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족의 왕, 아틸라
패트릭 하워스 지음 | 가람기획
아틸라, 훈 족의 왕이 되다역사적으로 가장 크게 중상(中傷)당해왔고 오해 받아온 민족 가운데 하나인 훈 족은 AD 5세기경 티소 강 중류 근방에 본부 - 그들이 수도를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를 차렸다. 그 곳의 평원은 평탄하다. 부다페스트에서 세게드까지 여행하는 사람은 산다운 산은 하나도 보지 못할 것이다. 헝가리 동남부에 자리잡은 그 평원의 일부는 훈 족이 그 곳을 차지했을 당시의 특징들의 일부를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곳은 바로 호르토바디 평원이며, 말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훈 족은 5세기에 이 평원을 기점으로 우랄로부터 론 지방(프랑스의 중동부 지방)에까지 이르는 드넓은 제국을 주로 자기와 손을 잡은 민족들이나 자기에게 종속된 민족들을 통해 다스렸다. 그러나 이 주목할 만한 사람들 중에서 소수의 전문 역사가를 제외한 헝가리 외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진 이는 단 한 사람뿐이다. 그 예외적인 인물이 바로 아틸라(?∼453)이다. 그의 이름은 1,500년 동안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왔다.
아틸라는 불과 8년 동안만 훈 왕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발휘하는 군사력은 대단해서 동·서 로마 제국을 거의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한 때 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까지 쳐들어가 막대한 양에 달하는 황금 공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후 당대 사람들은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저 멀리 오를레앙까지 진격하는 그의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 그는 로마에 진격해 번창하던 이탈리아 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해나갔다.
주로 기독교인이었던 아틸라의 적들은 그를 '신의 징벌'로 여겼지만 한 로마 황제의 누이는 아틸라에게 자신의 반지를 보내 구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아틸라를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묘사해왔지만 가까이에서 아틸라를 관찰할 기회를 가졌던 저명한 한 작가가 그의 생김새와 생활방식,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아틸라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인물이다. 통치자로서의 아틸라의 능력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던 그는 아틸라에 대해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뒤흔들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요, 이 자부심 넘치는 사람에게 내재된 힘은 그의 몸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볼 때 5세기 중엽은 아주 인상적인 인물들이 큰 활약을 했던 시대로 보인다. 하지만 아틸라는 당대의 어떤 인물들에게도 당당하게 맞섰고 정복자로서 모든 정복자를 딛고 우뚝 섰다. 그렇다면 아틸라는 약탈 - 특히 황금 - 이 훈 족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올 때마다 그것을 최대한 이용했던 군주였을까? 아니면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군사 지도자였을까? 아틸라는 그 두 가지 모두에 해당했을 수도 있다.
지난 1,500년간 서구 사람들은 훈 족과 아틸라에 대한 편견과 경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서구에서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헝가리 학자 못지 않게 훈 족에 관한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여 북아프리카나 더 나아가 영국 땅에서도 훈 족 문화의 자취들을 찾아냈다. 이렇게 새로운 자료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훈 족은 중국 국경 부근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에 이르렀다. 한(漢) 시대의 사서들에는 흉노로 알려진 호전적인 민족에 대해 서술한 부분들이 나오는데 바로 그 흉노족을 훈 족이라고 볼 수 있다. 흉노족은 중국 군주들을 대단히 골치 아프게 했고, 한번은 전쟁에서 크게 이겨 엄청난 양의 금과 비단, 여자 노예 같은 공물을 얻었다. 흉노가 훈 족의 조상이었든 아니었든, 아무튼 훈 족은 중앙 유럽에 자리잡은 뒤에도 한나라 무제가 비단길을 열자 중국과 계속 접촉을 가졌다.
훈 족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한 데는 다른 이유들이 내재되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후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즉 북유럽의 기온이 전반적으로 크게 떨어지고 해수면이 높아져 점점 육지를 침식해왔던 것이다.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초원지대는 몇백 년에 걸쳐 건조한 기후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었다. 북유럽의 기온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초원지대에서는 지나치게 건조한 기후가 되풀이되자 훈 족을 포함한 초원의 유목민들은 풀을 찾아서 서쪽으로 이동한 듯하다. 훈 족이 서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수많은 난민들이 훈 족에게 정복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그렇게 피난을 떠난 것은 훈 족의 전투 기술이 뛰어난 탓이기도 했고, 또 이상하고 낯선 훈 족에 대한 공포심도 작용했다.
훈 족이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우선 말을 다루는 솜씨가 훌륭했고 그에 못지 않게 궁수로서의 뛰어난 능력이 한몫 했다. 훈 족은 신속히 움직였다. 훈 족은 항상 여분의 말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적의 연락병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그 덕에 훈 족 군대가 왔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연락병이 아니라 처음에는 멀리서 이는 먼지 구름을 통해서, 다음에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에 의해서 알았다.
훈 족의 활 솜씨는 기마 능력 못지 않게 능숙했다. 훈 족은 화살을 300m 날릴 수 있었고, 약 1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을 겨냥해 사살할 수 있었다. 화살로 50m쯤 떨어져 있는 멧돼지의 몸을 꿰뚫을 수 있었고, 30m쯤 거리에 있는 황소의 허벅지 뼈를 꿰뚫을 수도 있었다. 훈 족의 활로 거리 차이를 둔 표적을 맞추는 시험을 해본 결과 그것은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훈 족의 공격군은 대략 5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인원으로 이루어졌는데 300m 거리에서 불화살을 날리는 것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 다음 물러나는 척하다가 다시 지그재그 식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등자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활을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쏠 수 있었다. 초기 역사가들이 화살이 하늘을 시커멓게 덮었다고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공포심을 안겨주는 전격적인 기습이야말로 훈 족 전술의 핵심이요, 진수였다.
훈 족의 서진으로 압력에 몰려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거대한 민족이 4세기의 백 년 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해서 로마 제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했다. 훈 족의 공격으로 인해 동고트 족뿐만 아니라 서고트 족까지 로마의 국경선을 향해 이동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발렌스 황제는 서고트 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고트 족이 동로마 제국 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이 머물던 지역에서 상당수의 로마인들이 식량이 부족한 고트 인을 상대로 개고기를 팔고 그들 중 일부를 노예로 팔아넘김으로써 큰 이득을 취하자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로마와 고트 인과의 전투는 로마의 우세 속에 고트 인들이 철수하는 결과로 나타났지만, 378년 고트인 들은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이번에는 훈 족과 알란 족이 그들을 뒷받침해 주었다. 결국 아드리아노플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트 인들은 전면적인 승리를 거뒀고, 발렌스 황제를 비롯한 그의 군대는 3분의 2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훈 족 지도자들 중에서 우리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최초의 인물은 루아(Ruga)이다. 그는 힘 있는 왕이기는 했으나 과연 훈 족을 확고하게 장악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의 왕국에 결속시키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아마도 루아가 통치하던 동안에는 완료되지 못했을 것이다. 루아에게는 문주크라고 하는 동생이 하나 있었고, 문주크의 슬하에는 두 아들 블레다와 아틸라가 있었다.
434년에 루아가 사망한 뒤 아틸라의 형인 블레다가 왕권을 계승했다. 루아의 사망 후 블레다와 아틸라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아틸라를 찬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조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 훈 족과 로마와의 전투에서 그 주역은 당연히 블레다였고 아틸라는 기껏해야 작은 역할을 한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훈 족과 로마와의 전투는 이후 훈 족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43년, 갑자기 블레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사망한 원인은 결코 풀리지 않은, 그리고 풀릴 수도 없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 후 잇따르는 전설들에는 여러 견해가 등장했다. 분명한 것은 이탈라처럼 기가 센 사람이 무한정 2인자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블레다가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아틸라를 제거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했는데 아틸라가 미리 손을 써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형을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틸라가 쿠데타 음모를 꾸며 블레다를 암살하게 했을 수도 있다.
블레다와 아틸라가 불화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세상에 알려졌으나 블레다에 관한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와 관련된 일화의 하나는 로마 제국의 장군 아스파르의 소유물이었던 제르코라는 난쟁이와 관련된 것이다. 제르코는 훈 족의 포로가 된 뒤 늘 블레다를 즐겁게 해주었고, 그 때문에 블레다는 제르코에게 훈 족 출신의 여자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기까지 했다.
반면 아틸라는 제르코를 몹시 싫어해서 블레다가 죽은 뒤에는 그를 서로마의 아이티우스에게 보냈고 아이티우스는 다시 그를 원주인인 아스파르에게 돌려보냈다. 제르코가 자기 아내를 보내달라고 청하자 아틸라는 그 청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블레다의 죽음의 원인에 관한 어떤 이론도 추측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훈 족 사람들이 아틸라를 '훈 족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통치자로서의 아틸라는 혁신적인 창안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훈 제국이 자기가 뜻한 바대로 강국이 되려면 좀더 발전한 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를 보좌한 측근 그룹은 주로 외국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좌관 중의 한 명인 오레스테스는 로마의 노리쿰 주의 군사령관의 딸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궁으로 가서 아틸라를 보좌했으며, 그때부터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 활동했다. 그의 아들 로물루스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아틸라를 보좌한 인물들은 외부 세계의 일들에 정통했으며, 서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나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그리스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었다. 훈 족에게 정복된 사람들 상당수는 노예가 되었다. 훈 족 귀족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데려간 시종들은 노예와 자유민으로 구성되었다.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훈 족 사회도 노예가 자유민의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훈 족이 새 영토를 차지할 때면 으레 많은 사람들이 미리 피난을 가곤 했으나 제 고장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농민들이었다. 훈 족은 그들이 농사 짓는 것을 허용해주었을 뿐 아니라 계속 그렇게 하라고 권장하기까지 했다. 훈 족은 자기들이 점령한 땅에서 일종의 군사적 지배계급, 혹은 귀족계급이 되었다. 그들이 이민족들을 어떤 식으로 다스렸는가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들이 당대의 다른 정복자들보다 더 잔혹하게 굴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것은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틸라나 그의 전임자들이 기독교도를 박해했다는 증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상대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훈 제국 내에 기독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렸음이 분명하다.아틸라 군은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뒤 비옥한 평원지대의 이점을 누리면서, 그리고 얼마 동안 포 강을 따라서 서쪽으로 진군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아틸라가 로마에 입성하는 것을 이탈리아 원정의 제일 목표로 삼았다면 그가 이때 의외의 경로를 택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밀란을 경유한 뒤에야 비로소 파비아 방향으로 남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진격로는 아틸라가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탈취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아틸라는 그 땅의 지형상의 이점들을 활용해가면서 부유한 한 도시에서 또 다른 부유한 도시로 이동하는 최적의 경로를 택했다. 그는 또 자기에게 맞설 만한 군대의 소재지도 역시 고려에 넣어야 했을 것이다. 아틸라 군은 아퀼레이아에서 서진하다가 남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어 파두아로 향했다. 파두아는 번창하는 농업과 공업의 뒷받침을 받는 중요한 도시로 기사계급의 숫자만 500명이 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틸라 군은 그 도시를 철저히 약탈했으나 시민들의 상당수는 아틸라 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 곳을 탈출하고 없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전설에 의하면 베네치아 시를 창건한 사람들은 바로 이때 아틸라에게서 도망친 피난민들이었다고 한다.
아틸라의 공격로에 자리잡은 다음 도시들은 비첸차와 베로나였다. 이 두 도시를 비롯하여 아틸라 군에 맞서려 드는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예 자진해서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아들이는 도시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런 도시들은 아틸라 군을 진정으로 환영한 게 아니라 저항해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들은 브레시아와 베르가모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접수했고, 제국의 전 수도였던 밀란으로 가는 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틸라 군은 계속 진군하여 메디올라눔에 이르렀다. 4세기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훗날 밀라노로 알려지게 된 유서 깊은 도시인 그 곳은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준다는 저 유명한 칙령을 발포한 곳이기도 했다. 아틸라 군은 메디올라눔에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다. 아틸라는 그 곳에 입성하자마자 이내 황궁을 접수했으며, 거기서 교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세가 로마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폈다고 한다. 그는 로마 황제들이 옥좌에 앉아 있고, 스키타이 군주들이 그들의 발밑에 엎드려 절하는 광경을 표현한 한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를 불러들여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바꿔 그리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로마 황제들이 아틸라로 짐작되는 한 군주 앞에 쪼그리고 앉아 황금이 든 공물자루를 비우면서 사정을 하는 그림으로 바뀌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그 그림은 사라지고 없다.
아틸라 군은 파비아를 떠난 뒤 그냥 발길 닫는 대로 무작정 진군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로마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롬바르디아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니까. 파비아 동쪽에 있는 만투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민키오 강둑에. 그리고 여기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틸라 군이 프랑스에 진격했을 때 프랑스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 그들 중의 일부는 훗날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 은 아틸라를 찾아가 자기네 도시를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아틸라가 이탈리아에 들어왔을 때는 교황 자신이 친히 민키오 강변으로 그를 찾아갔다.아틸라가 많은 영토를 요구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보낸 사절단의 대표는 스키리 왕 에디카와 훗날 로마 황제의 아버지가 된 오레스테스였다. 한번은 에디카가 동로마 제국의 환관인 크리사피우스와 만난 자리에서 통역자 비길라스를 통해 황궁의 화려하고 장대한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랐다는 얘기를 전한다. 그러자 크리사피우스는 에디카에게 "스키타이의 관습을 버리고 로마의 관습을 따르기만 하면 황금지붕으로 된 대저택의 주인으로서 부와 사치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사피우스는 에디카가 아틸라의 경호임무를 수행한다는 말을 듣고는 만찬에서 그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아틸라의 목을 베고 로마에 돌아오기만 하면 여생을 더할 나위 없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 에디카는 그 제의에 응하면서 그렇게 하는 데 금이 좀 필요하다고 했다.
두 음모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길라스에게 음모의 전모를 밝힌 뒤 그를 중개자로 이용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