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서·화 풍류담
최종세 지음 | 책이있는마을
중국 시․서․화 풍류담
최종세 엮음
책이있는마을/2002년 7월/319쪽/10,000원
1. 당대(唐代) 편
왕희지(王羲之) 부자의 서예 비결
동진시대(東晋時代)의 왕씨(王氏) 가문은 첫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거족이면서 서예에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니 왕군(王軍), 왕흡(王洽), 왕민(王珉),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등이 당시 예림(藝林)의 거장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왕희지의 성취가 가장 뛰어나 고대 중국에서 서성(書聖)의 칭호를 받았던 몇몇 서예가들 중에서도 유독 그만이 서성 중의 서성, 즉 계관서성(桂冠書聖)의 영예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글씨를 쓰는 데 있어 무슨 남다른 비결, 즉 비법을 간직한 책이라도 지니고 있었던 말인가? 그 비결은 그가 일찍이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던 것으로 바로 정원에 놓여 있는 18개의 물독이었다. 왕씨 가문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여 그 가문의 자제들은 어릴 때부터 서예를 배워야만 했다.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인 왕헌지는 매우 총명하여 그 또래의 자제 중에서도 서예 솜씨가 가장 뛰어났는데 다만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 흠이었다. 때문에 왕희지가 자식들에게 매일 몇 시간씩 연습을 시킬 때에도 왕헌지는 창 밖에서 노는 소리가 들려오기만 하면 마음은 이미 서방(書房)을 떠나 부친이 정해준 학습량을 적당히 얼버무리곤 하였다.
어느 날, 대충 몇 장의 글씨를 쓴 왕헌지는 살그머니 집 밖에서 놀다가 모친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는 이미 여러 해를 연습하여 완숙해졌노라고 변명했다. 이에 모친이 그에게 글씨를 써서 가져와보라고 하자 그는 즉시 대(大)자를 썼다. 이때 마침 왕희지가 서방으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점 하나를 보태어 태(太)자로 바꿔 써놓았다. 왕헌지는 득의양양하여 부자가 합작하여 쓴 글씨를 모친에게 가져다 보여드리니 이를 자세히 본 모친이 말하였다. “단지 이 점 하나가 잘 써졌구나.”
이 말에 왕헌지는 아버지와 아직 크게 실력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부친의 수중에 틀림없이 서예의 비결이 있으리라 여기고 즉시 부친에게 가서 청하였다. 그러자 왕희지는 그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그곳에 놓여 있는 18개의 큰 물독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비결은 모두 이 물독 안에 있다. 네가 이 안의 물을 다 쓰고 난 후라면 비결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왕헌지는 아직도 멀었다는 답답한 마음에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성문(城門) 입구에 이르러 그는 떡을 굽는 어떤 노파가 대나무 젓가락으로 다 구운 떡을 어깨 너머로 던지는데,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뒤쪽에 놓여 있는 둥글고 평평한 대나무 바구니 속에 차곡차곡 가지런하게 쌓이는 걸 보았다. 경탄을 금치 못하고 왕헌지는 물었다. “할머니,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이 떡들을 어쩌면 그리도 정확하게 던져서 가지런하게 쌓을 수 있으십니까?” 이 말에 노파는 한 차례 웃더니 말하였다. “별거 아니지. 그저 왕희지가 글씨를 쓰는 것처럼 연습하면 된다네.”
이 말에 더욱 자극을 받은 왕헌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서방에 처박힌 채 글씨 쓰기에 몰두하면서 아예 서방 밖으로 나가려하지 않았다. 한번은 서방으로 들어온 왕희지가 등뒤에서 왕헌지의 붓을 뽑으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왕희지는 크게 기뻐하였으니, 왕헌지가 글씨를 쓰는 손에 힘이 집중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왕헌지는 18개의 물독을 글씨 쓰는 데 다 사용하였고, 그러고도 더 연습을 하여 모두가 알아주는 유명한 서예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와 왕희지를 병칭(竝稱)하여 이왕(二王)이라 하였는데 왕희지는 대왕(大王), 왕헌지는 소왕(小王)이라고 불렀다.
한번은 왕희지가 볼일이 있어 건강(健康 : 당시의 수도로 지금의 남경시)로 떠나기 전에 벽에다 몇 글자를 써놓았는데, 왕헌지가 벽의 글씨를 지워버리고 부친의 필체를 그대로 흉내내어 써놓았다. 얼마 후에 돌아온 왕희지는 자신이 써놓은 글씨를 살펴보더니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이고! 내가 떠나던 날 술을 많이 먹어 필경은 이렇게 글씨를 써놓고 말았구나!”
이 말을 옆에서 들은 왕헌지는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아예 자만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더욱 착실하게 글씨 쓰기를 연마하였다.
2. 송대(宋代) 편
그림을 모사(摹寫)하다 망신당한 미불
북송(北宋)의 유명한 서화가(書畵家)이자 비평가였던 미불의 호(號)로 녹문거사(鹿門居士), 양양만사(襄陽漫士), 해악외사(海岳外士) 등이 있다. 대대로 태원(太原)에서 살다가 양양(지금의 호북성)으로 이주하였으며 후에 다시 윤주(지금의 강소성)에 정착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는 채양(蔡襄),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과 더불어 송사가(宋四家)로 불렸으며, 산수화에 있어서는 수묵(水墨)을 점염(點染)하는 수법을 다용(多用)하여 중국 회화사에 있어 미가산(米家山), 미씨운산(米氏雲山), 미파(米派) 등으로 불렸다.
미불은 어린 시절부터 서화를 좋아해서 명첩(名帖)과 고화(古畵)를 모사(摹寫)함에 진위(眞僞)를 변별해낼 수 없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절묘한 모사 솜씨를 지닌 미불도 실수한 적이 있었으니, 전설에 의하면 그가 모사한 당대(唐代) 화가 대숭(戴嵩)의 <와우도(臥牛圖)>는 하자가 드러나서 한때 웃음거리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가 연수군(지금의 강소성)의 군사(오늘날의 군수와 비슷함)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번화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노인이 길가에서 대숭의 진품 <와우도>를 팔고 있었다. 이를 본 미불은 몹시 탐이 났으나 지니고 있던 돈도 없는데다 값도 매우 비싸 살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술수를 생각해내고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영감, 이 그림이 참으로 좋긴 좋은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기서는 구분할 수가 없구먼. 그러니 하루만 나에게 빌려주시게. 내가 집으로 가져가서 자세히 감정해보고 진짜라면 즉시 사겠네.” 노인은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관리인데다 온 나라가 알아주는 서화가이니 어찌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그림을 내주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대인께서 가져가십시오. 소인이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림을 갖고 귀가한 미불은 그날로 한 폭을 모사하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털끝만큼도 진품과 다름없기에 득의양양하였다. 다음날 아침, 노인이 오자 미불은 진위를 변별하기가 어려워 그냥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그림을 보더니 미불에게 말했다. “미 대인께서는 진본을 돌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에 깜짝 놀란 미불이 말하였다. “영감은 이것이 어떻게 진본이 아닌지 알아낼 수 있었소?”
“제가 가진 진본은 소의 눈동자 안에 목동의 그림자가 은은하게 어른거렸는데 돌려주신 그림의 눈동자 안에는 그게 없으니 틀림없이 미 대인께서는 모사본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제야 미불이 진본을 살펴보니 소의 눈동자 안에는 확실히 목동의 그림자가 절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 볼 때는 모호하였으나 자세히 보니 과연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핍진(逼眞)하지 않은가! 홀연히 깨달은 미불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는 진본을 돌려주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미불은 참으로 고개를 들고 다니기가 민망하게 되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단지 옛 사람들의 글자나 그림을 모사하였을 뿐이지 하나도 나의 개성이 담긴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은 결국 화단(畵壇)을 어지럽힐 뿐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언젠가는 나 역시 옛 사람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일가(一家)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정한 미불은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더욱 분발하여 그림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취합하여 자신의 독특한 기법을 창안해냈다. 이것이 바로 천하에 이름을 드날린 ‘미점산수(米點山水)’로 그의 기법은 훗날 서양으로 전파되어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상파(印象派)의 비조(鼻祖)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3. 명대(明代) 편
속아서 현판을 써준 황도주(黃道周)
황도주의 자(字)는 유평(幼平) 또는 유현(幼玄), 호(號)는 석재(石齋)로 복건성 장포현 사람이다. 명대의 학자이자 서화가로 시문(時文)과 천문(天文) 및 수리(數理)에도 능했다.
복건성 장주부(구룡강 중하류 및 그 서남쪽 일대)의 공부가(公府街)를 이전에는 탐화가(探花街)로 불렀는데, 원래 명조(明朝) 때 탐화(진사시에 3등으로 오른 자를 칭하는 말)였던 사련(謝璉)의 옛 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 때에 황오(黃梧)라는 자가 해징성(海澄城)을 청나라 조정에 바치고 투항했기에 청은 그를 곧 해징공으로 봉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황오의 원명(原名)은 결코 오(梧)가 아니며, 그가 투항할 당시 함께 했던 자가 오씨(吳氏) 성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청의 황제가 그들의 성을 물을 때, 한 사람은 황(黃) 아무개라 대답했으며 또 한 사람은 오(吳) 아무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황제가 경성(京城)으로 돌아가 고봉(誥封 : 공이 있는 자나 그의 인척에게 황제가 수요하는 작위나 관직)을 내릴 때, 그만 그들의 성만 기억하고 이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냥 ‘황오(黃吳)’라고 쓰도록 하였는데 또 고봉을 쓰는 관원은 ‘황오(黃梧)’라고 잘못 알아듣고는 그렇게 썼다.
당시 황오의 권세는 실로 막강하여 탐화부를 강점하고 황공부(黃公府)로 개명하였으며 탐화가는 공부가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미 습관이 되어 여전히 탐화가라고 불렀다. 이에 황오는 집의 머슴에게 명령을 내려 매일 그 거리의 입구에 동전을 가득 넣은 항아리를 놓고 그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리의 이름을 묻게 하였다. 그래서 ‘공부가’라고 답하는 사람에게는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을 마음대로 꺼내 가도록 하였다. 단 그 항아리는 입구가 매우 작아 동전을 많이 집으면 손을 빼낼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황오는 이에 그치지 않고 ‘탐화가’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가죽채찍으로 때리면서 그 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은 황오의 권세가 두려워서 점점 ‘탐화가’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황오의 저택은 거리의 우측에 있었는데 조묘(祖廟), 즉 선조의 사당을 지을 때에 서화가로 명성이 높던 황도주에게 ‘상공조묘(上公祖廟)’라는 현판의 글씨를 부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도주는 황오를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써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오 측근들은 황도주 집안의 계집종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말했다. “만약 한 글자를 얻어온다면 1천 금을 주겠다.”
황도주 집안의 계집종들은 모두 글씨를 배우고 있었다. 그중 한 계집종이 계책을 생각해내고는 매일같이 ‘공(公)’자를 연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도주는 그 계집종이 매우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으나 아직 미숙한 것을 보고는 소리내어 웃으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번 써볼 테니 잘 보도록 하여라!”
붓을 든 황도주가 정신을 집중하여 단정하게 ‘공’자를 썼다. 황도주가 친히 쓴 ‘공’자를 얻게 된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남몰래 황공부로 가지고 가서는 1천 금과 바꾸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매일 같이 ‘묘(廟)’자를 연습하였다. 이를 본 황도주는 또 그녀에게 말하였다. “‘묘’ 자는 그렇게 쓰면 안 된다. 내가 한번 써볼 테니 잘 보도록 하여라!”
그렇게 또 한자를 얻게 된 그녀는 다시 남몰래 황공부로 글씨를 가지고 가서 1천 금과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 황도주는 그녀가 ‘조(祖)’자를 연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쓰는 것이 역시 엉망이라 곧 말하였다. “이렇게 엉터리로 쓰다니! 내가 써볼 테니 잘 보아라!”
말을 마친 황도주는 다시 붓을 들고 ‘조’ 자를 썼다. 이를 받아든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황공부에서는 단지 네 자를 원하고 있는데 이제 이미 세 자를 손에 넣었구나. 한 삼태기의 흙이 없어 산을 쌓는 공을 이루지 못할 수는 없지!’
이에 곧 황도주에게 ‘상(上)’자 한 자를 더 써달라고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황도주는 자신이 그녀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몹시 화를 내면서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 별수가 없게 된 그녀는 자신이 ‘상’자를 써서 보충하고 황공부로 가서 황도주가 친히 쓴 것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2천 금을 받으니 모두 4천 금을 얻게 되었다.
이 상공조묘의 현판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세히 한번 관찰해보면 ‘상’ 자 한 자가 세 자에 비해 고아(古雅)하고 힘차지 못한 것을 구분해 낼 수가 있다.
4. 청대(淸代) 편
부산(傅山)의 일자사(一字師)
부산(傅山)의 자(字)는 청주(靑主), 공택(公宅)이며, 호(號)는 주의도인(朱衣道人)으로 산서성 양곡현(지금의 태원시) 사람이다. 그는 명말청초의 사상가이자 서화가로 경사제자(經史諸子) 및 시문, 금석학, 의학에도 정통하였고 『상홍감집(霜紅龕集)』, 『순자평주(筍子評注)』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부산과 같은 인물도 어떤 걸인으로부터 서예에 대해 계시받은 적이 있었으니 이제 부산의 일자사(一字師), 즉 한 글자에 대해 스승 노릇을 했던 걸인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부산의 친구 한 사람이 육십대수(六十大壽)를 맞이하게 되자 부산에게 크기가 오두(五斗 : 말 다섯 마리)정도나 되는 수(壽)자 현판 하나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생일은 다가오는데 10여 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초조해진 친구는 부산에게 찾아가 말하였다. “생일 당일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즉석에서 써주려고 하는가?” 이 말에 부산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네. 다만 나의 스승을 청해 쓰도록 준비하고 있는 중일세.” 이 말에 친구는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자네 스승은 이미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지금의 자네같은 인물에게 어떻게 또 스승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생일이 되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부산은 말한 대로 늙은 걸인 하나를 스승이라고 데리고 온 것이었다. 원래 부산은 친구의 청을 받아들인 후로부터 그의 가혹한 요구에 다소 걱정을 했었다. 아무리 자신이 서예의 대가라지만 이렇게 큰 글자를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리저리 머리를 쓰며 구상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집 근처 약수터인 난노천(難老泉) 쪽으로 산책을 하면서 계속 그 일만을 생각했다. 걷고 또 걷다 어느덧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 그는 난노천 근처에서 웬 노인 하나가 천 조작을 두른 방망이에 물을 묻혀 땅 위에 무엇인가를 긋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 긋고 나더니 다시 발뒤꿈치를 들고는 다시 물을 묻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부산이 가까이 다가가 한동안 살펴보고는 놀랍고도 기뻐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훌륭하구나!”
이 노인이 땅 위에다 쓰고 있던 것은 바로 수(壽)자였던 것이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노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더니 곧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글자 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부산은 그에게로 다가가 예를 행하고 물어보았다.
“노인장, 저를 위해 글씨를 써주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이 말에 노인이 고개를 흔들자 부산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거절하십니까?” “저는 글씨는 쓸 줄 모릅니다.” “제가 한참 동안 보았는데요. 노인장께서는 매우 잘 쓰시더군요!” 그러자 노인은 오직 수(壽)자 한 자만을 쓸 줄 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 이 노인은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구걸하면서 연명해왔다. 구걸하러 다니면서 보니, 부잣집에서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커다란 수(壽)자를 걸어놓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반복해서 이 글자를 써보았으며 다 쓰고 마지막으로 점을 찍을 때에는 발뒤꿈치를 들고는 다시 물을 묻혀서…. 이런 식으로 50여 년 동안을 하루같이 연공(練功)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부산은 즉석에서 그를 ‘일자사’로 모시고는 친구의 집으로 데려가 ‘수’ 자 현판을 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