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음식, 그 상식을 뒤엎는 역사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 | 창해
음식, 그 상식을 뒤엎는 역사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이정환 옮김

창해/2002년 9월/224쪽/8,000원



1. 그 나라를 상징하는 '요리'의 숨겨진 이야기

'프랑스 요리'의 원류는 이탈리아

세계 최고 수준의 요리를 선보이고 있는 프랑스이지만 프랑스인이 옛날부터 특별히 음식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프랑스 요리의 기술이나 조리 방법, 식사 예절, 식기 보관 방법 등의 원류는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이다.

프랑스 요리가 음식 문화로서 장족의 진보를 보인 것은 1533년이다.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2세의 딸 카트린이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 앙리(앙리 2세)에게 시집올 때 다양한 음식 문화를 프랑스 왕궁으로 가져오고 나서의 일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함께 데리고 온 일급 요리사와 급사들을 비롯해 다채로운 조리법과 요리 도구, 포크나 글라스 등의 식기류, 『50가지의 식탁 예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요리 기술 전반에 걸친 내용이 ‘수입’되었다.

격이 낮은 프랑스의 식탁을 보고 한탄한 카트린 왕비는 음식과 패션에 남다른 열정을 쏟으며, 슈논소의 성에 있는 저택에서 밤낮으로 디너파티를 열어 요리 기술 향상에 힘썼다고 한다. 사실은 그녀의 식도락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언제나 디너파티가 그 이후의 프랑스 요리 기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카트린 왕비가 가져온 음식의 노하우는 프랑스 전역에 급속도로 퍼졌고 마침내 부르봉 왕조에서 요리에 조예가 깊은 앙리 4세와 그의 손자인 미식가 루이 14세가 출현하면서 화려하고 찬란한 프랑스 궁중 요리는 꽃을 피우게 된다. 그래도 루이 14세는 포크를 사용하는 것이 꽤나 힘들었던 듯 여전히 맨손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18세기로 접어들면 마요네즈나 거위의 비대한 간으로 만든 푸아그라가 등장하는 등 프랑스 전통 요리가 개발돼 내용 면에서도 예술적 경지에 이른다. 이렇게 세련된 궁중 요리는 ‘오뜨 큐이지느’라고 불리는데 현재의 프랑스 요리의 원형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부 특권 계급만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었다.

또한 18세기 말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그때까지 왕후나 귀족을 받들던 요리사들의 직업을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들은 생활수단으로서 직접 레스토랑을 개업하거나 유명한 음식점에 요리사로 고용되는 식으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이렇게 해서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일류 레스토랑이 잇따라 개업했는데 미식가들을 유혹하는 프랑스 요리가 지극히 일반적인 서민들의 입에 오르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19세기 후반이다.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유명한 요리사로 알려진 우르바인 듀보아는 식탁에 모든 요리를 늘어놓고, 한 번에 선을 보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맛을 손상시키지 않고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요리를 차례로 한 가지씩 내놓는 러시아식 서비스를 선보이는 등 식사를 제공하는 방법에서도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역사를 거쳐 완성된 프랑스 요리는 19세기 말까지 각국으로 보급돼 중화요리와 함께 세계 최고의 요리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한국 요리는 옛날부터 매웠는가?

한국 요리는 맵다는 움직일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있다. 실제로 한국인 1인당 연간 고추 소비량은 약 1.8~2.0kg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당연히 최고 수준이다. 그렇다면 한국 요리는 옛날부터 매운 맛을 자랑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한국 요리가 매운 이유는 고추를 듬뿍 사용하기 때문이지만 고추의 원산지는 중남미로 신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갖고 가 이식할 때까지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향신료다. 한국 음식이 지닌 매운맛의 대명사인 김치는 ‘국물이 많은 절인 야채’라는 의미의 침채(沈菜)가 그 어원인데 여기에 고춧가루를 넣어 담그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다. 그때까지는 마늘, 산초, 생강, 차조기 등 자생 재료에 소금으로 간을 맞춰 발효시키는 절인 야채에 지나지 않았다. 후추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의 모든 지역과 남만 무역으로 연결된 일본을 경유해 수입되는 향신료로 서민들은 도저히 접해볼 수 없는 귀중한 음식 재료였다.

한반도에 고추가 들어온 경로는 일본의 규수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조선 중기인 1613년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이라는 백과사전이야말로 한반도에서의 고추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이다. 이 책에서 식물을 다룬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남만초(南蠻椒 : 고추)에는 강한 독이 있다. 왜국(倭國 : 일본)에서 처음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흔히 왜겨자(일본 고추)라고도 불리는데 최근에는 이것을 재배하는 농가를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막에서는 소주와 함께 팔았는데 이것을 먹고 목숨을 잃은 자가 적지 않다.

당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독살할 목적으로 무서운 독초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소문도 나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고추는 독초라는 생각 때문에 요리에 사용한다는 발상 전환은 그후 약 1세기가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고추가 그럭저럭 빛을 보게 된 것은 18세기 초로 여겨진다. 1715년에 수도법(논에 물을 대어 벼를 심는 방법)을 체계화한 농학서 『산림경제』에서 처음으로 고추의 재배 방법이 소개됐다. 이윽고 고추는 김치나 젓갈의 변질 방지와 냄새 제거의 목적으로 서서히 들어가게 되었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고추장도 개발되었다. 이런 경위를 거치면서 고추를 사용한 매운맛이 서민들의 가정에 정착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세기 초다. 한국 요리는 맵다는 고정관념도 사실은 2백년 남짓한 음식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2. 세계를 움직인 차 ․ 커피 ․ 술의 매력

'차'는 어떻게 '티'가 되었는가?

차의 원산지는 미얀마 북부에서 중국의 운남성에 이르는 지역 일대다. 차를 마시는 습관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으로 처음에는 종기나 방광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고 졸음을 쫓아주는 한약의 일종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술을 금지하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3세기 중반부터 순수한 기호품으로서 마시게 되었고, 그로부터 약 1세기 정도 지나 본격적인 차 재배가 시작되었다. 7세기 초반, 당 초기에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환금작물로서 전매제도가 도입됐다.

국내에서의 거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주변 국가들과의 교역도 왕성해졌고, 이윽고 실크로드를 거쳐 오지의 오아시스 도시나 중앙아시아로 전파됐다. 특히 이런 지역은 건조 지대이기 때문에 차는 더할 나위 없는 음료수로서 매우 중요한 취급을 받았고, 나중에는 비단 이상으로 중요한 교역상품이 됐다고 한다. 차가 제조 방법, 음용 방법에 있어서 가장 발달한 것은 11~12세기의 송나라 시대다. 북송의 8대 황제인 휘종에 의한 『대관차론(大觀茶論)』은 다도의 정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차는 원나라 시대인 14세기가 되자 실크로드를 경유해 러시아에서 인도, 페르시아, 터키로까지 전파된다. 육로로 운반된 차는 모두 고형 녹차로 그들은 이것을 잘게 부수어 끓여서 우유나 양젖, 버터 등과 섞어 마셨다. 육로보다 3백여 년 정도 늦게 복건 지방의 아모이(厦門)가 차를 선적하는 항구로 등장하자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유럽 각지로도 전파되었는데 바닷길을 제일 먼저 독점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하지만 1669년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으로부터 직접 차를 수입하는데 성공하면서 영국은 바닷길을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이는 현재 영국이 세계 굴지의 차 소비국가가 된 계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영국에서도 녹차를 마셨지만 경수(硬水)의 수질이 발효시킨 차에 적합했고, 육식 중심의 식사에는 짙은 맛이 나는 차가 잘 어울렸기 때문에 나중에 홍차를 자주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서는 녹차보다 홍차를 더 선호하게 되었고, 19세기에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대규모 차 재배를 전개해 세계의 홍차 시장을 제압하자 영국뿐 아니라 중동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대부분 녹차에서 손을 떼고 홍차로 전환해버렸다. 그러나 영국에 의한 홍차 독점판매와 비싼 세금을 기피한 프랑스와 미국 등에서는 서민들의 기호가 저절로 차에서 커피로 옮겨갔고 그 때문에 홍차는 영국, 커피는 미국이라는 도식이 정착됐다.

차라는 말은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사전 『이아(爾雅)』에 처음 등장한다. 그 뜻은 ‘쓰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인데 아마 달였을 때의 쓴맛에서 유래된 것 같다. 차는 표준 중국어인 북경어에서도 ‘차’라고 발음하는데 원래는 광동어의 ‘차’에서 비롯된 말이다. 육로로 전파된 차는 그 집산지가 광동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그대로 정착됐다. 육로를 경유해 차가 전파된 지역, 예를 들어 몽고의 ‘차이’, 이란의 ‘차’, 터키나 러시아의 ‘챠이’, 한국의 ‘차’ 등은 모두 어원이 광동어의 ‘차’다.

한편 바닷길에서는 복건어인 ‘테’가 현지어로 정착됐다. 말레이 반도의 ‘테이’, 남인도나 스리랑카의 ‘테에이’,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서유럽의 ‘테’ 또는 ‘테이’ 그리고 영국의 ‘티’가 그런 지역에 해당한다. 이 ‘테’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바닷길을 경유해 차가 전파된 지역이다.







3. '음식에 대한 금기'가 성립된 진상

육식 금기의 탄생 배경

인류는 불을 발명하면서 육식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친 식생활 습관을 살펴보면 식물성 음식에 대한 금기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편견과 금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종이나 문화에 의한 미각의 차이나 조리 방법의 차이라기보다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그 고기를 먹는다는 데에 대한 감정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중에는 그것들이 종교적인 금기로 체계화된 경우도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예로 힌두교의 소나 이슬람교의 돼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한 채식주의를 주장하는 경우는 없었다. 단 인도의 자이나교나 예수 재림 교리를 중시하는 세븐스 데이 애드벤티스트(sevens day adventist) 등의 소규모 종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육식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육류를 거부하는 이른바 육식 금기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아가 달걀이나 유제품조차도 입에 대지 않는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그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즉 전 세계 사람들 대부분은 육식에 대한 저항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이 실태다. 그런데도 왜 육식 금기가 존재하는 것일까?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는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이 점을 설명하려 했다. 어떤 집단이나 민족에 있어서 육식은 어떤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가, 조달 비용과 이익이 어느 정도나 합치되는가 하는 판단을 근거로 금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면 그 음식물이 적은 비용으로 큰 이익을 올릴 수 있는가(칼로리 값) 없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즉 해리스에 의하면 비용 대 효과가 비슷한 음식물의 재배나 사육은 장려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쓸데없이 비용과 노력을 투입하지 않도록 ‘금기’라는 낙인을 찍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가 금기로 여겨지게 된 이유는 아무리 고기가 맛있어도 고온 건조한 중동 지역에서 돼지를 사육하는 것은 사회 전체로 볼 때 이익을 안겨주는 가축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중동에서 돼지는 금기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특정 육류가 편견의 대상이 되거나 금기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이처럼 사육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결과 식용으로서 당연하다는 듯 선호를 받는 육류와 그렇지 않은 육류의 우열이 매겨진다. 예를 들면 인도의 힌두교도들은(금식의 대상인 소는 제쳐두고) 육류는 일반적으로 염소, 양, 닭, 돼지, 말의 순서로 선호한다.

유럽에서는 돼지나 양의 경우와는 달리 소의 경우에는 농사를 지을 때에 많은 도움을 주는 동물이기 때문에 18세기 말까지는 육식을 위해 죽이면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쇠고기가 일반 가정의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곡류의 대량생산 체제가 확립되고 사료도 목초에서 곡물로 바뀌면서 2년 주기로 쇠고기를 얻을 수 있게 된 때이다. 또 20세기 초에 냉동기술이 보급될 때까지 유럽인들은 부드러운 비프 스테이크는 맛볼 수 없었다.

금기에 도전하는 세계의 엽기적인 요리

‘철의 위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의 어떤 작가는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면서 부화 직전의 달걀 요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깃털이 자라 병아리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달걀을 뜨거운 물에 삶은 것인데 태국의 ‘카이한한’이나 필리핀의 ‘바루트’도 같은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먹는 광경은 그야말로 엽기다. 그러나 엽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대적인 판단일 뿐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이밖에도 일반적으로 우리가 입에 대지 않는 쥐, 고양이, 박쥐, 도마뱀, 올챙이, 거머리, 나방 등의 다양한 종류가 세계 각지에서 일상적으로 섭취되고 있으며, 그것도 반드시 소수파에 의해서만 섭취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음식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 이런 것들은 어떻게 조리하는가에 따라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도 있는 요리다.

가식 영역 중에서 일반적인 엽기 요리인 동시에 자연식은 곤충 요리가 아닐까? 전 세계에서 먹을 수 있는 곤충은 약 5백여 종에 이른다고 하는데 지금도 곤충을 상식(常篒)하고 있는 지역은 중국,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다. 중국 내륙 지역의 농민은 누에의 번데기나 귀뚜라미를 즐겨 먹고, 베트남에서 라오스와 태국에 이르는 산악 지대에서는 물방개, 개미, 나비, 매미 등을 즐겨 먹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매미를 즐겨 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매미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매미는 마지막 탈피를 하기 직전의 번데기일 때가 가장 맛이 좋다. 그리고 성충인 경우에는 교미가 끝난 이후에 하얀 알이 가득 들어 있는 암컷이 맛있다.”

인류는 무엇 때문에 특이하고 엽기적인 음식 재료에 손을 대는 것일까? 특히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까지 먹는 것에 대해서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육식동물인 개는 고기의 공급원으로서는 효율성이 떨어지고,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충분히 공급돼 굳이 개를 도살해서 섭취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개고기를 즐기는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에는 돼지 이외의 육류는 항상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낙농업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채 중심의 식생활을 하게 됐고, 쉽게 볼 수 있는 개가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제공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한편 곤충의 경우에는 대형 초식, 잡식 동물을 손에 넣을 기회가 적은 지역일수록 음식 재료의 폭이 넓어짐과 동시에 곤충도 먹지 않을 수 없었던 듯 하다. 곤충은 대량으로 무리를 지어 서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잡을 수 있고,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영양가도 예상외로 높다. 대형 포유류는 부족하지만 곤충은 풍부한 열대 지역에 곤충식이 뿌리를 내린 이유도 이런 서식환경 때문이다.



4. '식사 방법과 식기'에 감추어져 있는 뜻밖의 문화사

'수식'이 가장 깨끗한 음식 문화인 이유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먹는 행위는 야만적이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며, 위생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낳은 단순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와 문명의 선진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는 유럽에서조차도 오랜 세월 동안 수식 문화가 이어져내려왔고, 젓가락 문화가 침투해 있는 일본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으로 밥을 주물러 만드는 초밥을 만들어 먹는 것은 물론이고, 토스트, 햄버거 등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사용해 먹고 있지 않은가.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