죽었던 람세스 3세의 몇몇 아들들의 경우처럼 그들이 단지 어린아이였을 때도 그러하였다.마네토를 비롯한 고전파 작가에 따르면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최초 통일은 메네스에 의해 달성되었다고 한다. 메네스에 의한 두 영토의 통합은(기원전 3150년) 두 이집트의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하나로 통합시킴으로써 메네스왕 이후 모든 파라오들에게 '통일 이집트'란 전통을 남겼다. 한편 메네스는 수도도 상·하 이집트의 중간지역인 '백색의 벽', 훗날 멤피스로 불리는 곳에 정함으로써 두 영토 사이의 조화를 이루었다.



멤피스의 신인 조물주 프타하는 '발언(發言 : 입 밖으로 내어 말하는 것)'을 통해 무(無)에서 모든 사물을 창조하고, 이름지었다. 그 이후로 창조주의 화신인 파라오는 창조적인 사고와 권위 있는 말씀을 내뱉는 신과 동일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메네스왕이 확립한 왕권은 후대 왕들에게 성공을 위한 신성한 본보기가 되었다. 왕들은 차례로 멤피스에서 왕관을 썼고, 왕국의 통치를 공식화하는 의미로 백색의 벽을 순회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당시 왕조(제1왕조)의 무덤에 사용되었던 거대한 목재를 보아 당시에 레바논과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아, 흑단, 유리 장식품을 통해 아프리카와 근접 아시아 지역과도 상업적인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메네스왕은 서부 사막과 시나이 반도의 부족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이 분명하다.



왕권이 강화되어 파라오가 죽으면 그의 화신이었던 창조주와 동일화되며, 그의 무덤은 성스러운 곳이 되고 그를 위한 숭배의식은 신에게 하듯이 치러진다. 따라서 신앙의 부산물로서 파라오의 여러 부인들과 시종들을 함께 희생시켜 사후세계까지 왕과 동행하도록 하고 내세에서도 그를 모시게 함으로써 영원불멸을 이루려 했다.



왕권의 강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쓰기 방법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약 500여 년 동안에 발생한 홍수의 수위 그리고 인구 및 가축의 정기적인 조사 기록이 남아있는데 쓰기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이집트 국가의 고도로 중앙화된 통치체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쓰기와 함께 계산학도 발달하였다. 십진법은 왕조시대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기원전 1,600년경에 쓰여진 '리하인드 수학 파피루스(Rhind Mathematical Papyrus - 대영박물관 소장)'를 비롯한 자료를 보면 이집트 사람들은 기원전 3,000년대 말경에 이미 수의 체계를 발달시켜 비교적 쉽고 정확하게 복잡한 분수 개념이 도입된 산술적 계산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라오 국가는 그 존속 기간 동안 세 가지 달력을 갖고 있었는데 관리와 재정 목적인 시민력과 그와 쌍을 이루는 제2의 태음력, 그리고 종교적인 축제와 신전 예배일자 확정을 위한 최초의 태음력이 그것이다. 최초의 태음력은 다른 원시 민족과 마찬가지로 농사에 맞추어 달의 주기적 현상에 따라 결정되는 달력이며, 시민력은 하루는 24시간, 30일씩 12달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5일은 신들의 생일로 남겨둔 것이다. 시민력은 조직화된 국가에서 농업에 따른 태음력의 날짜 변화의 보안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제2의 태음력은 윤년제도를 대신하여 시민력과 관련 있게 만든 것이다.고도로 중앙집권화된 행정체제 내의 모든 직위는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었다. 전문적인 직종을 선택하려는 사람의 우선적인 필수과제는 그가 학교 교육을 완벽하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왕실, 재무성 및 군대와 같은 대규모 정부기관에 부속되어 있거나 책을 필사하고 비문을 편집하는 커다란 사원의 기록실, 즉 '생명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 부속되어 있었다.



이집트 교육에서 학생은 여러 가지 범주로 분류된 서로 다른 상형문자들을 암기하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지리, 수학, 외국어, 교역 물품, 여행 장비, 종교 축제, 인체 부위 등에 대해서는 원문 글자를 베끼거나 왕과 그 주민들에 관한 시, 박식한 두 서기관들 사이의 문학적 논쟁의 다양한 교류 등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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