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의 역사
로리 롤러 지음 | 이지북
이탈리아의 발명가이며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물여섯 개의 뼈, 열아홉 개의 근육, 백여섯 개의 인대로 된 인간의 발을 "공학의 결정체요,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편안하고 여유 있는 운동 경기용 신발이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국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전적으로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의 굳은 의지와 용기가 일궈낸 혁신적인 기술 덕분이었다. 거의 20년 동안 굿이어는 '인도 고무'로 알려진 신기한 물질의 실용화에 매달렸고 결국 '고무의 경화'라는 열가공처리 기술을 개발해 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무로 부를 이룬 사람은 굿이어의 아이디어와 이름을 도용한 어느 부도덕한 사업가였다. 정작 굿이어는 1860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늘 속에 가려졌고 빚더미에 놓여 있었다.
어쨌든 그가 개발한 고무는 미국에서 수백만 달러를 낳는 사업으로 급성장했다. 개선된 고무로 만든 구두 밑창과 그 구두 갑피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새로운 기계가 등장하면서 대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1868년에는 고무 밑창에 캔버스 갑피, 그리고 끈이 달려 더욱 편안해진 '크로케 샌들'이 선보였다. 이것은 잔디에서 하는 운동경기인 크로케를 위한 최초의 스포츠 신발이었다. 1873년 이 샌들은 '스니커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72년 빌 바우어만이라는 오리건 대학 육상 코치는 달리기 선수가 금속 스파이크가 달리지 않은 가벼운 신발로 점착 마찰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와플 틀에서 힌트를 얻은 그는 네모난 스파이크가 그 해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흥분되어 액체 우레탄을 와플 틀에 쏟고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와플 틀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새로운 와플 모양의 운동화 밑창이 있었다. 결국 그는 '나이키'라는 새로운 회사의 최신식 신발 밑창을 만들어냈다. 디자이너들은 쐐기를 박은 뒤꿈치에 조그만 밑창을 덧대었고 중간 창과 나일론으로 갑피를 푹신하게 만들어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운동화를 생산해 냈다. 나이키는 1984년 신제품 에어 조던의 광고에 농구계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을 기용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나이키는 1992년에 거의 1억 켤레의 신발을 판매했고 이 기록은 1993년까지 이어졌다.
운동화를 구입한 사람의 90퍼센트가 단지 평상화로 신기 위해 선택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유행의 주기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자주 반복되는 것 같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말을 타지도 않으면서 부츠를 즐겨 신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미국인들 역시 농구나 마라톤을 할 생각이 없으면서도 운동화를 신는다. 편안하게 신을 수 있고 편리하며,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것이 운동화가 유행하게 된 원인이다. 그 결과 고무 밑창을 가진 운동화는 1994년 한 해 동안 3억 6,000만 켤레 이상 미국에서 판매되었다. 굿이어와 같은 열정적이었던 사람도 놀랐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6. 신발과 마술 - 신화와 문학7. 신발과 인생의 사건들 - 탄생, 죽음, 그리고 결혼8. 신발과 운동 - 크로케 샌들에서 에어 조던까지네덜란드 사람들은 한때 신발에 강력한 마법의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번개를 맞으면 그의 친척들은 초자연적인 힘이 퍼지지 않도록 재빨리 그의 신발을 땅에 묻어버렸다. 식민지 시대의 미국에서는 배가 아픈 사람을 치료할 때 그를 마루에 누이고 배 위에 무거운 신발을 올려놓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배가 아파 호소하는 사람에게 낡은 가죽 신발의 앞부분을 먹이는 것을 가장 훌륭한 치료법으로 쳤으며, 몽골에서도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 없애버리면 소화 기능이 회복된다고 믿었다.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전통적으로 원숭이 가죽 샌들을 신으면 어떤 질병도 치료된다고 믿고 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해 대략 7,500만 명이 사망했던 14세기의 유럽에서는 원숭이 가죽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절망 속에서 많은 런던 사람들은 도시를 탈출해 구두 가죽을 다루는 제혁소를 서둘러 찾아갔다. 그들은 제혁소의 강한 가죽 냄새를 맡으면 그 무시무시한 흑사병을 털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듯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는 신발이 개인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해왔다.
이탈리아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신발에 '악마의 눈을 피하게 하기'위해 붉은색 나비 리본을 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일랜드 지방에서는 아이를 잃어버린 경우 그 아이가 신던 신발을 묻으면 아이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린란드의 이누잇 족은 안전한 여행과 따뜻하고 건조한 발을 위해 사슴 가죽으로 바닥을 댄 카미크, 즉 부츠를 목에 걸었다. 중국 사람들은 신년을 맞아 새 신발을 사서 신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인들은 매일 아침 오른쪽 신발을 먼저 신었고 건물에 들어갈 때도 항상 오른발을 먼저 내디뎌야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아마도 '시작이 순조롭다(Getting off on the right foot).'라는 표현도 여기서 비롯된 듯싶다.
또한 신발은 문학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요정들의 이야기 속에서 신발은 탈출을 위한 마법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장화 신은 고양이』와 같은 유의 이야기 속에는 주인공들의 신기한 여행을 돕는 강력한 신발이 나온다. 요정들의 이야기 속에는 악마, 마녀, 그리고 도둑을 속이는 신발도 등장한다. 어떤 신발은 끊임없이 계속 춤을 추게 한다. 또 걸을 때마다 동전이 떨어지는 신발도 있다. 신발이 없었다면 신데렐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요정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인 『신데렐라』는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300개 이상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2000년도 더 된 이집트판 신데렐라 여자 주인공 로도페는 금으로 된 멋진 샌들을 신었다.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신발은 청혼에서 결혼까지, 탄생에서 죽음까지 삶의 중요한 사건들을 축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옛날 그리스인들은 연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발렌타인 카드가 아닌 자신의 샌들 밑창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 걸어 다니는 곳마다 그 이름이 땅에 찍히게 했다. 15세기 유럽에서는 결혼하고 싶은 여성에게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남성은 "나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새겨진 끝이 뾰족한 신발 모양의 주전자를 전해 주었다.
1860년 레스터셔 마을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신부의 아버지가 갑자기 길에서 주운 다 낡아 떨어진, 징이 박힌 부츠를 막 출발하려는 신부의 마차 위로 힘껏 집어던진 것이다. 그가 미쳤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단지 방금 결혼헌 신랑과 신부를 위해 행운을 비는 고대 의식을 따랐을 뿐이다. 부츠가 거리의 철쭉꽃들 사이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튕겨 들어가자마자 화려한 옷을 입은 신부 들러리들이 소리를 지르며 울타리로 뛰어들었다. 낡은 부츠를 먼저 잡는 사람이 다음 번 신부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단 찾으면 더러운 부츠를 집으로 가져가 공단 리본으로 매달았다. 행운과 많은 자녀를 기원하는 소망을 담아서. 이 풍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낡은 구두를 던지는 대신 들러리들은 신랑과 신부가 출발하기 전에 그들이 타고 가는 자동차 뒤에 낡은 구두를 묶는다.
중국의 산악 지역에서는 아기 갖기를 소망하는 여인들이 '마니티지렌 샤'라고 하는 아름다운 수가 놓은 인형 크기의 구두를 신성한 사당에 가져다 놓았다. 영국의 랭커셔 지방에서는 임신하기를 원하는 여인들이 지금 막 아기를 낳은 여성의 구두를 신어보기도 했다.
구두는 또한 죽음과 장례식의 상징이기도 했다. 미국 대통형의 장례식 때는 기수가 타지 않은 한 마리 말이 맨 앞에서 행군을 한다. 이 말의 등자에는 뒤쪽을 향한 부츠 하나가 올려져 있는데 이는 죽은 지도자를 의미한다. 서부 아프리카의 아산티 족에게는 왕이 죽으면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발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풍습이 있다.유행은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신발의 형태는 우리의 감정뿐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꿈까지도 이야기한다. 혼돈과 분쟁의 시대에는 딱딱하고 실용적인 부츠가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 300여 년 전, 유럽은 끊임없는 전쟁과 사회적 불안으로 술렁거렸다. 미래 역시 매우 암울해 보였다.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왕권을 잃고 영국의 시민전쟁 중 처형된 찰스 1세 치하의 영국에서는 군 장교부터 마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윗부분이 술로 장식된 괴물 같은 넓은 부츠에 반쯤 파묻혀 걸어다녔다.
그렇다면 신발의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옛날에는 왕이나, 왕비, 그리고 몇몇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600년대에 찰스 2세는 "영국의 왕 중 가장 영리하면서 또 가장 게으른 왕"이라고 불렸다. 승마와 도박, 그리고 예쁜 여성과의 유쾌한 어울림을 즐겼던 찰스 2세는 끝이 뭉툭한 신발 윗부분에 비단으로 만든 장미를 붙였다. 궁정의 다른 부유한 남녀들은 이 신발 형태를 빠르게 모방했다. 화려한 색상과 장식으로 보다 돋보이고자 노력하면서….
때로는 노동자 계층의 신발과 유사한 형태가 유행하기도 했다. 펌프는 1555년 영국에서 '얇은 신발'로 묘사되었다. 마차가 멈췄을 때 문을 열 준비를 하기 위해 주인의 마차를 따라 달려야 했던 하인을 위해 코르크나 가죽으로 된 밑창이 있는 목이 낮은 신발이 고안되었던 것이다. 1730년까지 젊고 부유하고 활동량이 많은 사람들은 이 신발을 벨벳으로 바꾸어 많이 신었다.
굽의 발명은 가장 극적인 유형의 변화 중 하나를 가져왔다. 근본적으로 굽은 비와 눈, 진흙 속에서 스커트 자락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근동의 여성들은 이미 500여 년 전에 초핀(chopines)이라는 것을 개발했다. 터키 여성들이 신었던 나무로 된 초핀은 높이가 20센티미터 정도고, 진줏빛 파란 조개와 은으로 선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샌들의 끈과 비슷한 가죽밴드로 발 주변을 둘러싸 고정시켰다.
이러한 초핀이 유럽으로 전파되어 16세기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는 너무도 많은 여성이 초핀을 신고 다녔다. 그래서 운하와 배의 도시 베니스의 부유한 여성들은 어딜 가든 걷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만약 걸으려고 했으면 이 초핀 때문에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인의 보조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곧 이 유행은 프랑스와 영국으로 번져갔는데, 이곳에서는 초핀의 높이가 무려 45센티미터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초핀에 대한 변화는 1500년대 초 이탈리아의 한 무명 구두 디자이너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높이를 조절하여 초핀의 불편함을 없앰으로써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것은 밑창의 앞쪽에 쐐기형 코르크를 붙이고 뒤꿈치 쪽을 좀더 높게 만든 형태였다. 이후 높은 굽의 신발은 구두 제조공이 양쪽 발에 서로 다른 창을 만들어 대면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코르크나 나무로 만들어진 8∼13센티미터 높이의 이 새로운 굽은 처음에는 너무 불편해서 신으면 다리가 퉁퉁 부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꼭두각시같이 죽마를 탄 듯한 걸음걸이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새로운 신발을 아치 모양 때문에 '브리지 슈즈' 또는 신발이 내는 소리 때문에 '클리킹 슈즈'라고 불렀다.1. 최초의 신발 - 샌들과 모카신2. 보호용 신발 - 부츠에서 나막신까지3. 신발과 권위 - 지도자가 신었던 것4. 신발과 지위 - 맨발에서 전족까지5. 신발과 유행 - 힐과 그 이상의 것우리는 종종 신발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장 먼저 신발을 신은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신발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 아프리카 남쪽 끝에서 시작됐다. 인도양 부근 클레이지 강 어귀에 암석으로 된 거주지와 동굴 속에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최초로 공동체를 이루며 무리지어 살았다.
클레이지 강 유역은 사냥감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했기 때문에, 거주자들은 옷을 거의 입지 않았을 것이고 신발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 7만년 동안 해변가 생활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지구 전반에 걸쳐 기후 변화가 일어나 기온이 내려가고 빙하가 팽창하자 해수면 수위가 낮아지면서 새로운 해안선이 나타난 것이다. 해안선이 거의 65킬로미터 밖으로 멀어짐에 따라 동물들은 먹을 것을 찾아 무리를 지어 이동했고, 초기 사냥꾼들도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나서거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규모 이주와 재정착 과정은 수천 년에 걸쳐 되풀이되었다. 사람들은 모래뿐인 뜨거운 사막과 암벽으로 된 높은 산, 춥고 눈이 많은 툰드라, 습하고 바람이 많은 초원 등 다양한 지역을 맨발로 수백 또는 수천 킬로미터나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신발이라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덩굴이나 길고 질긴 풀을 이용해 발에 묶었다.
그리고 수년에 걸친 시도 끝에 누군가가 샌들을 고안해 냈다. 손으로 만든 신발 중 가장 오래된 이 초기의 샌들은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되어 있다. 하나는 야자, 파피루스 또는 풀을 엮어 만든 것으로 발가락 주위에 식물의 섬유질 부분을 구부려 이은 고리가 달려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러한 형태의 샌들은 일본과 폴리네시아 지역에서부터 클래머스 인디언과 유트족 그리고 현 애리조나 지역의 선사시대 거주지를 포함하는 북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손질된 가죽을 잘라 가장자리에 구멍을 내고, 이를 가죽끈으로 연결한 형태다. 가죽끈은 샌들이 벗겨지지 않도록 졸라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종류의 샌들 중 하나가 안데스 고원지대인 페루에서 발견되었다.
어떻게 같은 모양의 샌들이 그토록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 몇몇 고고학자들은, 원시시대 사람들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지구 구석구석을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서로 신발 만드는 법을 차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최초의 샌들이 어디서 기원되었는지는 과학자들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샌들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그림 속에서 최초의 샌들 형태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 당시 이집트에서 샌들을 만드는 것은 커다란 사업이었다. 이집트의 샌들 제조공은 부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지만 자신도 사회에서 존경받는 특권을 누렸다.
고대 이집트의 특권층 사람들이 환상적인 샌들을 신고 돌아다니는 동안 먼 북쪽의 추운 지역에 사는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신고 다녔을까? 기원전 8,000년 이후, 원시 사냥꾼들은 지금의 스페인 동쪽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털이나 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실 이들도 샌들을 신고 이주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날씨가 점점 추워짐에 따라 샌들과 함께 급하게 '양말'을 신었을 것이다. 이때의 양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가죽이나 헝겊끈으로 발 주위를 감쌌는데, 샌들이 발바닥 보호를 위한 커버였다면 양말은 발의 보온 유지를 위한 싸개였다. 또한 이들은 한겨울 다리가 푹푹 빠지는 깊은 눈밭에서 사냥을 하면서 샌들을 더 넓고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스노 슈즈이다. 좀더 추운 지역으로 여행할 때는 가죽으로 된 긴 양말을 만들어 신었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결국은 이 가죽 양말이 스노 슈즈가 벗겨졌을 때 그대로 신발, 즉 부츠가 되었다는 것이다.전 역사를 통틀어 군인들은 두 다리와 발을 보호하기 위해 부츠를 신었다. 시골의 거친 길을 행군하기 위해, 결빙된 강 위를 걸어서 건너기 위해, 말을 타고 하는 긴 여행을 위해 부츠를 신었다. 이런 형태의 신발류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 중 하나가 2700년된 사르곤 2세(Sargon II, 721∼705 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