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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그 역사와 문화

스탠리 월퍼트 지음 | 가람기획
요가 수행자들은 정신 집중과 깊은 호흡, 균형 잡힌 자세와 명상을 통해 정신적 평안함을 유지했으며, 외부 세계의 숱한 위험과 불안에 대응하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을 억제함으로써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불타고 있는 석탄더미 위를 맨발로 걷거나 팔을 머리 위로 쳐든 채 딱딱한 자세로 하염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에 대해 아직까지는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검증된 바가 없다.



시바는 비슈누와 함께 힌두교의 가장 대표적인 두 남신 중 하나이다. 두 신들의 이미지와 능력은 2천여 년에 걸쳐 인도에서 거의 비슷하게 숭배 받아왔다. 고대 인도에서 풍요의 신을 상징하는 시바는 지칠 줄 모르는 성적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시바는 요가의 금욕주의를 상징하는 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여기서 나타난 그의 성적 절제는 그의 호색적 탐욕에 비견될 만 하다. 이를테면 최상의 요가 수행자로서의 시바는 쾌락과 고통의 한계를 구현하여 그 양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열과 억제를 초월하여 자제와 무관심의 경지에 오른 탁월한 신이었던 것이다.

산스크리트 어로 '아트만(Atman : 영혼)'의 처음 의미는 '호흡'이었다. 고대 인도인들은 살아있는 육체와 죽은 육체 사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차이가 바로 호흡에 있음을 주목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트만에 대한 그들의 찬양은 처음엔 '자아'였지만 이윽고 '영혼'이 되었다. 요가는 피를 정화하는 산소의 역할 때문에 호흡이 신체의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이해가 없었을 당시에도 직관적으로 호흡 조절을 항상 강조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모든 호흡이 자신들의 팔다리와 신체의 기관들 속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고 오래도록 믿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또한 그들은 신체를 지탱해 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기관으로서 척추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척추의 기둥 안에 보이지 않는 여섯 개의 '수레바퀴'가 들어 있으며, 그 맨 밑바닥에는 독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정신집중을 통해 잠자는 독사를 깨울 수 있다고 여겼으며, 잠에서 깨어난 독사가 순식간에 솟구쳐 올라 여섯 수레바퀴를 한꺼번에 돌리는 순간 황홀감을 느끼게 된다고 믿었다. 대체로 모든 학파의 요가 철학자들은 요가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각양각색의 기질을 맑게 하며, 해탈에 이르도록 기분을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춤의 왕'으로서 시바는 타밀나두에 있는 치담바람에서 처음으로 우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바가 만들어낸 1백 가지가 넘는 춤들 가운데 대다수가 죽음과 파괴의 춤이다. 이처럼 시바의 역할로 나타나는 이중성은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 선과 악이 마구 뒤엉켜 있는 보편적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제6장 정치와 외교



경제계획과 개발외교정책 -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간디는 190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돌아와 그해 연말에 캘커타에서 열리는 인도 국민회의 의회에 참석했다. 당시의 우호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핍박받는 인도인 사회의 권익에 대한 간디의 동의 신청은 의회에서 적극 수용되었다. 그러나 간디는 영국 법학원의 법정 변호사 자격으로 현지 인도인 무슬림이 운영하는 회사의 소송을 취급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열차표를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1등 객실에서 쫓겨났다. 간디는 이 경험으로 인생이 바뀌었고, 이후 인도 국민회의의 노선도 바뀌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과감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양복 대신 가난한 인도 농민들처럼 전통 의상 도티를 입고 소박한 식사를 했다. 자신이 이끄는 혁명운동의 핵심어로 '사티아(satya : 진리)를 채택하여 자이나 교도, 불교도, 후에는 무슬림까지 서로 융합시켰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허망한 결말로 인해 서구문명의 폐해에 대해 인식하게 된 간디는 전통적인 힌두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인구가 많이 늘어난다 할지라도 인도의 촌락 단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수백만의 힌두 교도들에 의해 위대한 영혼으로 숭배받았다.



하지만 종전 직후 인도에서는 간디가 흑색 법안으로 지칭한 로울라트 법안에 의해 시민 자유권과 관습법이 계엄령이 선포된 인도의 전시체제로 제한되자 사티아그라하(무저항 불복종) 운동이 펼쳐져 큰 호응을 얻었다. 간디는 1920년 8월에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이 운동을 시작했으며, 인도 전 국민에게 영국의 상품, 법정, 학교, 직업 등에 대한 거부를 부탁했다. 이러한 호소에 힘입어 흥분한 인도인들이 경찰서에 침입하여 24명의 경찰관들을 죽이고 그들을 집단 화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책임을 느낀 간디는 모든 사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중지를 명령했고 1930년 소금시위 때까지 이 운동을 다시 일으키지 않았다.



1928년 모티랄 네루는 인도 자치령의 국가 형태를 기초한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간디는 이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움직임에 냉담했고, 영국 정부의 독점에 반대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소금을 채취하다가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석방되어 의회의 단독 대표로 영국을 방문해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는 했으나 영국과 인도의 혼혈인, 급진파, 무슬림과 왕족 등 자신들의 요구만 내세우는 탓에 일종의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스스로 '아쉬람'이라 지칭한 독방 감옥에 갇혔다가 병으로 가석방된 후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도 같은 힌두교의 번형인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다.



이 와중에 원탁회의는 결렬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영국 통치의 종식이 앞당겨졌으며, 그 여파로 결국 인도아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로 권력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네루와 국민회의 지도부 동료들은 영국 통치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철회했고, 70세의 간디는 국민회의 지도자로서 다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진행했다. 또한 1940년대 초반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이 파키스탄 탄생을 선언하고 영국의 전쟁 고문단이 이를 묵시적으로 예고하자 간디와 네루는 분리를 확정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분노하였으며, 비극적인 폭동이 수개월에 걸쳐 잇따라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영국인들은 인도인에 대한 발포로 대응하여 수만 명이 사망, 부상하고 수십 만 명이 체포되었다.



1946년 각료 대표단이 3단계 연방계획을 제시하였으나 국민회의와의 평화적 화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진나는 새로운 수도 카라치로 가 파키스탄 자치국가 탄생을 준비했으며, 네루는 구(舊) 델리에 건설한 레드포트에 인도 독립 자치령의 깃발을 세웠으며, 이로써 수천 만 명의 피난민들이 펀자브와 벵골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무슬림, 힌두 교도, 시크 교도의 분리에 따른 혼란과 테러가 지속된 수개월 동안 무려 1백만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간디는 동부 인도의 경계선을 따라 극심한 광란의 소용돌이 속을 통과하여 촌락들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평화를 위한 아힘사(비폭력)를 설교했다.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간디는 경배를 받았으나 그가 떠나면 파괴행위와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이러한 사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평화와 사랑에 대해 설교하고, 성경과 『바가바드 기타』뿐만 아니라 코란의 운문을 읽으며 기도했다. 하지만 간디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힌두교 광신자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러한 반응에 환멸을 느끼고 삶에 대한 의욕도 상실한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광적인 힌두 브라만의 총격으로 자신의 여생을 마감하고 말았다.이슬람교의 본질과 그 의미는 율법에 대한 복종과 알라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진정한 신명을 가지고서 아라비아어로 '세상에는 오직 한 신 알라만이 있으며, 마호메트는 신의 예언자이다.'라는 맹세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하고 헌신적인 무슬림으로서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올려야 하는 등 다양한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가 있다. 그밖에도 이슬람교에는 갖가지 율법과 전통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교가 계율과 전통, 특히 마호메트의 계율과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에게는 '다르 울 이슬람(dar ul islam)'이라고 하는 이슬람교 통치가 이루어지는 땅에서 사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니면 그들은 이른바 '다르 울 하브(dar ul harb)'라는 전쟁 중인 땅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된 의무는 필요한 경우,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하드(jihad : 聖戰)에 종사하는 것이다. 무슬림은 이슬람교와 알라 신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탄생한 이슬람교는 그 특징이 힌두교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령 이슬람교의 신은 유일신이지만 힌두교가 포용하는 신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편 힌두교 사원의 우뚝 솟은 문과 벽에 조각되어 있는 나체의 남신과 관능적인 여신들의 모습은 무슬림의 신경을 무척이나 거슬리게 하고 있으며, 반면에 무슬림 도살업자가 소나 송아지를 도축하는 광경은 힌두 교도들의 원성을 한껏 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 교도와 무슬림이 인도 땅에서 공존해온 기간은 자그마치 1천 년이 넘는다. 현재에도 그들은 무수히 많은 인도의 작은 도시와 시골마을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19세기에 남아시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게 된 무슬림은 힌두 교도와 이슬람교를 양친으로 둔 자식들이거나 힌두교로부터 이슬람교 이단파나 신비주의 분파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들이 대다수이다. 따라서 맨 처음부터 인도를 정복하고 그 자리에 머문 순수한 이방인 계열의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아프가니스탄인, 터키인과 몽골인 이슬람교도들의 수는 고작 전체 대륙 인구의 1% 내지 2%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슬람교와 힌두교 사이의 종교적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힌두 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반감은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며 과거 인도의 역사를 보면 공존의 시기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각자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던 영국 왕정통치의 권력이 인도인들에게 이양됨에 따라 오히려 종교 공동체적인 유독성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또한 벵골의 분리는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무슬림들에게 있어 그들의 정치적 야욕을 자극할 만한 사건이었다. 또한 그것은 인도 민족주의 혁명이 1919년 발생한 대량학살을 계기로 갑자기 활력을 얻어 이전의 온건한 진보주의 노선으로부터 일탈했던 상황과도 거의 흡사했다. 그 결과 벵골의 최초 분리를 발표한 이듬해에 다카에서 무슬림 연맹이라는 무슬림 정치세력권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윽고 1909년 인도 회의 결의안에서 무슬림 분리 선거구 안건이 통과되자 영국령 인도에서 무슬림의 정치적인 입지는 한층 강화될 수 있었다. 영국 정부가 무슬림이 독자적인 블록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1940년 '파키스탄'이라는 독립 무슬림 국가를 요구하는 공식적인 움직임도 생겨났으며,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등이 결합되어 1946년 이후 벌어진 힌두 교도와 무슬림 간의 시민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947년 드디어 파키스탄이 탄생했지만 그 역시 힌두 교도와 무슬림 간의 의견차이와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진 못했다. 분리 이후 5백만 명 가량의 힌두 교도와 시크 교도들이 몇 주 또는 몇 달에 걸쳐 파키스탄을 빠져나왔으며, 이 과정에서 1백만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체로 현대 인도의 전체 무슬림 인구 가운데 10% 가량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던 민주주의와 함께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인도 공화국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델리, 아마다바드, 러크나우, 캘커타 등과 같은 복합 대도시 근처에서는 힌두 교도와 무슬림 간의 소요가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있다.인도의 카스트는 오랫동안 힌두교의 중추 역할을 해온 제도로서 심지어 마하트마 간디처럼 계몽된 힌두 개혁주의자들도 감히 공격할 엄두를 못 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대했다. 현대의 인도인들은 자유화의 물결로 카스트가 이미 소멸되었으며, 헌법수정 조항에도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금지가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아직도 브라만의 '순수성'과 불가촉천민의 '부정함'이라는 사회 계급제도의 양극이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카스트(caste)'는 원래 인도어로 '자티(jati)'에 해당하고, 이 말은 '출생'을 의미한다. 자티는 가족보다는 훨씬 크지만 사회의 한 계층 보다는 작은 규모의 친족 관계에 해당한다. 현대의 인도에는 이미 수천 종류에 이르는 자티가 존재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자티들 사이의 결혼이나 다른 자티로의 전환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자타들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경전에 의하면 모든 인도인들은 태초의 인간인 '푸루샤(purusha)'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수천 개의 머리에서 브라만이, 팔에서 크샤트리아가, 다리에서 바이샤가, 그리고 발에서 슈드라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브라만은 시인과 성직자, 크샤트리아는 왕, 바이샤는 상인과 농부, 그리고 슈드라는 노예나 날품팔이꾼을 말한다. 그리고 그밖에 다섯 번째 계급으로 '판차마스(panchamas)'가 있다. 이들은 후에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 불려졌다.



인도의 전통 계급인 바르나 제도가 아리아 부족의 분업과 선주민 정복 및 오염된 이방인들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진정한 카스트라 할 수 있는 자티 제도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오염이나 중독에 의한 피해가 고대 카스트의 금지나 제한의 이유가 되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그것이 구체화되어 있는 분업과의 관계이다. 즉 카스트의 성립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공급되는 모든 물품과 서비스를 타고난 재능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인도의 촌락 경제는 촌락의 자즈만(jajman), 즉 주로 부유한 지주(대체로 브라만)로 그 지역에 지배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해마다 수확되는 자신의 농산물 가운데 일정량을 각종 상인들이나 마을의 일꾼들에게 지급하면 그들은 자즈만에게 이에 상응하는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관계가 성립됐다. 지주의 상속자와 그를 돕는 이발사나 세탁부의 후손들도 변함없이 이런 관계를 계승하면서 구축되었던 전통적인 자즈만 제도는 현대적 화폐 경제의 등장으로 그 관계가 임금과 일의 관계로 전환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촌락에서는 자즈만 제도와 화폐 경제가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 또한 인도의 카스트와 계급에 영향을 준 듯하다. 고대 인도에서는 네 가지 전통적인 계급이 바르나의 원래 의미인 피부색과 관련이 있었다. 예컨대 흰색은 브라만, 붉은색은 크샤트리아, 갈색은 바이샤, 그리고 검은색은 슈드라를 상징했다.



하지만 인도의 전통적인 카스트와 계급 유형은 서구와 인도 독립의 영향을 받아 지난 150여 년 동안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그 중에서도 19세기 후반 브라만을 능가하는 통치계급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영국 공무원들이 과거 인도의 브라만, 왕자, 왕, 태수 등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1854년 이후 시행된 공무원 임용시험을 통과한 인도인들은 계급과 상관없이 영어와 서양학문을 공부한 젊은이들로서 영국의 통치기간 동안 초(超)브라만의 지위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엘리트 계급은 인도 독립을 전후하여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인도 독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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