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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그 역사와 문화

스탠리 월퍼트 지음 | 가람기획
제1장 인도의 자연환경



강




인도에서 가장 비옥한 북부 평야지대는 지금도 인구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곳으로서 거대한 강으로부터 갖가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1947년 8월 중순 이래로 파키스탄에 포함되어 그곳의 주요한 동맥이 되고 있는 인더스 강은 북부의 여러 거대한 강들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강으로 인도 문명의 요람이다.

4,000여 년에 걸쳐 히말라야 계곡으로부터 맹렬하게 밀려드는 인더스 강의 홍수는 제방 근처의 도시와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가곤 했다. 인더스 강의 거친 물결은 그 파고가 나일 강보다도 훨씬 더 높고 강했기 때문에 최근 콘크리트 댐과 대규모 저수지가 건설되어 홍수 조절이 가능해지고 그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계곡의 주민들에게 항상 공포의 대상이었다.

갠지스 강은 인도에서 가장 신성한 강으로 강 북쪽의 왼쪽 제방으로는 힌두 사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갠지스 강은 다른 강과 합쳐져 여러 지역을 굽이쳐 흘러가다가 야무나 강과 합류하여 힌두 인도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도시로 알려진 바라나시로 흘러간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의 물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내륙 도처에서 병을 앓고 있는 힌두 교도들은 먼길을 마다 않고 북적거리는 바라나시 사원의 계단까지 찾아와 온갖 질병에 효험이 있다는 강물 속에 자신들의 몸을 담그고 있다. 몇몇 독실한 힌두 교도들은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는 바라나시의 녹색물을 마시기도 하며, 그 물을 담아 쇠약해진 몸 때문에 그곳까지 오지 못하는 친척들에게 주기 위해 집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이 밖에도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흘러나온 여러 거대한 강들은 동쪽을 향해 갈수록 점점 폭이 넓어지면서 당당한 자태를 갖추어가는 어머니 갠지스 강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중부와 남부 인도를 가로지르는 강들은 거대한 북부의 강들과는 달리 만년설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수량을 공급받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 강은 빈약한 샘과 기껏해야 일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에만 내리는 몬순의 풍부한 강우량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중부 인도의 대표적인 세 강은 마히 강, 나르마다 강, 타프티 강으로 모두 캠베이 만으로 흘러든다.

이처럼 문명의 여명기부터 강변에 정착한 인도인들은 풍족한 물을 이용하여 생활을 영위했으며, 대지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수많은 예술가, 장인, 관료, 군인들 역시 강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누리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거대한 강들이 흘러가는 곳에서는 신선한 물과 비옥한 침전물 덕택에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그곳으로부터 고유한 지역 문화가 등장했고 또 고착화되었다. 인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타밀어 등 다양한 언어와 사회관습들이 문명 생활의 토대가 되는 강 유역에서 수천 년에 걸쳐 발달해 왔다. 또한 종교적 축제가 열릴 때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신성한 강이 있는 도시에 모여 고대의 리듬과 장단에 맞춰 춤추고 기도한다. 간혹 그곳에서는 점성학상 건강과 장수에 가장 좋은 때로 알려진 시간에 정확하게 도착하기 위해 한꺼번에 밀려든 엄청난 인파로 인해 압사당하는 이들까지 생기곤 한다.

제2장 인도의 역사



고대 제국의 통일과 그 한계




기원전 324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기원전 320∼293년)는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 일대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를 일으켰다. 그의 마우리아 후계자들은 그 이후 120년을 더 인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했다. 마우리아 제국의 정책들 대부분은 차나키아 또는 카우틸리아라는 이름의 브라만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아르타샤스트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를 통해 구축된 제국주의적 관료정치는 관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불평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영원히 지속될 배신과 매수와 권력의 부식이라는 인간의 속성을 경계할 목적에서 마우리아 및 굽타 제국을 비롯한 여러 인도 제국들은 차나키아의 저서를 지침서로 사용해 왔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재위기간 기원전 269∼232)는 가장 지혜로운 마우리아 황제이자 당대의 가장 뛰어난 군주였다. 그러나 아쇼카 왕도 집권 초기에는 차나키아의 교본을 답습하는 현실적 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전쟁의 참혹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어 전쟁을 그만 두고, 대신 붓다의 '정의의 법칙'을 따르기로 하고 교단뿐만 아니라 제국의 최고 이상으로써 사랑과 비폭력(ahimsa)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불교 제국의 통치가 이루어진 이 시기에 이르러 인도인들은 대부분 채식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으며, 불교의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미얀마와 스리랑카를 비롯한 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아쇼카 왕이 왕국의 구석구석을 순례함에 따라 인도의 다양한 민족과 부족들에게 국가적인 이데올로기와 문화의 주입이 이루어졌다.

마우리아 제국은 아쇼카 왕의 사후에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184년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며, 인도는 이후 500년 동안 다시 한 번 정치적 분열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으며, 페르시아 인, 스키타이인 등의 침략이 이어졌다.

힌두교의 통합은 북부 인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통일제국을 이룩한 굽타 왕조(A. D. 320∼550)의 황금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굽타 제국의 절정기는 찬드라굽타 2세가 재위했던 A. D. 375년부터 415년까지였는데 힌두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신들을 위한 신전이 잇따라 건설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오랜 세월과 침략자들의 무참한 파괴를 견뎌낸 당시의 사원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원들로는 거대하고 단단한 석굴사원인 아잔타와 엘로라, 엘레판타 등이 있으며, 그곳에는 동시대의 그림과 탁월한 조각품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사실 고대 인도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감화를 기반으로 활성화되었다. 수많은 예술가와 장인들 그리고 그 후원자들이 자신들의 삶과 재산을 신에게 헌신함으로써 그와 같은 예술적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도 예술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아름다운 형상과 동기와 상징들은 그 반복성과 정교함에서 오늘날까지 그 고전적 특성들을 이어오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시각적 영속성은 지역적인 차이가 뚜렷한 내륙의 구석구석까지 전파되어 있는 힌두교 성전과 서사문학에 힘입은 바가 크며 그것들이 전통의 기둥을 한층 더 굳건히 받쳐주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각 제국의 흥망 사이에 예술적 통합들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인도를 거쳐간 중국인 순례자들은 특히 불교 사상에 대한 힌두교 왕조의 관용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이러한 힌두교의 관용은 붓다를 비슈누(힌두교의 가장 대표적인 남신)의 화신으로서 힌두교 속에 통합시킨 결과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문화와 사상에 대한 인도 특유의 인내와 관용이라는 깊은 조류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는 다원주의에 대처하는 인도 나름대로의 기교로 발전을 거듭해온 제도였다. 그리고 인도 사회는 이 제도의 도움으로 힌두교 제도의 균형 유지를 위해 정교하게 짜여진 다양한 계층의 관습이나 습관 또는 순수성을 크게 위협받지 않으면서 미약하나마 통합된 공동체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굽타 왕조는 서로 다른 지방에서 살아가는 개인이나 가족의 관습을 비교적 간섭하지 않고 그 지역에 일임하는 통치 방식으로 2세기 가까이 번영을 누렸다.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



간디는 190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돌아와 그해 연말에 캘커타에서 열리는 인도 국민회의 의회에 참석했다. 당시의 우호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핍박받는 인도인 사회의 권익에 대한 간디의 동의 신청은 의회에서 적극 수용되었다. 그러나 간디는 영국 법학원의 법정 변호사 자격으로 현지 인도인 무슬림이 운영하는 회사의 소송을 취급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열차표를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1등 객실에서 쫓겨났다. 간디는 이 경험으로 인생이 바뀌었고, 이후 인도 국민회의의 노선도 바뀌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과감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양복 대신 가난한 인도 농민들처럼 전통 의상 도티를 입고 소박한 식사를 했다. 자신이 이끄는 혁명운동의 핵심어로 '사티아(satya : 진리)를 채택하여 자이나 교도, 불교도, 후에는 무슬림까지 서로 융합시켰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허망한 결말로 인해 서구문명의 폐해에 대해 인식하게 된 간디는 전통적인 힌두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인구가 많이 늘어난다 할지라도 인도의 촌락 단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수백만의 힌두 교도들에 의해 위대한 영혼으로 숭배받았다.

하지만 종전 직후 인도에서는 간디가 흑색 법안으로 지칭한 로울라트 법안에 의해 시민 자유권과 관습법이 계엄령이 선포된 인도의 전시체제로 제한되자 사티아그라하(무저항 불복종) 운동이 펼쳐져 큰 호응을 얻었다. 간디는 1920년 8월에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이 운동을 시작했으며, 인도 전 국민에게 영국의 상품, 법정, 학교, 직업 등에 대한 거부를 부탁했다. 이러한 호소에 힘입어 흥분한 인도인들이 경찰서에 침입하여 24명의 경찰관들을 죽이고 그들을 집단 화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책임을 느낀 간디는 모든 사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중지를 명령했고 1930년 소금시위 때까지 이 운동을 다시 일으키지 않았다.

1928년 모티랄 네루는 인도 자치령의 국가 형태를 기초한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간디는 이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움직임에 냉담했고, 영국 정부의 독점에 반대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소금을 채취하다가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석방되어 의회의 단독 대표로 영국을 방문해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는 했으나 영국과 인도의 혼혈인, 급진파, 무슬림과 왕족 등 자신들의 요구만 내세우는 탓에 일종의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스스로 '아쉬람'이라 지칭한 독방 감옥에 갇혔다가 병으로 가석방된 후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도 같은 힌두교의 번형인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다.

이 와중에 원탁회의는 결렬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영국 통치의 종식이 앞당겨졌으며, 그 여파로 결국 인도아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로 권력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네루와 국민회의 지도부 동료들은 영국 통치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철회했고, 70세의 간디는 국민회의 지도자로서 다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진행했다. 또한 1940년대 초반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이 파키스탄 탄생을 선언하고 영국의 전쟁 고문단이 이를 묵시적으로 예고하자 간디와 네루는 분리를 확정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분노하였으며, 비극적인 폭동이 수개월에 걸쳐 잇따라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영국인들은 인도인에 대한 발포로 대응하여 수만 명이 사망, 부상하고 수십 만 명이 체포되었다.

1946년 각료 대표단이 3단계 연방계획을 제시하였으나 국민회의와의 평화적 화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진나는 새로운 수도 카라치로 가 파키스탄 자치국가 탄생을 준비했으며, 네루는 구(舊) 델리에 건설한 레드포트에 인도 독립 자치령의 깃발을 세웠으며, 이로써 수천 만 명의 피난민들이 펀자브와 벵골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무슬림, 힌두 교도, 시크 교도의 분리에 따른 혼란과 테러가 지속된 수개월 동안 무려 1백만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간디는 동부 인도의 경계선을 따라 극심한 광란의 소용돌이 속을 통과하여 촌락들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평화를 위한 아힘사(비폭력)를 설교했다.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간디는 경배를 받았으나 그가 떠나면 파괴행위와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이러한 사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평화와 사랑에 대해 설교하고, 성경과 『바가바드 기타』뿐만 아니라 코란의 운문을 읽으며 기도했다. 하지만 간디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힌두교 광신자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러한 반응에 환멸을 느끼고 삶에 대한 의욕도 상실한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광적인 힌두 브라만의 총격으로 자신의 여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제3장 종교와 철학



요가와 시바 숭배




요가 수행자들은 정신 집중과 깊은 호흡, 균형 잡힌 자세와 명상을 통해 정신적 평안함을 유지했으며, 외부 세계의 숱한 위험과 불안에 대응하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을 억제함으로써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불타고 있는 석탄더미 위를 맨발로 걷거나 팔을 머리 위로 쳐든 채 딱딱한 자세로 하염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에 대해 아직까지는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검증된 바가 없다.

시바는 비슈누와 함께 힌두교의 가장 대표적인 두 남신 중 하나이다. 두 신들의 이미지와 능력은 2천여 년에 걸쳐 인도에서 거의 비슷하게 숭배 받아왔다. 고대 인도에서 풍요의 신을 상징하는 시바는 지칠 줄 모르는 성적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시바는 요가의 금욕주의를 상징하는 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여기서 나타난 그의 성적 절제는 그의 호색적 탐욕에 비견될 만 하다. 이를테면 최상의 요가 수행자로서의 시바는 쾌락과 고통의 한계를 구현하여 그 양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열과 억제를 초월하여 자제와 무관심의 경지에 오른 탁월한 신이었던 것이다.

산스크리트 어로 '아트만(Atman : 영혼)'의 처음 의미는 '호흡'이었다. 고대 인도인들은 살아있는 육체와 죽은 육체 사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차이가 바로 호흡에 있음을 주목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트만에 대한 그들의 찬양은 처음엔 '자아'였지만 이윽고 '영혼'이 되었다. 요가는 피를 정화하는 산소의 역할 때문에 호흡이 신체의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이해가 없었을 당시에도 직관적으로 호흡 조절을 항상 강조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모든 호흡이 자신들의 팔다리와 신체의 기관들 속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고 오래도록 믿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또한 그들은 신체를 지탱해 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기관으로서 척추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척추의 기둥 안에 보이지 않는 여섯 개의 '수레바퀴'가 들어 있으며, 그 맨 밑바닥에는 독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정신집중을 통해 잠자는 독사를 깨울 수 있다고 여겼으며, 잠에서 깨어난 독사가 순식간에 솟구쳐 올라 여섯 수레바퀴를 한꺼번에 돌리는 순간 황홀감을 느끼게 된다고 믿었다. 대체로 모든 학파의 요가 철학자들은 요가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각양각색의 기질을 맑게 하며, 해탈에 이르도록 기분을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춤의 왕'으로서 시바는 타밀나두에 있는 치담바람에서 처음으로 우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바가 만들어낸 1백 가지가 넘는 춤들 가운데 대다수가 죽음과 파괴의 춤이다. 이처럼 시바의 역할로 나타나는 이중성은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 선과 악이 마구 뒤엉켜 있는 보편적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도의 이슬람교



이슬람교의 본질과 그 의미는 율법에 대한 복종과 알라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진정한 신명을 가지고서 아라비아어로 '세상에는 오직 한 신 알라만이 있으며, 마호메트는 신의 예언자이다.'라는 맹세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하고 헌신적인 무슬림으로서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올려야 하는 등 다양한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가 있다. 그밖에도 이슬람교에는 갖가지 율법과 전통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교가 계율과 전통, 특히 마호메트의 계율과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에게는 '다르 울 이슬람(dar ul islam)'이라고 하는 이슬람교 통치가 이루어지는 땅에서 사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니면 그들은 이른바 '다르 울 하브(dar ul harb)'라는 전쟁 중인 땅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된 의무는 필요한 경우,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하드(jihad : 聖戰)에 종사하는 것이다. 무슬림은 이슬람교와 알라 신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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