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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지 않은 마침표

박영만 지음 | 평단문화사
당시는 기묘사화의 피바람 속에 조광조가 사형을 당한 이듬해로 유생들의 사기가 떨어져 사회적으로 도학을 기피하고 문학만 숭상하는 경박한 풍조가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퇴계 이황은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그 후 두 차례나 더 낙방하였다. 그가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이며, 불행히도 그해에 아내가 죽고 말았다.



서른 살에 재혼한 이황은 서른네 살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호조좌랑, 홍문관 교리, 충청도 어사,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치는 동안 그의 관리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그것은 당시의 세도가 김안로가 동향이라 하여 그를 불렀으나 찾아가지 않았던 바, 그의 미움을 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정치 개혁의 중심에 뛰어들었다가 사약을 받고 비참한 결말을 맞은 조광조를 보면서 장차 높은 벼슬을 꿈꾸기보다는 성리학 연구에 뜻을 두었던 이황은 건강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마흔여섯 살 되던 해에 예안 땅 동쪽에 양진암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이때 스스로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연이은 퇴귀(退歸)와 무관하지가 않다.



얼마 후 조정에서 낙향해 있는 그에게 다시 벼슬을 내리자 그는 안양군수를 희망하였다가 9개월만에 풍기군수로 전임하였고 마흔아홉 살에는 다시 병을 이유로 세 차례나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냥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러자 다음해에 허락 없이 직책을 버렸다 하여 경상도 감사로부터 2계급 강등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퇴계(낙동강 상류)의 서쪽 양지바른 곳에 한서암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서 조용히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유학이란 원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이황의 관심사도 인간의 본성과 행동에 있었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4가지 본성, 즉 타인을 가엾게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羞惡地心),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의 4단(端)을 이(理)가 발현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 즉 희·노 ·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7가지 감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만일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이(理)가 발현되도록 힘쓴다면 도(道)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성리학은 바로 이러한 도에 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도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이론 체계는 현실정치를 저급한 것으로 보고 학문 연구에만 열중한 그의 자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후 이황은 4단(四端)과 7정(七情)은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는 이론을 들고 나온 기대승과 무려 8년간에 걸친 학문적 논쟁을 시작하였다. 당시 이황은 대사성(정3품)까지 지낸 59세의 노 대가였고 기대승은 겨우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황은 기대승의 이론을 신중히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진지한 논쟁은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참신한 기풍을 일으켜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황의 만년 관직 생활은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만이 계속되었다.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공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52세부터 70세까지 18년 동안 무려 50회의 사퇴서를 냈으며 특히 정3품 이상의 벼슬은 실제로 받아들인 것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학자의 최고 영예인 양관대제학을 제수 받기도 했으나 이마저 거절하고 고향에 도산서원을 세운 다음 후학지도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이때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다. 『성학십도』는 그가 일생을 두고 최대의 심혈을 기울여 쓴 것으로 선조는 이것을 열 폭의 병풍으로 만들어 거실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높은 그에게는 당연히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아무리 많은 유생들이 찾아와도 이를 싫어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자 대하기를 마치 벗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비록 어린 제자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른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고 보내고 맞을 때는 항상 공손히 하였다. 또한 그는 공부하러 오는 사람에게 투호를 시켜 그 솜씨를 보아 그 사람의 건강과 학문할 수 있는 덕이나 집중도를 가늠해 보았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전국 각처에서 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고 도산서원은 지방 사립학교와 같은 기능을 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이 후일 조정에 진출하였다.



이황은 1570년 11월, 종갓집 제사에 참석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악화되어 자리에 누웠다. 많은 후학을 배출한 70세의 노학자는 이제 자신의 생명이 다한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지었다.1.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



불멸의 영혼인생은 유한한데 시름은 그지없고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는 듯하구나.

계절은 때를 알아 갔다간 다시 오니

듣고 보고 느끼는 일은 많기도 하도다.1788년 1월, 82세의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자기 집 정원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오른쪽 팔과 팔목을 심하게 다쳤다. 때를 같이하여 회복 중이던 그는 신장 담석이 재발하여 그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아편을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치명적인 늑막염 증세가 나타났다. 그 해 4월 17일,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이 찾아와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최근 소식을 전해주는 가운데 프랭클린은 충만한 그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세상에는 죽음과 세금 말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미국 정부와 국민은 물론 프랑스 국회에서도 3일 동안 검은 옷을 입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주 정부 사상 최대의 조문객이 모인 가운데 크리스트교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죽어서도 능력과 업적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자신의 생전에 출판과 발명으로 벌어들인 돈을 유산으로 기탁했는데, 신탁된 유산은 투자되어 그 이자가 공공사업에 쓰여졌고, 오늘날까지도 이 신탁 유산은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프랭클린은 젊었을 때 재미 삼아 자신의 묘비명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다.프랭클린은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감투를 쓰고 신사인체 할수록 더 남을 기만한다. 또 비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게으른 사람일수록 더 신사인 체한다. 농부는 정직하게 씨를 뿌려 땀흘린 만큼 거둔다. 그런데 어떤가? 소위 신사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앉아서 권모술수를 부려 부당하게 많은 이익을 챙기지 않는가? 만약 창조주가 죽은 프랭클린을 교정하고 수정하여 새 판으로 등장시킨다 하더라도 그의 다재다능함과 겸손함과 부지런함은 절대 교정하거나 수정하지 않고 오히려 잘 금박 씌워 재등장시킬 것이다. 그의 업적과 겸손 앞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2. 돌에 새겨 뒷사람을 경계하노라



학문은 구할수록 멀어지고인쇄공 벤자민 프랭클린의 몸이 헌 책의 겉껍데기처럼 책장은 찢어져 나가고 글씨와 금박 은 지워진 채로 여기에 누워서 벌레들의 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바로 이 책의 원저자(창조주)의 교정과 수정 을 거쳐서 더 완벽한 새 판으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정철의 <관동별곡>을 읽다 보면 누구든 그의 넓은 시야와 수려하고 감칠맛 나는 표현력에 압도당한다. 지금이야 비행기가 있고 자동차가 있어 서울에서 관동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말을 타고 며칠씩 걸려야 금강산과 경포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철은 한양에서 강원도 전체에 이르는 관동 팔백 리를 마치 하늘에서 한눈에 내려다보는 듯 묘사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문학가로서는 정철은 호방하고 스케일이 큰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세상은 천양지차로 변했으되, 인생사는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그의 시비에 나타난 대로 인생은 유한한테 시름은 그지없다. 오늘날 또 다른 호방한 문객(文客)이 있어 '신관동별곡(新關東別曲)'을 짓는다면 그는 오늘의 세태를 엮어 넣어 관동 팔백 리를 어떻게 읊을지 자못 궁금하다. 다시 한 번 '사미인곡' 한 구절을 읊조려 그의 문학을 사모하고자 한다.송강 정철은 무척이나 술을 좋아한 시인이며 정치인이다. 일찍이 최명길이 백사 이항복에게 이렇게 물었다. "송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그러자 이항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송강이 반쯤 취했을 때 손뼉을 치며 담론하는 것을 보면 마치 하늘 위의 사람을 보는 것 같소이다." 술을 좋아했던 정철은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이와 같이 읊었다.하지만 정작 프랭클린의 묘비에는 그의 프랑스인 친구인 달랑베르가 헌사한 말 "이 사람은 하늘로부터 번개를, 폭군으로부터는 옥띠를 빼앗았다."라는 말이 새겨졌다. 프랭클린은 『자서전(Autobiography)』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앉은 신사보다 서 있는 농부가 더 훌륭하다."구덩이 속으로 사라진 존재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아르헨티나 국민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진다해도 영 원히 아르헨티나인으로 남을 것이고 여러분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여! 나의 말은 모두 진실이랍니다.『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학자이다. 로버트 볼트는 모어를 '전천후 인간' 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처럼 그는 실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국내의 정치적 긴장과 국제적인 압력에 대처하는 한편 국왕들이나 황제들과도 교분을 유지했으며, 훌륭한 판사이자 법률가 그리고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막상 불행이 닥쳐왔을 때 그 어느 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모어는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직을 맡아 그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한편 리처드 3세에 관한 역사서를 저술하여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평화협상을 주선하는 대사로 임명되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작위를 수여받은 다음 마침내 왕 바로 아래의 고위직인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모어는 왕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싶어하는 왕 헨리 8세에게 이러한 거짓 없는 충성은 오히려 걸림돌이었다. 교황은 헨리 8세의 이혼 청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모어에게 있어 왕의 이러한 결정은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였다. 그러나 여러 대학들과 의회와 심지어 성직자들까지도 왕의 입장에 찬성을 표시하면서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갔다. 그러나 모어만은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뜻으로 대법관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타협을 원하지 않았고 인기를 꾀하지도 않았던 탓에 결국 큰 어려움에 빠졌다.



그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집에는 돈이 없었다. 주교가 국가에 봉사한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35만 파운드라는 많은 돈을 주었지만 그는 양심의 이름으로 그것을 거절했다. 그런 차에 그를 회유하려는 또 다른 유혹이 찾아왔다. 세 명의 주교가 관직 복귀를 권하는 뜻으로 그를 새 왕비 즉위식에 초대한 것이다. 모어가 그것마저 거절하자 이제 왕의 가슴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모어는 왕국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고 양심이라는 이름 아래 공개적으로 자신과 성직자들을 경멸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한때는 대법관이었던 그가 피고의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고결성을 보여 주었다.한편 김장생은 정철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정직하고 티가 없음을 믿고 세상에 대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해 세상의 미움을 많이 산 사람이다." 이리저리 동서 힘의 균형에 따라 벼슬살이와 파직을 거듭하며 때로는 청백하고 강직하게, 때로는 권력의 시녀로 살다간 송강 정철. 그러나 그는 4·4조의 운율을 기본으로 아름다운 우리말을 구사해 호탕하고 비장한 품격의 수많은 시를 지어냄으로써,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정철은 153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을사사화와 관련하여 유배당하자 전라도 창평으로 옮겨가 약 10년간 김대승, 김인후 등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후 1562년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그는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냈고 1578년에는 장악원정으로 기용되었다가 곧 승지에 올랐다. 그러다가 1580년부터 3년간 강원도를 비롯하여 전라도,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이때 '훈민가','관동별곡' 등을 지었다. 이후 예조판서, 대사헌 등에 올랐으나 당파싸움에 휘말려 1584년 사직하고 창평에 내려가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짓는 등 작품활동에 전념하였다.



1589년 다시 우의정에 기용된 그는 정여립의 반란을 다스렸고, 다음해에는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 강화의 송정촌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자 『이조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철이 강화에 우거하다 술과 함께 병들어 죽었다."



원래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의 묘는 우암 송시열이 이장할 장소를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으로 정하여 후손인 정양이 그곳으로 옮겼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유명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시문청호송강정공철(有明朝鮮左議政寅城府院君諡文淸號松江鄭公澈)"이라 새겼고 그의 위패를 모신 송강사 뜰에는 시비(詩碑)가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사미인곡>의 서사(緖詞)를 적었다.소년 시절 카네기는 종종 어머니를 따라 근처 가게에 들르곤 했는데 가게에는 먹음직스러운 빨간 앵두가 놓여 있었다. 그가 앵두를 먹고 싶어 그것을 빤히 바라다보고 있자 가게 주인이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얘야, 한 줌 가지렴." 그러나 카네기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 넌 앵두를 싫어하니?" "아니에요, 좋아해요." "그럼 사양말고, 자 한 줌 가져가거라." 주인은 손수 한 웅큼의 앵두를 집어 카네기의 모자에 넣어 주었다. 집에 돌아온 뒤 어머니가 카네기에게 물었다.

"앤드루, 너 아까 상점에서 아저씨가 앵두를 가지라는데도 왜 그냥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야 받았니?" 그러자 카네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저씨 손이 제 손보다 더 크잖아요!"



또 카네기가 어렸을 때 우연히 새끼를 밴 어미 토끼 한 마리를 갖게 되었다. 어미 토끼는 곧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동네 아이들은 귀여운 토끼 새끼를 무척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카네기는 혼자서 많은 토끼의 먹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궁리 끝에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귀여운 토끼를 갖고 싶어하는 동네 친구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제의한 것이다. "클로버나 질경이를 뜯어 오는 사람한테는 토끼 새끼에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 주겠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아이들은 토끼 새끼에게 자기의 이름이 붙여진다는 말에 다투어 클로버와 질경이를 뜯어 왔던 것이다.



훗날 철강왕으로 불리게 되는 앤드루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 펜실베니아 주로 건너와 방적공, 전기기사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다. 그러던 그가 실업가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아주 조그마한 일이 계기가 되면서부터이다.



피츠버그에서 전기기사 일을 하고 있던 그는 어느 날 기차 안에서 한 발명가와 옆자리에 앉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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