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로 가는 길
웨인 패터슨 지음 | 들녘
아메리카로 가는 길
- 한인 하와이 이민사 1896~1910 -
웨인 패터슨 지음/정대화 옮김
들녘/2002년 7월/312쪽/12,000원
1. 이민 배경
1903년과 1905년 사이에 약 7천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에 도착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 조선과 하와이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던 일련의 사태 발전과 그 과정의 결과였다. 조선 왕조(1392~1920)의 쇠퇴와 1876년 일본에 의한 개항, 1882년 미국에 의한 개항은 일부 한국인들로 하여금 해외에서 보다 안정되고 번영된 생활환경을 찾도록 하는 일련의 계기를 마련했다. 다른 한편으로, 하와이에서는 설탕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 문제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일본인 노동자들로 생긴 문제들 때문에 설탕 농장주들은 그들 나름대로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1778년 영국인 선장 쿡에 의해 처음으로 접촉한 이후 하와이는 미국인 선교사, 고래사냥꾼, 커피 재배자,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었다. 1835년경 사탕수수가 커피를 대체하여 하와이 섬의 주된 농작물이 되었고 사탕수수는 하와이 경제를 노동집약적인 대규모 농장형태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하와이 원주민의 감소와 설탕에 대한 수요증가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1876년과 1885년 사이, 대규모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3년의 계약이 끝난 중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직장을 찾아 도시로 옮겨갔다. 그 결과, 중국인들의 낮은 임금 때문에 불공평한 경쟁을 하게 된 도시 미국인들은 불평이 늘어났고 정부에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하와이의 엘리트들 역시 중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그들의 이러한 불만은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인을 반대하는 소요가 있은 후, 1882년 ‘중국인 이민 금지법’이 통과됨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이에 농장주들은 중국인을 대신할 가장 적절한 인종으로 일본을 생각했고 1885년에 일본으로부터 체계적인 첫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인들은 이내 다루기가 어렵고 신뢰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고, 파업과 증가하는 이탈률로 농장주들은 걱정하게 되었다. 농장주들은 일본인 문제 해결을 위한 이상적인 대안은 다른 아시아 인종의 값싼 노동력으로 대체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자고 농장주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1896년 가을의 일이었다.
2. 계획이 착수되다
1898~1902년 사이에 하와이로 온 수많은 일본인들은 일본인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인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히 느끼기 시작한 하와이 농장주들과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중국인 이민이 법으로 금지된 후 일본인 이민 문제도 하와이 정부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절박해졌으며,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문제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농장주들은 이에 대한 논의를 비밀리에 시작했으며, 그러던 중 워싱턴으로부터 미국법이 정하는 테두리 안에서 이민 충원을 일시적으로 허용한다는 청신호를 받게 된 농장주들은 그들 중에서 유능한 대표가 한국인 이민의 개시를 위해 한국으로 떠날 수 있도록 기다렸다. 그 와중에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이 이 일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3. 호레이스 알렌의 등장
1883년, 한국과 미국 사이에 슈펠트 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미국인이 바로 알렌이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미국 장로교인들을 위한 의료 선교사로서 1884년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 즉시 일어났던 한국의 정변(갑신정변)에서 부상당한 어느 한국 고관의 상처를 치료해줌으로써 한국정부와 즉각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에 고종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해 1890년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직위에 있었던 7년 동안 고종과의 친분 덕분에 그는 미국 공사관을 무리 없이 이끌어 나갔다.
알렌은 하와이로 가서 농장주 조합 이사들과 한국인 이민의 실효성과 한국인의 노동 능력, 그리고 한국의 현 상황에 관하여 심도 있게 논의하고 그 문제가 한국 정부와 관련되어 있는 한, 더욱 깊이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 후 알렌은 농장주들을 돕기 위해 네 가지 일을 해야 했다. 첫째는 한국 정부와 고종 황제로부터 승인을 얻는 일, 둘째는 이민 모집 담당자를 선정하는 일, 셋째는 농장주들을 위해서 워싱턴 정부에 개입하는 일, 넷째는 농장주들이 미국 이민법을 피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알렌의 이 생각은 곧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또한 이 계획이 미국법에 저촉될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내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와이 농장주들에게 보내는 서신조차 중개인을 통하여 그 내용을 위장하도록 했다. 미국에서는 1885년, 계약노동을 불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래서 미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민자와 계약을 맺는 것은 불법화되었으며, 또한 이민자를 위해 고용주가 미국행 여비를 제공하는 것 역시 불법화되었다.
알렌은 한국에 도착하자 곧바로 고종 황제를 알현하여 처음으로 그 문제를 상고했다. 고종황제의 직접 승인을 받은 알렌은 다음으로 이민 모집 담당관을 선정하는 일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데슬러를 선택했다. 데슬러는 오하이오 주의 주지사인 의붓아버지를 통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매킨리 대통령의 중재로 알렌이 주한 미국 공사로 임명받도록 힘썼다. 그래서 1902년 하와이 이민에 대한 독점권을 취득했을 때 알렌은 그것을 데슬러에게 확보해 줌으로써 보답했다. 하와이의 설탕 농장주들과 알렌의 만남은 사업적 이해와 정치적 이해를 동맹 관계로 연결시켜 주는 결합의 시작이었으며, 이 관계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과 하와이의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4. 한국으로 간 비숍
한국인 이민 충원계획은 이제 농장주들 중 한사람인 비숍이 한국으로 가서 알렌과 데슬러를 만나고, 한국인 이민자들을 실은 첫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 준비할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는1902년 9월 에벤 호놀룰루를 떠나 요코하마로 갔다. 일본에서 비숍이 한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알렌의 지시에 따라 1894년에 제정된 일본의 이민 보호법의 복사본을 얻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한국인 이민자들을 일본의 태평양 횡단 우편기선에 태우는 일인데, 이는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비숍은 이곳에서의 두 가지 임무 수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향했다. 곧바로 비숍은 데슬러와 함께 알렌을 만났고 농장주들에게 상황보고를 하기 위한 의견을 모았다. 그 보고내용은 이러했다. “데슬러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낙관적인 보고를 해도 괜찮을 정도로 그들이 일을 잘 처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사들은 만장일치로 한국 노동 이민을 확보하는 데 있어 비숍이 취한 조치들을 승인했다. 한국인 노동자의 적합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 비숍의 태도는 확고부동했다. “한국인을 하와이 섬으로만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 훌륭한 노동자임을 입증해 보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인은 원기 왕성하고 일본인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우수합니다”라는 편지를 쓴 비숍은 한국인들이 이밖에도 두 가지의 이유 때문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쇠퇴해 가는 조선 말기의 상황이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비교했을 때 본국과 관계를 계속 맺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여 오래 머무를 수 있다. 둘째로, 근검절약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특성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만큼 충분한 저축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5. 서울, 워싱턴과 교섭하는 알렌
1902년 가을, 이민 계획의 성패를 알렌에게 송두리째 맡긴 비숍과 데슬러가 한국 정부로부터 합법이민을 위한 허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알렌은 이 모든 장애물들을 혼자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알렌은 다행히 20년 동안 쌓아온 고종과의 돈독한 친분을 이용하여 한국인들이 이민해야 한다는 논리 정연한 이유들을 피력했다. 당시 한국은 극단적인 중앙집권체제 때문에 이민 독점권이 데슬러에게 가야 하는 이점에 대하여 고종 황제만 설득하면 끝나는 것이었다.
알렌이 사용한 첫 번째 방법은 위대한 중국인이 못 가는 곳에 한국인들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고종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데슬러의 출신지 오하이오 주와 관련되어 있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은 당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화군이 다녔던 대학이었다. 세 번째로, 하와이에 한국인들을 이민 보냄으로써 최근에 닥친 일련의 자연재해의 고통을 약간은 덜어주어 고종이 덕망 있는 황제라는 명예를 얻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설득했다. 네 번째로 알렌은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한국 관리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이용했다. 알렌이 제한한 이민국이 왕실의 궁내부에 소속되도록 함으로써 여권 수수료가 모두 황제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다섯 번째로 고종이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싶어하는 것을 재빨리 파악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바로 이것이 이민을 데슬러에게 허가하도록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드디어 1902년 11월 15일 고종은 이민권을 데슬러에게 허가했다. 다음날, 비숍이 초안을 잡았던 황제의 칙령이 공포되었다. 칙령의 첫 부분은 이민국인 유민원의 설치와 조직에 관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 부분은 21개 조항으로 된 대한제국의 이민규정이었는데, 이는 1894년 일본의 이민 보호법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었다.
1902년 12월 중순경, 이제 알렌은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민 금지법을 방지하기 위해 워싱턴에 로비를 할 차례였다. 동시에 상부의 지시를 위반하고 한국의 내정에 간섭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국무장관 헤이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 그 편지에서 알렌이 첫 번째로 내세운 대목은 이 이민계획에 대해 자신의 역할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두 번째는 새로운 아시아 이민에 대한 워싱턴의 반대를 무마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세 번째는 앞으로 계속될 한국 이민선에 대하여 워싱턴을 심리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농장주들이 불법적으로 한국인들을 이민시키려고 도왔다는 의심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1902년 말에 이르러 비숍과 알렌은 맡은바 임무를 모두 완수했다.
6. 데슬러, 이민 모집을 시작하다
1902년 11월에 들어서자 데슬러는 이민을 모집할 단계에 이르렀다. 이 일을 위해 첫 단계로 이민 모집을 위한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민 모집을 위해 ‘데슬러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로, 데슬러는 통역과 조수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실제로 밖으로 나가서 이민을 모집하는 세 번째 단계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알렌의 친구이며 인천에 있는 감리교회의 목사인 존스가 적절한 시기에 개입하자 해결되었는데, 존스의 설득 결과로 그의 신도들 중 50명 이상의 남녀와 인천항에 있던 20명의 부두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가기를 자원했다.
1백명이 조금 넘는 첫 이민그룹은 1902년 12월 22일 일본에 가기 위해 ‘겐카이’ 호에 승선했고 1903년 1월 12일 갤릭호는 호놀룰루 외항에 입항했다. 첫 한국 이민단이 모집되고, 한국을 떠나 별 문제없이 하와이에 도착하자, 데슬러가 다음 이민단을 모집하는 일이 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다음 그룹의 이민들도 속속 호놀룰루로 떠났다. 이렇듯 이민 수를 늘리려는 데슬러와 농장주의 요구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민이 진행되었다. 1903년 새해부터 6개월에 걸쳐 약 6백 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많은 일본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농장주의 계획에 따라 한국 이민을 들여왔지만 농장주들의 기대 이상으로 한국 이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잘해내고 있었다.
농장주들은 6개월에 걸친 이민 사업의 실험에 대한 평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쿡은 “한국인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농장에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쓰고 있다. 첫 한국 이민단을 맞이한 굿데일 농장 지배인 역시 편지에서 “그들은 꾸준한 사람들이며 일을 잘 해낼 뿐만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하며 만족해 보인다”라고 쓰고 있다. 하와이 농업회사의 지배인인 셔먼은 농장 노동자로서 한국인들은 대단히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 숙소를 지어주었더니 만족해하더라고 말했다. 알렌은 오하이오에서 여름 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이 일기장에 써놓았다. “한국인들은 훌륭한 노동자들로 인정받고 있으며 아주 인기가 높다. 그들은 일과 주위 환경을 좋아하는 듯하다.”
1903년 늦은 봄까지 한국인 이민은 상당히 체계화된 일본인의 이민처럼 조직적이고 정규적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7. 한국에서의 문제
알렌과 농장주들이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장애물이 한국과 하와이에서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난관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한국 주재 일본 공사 하야시는 고종에게 한국인 하와이 이민이 일본인의 이민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공식적으로 항의하면서 이 일을 비우호적인 처사라고 말했다. 이 일본 공사는 한국에서 미국이 갖는 그 어떠한 독점권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말기에 독점권의 소유 여부가 중요했던 것은 많은 독점권을 따내는 외국 정부는 그 독점권을 허가한 나라를 보호할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반대는, 평양에 있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나왔다. 존스 같은 선교사는 이민을 도왔고 헐버트도 「한국평론」 지를 통해 이민을 지지하는 취지의 글을 실었으나, 모펫 선교사는 한국인들이 계약노동자로 간 것을 미국 이민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이민이 남용될 소지가 있어 한국인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알렌은 그 비판에 대해 “그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당신네들이 더 권장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재빨리 반박했다. 특히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 섬의 주된 거주자들은 기독교인들, 즉 선교사들의 후예들이며 안식일을 지키고 있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이민은 우리 미국인들이 바라는 것이며, 모든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주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평양 장로교의 베어드 목사는 월간 보고서에서 “물론 이렇게 비참한 정치를 하는 나라에서 많은 국민들이 초조하고 불안한 나머지 나라를 떠나려 한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고 게다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이 한국 기독교인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국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그들이 이곳에 남아서 부조리를 척결하는 데 앞장서서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또한 교회에 종사하고자 공부하고 있던 훌륭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돈에 유혹을 받아 이민을 떠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대이동을 막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여러 기독교 교파들이 현명하지 못한 자선행위를 하지 말라고 베어드 목사는 충고했다.
그러나 이 대이동을 막는 데 역부족을 느꼈던 선교사들은 차선책으로 이민자들에게 한국으로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모펫 목사를 기억하는 한 이민자의 회고다. “나는 내게 세례를 준, 평양에 처음 온 미국인이었던 모펫 목사에게 출발인사를 하러 갔다. 그날 밤 그의 집을 찾아가서 미국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오, 그래 이석 군. 자네를 위해 정말 잘된 일이네. 자네가 성공하기만을 바라겠네’ 하면서 기뻐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무엇을 하겠냐고 물었다. 내가 미국에 가서 의학을 전공한 뒤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자 그는 몹시 기뻐하면서 ‘아주 훌륭해. 우리는 많은 의사가 필요하고, 특히 한국인들을 위해서는 한국인 의사가 필요해. 자네가 의사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빌겠네’라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