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과 예술
키릴 알드레드 지음 | 대원사
1. 천연 자원고대 이집트인들의 주요 작물은 여름밀과 겨울밀, 보리 등이 있는데 이는 빵과 맥주의 주원료였다. 이집트에서는 병사 1인당 하루 4파운드(2.25㎏)의 빵을 지급했는데, 이런 이유로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을 '빵을 먹는 사람들'이란 뜻의 'Artophagoi'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식 외에도 채소류로 부추, 양파, 상추, 멜론, 오이, 강낭콩이 있고, 대추, 무화과 및 대추야자 등의 과일도 생산되었다. 포도는 선사시대부터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역사시대에는 델타와 오아시스 지역의 새로운 땅에 포도밭이 생겨났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식물성 상품 외에 방대한 양의 가축도 기르고 있었다. 주요 제사에 바쳐지는 육류는 대부분이 쇠고기이다. 종교적 전통에 따라 황소를 제외한 가축은 봉헌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돼지, 염소, 양, 나귀 등이 하층계급의 일상적인 주요 식품이자 가축으로 키워졌다.
나일강과 그 지류엔 물고기가 많았다. 이집트인들은 돼지고기와 마찬가지로 물고기 또한 제식상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노동자 계층에겐 중요한 식료품이었으며 케베에서 왕의 무덤을 깎아 새기고 장식하는 장인들은 그들 집단에 소속된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10일마다 18㎏씩 먹을 수 있었다.
나일강의 범람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던 몇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 이집트는 풍요의 땅이었다. 잉여 곡물은 메렌프타하(기원전 1211년) 재위 시 기근이 들었을 때 히타이트족에게 원조했고 1,000여 년이 흐른 뒤 로마시대의 도식폭동 때도 도와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바로 질 좋은 목재였다. 이집트의 자생 나무들은 아카시아, 무화과나무, 능수버들 등이 있다. 이 나무들은 지나치게 마디가 많고 뒤틀린 데다 탄력이 없어서 목재로서 부적합하므로 목재는 레바논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생활 소품인 탁자, 스탠드, 상자 등은 골풀과 갈대로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이집트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명은 파피루스 골풀 줄기에서 종이를 제조해 낸 것이다. 파피루스 종이의 발명은 이집트를 가장 조직적인 국가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기원전 1000년경까지 이집트는 다른 문명 국가와 무역을 할 때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수출하고 있었다. 펜과 잉크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자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서 사용해 왔던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새겨 넣는 귀찮은 방법을 쓰지 않게 되었다.
또 다른 가치 있는 식물성 작물은 겨울철에 자라는 아마였다. 줄기를 적당한 웅덩이 물 속에 담그면 섬유질이 분리되고, 물의 소용돌이에 의해 여러 무게의 실이 자아진다. 이는 모든 옷과 침구류의 필수적인 재료였다. 사람이 죽으면 그 침대보를 찢어서 미라를 동여매는 천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왕의 무덤을 약탈하던 도둑들도 금과 은만큼이나 아마포로 만든 의복을 중요하게 여기며 찾아 나서곤 하였다.
나일 계곡을 경계로 한 사막의 동부에는 홍옥 석류석, 벽옥, 아마존석과 같은 보석 원석과 금이 있었는데 특히 금과 은이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혼합된 합금인 호박금도 생산되었다. 금이 포함된 암석을 채굴하여 잘게 부순 다음 당나귀에 실어 나일강으로 수송하는 과정이 신왕국시대에 아주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당시 아시아의 국가들 사이에는 '이집트 땅의 티끌도 금이다'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이집트는 놀랄 만큼 석재가 풍부해서 나일강 양쪽 제방에서 다양한 품질의 석회암과 사암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쉽게 채굴되고 나일강을 이용한 수송도 용이하여 건축물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집트인들의 석재 다루는 솜씨는 일찍이 발달하여 이집트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왕들에게 초대되었다.
2. 이집트의 정착이집트의 자연 환경은 정치와 사상, 종교 등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농업용수의 관리로 통치자의 능력이 검증되었고, 황폐한 사막과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세계관과 종교적 개념 수립에 영향을 끼쳤다.
농업 경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토지 개발은 둑과 제방을 세우고 늪지의 물을 배수시키고 수로와 수문을 만드는 등 물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관개 공사에 동원되는 노동력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은 나일강의 홍수 조절과 함께 정치력의 일부분으로 여겨졌다. 즉 고대 농업 국가에서 비와 홍수는 농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고 통치자인 파라오는 비와 홍수를 조절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또한 비와 홍수를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을 만들어야 했으며, 여기에 동원된 노동력의 통제도 파라오의 능력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나일강의 풍요로운 진흙지대를 벗어나면 대부분이 불모지대인 사막이다. 이로 인해 경작지와 황무지, 비옥함과 불모, 생과 사, 선과 악으로 확연히 대조되는 현실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의 이원적인 사고로 자리잡았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나일강의 범람에 분해되었다가 물이 빠지고 새로운 땅이 드러나면서 자신들의 세계도 다시 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 후 물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여겨서 새로운 세계의 시작은 땅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의 기원이 미완성의 형태로 혼돈의 물 속에 있다가 그로부터 원시의 언덕이 솟아났다.
이 같은 해마다 새로운 땅의 생성의 반복은 수많은 신앙의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고대 종교의 바탕이 되었다. 이집트의 '혼돈의 물에서 새로운 땅의 솟아남'이란 사상은 선사시대의 다양한 인종의 정착민들도 자신의 신앙과 신화를 버리고 이집트의 창조신화에 동화되게 만들었다. 이로써 기원전 4,00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통일국가가 형성되어 다양한 소수 종족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융합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3. 상고시대마네토를 비롯한 고전파 작가에 따르면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최초 통일은 메네스에 의해 달성되었다고 한다. 메네스에 의한 두 영토의 통합은(기원전 3150년) 두 이집트의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하나로 통합시킴으로써 메네스왕 이후 모든 파라오들에게 '통일 이집트'란 전통을 남겼다. 한편 메네스는 수도도 상·하 이집트의 중간지역인 '백색의 벽', 훗날 멤피스로 불리는 곳에 정함으로써 두 영토 사이의 조화를 이루었다.
멤피스의 신인 조물주 프타하는 '발언(發言 : 입 밖으로 내어 말하는 것)'을 통해 무(無)에서 모든 사물을 창조하고, 이름지었다. 그 이후로 창조주의 화신인 파라오는 창조적인 사고와 권위 있는 말씀을 내뱉는 신과 동일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메네스왕이 확립한 왕권은 후대 왕들에게 성공을 위한 신성한 본보기가 되었다. 왕들은 차례로 멤피스에서 왕관을 썼고, 왕국의 통치를 공식화하는 의미로 백색의 벽을 순회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당시 왕조(제1왕조)의 무덤에 사용되었던 거대한 목재를 보아 당시에 레바논과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아, 흑단, 유리 장식품을 통해 아프리카와 근접 아시아 지역과도 상업적인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메네스왕은 서부 사막과 시나이 반도의 부족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이 분명하다.
왕권이 강화되어 파라오가 죽으면 그의 화신이었던 창조주와 동일화되며, 그의 무덤은 성스러운 곳이 되고 그를 위한 숭배의식은 신에게 하듯이 치러진다. 따라서 신앙의 부산물로서 파라오의 여러 부인들과 시종들을 함께 희생시켜 사후세계까지 왕과 동행하도록 하고 내세에서도 그를 모시게 함으로써 영원불멸을 이루려 했다.
왕권의 강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쓰기 방법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약 500여 년 동안에 발생한 홍수의 수위 그리고 인구 및 가축의 정기적인 조사 기록이 남아있는데 쓰기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이집트 국가의 고도로 중앙화된 통치체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쓰기와 함께 계산학도 발달하였다. 십진법은 왕조시대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기원전 1,600년경에 쓰여진 '리하인드 수학 파피루스(Rhind Mathematical Papyrus - 대영박물관 소장)'를 비롯한 자료를 보면 이집트 사람들은 기원전 3,000년대 말경에 이미 수의 체계를 발달시켜 비교적 쉽고 정확하게 복잡한 분수 개념이 도입된 산술적 계산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라오 국가는 그 존속 기간 동안 세 가지 달력을 갖고 있었는데 관리와 재정 목적인 시민력과 그와 쌍을 이루는 제2의 태음력, 그리고 종교적인 축제와 신전 예배일자 확정을 위한 최초의 태음력이 그것이다. 최초의 태음력은 다른 원시 민족과 마찬가지로 농사에 맞추어 달의 주기적 현상에 따라 결정되는 달력이며, 시민력은 하루는 24시간, 30일씩 12달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5일은 신들의 생일로 남겨둔 것이다. 시민력은 조직화된 국가에서 농업에 따른 태음력의 날짜 변화의 보안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제2의 태음력은 윤년제도를 대신하여 시민력과 관련 있게 만든 것이다.
4. 제1고왕국의 피라미드 시대제3왕조와 더불어 이집트는 비로소 500년간의 뛰어난 문화를 누리는 시기로 들어서는데 이를 고왕국시대라 한다. 이 시대의 주목할 점은 왕이 아닌 재상 임호텝(기원전 2680)이 이룬 업적이다. 그는 천문학자, 작가, 의사 현자로서 유명하며 이집트 문화의 선구자로 그의 명성은 프톨레미 시대까지 빚을 잃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임호텝의 가장 큰 명성은 조세르왕의 스텝 피라미드의 건축가로서 얻은 것이었다. 임호텝은 엄밀히 말하면 석조 건축의 최초 발명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제2왕조의 후기 왕묘를 기본으로 하여 '장례 복합단지'라는 대단한 아이디어를 내었다. 이후 이집트의 묘지문화는 '장례 복합단지'를 따르게 되었고, 이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자리잡는다.
조세르왕의 스텝 피라미드는 수도 멤피스 맞은편의 사카라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서부 사막 가장자리의 급경사면으로 스카이라인을 위압하기에 충분한 위치였다. 또한 계단형의 6개 층으로 총 높이가 60미터에 이르며 이 중심 건축에 부속되는 여러 건축물들은 주변 1마일에 걸쳐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편 석재를 다루는 방법도 기존과는 달라서 나무와 갈대 다발, 파피루스 골풀 줄기 및 야자 잎사귀 등에 진흙을 입힌 건축술에서 양질의 석회암 덩어리를 사용하였다.
이 스텝 피라미드의 주인이었던 조세르왕은 자신을 태양신으로 여겼는데 태양신은 레(Re) 또는 레-헤라크티라고 부르며 낮에는 낮의 범선을 타고 하늘 물 위를 항해하다가 해가 지면 밤의 범선으로 옮겨 타서 숫양머리 형상의 창조주의 육신을 빌어 지하의 물 위를 순항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조세르의 무덤인 스텝 피라미드는 사다리 모양을 이루어 죽은 왕이 하늘까지 타고 올라가서 태양 범선에 다다르도록 한 것이다.
피라미드 시대가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제4왕조의 케옵스왕 시대 때였다. 케옵스는 기자에 대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는데 이는 고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대 피라미드는 200만 개가 넘는 석회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몇 개는 한 개당 15톤의 무게가 나간다. 진흙은 윤활제로 상용되었고 돌덩이는 현장에서 떼어냈으나 외장용 고급 석재는 투라에서 다듬어 나룻배로 수송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주 섬세한 부조로 장식되고 찬란한 색깔로 빛날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흩어진 파편뿐이다.
당대에 죽은 지식층의 실제 도시인 기자 고원의 광대한 공동묘지는 스핑크스가 보호하였다. 케프렌왕의 머리를 하고 가로 누운 사자의 형상은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남은 바위산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최초이자 가장 큰 스핑크스이다. 이집트 신앙에 따르면 스핑크스는 사자의 파생물로서 입구를 지키면서 경내를 침범하는 어떤 침입자도 모두 잡아낸다고 한다.
기자 피라미드군 건립을 위해 부과되었던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의 소모는 후대에 와서는 파라오들이 백성에게 요구할 수 없게 된다. 제4왕조가 끝나기도 전에 이러한 양상은 두드러져서 기존의 피라미드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규모로 지어지고, 4왕조의 마지막 왕인 솁세스카프 분묘는 피라미드 형상이 제외되었고 돌 대신 진흙벽돌로 대체된 부분이 있기도 하다.
5. 제2고왕국의 피라미드 시대태양 숭배의 영향은 점점 커져서 제4왕조를 거치면서 왕의 이름들이 '레'의 합성어로 이루어졌으며, 5왕조 시대까지 이어져서 파라오는 신들간의 결혼에 의해 출생했다는 신화가 나타나게 된다.
5왕조 초기에 네 명의 왕은 그들의 분묘 부지를 기자가 아닌 아부시르로 정했는데, 이는 선대의 기자 분묘에 비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며 이후 기자는 왕립 매장지로 두 번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5왕조의 매장 문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배이다. 나우세레 사원에서 벽돌로 만든 태양신의 배가 나왔는데 이는 신들이 배를 이용하여 천국 수면을 가로지르는 여행, 곧 나일 수로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이집트의 수송 방식을 비유한 것이다. 태양신의 낮과 밤의 항해를 위한 두 척 이상의 배가 선사시대 이래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다.
제왕들에 비해 그들의 친족이나 관리들은 인근의 석실분묘 바위를 쪼개 만든 지하분묘에 매장되었다. 내세에 대한 생각이 점점 영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묘지의 기념석주에 빵과 맥주, 채소류, 아마포, 우유 같은 주식품이 차려져 있는 식탁 앞에 죽은 자가 앉아 있는 모양의 부조를 새기는 경향이 나타났다. 주인의 영이 마법의 주문을 통해 그 음식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결국 '불사의 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좋고 깨끗한 모든 것'이 부장품에 포함되었다.
5왕조에 들어와서 파라오의 권력과 명망이 눈에 띄게 축소되고 귀족사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따라서 특권을 가진 조신들의 무덤과 장례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파라오로부터 땅을 받았다. 또한 귀족들의 장례비용도 왕실 재정으로 충당되었는데 비용의 대부분이 장례 기도문의 암송과 같은 활동에 쓰여져 경제 침체를 촉진시켰다.
또한 귀족들은 직위가 세습되자 그들의 직위는 왕의 총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출생에 따른 혜택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왕의 피라미드 밑에서 매장지를 물색하지 않고 그 지방 수도에서 자신들의 석굴묘지를 다듬었다. 또한 필요에 따라 멤피스의 왕실 석묘 기술자들을 초빙하기도 하였다.
파라오와 이들 고관들 사이에 벌어진 깊은 틈은 피옵스 1세 통치 말기에 와서야 메워지게 된다. 그리고 6왕조 중기 무렵에 봉건국가의 기초가 마련된다. 메네스가 이룩했던 전통적인 규범의 유형이 최후의 일격을 맞은 것은 고왕국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인 피옵스 2세가 90년 이상 재위한 후 사망한 때이다. 그의 계승자들은 제7왕조 및 8왕조의 미명기에 단 2,30년 간에 걸쳐 집권한 20여 명이 넘는 단명한 군주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어떤 업적도 남기지 않았고 고왕국은 마지막 그림자를 드리우며 완전히 암흑의 장막 뒤로 퇴진하게 되었다.
6. 제1중간기고왕국의 멸망은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쇠약했기 때문에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연재해로 인한 파라오의 신임이 실추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아비시니아 고원에 내린 몬순 강우형의 기상 변화가 저지대 일색인 나일 지역을 급습하여 이집트의 강 유역 경작방식으로는 속수무책의 상황을 만들었다. 그런 결과는 모든 주민에게 재난을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인 파라오가 신비스런 힘으로 나일강의 홍수를 다스린다고 믿으며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이집트의 전반적인 정치 및 경제 체제가 순식간에 불신을 받게 되었다. 제7 및 제8왕조의 30년이라는 기간 동안 왕의 목록은 수많은 파라오들을 나열하고 있으나 한두 해 정도 통치하여 나일강의 수량을 풍부하게 만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단명의 형벌을 감수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