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레이 황 지음 | 푸른역사
수나라의 번성은 종이의 발명과 관계가 깊다. 수당시대에는 종이를 사용한지 500년이 넘었을 뿐 아니라 서기 600년 무렵에는 목판인쇄도 출현했다. 이는 전 시대에 비해 교육을 보편화시켰고, 전체 문관집단이 소규모 자작농 사회를 직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왔다. 또한 통일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정책이 필요함에 따라 수나라를 건국한 수문제는 토지부터 사상까지 모든 것을 통일시키려 하였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500가를 향(鄕)으로, 100가를 리(里)로 조직하여 강남 지역에 시행하자 곧 지방 토호세력의 반발이 일어났고 이를 평정하기 위한 문제의 통치는 더욱 긴박해졌다.
이후 595년에 천하의 무기를 거둬들이고, 상공업자들의 벼슬 진출을 막고, 민간에서의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했다. 게다가 사상을 통일하려는 취지에서 불교를 제창하고 중앙 학교를 축소하고 지방학교는 폐지하였다. 이는 덕을 모범으로 삼는 고급 인원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고압적인 정치는 중농정치에도 이어져서 전면적으로 생산하는 일에 몰두한 결과 완전한 교환과 분배법이 없어도 국가 경제를 다원화시키면서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이 도리어 누가 되어 농촌에서 남는 인력을 실업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나라의 인력과 물자를 다 쓰기 위한 정책을 세워야 했다
수양제 양광은 천부적인 자질이 매우 뛰어나고, 문필과 관련한 재주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는 나이 13세 때 진왕에 책봉되고 2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임시 총사령관직을 맡아서 1개월만에 강남 지방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한 차례의 전투를 통해서 위엄과 명망은 높였으나 교만함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하의 일은 모두 이처럼 쉽다는 생각에 장성을 축조하고 운하를 만들었으며, 오늘날의 월남 지역을 격파했다. 그 외에도 많은 소국들을 격파하거나 외교적 수단으로 접수했는데 이는 그의 능력도 있었지만 그를 받쳐주는 백성들의 노력과 풍부한 물자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수적 우세만을 믿고 벌인 서기 612년과 613년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는 신하들의 배신으로 패하고, 이후 각처의 반란과 들끓는 도적떼로 인해 고구려 정벌은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618년 봄에 많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측근들도 떠난 버린 뒤 양제도 총애하던 시종에 의해 피살되었다.
결국 통일왕국을 세우기 위해 수문제가 벌려 놓은 고구려 정벌이나 새로운 궁전의 축조와 같은 대규모 사업을 수양제는 남아도는 인력과 물자의 소모를 위해 쫓아 시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무리한 정책으로 인해 여인들까지 부역에 동원되고, 이에 반발하는 백성을 율령으로만 다스릴 수 없었으니 전국은 반란으로 들끓고 수 왕조는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당고조 이연은 617년에 수나라 양제를 내쫓고, 13세의 공제를 황제에 올려놓았다가 이듬해 스스로가 황제에 올라 당나라를 열었다. 630년 당나라가 돌궐을 깨뜨리자 당태종 이세민(二世民)은 네 명의 북방민족 수장에 의해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었다. 서기 7세기인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알려져 있다.
이후 당나라 군대는 서역의 여러 국가들을 공격하고 점령했는데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인도, 동쪽으로는 고구려의 평양까지 진출하였다. 당 왕조는 무력을 통한 정벌뿐만 아니라 문치에도 계속 힘을 기울였는데 당의 도읍지인 장안은 동서로 6마일, 남북으로는 5마일이었다. 당시의 모든 도시는 계획에 맞춰 건설되었는데 전 시가지를 110개의 격자 모양으로 나누고, 말이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만든 남북의 치도(馳道)는 500척이나 될 정도로 넓었다.
이 시기에 각 국에서 중국으로 사절단을 보냈는데 일본은 2,000여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승려를 파견했고, 이 중에서 몇몇은 몇 십 년씩 머무르면서 당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배워 일본에 전수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일본 역사에 율령정치라고 칭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됐으며 당 왕조의 균전제는 일본에서는 반전(班田)이 되었고 지금의 교토에 해당하는 헤이안과 나라는 장안을 모방하여 건축한 도시이다.
당은 중국 역사상 가장 외향적인 왕조로 손꼽히는데 이는 당 왕조와 접촉한 종족이 모두 48개국에 이르고 불교와 기타 경교(景敎),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 모든 종교의 수장들은 차별 없이 관위와 품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당 태종 자신이 소수민족의 혈통을 지닌 탓에 '소수'에 대해 관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유럽에서는 인종과 종교로 인한 다툼이 빈번했음과 비교할 때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역사가들은 당태종의 시대를 일컬어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오령(五嶺)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밖의 문을 닫지 않고, 여행하는 사람은 양식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길을 가다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라고 격찬했다. 서방의 중국학 학자들 역시 다른 황제에 대해서는 비판을 해도, 당태종 이세민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다.
이와 같은 치세는 수양제 말년과 당고조 초기에 벌어진 대규모 인명 살상을 겪으면서 백성들이 '잘 다스려지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의 공신이자 학자인 위징(魏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유하건대 배가 고픈 사람은 쉽게 밥을 먹고 갈증이 나는 사람은 쉽게 물을 마시는 법이다." 이세민은 이러한 시기에 정치에 힘쓰고 기회와 인연을 철저히 이용하여 정관시대의 치세를 이룩한 것이다.칭기즈 칸과 쿠빌라이분열에서 통일로 수당제국의 등장망국의 군주, 수양제모범적 치세, 당태종의 정관시대비정한 독재자, 측천무후서양에서 예수가 탄생하기 약 200년 전인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했고 이후 중국 역사에서 통일이 아닌 분열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에는 오랜 기간의 분열이 있었으나 모두 망명을 하면서까지 통일을 이루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거대한 나라가 끊임없이 통일하려는 예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진나라는 중국 대륙의 서쪽에, 그것도 산악지대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2∼3세대의 왕위 교체 동안 동부의 여섯 개의 큰 나라와 그 외의 작은 나라를 통일했다. 유럽의 예를 든다면 진시황 이후 2000년 후에 등장한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는 진시황 개인의 능력일 수도 있으나 진시황이 살았던 전국시대의 사회적 요인이 이유라고 하겠다.
중국의 자연환경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넓은 땅에서 다양하고 많은 자연재해가 일어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황하의 범람과 계절풍에 따른 집중 호우이다. 그리고 중국 문화는 황하를 끼고 발생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황하는 황토지대를 통과하고 이 황토는 중국 북부지역의 광대한 지역을 덮고 있다. 즉 황하는 대량의 진흙과 모래를 안고 흐르는데 시간이 지나면 강바닥에 진흙과 모래가 쌓여 강물이 제방을 넘쳐 사람과 가축을 덮치고 농작물에 피해를 주어 기근을 몰고 오게 된다. 주요 하천들도 진흙 성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그 수치가 높다고 알려진 아마존 강의 경우, 강물에 포함된 모래 성분이 총 무게의 10∼12%인데 1940년대 황하에서는 황토가 46%가 포함돼 있었고, 황하로 흘러드는 3개의 지류 모두 이 수치를 웃돌았다. 그러니 중국에서 황토의 퇴적 문제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황하 근처의 나라들이 각자 제방을 쌓는 것은 서로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사기』에 기원전 332년에 조나라는 제나라와 위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는데 일부러 황하의 제방을 터서 상대국을 수장해 버린 일이 있었다. 진시황도 각 국을 통일한 뒤 기원전 218년에 업적을 새긴 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하천이 막힌 것을 터뜨려 통하게 했다"라는 문구가 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덕수(德水)로 바꾸고, 진나라가 수덕(水德)을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수덕(水德)이란 오행(水木火土金)의 수(水)에 해당하는 덕을 가진 왕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치수는 중앙집권적 국가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한편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6년에 한 번은 풍년이 들고, 6년에 한 번은 가물며, 12년에 한 번은 큰 기근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농업지구에서는 전체 강우량의 80%가 여름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내린다.
중국의 계절풍은 필리핀 해에서 서북쪽을 따라서 불어오는데 이 계절풍이 신장 지역에 이르러 서쪽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을 받아서 위로 올라가면서 비를 만들어 낸다. 이 계절풍과 회오리바람이 어느 시기, 어느 지점에서 만나느냐에 따라서 한 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해당 지역은 수재를 만나고, 이에 반하면 가뭄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재앙은 전쟁의 빌미가 되어 한 나라가 재해를 입었을 때 이웃 나라가 구제 요청을 무시하면 곡식의 수입을 방해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전쟁 발발의 구실이 되었다.
각 제후들은 상호간의 혼인이나 개인적인 은혜 및 원망 같은 구실로 혹은 영토 확대를 위한 야심에서 전쟁을 일으키지만 인민들은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역사에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수한 전쟁의 이유가 이러한 자연재해에 따른 기근이었을 것이다.
주 왕조 이전에는 각 나라들이 멋대로 성을 쌓거나 방어 시설을 설치할 수 없도록 되어있으나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대륙은 이웃 나라에 위협을 느끼고 기존의 예를 어기고 성문을 쌓게 되었고 이러한 시설의 증가는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시켜야 할 필요를 부추겼다. 점차 병력을 전국적으로 동원하고, 농사짓는 면적에 따라서 세금을 징수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국가는 점점 커졌고, 중앙에서 자원을 통제하면 할수록 더 효과적으로 재앙을 구제하고 이웃을 구휼할 수 있는 시대가 왔고 이 시대와 진시황이 부합되어 통일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전통적인 도덕윤리로 측천무후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아들을 죽이고, 오빠를 찢어 죽이고, 황제를 시해하고, 어머니를 독살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반쯤은 억지로 갖다 붙인 허구이다. 오히려 측천무후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중국의 정국을 반세기 동안 주관한 인물이다. 그녀가 미친 영향은 역대 제왕 가운데 가장 큰 족적을 남긴 황제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측천무후는 당태종의 재인(才人)이었는데 재인은 반쯤은 시녀이자 반쯤은 실제적 명분 없는 희첩(姬妾)을 일컫는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감업사로 보내져 승려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태종의 아들 고종 이치(李治)를 만난다. 이후 그녀는 고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서기 655년에는 서른 전후의 나이로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태종의 여덟 아들 중 뒤의 네 아들의 어머니이기도 하였으나 두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가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이 왕조의 이름은 '주'이고 서기 690년의 일이었다. 측천무후가 여자 황제로 불린 기간은 약 15년이었는데 81세로 사망한 이후 그녀의 아들들이 뒤를 이었고, 당 왕조를 지배한 열다섯 명의 황제들 모두 그녀의 후손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명실상부한 당왕조의 선조이며 국모인 것이다.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들이라면 자신의 후예와 대신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서기 686년 각처에 구리로 만든 궤짝을 두고 밀고를 받았고 밀고된 사람은 처참하게 고문당하여 사지로 보냈는데 고문을 하면 "백 명 가운데 한 명도 온전치 못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측천무후의 사생활은 러시아의 차르 카사린(Kaichelin)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60세를 넘어서 총애하는 설회의(薛懷義)를 출가시켜 승려의 신분으로 궁에 들이고 70세를 넘겨서는 미소년 형제 장역지, 장창종을 "붉은 분으로 화장시키고 화려한 비단 옷을 입혀서" 자신의 딸과 함께 한가로이 지내며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어질지 않은 정치와 그른 행적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역사가들은 그녀에 대해 좋은 평을 내린다. 실제로 그녀는 황후로 28년, 황태후로 7년, 그 후 본인의 이름으로 15년 간이나 황제 노릇을 했지만 사생활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 기간에 어떠한 국가적 변고도 당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치적 실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당고종 스스로가 부여했기 때문이다. 당고종은 고혈압으로 여러 해 동안 시력장애를 겪고 있었으므로 측천무후에게 의지하여 서신을 판단하고, 그녀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게 했다. 이 수렴청정은 서기 650년부터 660년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 또한 고종은 34년간 재위하면서 신하들 앞에서 측천무후가 자신의 분신임을 공표하고 자신들을 천황(天皇)과 천후(天后)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두 사람을 두고 '두 성인(二聖)'이라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조서에도 태자가 즉위한 뒤 "군국에 관한 큰일 가운데 결정하지 못할 일이 있으면 천후의 뜻을 받아들여서 결정하라"고 되어 있을 정도였다.5대10국은 당이 멸망하고 송이 건국되기까지 54년간 존재한 정권이다. 이는 당왕조의 쇠망에서 비롯되었으나 이는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오히려 진화의 결과이다. 서기 8세기에 이르자 중국 전역의 인문적인 요소들은 갈수록 복잡해졌지만 각 지역이 진보하는 수준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는 당나라 초기에 설계된 행정상의 평면적인 조직과 실제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를 거쳐서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는 장안에서 동쪽으로 옮겨갔고, 국방의 중심지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 이후로 거란족의 요(遼)나라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금(金)나라와 만주족의 청(淸)나라도 모두 동북 지방에서 발원했다.
5대10국은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내주었다는 이유로 중국 역사의 최악의 시대라는 평을 받고 있으나 거란은 동북지방의 요녕성과 길림성 지역에서 발원하여 7세기 측천무후 시대에 이미 하북 지방을 유린하였고, 문자를 창조하고, 소금과 철에서 나오는 이익을 획득하는 법도 알았다. 947년에 이르러서야 국호를 요(遼)로 칭하였으나 이미 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규정하는 전장(典章)제도를 갖추고 한족이 세운 남조(南朝)와 대등한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만리장성 주변에는 다수민족인 한족이 이룬 농업사회와 소수민족이 이룬 유목사회의 세력이 서로 팽팽하던 차에 나라를 건국한 거란이 화북으로 진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연운 16주를 걸고 화의를 청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수 있다. 결국 연운 16주는 1368년 명태조 주원장에 이르러서야 432년만에 되찾게 된다.
당시의 군제는 아군(衙軍), 아병(衙兵)이라 했는데 이들은 관아에 소속된 군대로, 절도사의 호위부대에 지나지 않았으나 각 지방의 세도가들이 "이를 장악한 사람의 친군(親軍)으로 바꾸자"고 제창하면서 성격이 변화되었다. 세도가들인 번진들은 부세를 증가시키고, 무기를 수리했으며, 호구가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노약자는 농경에 힘쓰게 하고 정장(丁壯)들은 전투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러한 발전으로 몇 년 사이에 그 무리가 10만이 되었고, 이들로 자신을 보호하니 아병(衙兵)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아군의 장교들은 절도사의 양자(養子)가 되어 직위를 세습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를 확충할 때 고급지휘관으로 승격되었다. 이들은 군사적 호위 외에도 세금 징수와 재정관리의 임무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번진의 절도사들은 인사권을 가진 관리와 절도사 소속 관리인 "장사(長史)와 속관(屬官)들을 제멋대로 배치"했으니 세금 수입을 관리하고 처리하는 것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이 양세법을 원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