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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김석종 지음 | 마당넓은집
밥상머리 풍경



지금이야 보리밥이 건강식이지만 그때 보리밥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상징이었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 보리쌀을 솥 한쪽에 따로 안쳤다. 한쪽은 흰쌀밥, 한쪽은 거무튀튀한 깡보리밥. 그 명료한 흑백의 대비! 어머니는 흰쌀밥 쪽에서 아버지 밥을 먼저 푸신 뒤 보리밥과 쌀밥을 섞어 아이들 밥을 푸셨다. 솥에 남은 커다란 깡보리밥, 그것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그 깡보리밥을 양푼에 퍼 고추장에 썩썩 비벼 잡수시며,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보리밥이 소화가 잘 돼."하셨다. 하긴 보리밥이 소화가 잘 되긴 되는지 골목길 달음박질 한 번에 아이들의 배는 꺼져버렸다.

풀반찬만 먹다가 오랜만에 고등어나 꽁치 조림이 밥상에 올라오면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가운데 도막 덥석 집어다 먹었으면 원이 없으련만! 아이들은 슬금슬금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어머니들 몫은 항상 생선 대가리였다. 어두일미 혹은 어두육미라고 하지만 돼지 머릿고기 누른 것도 아닌데 거기에 무슨 살점이나 붙었겠는가. 그래도 어머니는 "생선은 대가리가 제일 맛있지."하며 그 알량한 살을 발라 잡수셨다. 맛없는(?) 생선 가운데 도막은 아버지 앞에 놓였다. 어머니는 아예 생선 대가리를 통째 입에 넣으시고는 밥사발 뚜껑에 보기 좋게 뼈만 뱉어놓으셨다. 아이들은 아무리 따라 해도 살과 뼈가 발리지 않았다. 우물우물 입 속에서 생선 대가리를 발라보지만 뼈를 뱉으면 입안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어머니들이 평생 배워온 그 기술(?)을 어찌 흉내나 낼 수 있으랴.

그 시절에는 보온밥통이 없으니 아랫목이 보온밥통 역할을 했다. 하루 종일 이불을 펴놓는 아랫목에 밥사발 뚜껑 덮어 파묻어놓으면 그런대로 최소한의 보온은 됐다.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고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잠자는 아이의 밥사발을,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아버지의 밥사발과 함께 아랫목에 묻어놓았다.

아랫목은 또한 바깥에서 놀다 들어온 아이들이 언 몸을 녹이는 곳이어서 아이들은 흥부네 아이처럼 옹기종기 이불 속에 배깔고 엎드려 만화도 보고 장난도 쳤다. 장난을 치다 밥사발을 발로 차 뒤집어놓으면 이불이고 발이고 밥풀이 더덕더덕, 아랫목은 온통 밥풀 난리가 났다. 들킬세라 아이들은 이불과 발바닥에 붙은 밥풀을 부지런히 떼어먹었다. 때딱지 않은 손으로 주물럭 주물럭 밥사밥에 밥을 쓸어 담아놓고는 시치미를 뗐다. 느지막이 들어오신 아버지는 그 밥을 맛있게 잡수셨다. 모르는 게 약!

쇠다리를 접어 넣은 호마이카상이 나오기 전 교자상 같은 큰 상이 드물었다. 아이들이 많은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삼대가 같이 사는 집에선 밥상을 두 개씩 봤다. 밥상이 둘 차려지면 대개 여자와 남자가 따로 앉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니라 남녀칠세부동상이랄까. 반찬은 뭐든지 남자 쪽 상이 푸짐했다. 여자아이들은 입이 튀어나왔고, 할머니는 습관 때문인지 굳이 여자 쪽 상에 가서 앉으셨다. 호마이카상도 한 집에 하나뿐이어서 잔치가 나면 동네 상들이 모두 잔칫집으로 징발됐다. 일회용 숟갈은 없던 때라 잔치용 수저를 공동으로 사놓고 쓰기도 했고 아니면 이웃집 수저를 빌려 썼다. 어머니는 잔치 품앗이 가고, 집엔 상도 수저도 없으니 천생 잔칫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잔치가 나면 동네 잔치였다.

다방과 디제이



성년이 되어야 다방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성년의 기준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느냐였다. 고등학생까지는 다방 근처에도 얼씬거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도 이젠 성인이 됐다'며 볼일도 없이 담배 하나 꼬나물고 다방에 한참 앉아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방에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연애까지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때 결혼은 대부분이 중매결혼이어서 과년한 처녀가 다방에서 사내와 앉아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동네에서 아예 '날라리'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남녀 사이는 인력으로 안 되는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를 하는 쌍도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동거하는 여자는 사람 취급도 안 했다.

다방엔 레지라고 부르는 차를 나르는 아가씨가 있었다. 동네 젊은이들은 말이라도 한번 붙이고 손이라도 한번 만져보려고 다방엘 자주 들락거렸다. 레지들은 손님이 혼자 앉아있으면 옆자리에 앉아 말동무가 돼주곤 했다. 손님은 말동무를 얻은 대신 레지에게 커피나 쌍화차 같은 것을 한 잔 사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커피 한 잔 마시곤 하루 종일 붕어처럼 오차만 마셔대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런 손님일수록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해서 레지들과 노닥거리곤 했다. 그러니 다방 주인이 싫어할 수밖에. 그래서 다방 주인들은 레지들이 어느 정도 단골이 생기면 다른 동네 다방과 서로 바꾸곤 했다.

다방엔 노래와 음악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다방은 전축을 카운터에 들여놓고 주인 맘에 드는 가요들을 틀어줬다. 그런 다방은 으레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이어서 '노땅다방'이라고 불렀다. 젊은이들은 주로 팝송을 틀어주는 다방으로 모였다. 그땐 그거나 저거나 다 다방이라고 써붙였는데 나중에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다방들은 '커피숍'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커피숍엔 디스크자키(디제이)가 있었다. 한쪽 구석에 유리로 된 박스를 만들고 거기에 앉아서 손님들의 신청곡을 받아 틀어줬다. 머리도 길게 기르고 일부러 낮게 깐 음성으로 닐 다이아몬드가 어쩌고, CCR이 어쩌고 하는 멘트를 한바탕 늘어놓고 음악을 틀어줬다. 그게 멋있게 보였는지 디제이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매일 디제이 박스 앞에 몇 시간씩 앉았다 가는 여자들도 꽤 있었다. 디제이의 시선을 끌려고 음악 신청용 쪽지에 하트 모양을 그려넣기도 하고 껌이나 사탕을 넣어주기도 했다.

주전부리 2



'쫀디기'라는 과자가 있었다. 녹말가루쯤으로 만든 과자 같은데 쫄깃쫄깃한게 씹는 맛이 있어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껌처럼 질겅질겅 씹고 다녔다. 쫄깃쫄깃하다고 해서 '쫀디기'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쫀디기를 튀기면 생긴 모양대로 부풀어올랐다. 튀겨놓은 과자는 쫀디기와는 달리 바삭바삭했다. 그걸 아이들은 '바가지과자', '반지과자' 등으로 불렀다. 네모난 쫀디기를 튀겨 만든 바가지과자는 쫀디기가 뜨거운 열에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어 바가지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반지과자는 두툼한 반지처럼 생겨 아이들이 열 손가락에 끼워가지고 다니며 하나씩 빼먹었다. 공장 아저씨가 바가지과자나 반지과자를 튀겨 커다란 봉지에 담아놓으면 구멍가게와 좌판 아주머니들이 떼어다 행인들과 아이들에게 팔았다.

그때의 껌은 지금처럼 부드럽지 못하고 조금 씹다 보면 딱딱해져 '아구리'가 무척 아팠다. 뒤에 풍선껌이 나왔는데 아마 '홍길동 풍선껌'이었던 것 같다. 그냥 껌이 10원에 다섯 개쯤이면 풍선껌은 두 개밖에 안 돼서 아이들은 껌을 살 때 늘 고민해야 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가 아이들한테 인기를 얻자 판박이껌이 나왔다. 껌 포장지에 덧씌워진 비닐에 그림이 있었는데 그 비닐을 공책 같은 데 붙이고 손톱으로 문지르면 비닐에 있던 그림이 떨어져나와 공책에 붙었다.

강냉이를 튀기는 뻥아저씨가 오면 동네 골목은 시끌시끌했다. 뻥 아저씨는 강냉이나 튀밥을 튀겨주고 한 홉에 얼마씩 돈을 받았는데 돈 대신 쌀이나 곡식으로도 받았다. 뻥 아저씨는 그렇게 뻥삯으로 받은 곡식을 튀겨서 봉지에 담아 팔았다. 뻥아저씨는 깡통을 잘라 만든 됫박으로 쌀을 가늠해보곤 거기에 병아리 오줌만큼 물을 붓고 사카린을 조금 뿌려 시커먼 뻥기계에 넣고 돌렸다. 뻥기계는 석유버너로 달궜다. 그러면 기계 안에 넣은 쌀이나 옥수수는 높은 압력에서 익었다. 기계 머리에 달린 눈금을 보던 뻥아저씨가 큰 소리로 "뻥이요!"하고 외치면 이젠 터질 때다. 뻥아저씨의 외침은 놀라지 말라는 일종의 경계경보인데 그 소리만 나면 그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던 아이들은 골목골목으로 도망을 가거나 귀를 막은 채 머리를 괴춤에 쿡 처박았다.

"뻥!" 기계의 뚜껑이 열리면 하얗게 터져나오는 김을 헤치고 강냉이와 튀밥이 폭죽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도망갔던 아이들은 불 본 나방처럼 뻥기계 앞으로 몰려들었고, 뻥아저씨는 싸주고 남은 부스러기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튀밥은 그런 대로 먹을 만했지만 강냉이는 좀 달랐다. 뻥아저씨가 주는 것은 부스러기라 부스러진 간냉이 반에 꺼끌꺼끌한 옥수수 껍질이 반이었다. 껍질은 씹히지 않고 입을 겉돌다 이 사이에 끼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강냉이 부스러기를 손위에 올려놓고 후후 바람을 불거나 이쪽 손에서 저쪽 손으로 쏟아가며 바람을 불어 꺼끌꺼끌한 옥수수 껍질을 가려냈다. 그리고 뻥아저씨는 기계 돌리는 게 귀찮아지면 아이들 중에 한 명을 골라 기계 돌리는 일을 시켰다. 기계를 돌리는 아이에게는 뻥아저씨가 특별히 강냉이나 튀밥을 챙겨서 줬다. 기계 돌리는 일은 어렵거나 힘들지도 않은 데다 강냉이까지 듬뿍 얻을 수 있으니 아이들은 턱을 괴고 둥글게 둘러앉아 '이제나 저제나 뻥아저씨가 나를 부를까.'하고 기다렸다.

반공 포스터



6월 25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아이들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똑같게 그리는 것은 북괴의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도깨비처럼 뿔을 그려야 했고, 얼굴과 팔엔 빨간색을 칠했다. 왜? 빨갱이니까. 또 팔뚝엔 온통 고슴도치 가시같이 뻣뻣한 털을 그려넣어야 비로소 북괴의 모습이 됐다. 그리고 북괴가 남한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모습이나 용감한 아이가 북괴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을 그리든지.

우리 나라 지도도 북한은 빨갛게 칠했다. 북한이 빨갱이라면 남한은 그 반대로 파랭이라고 해서 아이들은 남한을 파랗게 칠했다. 빨강과 파랑이 칠해진 우리 나라 지도는 남한 국기의 태극과 모습이 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포스터 아래나 위에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반공 방첩"과 같은 구호를 써넣었다. 반공 표어 짓기도 거의 의무적으로 해가야 했다. 잘 된 포스터와 표어를 뽑아 6·25날 운동장 조회시간에 상을 줬다.

반공 웅변 대회도 해마다 열렸다. 그런데 반공 웅변은 어찌된 일인지 가난한 애들은 잘 못했다. 못 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가난한 탓에 아이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을 거다. 학교에서는 웅변반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웅변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반공 웅변 대회도 학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대회, 전국 대회가 있어 학교끼리 경쟁을 했기 때문이다.

웅변 원고의 단골 메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의 절규와 '일천구백오십년 유월 이십오일, 새벽 네시'로 시작하는 전쟁 이야기였다. 또 한 오른손과 왼손을 치켜든 뒤 허공에서 양손을 부르르 떨며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도 단골 메뉴였다. 듣는 사람은 딴청을 하다가도 그 소리만 나오면 박수를 쳤다. 그러나 웅변 원고는 아이들이 썼다기보다 선생님의 작품인 경우가 더 많았다.

길거리에도 그런 구호는 많이 붙어 있었다. 반공 구호의 베스트셀러인 '의심나면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같은 것이었다. 양철판에 써서 전봇대 같은 데다 묶어놓기도 했고, 동네 반장 집이나 통장 집 대문 한쪽에 꼭 붙여 놨었다. 빨간 삐라를 주워오면 학교에서 상품을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상품으로 주는 연필을 타려고 동네 뒤 돌산을 뒤지기도 했다. 재수가 좋으면 남산이나 한강이나 기찻길 주변에서 뭉텅이째 불온삐라를 줍기도 했는데 한 사람이 여러 장을 내도 상품은 하나 뿐이라 아이들은 서로 나눠서 학교에 냈다. 물론 아이들이 주워온 삐라의 장수를 합산해 1년에 한번 6·25날 많이 주워온 아이들에게 '삐라상'을 주기도 했지만.

자전거와 버스 이야기



가겟집에서 물건 배달하는 데 쓰는 짐빠자전거는 윗동네에는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짐을 싣고 다니는 자전거라 아랫동네 시장통 가겟집에서도 쌀가게나 야채가게, 막걸리 도매상같이 무거운 짐을 배달해야 하는 가게에만 있었다. 윗마을 돌산 동네 아이들에겐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시장통 아이들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그 짐빠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웠다. 당시 조금 큰 가게에서는 배달원을 두고 장사를 했는데 아이들은 그 '배달 형'들을 졸라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배달 형들은 달동네 아이들의 부모들처럼 쌀밥을 꿈꾸며 무작정 상경해 떠돌다 가겟집에 취직한 20대들이었다. 당시 무작정 상경한 시골 형들은 공장의 공돌이나 가겟집 배달꾼으로 취직했다. 짐빠자전거 뒤 짐 싣는 곳에 자기 키보다도 더 높게 물건을 쌓고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배달 형들의 모습은 아이들이 보기엔 신기에 가까웠다.

짐빠자전거보다 작고 가벼웠지만 짐빠자전거에 없는 뒷거울이 핸들 양쪽에 달려 있던 신사용 자전거는 동네에 몇 대밖에 없었다. 달동네 아버지들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돈을 모아 자전거를 샀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파는 게 주업이 아니고 '빵꾸' 때워주고 바퀴에 바람도 넣어주는 자전거포가 있었다. 지금 보면 별로 고장날 곳이 없고 연장만 있으면 아무나 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엔 시골서 올라온 형들이 봉급도 몇 푼 못 받고 매맞아가며 자전거포에서 수리를 배웠다. 그들의 꿈은 빨리 기술을 배우고 돈도 모아 자신의 자전거포를 차리는 거였다. 그래서 무작정 상경해 서울에서 자전거포를 냈다고 하면 고향 사람들이 "그놈 서울 가서 출세했네."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60년대 중순부터는 버스가 대중교통 수단이 됐다. 당시 버스는 타는 문 쪽에 돈통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운전사 외에도 차장이 탔다. 차장은 요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거슬러주고, 요즘은 녹음해서 틀어주는 정류장 안내도 했다. 차장은 처음엔 남자가 했는데 점차 시골에서 상경한 누나들로 바뀌었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누나들은 시골 형들처럼 공순이가 되거나 차장이 됐다. 차장 누나들은 코맹맹이 소리로 정류장 안내를 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에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 가요."가 있었다. 차장 누나들이 "청량리 중량교 망우리 가요."를 코맹맹이 소리로 하면 그렇게 들린다나.

차장 누나들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긴 끈이 달린 손가방을 앞으로 메고 차비를 받았다. 대중교통 수단이 된 만큼 버스는 늘 만원이었는데 몸 전체를 버스 안으로 디밀지 못한 승객들은 늘 버스 문짝에 매달려 가야 했다. 그러니 말로 해서는 운전사와 차장 간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무전을 치듯 차체를 두르려 보내는 신호였다. 차장이 버스 차체를 두 번 두드리면 '가시오'이고, 한 번 두드리면 '서시오'였다. 운전사는 승객들이 문짝에 매달린 채로 출발하게 되면 지그재그 운전을 해 승객들을 버스 안으로 우겨넣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승객들이 안쪽으로 쏠리면 신기하게도 발 하나 디딜 틈이 없을 것 같은 버스 속으로 승객들이 모두 들어갔다. 물론 이 곡예운전 통에 매달려가던 차장 누나들이 손잡이를 놓쳐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신문에 났다. 차장 누나들은 그렇게 번 돈을 모아 고향에 있는 남동생의 학비를 댔다.

타작



장다리꽃 지천으로 널린 초여름, 보리 타작을 시작으로 농가는 거둬들이는 기쁨을 맛본다. 탈곡기가 요란하게 돌기 시작하면 꺼럭(벼, 보리 등의 낟알 겉껍질에 붙은 수염. 까끄라기의 사투리)이 꽃가루 날리듯 했고, 댓돌 위에 올려놓은 요강에도 미숫가루처럼 뽀얗게 올라앉았다. 품앗이 일꾼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벌겋게 충혈된 눈만 빠끔 열어놨다. 손 잘 맞는 두세 명이 박자를 타며 탈곡기 수레 보릿단을 밀어넣으면 맨송맨송한 알곡이 바닥에 소복이 쌓이고, 보릿짚은 머리 깎은 중마냥 개운하게 검불 속에 던져졌다. 바심이 끝나면 일꾼들은 땅바닥에 빙 둘러앉아 농주를 돌리고 갓 담가낸 김치를 흙 묻은 손으로 나눠먹으며 꺼끌한 목을 축였다.

그렇게 타작한 보리는 주린 보릿고개를 넘기는 고마운 주식이었다. 새벽이면 가마솥이 덜컹덜컹 끓고 구수한 밥 냄새가 창호지를 밀치고 들어오면 뱃속은 요동을 쳤다. 여름에 구들을 달궈가며 밥짓는 일은 고통이었다. 가능하면 아침에 밥을 지어 점심까지 해결했다. 그래서 그 시절 부엌 천장엔 흔들흔들 밥고리(새끼줄로 삼각형 틀을 만들어 삼베로 기운 소쿠리를 얹고 밥을 퍼담으면 밥이 쉬지 않는다)가 풍경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밥소쿠리를 베보자기로 덮어 열무김치와 함께 들밥으로 내가면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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