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지 않은 마침표
박영만 지음 | 평단문화사
1.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
불멸의 영혼『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학자이다. 로버트 볼트는 모어를 '전천후 인간' 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처럼 그는 실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국내의 정치적 긴장과 국제적인 압력에 대처하는 한편 국왕들이나 황제들과도 교분을 유지했으며, 훌륭한 판사이자 법률가 그리고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막상 불행이 닥쳐왔을 때 그 어느 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모어는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직을 맡아 그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한편 리처드 3세에 관한 역사서를 저술하여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평화협상을 주선하는 대사로 임명되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작위를 수여받은 다음 마침내 왕 바로 아래의 고위직인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모어는 왕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싶어하는 왕 헨리 8세에게 이러한 거짓 없는 충성은 오히려 걸림돌이었다. 교황은 헨리 8세의 이혼 청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모어에게 있어 왕의 이러한 결정은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였다. 그러나 여러 대학들과 의회와 심지어 성직자들까지도 왕의 입장에 찬성을 표시하면서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갔다. 그러나 모어만은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뜻으로 대법관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타협을 원하지 않았고 인기를 꾀하지도 않았던 탓에 결국 큰 어려움에 빠졌다.
그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집에는 돈이 없었다. 주교가 국가에 봉사한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35만 파운드라는 많은 돈을 주었지만 그는 양심의 이름으로 그것을 거절했다. 그런 차에 그를 회유하려는 또 다른 유혹이 찾아왔다. 세 명의 주교가 관직 복귀를 권하는 뜻으로 그를 새 왕비 즉위식에 초대한 것이다. 모어가 그것마저 거절하자 이제 왕의 가슴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모어는 왕국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고 양심이라는 이름 아래 공개적으로 자신과 성직자들을 경멸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한때는 대법관이었던 그가 피고의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고결성을 보여 주었다.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고 해로운 말을 한 적도 없다. 오히려 나는 모든 사람들의 행운 을 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때문에 살 수 없다면 나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 다.
이것은 분명히 도전이었다. 그러나 법정은 모어에게 사형을 언도할 만한 충분한 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 모어가 런던 탑에 갇혀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법정은 드디어 리처드 리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구실을 찾아냈다. 왕은 친절하게도 모어에게 '할복 자살형이 마땅하나 그간의 공로를 인정, 단두대형으로 감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목이 잘리는 날, 단두대로 올라가는 모어는 여전히 평온했고 간수들에게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간수의 부축을 받으며 단두대 계단에 오르면서 말했다. "오를 때는 부축을 받지만 내려갈 때는 나 혼자 내려가리다." 마침내 단두대의 칼날은 왕을 위해 기도를 올리자고 말하는 모어의 목을 내리쳤고 사형 집행인은 짚 위로 굴러 떨어진 그의 머리를 재빨리 집어들고 높이 쳐들어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렇게 하여 토마스 모어는 결국 충성을 다한 자신의 군주에게 오히려 처형당하는 신세로 비운의 종말을 맞고 말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장례식과 무덤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1935년에 로마 교황은 그에게 성자의 칭호를 내렸고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을 새겼다.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의 ou(=no)와 topos(=place)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아무 데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이상향은 재산의 공유와 교육의 평등, 종교의 관용 그리고 고결한 양심이 살아 있는 나라이다.
인간만이 양심을 위해 죽을 수 있고 인간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양심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나아가 강제적으로 죽음을 맞게 될 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초연히 육체를 버리고 고결한 양심과 영혼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토마스 모어 경(卿)의 묘비명 앞에서 당당히 머리를 들 수가 없다. 육체를 버린 그의 영혼은 유토피아의 이상향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불멸할 것이다.
더 완벽한 새 판으로벤자민 프랭클린은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만큼이나 다재다능했던 인물이다. 열두 살이 된 프랭클린은 보스턴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는 형 밑으로 들어가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도제 수업 중 그는 빠르게 일을 배워 곧 기술자가 되었고 틈틈이 산술과 기하학, 글 쓰기 등을 독학했다.
그가 아직 인쇄소의 견습공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주인이 일러준 지름길을 따라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막 담을 지나려는데 이웃집 주인이 머리를 숙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길 중간에 키보다 낮은 들보가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서 아무 생각 없이 걷던 프랭클린은 들보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주인은 급히 달려와서 상처 난 프랭클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머리를 자주 숙이게. 머리를 자주 숙일수록 부딪히는 일이 적어질 걸세."
이런 일이 있은 후 프랭클린은 평생 겸손을 제1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20세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 13훈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만든 13훈은 겸손, 침묵, 규율, 절약, 근면, 성실, 정의, 중용, 청결, 보건, 평정, 순결, 결단이다.
열여섯 살 되던 해에 프랭클린은 자신이 쓴 글을 익명으로 형이 발행하는 신문에 투고했다. 그러자 그의 형과 형 친구는 글 솜씨로 보아 보스턴에서 제법 유명한 어느 인사의 글인 줄로 알고 프랭클린의 글을 신문에 게재했으며, 그 이후에도 프랭클린은 익명으로 짧은 글을 여러 차례 형이 발행하는 신문에 투고했다.
그러나 결국 그 일이 들통나 형과 다투고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나와 자신의 인쇄소를 차렸다. 1729년, 스물세 살 되던 해에 그는 「펜실베니아 가제트」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신문계에 나서는 한편 인기 있는 연감을 간행하고 상식 철학과 기지와 경구가 넘치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을 발행하여 불과 2∼3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발행인 겸 편집인, 작가로 떠올랐다. 이렇게 해서 차츰 유명해진 프랭클린은 1950년 필라델피아 주 의원에 당선되었고, 7년 뒤에는 주 대표로 영국에 건너가 식민지 인지조령(印紙條令) 철폐를 관철시켰다.
이와 같이 인쇄와 출판, 외교관으로서 성공적인 길을 가면서도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연을 띄워 번개를 붙잡아 병에 넣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그 번개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스토브와 피뢰침을 발명하고, 안경을 만들고, 인쇄기를 개량하는 등 과학과 발명 분야에서도 유감없이 재능을 발휘하였다. 또 정치가로서 1775년, 독립선언 기초 위원이 되어 미국 독립에 헌신하는 한편 도로청소법을 만들고, 병원을 설립하고, 소방대를 조직하는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프랭클린은 상대를 노하게 하지 않고 공통의 결론에 도달하는 기술이 뛰어나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의원들도 그의 회화술을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술회했을 뿐이다.
나는 상대방이 말한 것을 절대 반대하거나 내 의견을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일은 결코 하 지 않았다. 이것이 습관화되면서 과거 50년이래 나의 입에서 단정적인 말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는 말솜씨가 없어 언제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꾸물거리곤 했으 나 그래도 나의 의견은 대부분 통했다.
1788년 1월, 82세의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자기 집 정원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오른쪽 팔과 팔목을 심하게 다쳤다. 때를 같이하여 회복 중이던 그는 신장 담석이 재발하여 그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아편을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치명적인 늑막염 증세가 나타났다. 그 해 4월 17일,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이 찾아와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최근 소식을 전해주는 가운데 프랭클린은 충만한 그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세상에는 죽음과 세금 말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미국 정부와 국민은 물론 프랑스 국회에서도 3일 동안 검은 옷을 입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주 정부 사상 최대의 조문객이 모인 가운데 크리스트교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죽어서도 능력과 업적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자신의 생전에 출판과 발명으로 벌어들인 돈을 유산으로 기탁했는데, 신탁된 유산은 투자되어 그 이자가 공공사업에 쓰여졌고, 오늘날까지도 이 신탁 유산은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프랭클린은 젊었을 때 재미 삼아 자신의 묘비명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다.
인쇄공 벤자민 프랭클린의 몸이 헌 책의 겉껍데기처럼 책장은 찢어져 나가고 글씨와 금박 은 지워진 채로 여기에 누워서 벌레들의 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바로 이 책의 원저자(창조주)의 교정과 수정 을 거쳐서 더 완벽한 새 판으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프랭클린의 묘비에는 그의 프랑스인 친구인 달랑베르가 헌사한 말 "이 사람은 하늘로부터 번개를, 폭군으로부터는 옥띠를 빼앗았다."라는 말이 새겨졌다. 프랭클린은 『자서전(Autobiography)』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앉은 신사보다 서 있는 농부가 더 훌륭하다."
프랭클린은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감투를 쓰고 신사인체 할수록 더 남을 기만한다. 또 비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게으른 사람일수록 더 신사인 체한다. 농부는 정직하게 씨를 뿌려 땀흘린 만큼 거둔다. 그런데 어떤가? 소위 신사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앉아서 권모술수를 부려 부당하게 많은 이익을 챙기지 않는가? 만약 창조주가 죽은 프랭클린을 교정하고 수정하여 새 판으로 등장시킨다 하더라도 그의 다재다능함과 겸손함과 부지런함은 절대 교정하거나 수정하지 않고 오히려 잘 금박 씌워 재등장시킬 것이다. 그의 업적과 겸손 앞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구덩이 속으로 사라진 존재히틀러는 북오스트리아 라인 강변의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화가가 되리라 결심하고 18세 되던 해에 빈의 미술대학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자, 빈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림엽서나 포스터를 그려 주면서 끼니를 이어 가는 곤궁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바이에른 예비보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4년간 근무했다. 최전방에 있는 동안 그는 부상을 당하고 독가스에 쓰러지기도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수훈을 세워 2개의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그후 1920년, '독일노동자당'이라는 작은 정당에 가입한 히틀러는 그 약소하고 무능한 정당을 가공할 정도의 강한 조직으로 키워내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바이에른 정부를 옹호하는 한편 바이마르 공화 정부에 대한 대규모의 반란을 획책하여 맥주홀을 거점으로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 반역죄로 체포되어 1924년까지 투옥되었다. 그런데 1년여 동안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을 때 그의 손에는 독일 제국의 세계 제패 계획을 골자로 한 엄청난 원고가 들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훗날 나치 당원의 성전이 된 『나의 투쟁(Mein Kamph)』이다.
출옥 후 히틀러는 독일 국내의 혼란과 핍박받는 민중을 이용해 당을 재건하는 데 주력하여 당수가 된다. 그리고 독일노동자당은 1930년 9월 총선에서 대승하여 사회민주당에 이은 제2당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 히틀러는 군부, 대자본가, 지주 등의 지지를 얻어 수상에 취임함으로써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고 이듬해에 대통령인 힌덴부르크가 죽자 마침내 총통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권좌에 오른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대립하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 없애거나 영원히 투옥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10만 명이나 되는 친위대, 즉 갈색 셔츠의 돌격대를 거느리고 아리아 인종은 완전무결하다는 정책을 펴서 약 600만 명 이상의 유럽계 유대인과 집시 그리고 반대파를 독가스실 또는 화형장으로 보냈다. 히틀러는 독일을 재정비하면서 라인강 서쪽의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이어 오스트리아를 합병, 다시 즈데텐란트를 공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그리고 1939년 9월에는 무장한 독일군을 폴란드 국경으로 진격시켜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당겼다.
1944년, 총통은 전 독일군의 전투를 직접 지휘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사자 수가 몇 백만 명에 이르자 1944년 그를 죽이려는 암살 사건에 직면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히틀러는 무자비하게도 그 범인들에 대하여 쇠갈고리로 살을 걸어 매단 다음 가느다란 피아노 선으로 목을 조르는 처형을 감행하였다.
1941년 소련과 개전한 후에도 파죽지세로 전 유럽과 아프리카를 석권하던 독일군은 1945년에 접어들자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게 패배하기 시작했다. 결국 항복 직전까지 몰린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베를린 수상 관저 지하에 구축된 콘크리트 방공호에서 그의 정부 에바 브라운과 아침 일찍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날 히틀러는 권총으로, 에바는 청산가리로 자살을 결행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시체를 화장할 것을 막료들에게 유언했는데 그의 시체는 사진을 찍은 다음 담요에 싸여 정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포탄 구덩이에 넣어진 뒤 시체 위에 휘발유가 뿌려져 불에 태워졌다. 그가 죽은 지 불과 10분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의식을 갖출 겨를도 없이 불에 태워졌기 때문에 물론 묘비나 묘비명 같은 것은 남지 않았다. 이와 같이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미친 개'처럼 전 유럽을 들쑤셔 놓았던 사나이는 불길 속에 사라져 버렸다.
일찍이 토마스 제퍼슨은 "무지가 과오보다 낫다. 그릇된 것을 믿는 사람보다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훨씬 진리에 가깝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릇된 것을 믿고 미쳐 날뛰는, 아니 악마의 혼령을 뒤집어 쓴 광인(狂人)이 아니고서야 어찌 수백만의 인명을 독가스실로 보내 고통스럽게 살상하는 인종 청소의 빗자루를 들 수 있었겠는가? 히틀러의 묘비명이 남지 않은 것, 시체를 태워서 존재마저 남기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소련군이 독일을 점령한 뒤, 의사들은 히틀러의 타고남은 시체를 검사한 다음 '표면은 불에 탔지만 형태가 그대로 보존된 음낭 중 오른쪽 고환만 발견되고 왼쪽 고환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히틀러는 고환이 한 개인 기형아였다는 사실인데, 이 같은 사실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가 곡조에 맞추어 다음과 같은 노래를 만들어 부름으로써 나치의 괴수들을 우롱했다.
"히틀러의 볼(Ball)은 겨우 한 개, 괴링은 두 개지만 너무 작고 히믈러의 것도 비슷한데 불쌍한 괴벨스는 아예 없구나." 바지 속에 감춰진 외방울의 콤플렉스가 한 시대를 잿더미로 만들고 그 위에 해골을 쌓았다니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