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문화도시, 아테네
김봉철 지음 | 청년사
현대 그리스에는 아직도 비잔틴 문화의 숨결이 살아 있다. 지금 아테네와 그 인근에 남아 있는 비잔틴 성당은 주로 비잔틴 중기의 것들인데 성 엘레프테리오스 성당, 다프니 수도원 성당 등이 대표적이고 이 성당들에 가면 비잔틴 건축과 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 유구한 성당들이 근대적인 도시 아테네의 틈새에서 그나마 존속되어 온 것은 그리스인들의 일관된 종교 생활 덕분이었다. 그리스인의 정신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국민의 90%가 신자인 그리스 정교이다. 물론 매주 꼬박꼬박 성당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엄격하게 정교회 규율을 지키는 신자들의 수는 그보다 훨씬 적을 것이지만 정교 신앙은 여전히 그리스인들의 생활 깊숙이 배어 있다.
아테네에서 그리스 정교회의 종교적 분위기를 가장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미트로폴레오스 광장이다. 그곳에는 미트로폴리스 광장과 비잔틴 시대의 성 엘레프테리오스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성당이나 수도원을 방문하려면 단정한 복장을 갖추는 것이 좋다. 대개 아테네 중심가의 성당에는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 출입하기 때문에 복장 통제를 하지 않지만 옷매무새를 고치고 정중하게 출입하는 것이 그리스인에 대한 예의다. 그리스인은 종교적 신앙심이 깊고 매우 보수적인 민족이다. 또한 성당보다는 수도원의 통제가 더욱 엄격하므로 수도원에 가려면 반드시 복장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에 들어가 보면 우선 그 화려한 색채의 성화들에 놀라게 된다. 성상 파괴령을 내렸던 비잔틴 제국의 성당에 많은 성상들이 가득한 것은 성상 문제를 놓고 오락가락 하던 비잔틴 제국이 843년 결국 성상 공경을 공인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성상의 종교적인 의미가 인정받게 되었고, 교회를 성상으로 장식하는 것이 동방 교회에서 엄연한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평면적인 회화가 성상의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정교회 성당에는 모자이크 그림과 벽화가 사방을 가득 장식하게 되었다. 정교회 성당에 걸린 성화들은 대개 종교적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개성과 예술성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고 엄격한 규범성이 느껴진다. 대개 마음의 동요가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정교회 신자들이 생각한 가장 모범적인 인물상이었을 것이다. 성화들은 다양한 색깔로 장식되어 성당 내부를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주고 있다.
아테네에 남아 있는 비잔틴 성당은 모두 비잔틴 중기의 것들로 11∼1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규모도 작고 장식도 소박한 편이다. 또한 건축학이나 에술사적인 측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탁월한 것도 아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의 약화된 국력과 내실 있는 영적인 신앙을 주장하던 당시 수도원 공동체의 입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테네의 비잔틴 시대 성당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표본이 되기에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들 비잔틴 시대 성당에 들어가보면 그리스 정교의 분위기와 뿌리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아테네에 남아 있는 비잔틴 시대 성당으로는 성 엘레프테리오스 성당, 카프니카레아 성당, 성 테오도리 성당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아테네 교외에는 유명한 수도원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다프니 수도원과 케사리아니 수도원이다. 이곳에 수도원 성당이 세워지게 된 것은 아폴론 성역을 와해시키려는 생각에서였다. 크리스트교가 국교로 된 이후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의 전통신앙을 이교로 규정하고 말살하고자 했다. 다프니는 아폴로 신전이 있었던 곳일 뿐 아니라 비밀 의식을 행하러 엘레프시나로 가는 신자들이 도중에 지나치는 곳이기도 했다. 크리스트교인들은 그런 상징적인 곳에 크리스트교 성당을 세울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 성당은 그리스의 고대 종교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다프니 수도원이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수도원 성당 내부의 유명한 모자이크 그림들 때문이다. 11세기의 작품들로서 비잔틴 시대 미술의 걸작으로 꼽힐 만큼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성당의 벽과 돔, 천장에는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의 모자이크 그림들이 묘사되어 있다. 케사리아니 수도원은 이전에 있던 고대 신전들의 터전 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역시 다프니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성역을 크리스트교가 인수한 것이다. 수도원에는 성당, 수도사들의 방, 목욕탕, 부엌, 방앗간 등이 갖추어져 있어서 당시의 고립된 수도원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수도원 내부 건물 중 가장 돋보이는 성당은 원래 비잔틴식으로 중앙의 돔 지붕에 십자가 구도를 갖춘 것이었는데 개조되고, 바로 옆에 성 안토니오스 성당이 추가되어 전체적인 인상이 뒤죽박죽이다. 성당 내에는 예수의 일생을 담은 성화들이 배열되어 있다.
정교회와 비잔틴 시대 유적 기행을 결산하기에 아테네 시내의 비잔틴 박물관처럼 좋은 곳은 없다. 아테네에 오면 국립고고학 박물관과 더불어 이곳에 꼭 한번 들를 필요가 있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유심히 볼 것은 초기 크리스트교의 바실리카 양식 성당, 비잔틴 시대 성당, 비잔틴 시대 이후 성당의 내부 모습을 전시한 방이다. 세 시기의 성당 건축 양식과 내부 모습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정교회 성당의 시대적 변천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밖에도 박물관에는 그리스 내 성당과 수도원 등에 남아 있던 4세기에 19세기까지의 대표적인 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식 신전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흔히 원형 기둥의 형태와 관련된 수직적인 요소들(주춧돌, 몸체, 기둥머리 부분)과 기둥 윗부분의 엔타블래처와 관련된 수평적인 요소들의 조합을 통해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토스식이 만들어졌다. 그중 가장 오래된 양식이 도리아식인데 도리아식 원주는 아름드리 나무처럼 지름이 넓고 기둥 높이도 기둥 밑둥 지름의 4∼6배 정도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기둥은 위로 갈수록 차츰 가늘어지고 중간 부분은 다소 부풀려 시각적인 안정감을 유도하는 일종의 엔타시스 기법이다. 이 기법은 직선형 기둥의 중간 부분이 가늘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고정하기 위해 기둥을 약간 배부르게 처리한 기법이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착시 현상을 교정하기 위해 사용한 기술은 신전 바닥의 수평선을 직선이 아니라 가운데가 다소 부풀어오른 곡선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흔히 사람이 수평선을 바라볼 때 실제로는 직선인데도 수평선의 중간 부분이 다소 쳐져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둥이 수직으로 세워졌을 때 밖으로 넘어질 듯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해 기둥들은 신전 안쪽으로 약간 기울게 세워졌다. 신전 기둥의 축들이 하늘로 계속 확장되면 신전 바닥 면에서 2.4km 높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올곧은 수직선과 수평선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건물의 균형감과 안정감을 유지한 것을 보면 그리스인들의 높은 건축 기술과 심미적 관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인의 신앙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에게 보이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철저히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만들어졌던 것이다.
현재 파르테논 신전에 일부 보존되어 있는 조각이나 부조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2,400년 이상의 나이를 먹으면서 겪은 그 숱한 파괴와 약탈을 꿋꿋이 버텨낸 것들이다. 현재 대영박물관에는 파르테논 신전의 입체 조각상과 부조들이 대량으로 소장되어 있다. 그 귀중한 작품들이 그리스에 있지 않고 대영박물관으로 가게 된 것은 1801∼1803년에 오스만투르크 주재 영국 대사로 재직 중이던 토마스 엘긴 경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재를 조사하여 오스만투르크 정부의 묵인 하에 문화재들을 영국으로 반출했고 영국 정보는 나중에 이것들을 사들여 대영박물관의 '엘긴 마블스'에 따로 보관했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영국에 그리스 문화재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영국 정부가 반환 요청을 외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반응 역시 차갑기만 하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 그리스의 외로운 외침에 호응하는 국가들은 별로 없다. 그것은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일 테니 말이다. 사실 이런 식의 문화재 반출과 약탈은 영국뿐만이 아니라 19세기 이래 제국주의 국가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가치가 있다. 프랑스와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걸려 있는 우리 나라로서는 그리스인의 노력을 남의 일로만 여길 수는 없다.아크로폴리스 남쪽 비탈은 고대 아테네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었다. 문화생활을 누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일반 그리스인들이 모처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때는 여름철 농한기나 종교 행사 때였다. 그럴 때 그들은 함께 모여 신에게 공동의 제사를 지냈으며, 연극이나 음악 경연, 체육 경기 등의 문화 행사를 보고 즐겼다. 흔히 각종 경연이나 경기는 종교적 제전의 부수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는데 특히 체육 경기는 그리스의 여러 국가에서 거행되었다. 아테네의 특별한 문화 행사인 연극 경연은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디오니시아 제전이나 레나이아 제전 때 디오니소스 신전 근처에 있던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국가에서도 연극 경연을 후원하고 시민들의 관람을 장려했으니 연극은 아테네인의 집단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 극장 좌우에는 2개의 음악당이 있었다. 음악당에서는 시를 노래하거나 악기 경연 등이 벌어졌다. 음악 경연 역시 체육 경기와 더불어 종교 제전의 부수적 행사로 진행되었다. 아테네의 대표적인 집단 문화인 연극과 음악 공연이 행해지던 곳이 아크로폴리스 남쪽 비탈이었기 때문에 이곳은 가히 아테네의 문화적 중심지라 할 만했다.
디오니소스 극장은 기원전 6세기에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에 처음으로 디오니소스 숭배를 도입하면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관람석도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여 경사면이 자연스런 관람석 역할을 했다. 그 후 점차 극장 구색을 갖추게 되었는데 목조건물에서 지금의 대리석 건물로 바뀐 것은 기원전 4세기에 가서였다. 관람석은 총 64열로 대략 1만 7,000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었다. 디오니소스 신전의 사제, 국가의 관리 등이 앉았던 67개의 특별석과 개별적인 좌석 구분이 없는 일반 관람석이 있었다.
디오니소스 극장의 탄생은 디오니소스의 숭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식물의 생장을 주관하는 신이며 다산과 풍요의 신이었다. 디오니소스 숭배는 그 의식이 열정적인 가무를 중시하고 무아지경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강조하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이는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여신도들의 격정적인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정신없는 춤과 노래, 동물을 산 채로 찢어서 그 피를 마시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이 파격적인 관행은 그리스에서도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신자들이 점차 늘어갔으며, 비록 외래신이었지만 농민들에게 농경신으로 환영받았다. 여성들은 구속적인 사회 환경에서 벗어나 디오니소스 제식에서 춤과 노래를 통해 여성의 온갖 굴레를 잊고 '인간 해방'을 맛보았다.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는 '아폴론적 요소'의 통제를 받고서야 그리스에 정착했다. 지금 디오니소스 극장은 과거의 명성을 잃고 한낱 폐허 같은 유적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이곳은 그리스 연극의 발원지이고 그리스 문학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곳은 로마 통치 시대인 서기 161년에 마라톤의 부호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그의 아내 레길라의 죽음을 기려 지었다고 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1857년에 발굴된 이후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 음악당은 무대와 관람석 사이에 반원형 모양의 오케스트라가 있으며, 6,000석 규모의 관람석은 급경사진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로데스 음악당은 지금도 음악회나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어 아테네에서 매년 여름 개최하는 여름 축제의 여러 공연들이 바로 이 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음악 공연을 할 때 대개 키타라나 아울로스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거나 그냥 악기만을 연주했다. 키타라와 리라는 현악기였고, 아울로스는 피리 모양의 관악기였다.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여러 악기들의 합주가 시도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음악 공연이 헤로데스 음악당에서 행해졌다. 헤로데스 음악당은 디오니소스 극장처럼 그리스의 공통적인 문화가 만들어지는 소중한 문화공간이었던 것이다.마라톤은 아테네에 북동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작고, 한적한 농촌으로 바다를 끼고 있지만 어업보다는 농업활동이 훨씬 더 왕성한 곳이다. 고대에 마라톤 지역은 아테네의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된 지역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렇듯 조용하고 한가로운 농촌 마라톤에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가 벌어졌다. 오늘날도 마라톤은 전투의 명성과 근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주와 더불어 존재한다.
당시 오리엔트의 최대 강국 페르시아는 유사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리스인이 살던 이오니아 지방 역시 페르시아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군사행동을 시도하고 그리스인이 이를 지원하자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 정복을 위해 군선 600척을 거느리고 기원전 490년 초여름에 에게 해를 건넜다.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 군은 마라톤을 아테네 공격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 아테네인과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마라톤에서의 승리 직후 아테네인은 아테네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병사 1명을 파견했는데 병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아테네까지 달려가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 병사의 일화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자료가 별로 없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저술을 남긴 헤로도토스는 이 일화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저술가나 전기 작가의 기록에서는 승전 소식을 알린 병사가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최초의 마라톤 경주 코스는 펜델릭 산을 가로지르는 옛길이 아니라 마라톤-네아마크리-라피나-팔리니-아테네로 이어지는 코스로 구간의 길이는 약 37km였다고 한다. 그후 마라톤 경주 거리는 40km 전후로 왔다갔다하다가 제8회 파리 올림픽 때부터 42.195km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마라톤에 가면 지금의 마라톤 전투의 흔적으로 아테네인의 대형 무덤이 남아 잇다. 무덤을 기념하는 화려한 장식물도 없고, 그 흔한 기념관 하나 없다. 전투 직후 세워진 묘비는 간데없고, 대신 단촐한 비석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이 무덤에는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 군 129명이 묻혀 있다. 그리고 마라톤 무덤에서 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산기슭에는 마라톤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마라톤 인근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마라톤 전투에 관한 유물들은 제3실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중앙에는 마라톤 전투 직후 만들어진 트로피의 잔해가 일부 남아 있다.
그리스인은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 결과 그리스가 얻은 것은 에게 해 일대에 대한 지배권에 불과했다. 페르시아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쇠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여전히 대국이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공포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왕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페르시아 전쟁을 생각할 때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은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페르시아'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정복을 통해 그리스인의 독립과 자유를 빼앗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강압적인 면이 인정된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페르시아의 정치 전반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인은 페르시아의 정치를 전제정으로 간주하고 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