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김석종 지음 | 마당넓은집
놀이도 시큰둥해지는 오후, 화들짝 사립을 밀치는 과일장수 '아짐니', 가끔 비린내 풍기며 고샅에 들어서던 생선장수도 반갑긴 마찬가지였다. "자반 사세유." "물 좋아유." 솔가지로 덮은 다라이에 무겁게 내려앉던 한숨. 밥 세 끼도 호강인데 생선 굽는 일은 이웃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애들 시켜 몰래 아짐니를 불러들였다. 하얀 소금이 꽃처럼 얹어진 자반 고등어, 짠 갈치, 꽁치 몇 마리…. 장에 다녀오시는 아버지 자전거에 어쩌다 한 번 건들건들 매달려 있던 귀한 생선을 먹을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두어 마리 들여놓으면 그 날 저녁은 냄새로 잔치했다. 아궁이에 짚불 대신 장작을 사르고 벌겋게 달아오른 숯이 혀를 내밀면 시커먼 소금 툭툭 뿌려 석쇠에 올려지던 꽁치. 노릇노릇 익으면 아이들은 조막 강아지처럼 들락거렸고 어머니는 자꾸 부엌 문 닫으며 냄새 단속을 하셨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괜히 "식욕이 없다."며 생선 접시를 슬쩍 밀어놓으셨고, 어머니는 뽀얀 살을 발라 붓꽃만큼씩 수저 위에 올려주셨다.
늦가을에서 초겨울쯤이면 단지를 보자기로 싸서 이고 다니는 꿀장수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종지로 꿀을 길게 늘여 개면서 토종임을 강조했으나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꿀은 다락이나 시렁 위에 영정 사진처럼 모셔졌다. 그러나 어린 사냥꾼들은 용케도 그 단지를 꺼내 한 수저씩 퍼먹고 시치미를 뗐다. 입 언저리가 부르트면 어머니는 손가락에 쥐똥만큼 찍어 발라주며 빨아먹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멀리 체장수가 지나가면 사람은 안 보이고 커다란 통가리(싸리를 새끼로 발처럼 엮어 둥글게 둘러치고 그 안에 감자, 고구마 등 곡식을 갈무리했다. 겨우내 얼지 않도록 윗방이나 부엌 안에 설치했음)가 굼실굼실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가벼워 20∼30개를 끈으로 엮어 꼴처럼 지고 다녔다. 아래쪽엔 조리나 수세미도 달랑달랑 매달았다. 상(床)장수도 가끔 모습을 보였다. 네댓 개를 끄낵기(끈의 사투리)로 묶어 지거나 이고 다녔다. 망가진 상을 고쳐주고 덧칠해주며 공임을 받았다.
기성복이 쏟아져 나오자 옷감을 지고 다니던 비단장수는 모습을 감췄다. 대신 속옷, 양말, 주름치마 등 온갖 의류를 이고 다니는 옷장수가 등장했다. 5일장에 가면 장돌뱅이들이 늘어섰지만 그래도 곡식과 바꾸는 방문 장수는 인기를 끌었다. 경상도 아짐니가 충청도 섬마을까지 들어와 마루에 알록달록 옷을 펼쳐놓으면 아이들 성화에 아낙들은 몸살을 앓았다. 이 보따리 장사꾼들은 누가 불러 앉히지 않으면 때 거르는 일은 예사였다. 찬밥이라도 내놓으면 고마워 눈물 그렁이며 옷가지나 과일을 슬쩍 내려놓고 갔다.
방물장수가 빼죽 얼굴을 디밀면 반가워하는 건 어머니였다. 면경(얼굴을 비추는 작은 거울), 참빗, 실, 바늘, 가위, 검정 고무줄, 족집게, 동동구리무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외상으로 슬쩍 분 등을 들여놓고 장에 갈 때만 살짝 분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시커먼 무쇠통을 지고 마을을 돌던 왜지름(일제가 들여온 석유라고 해서 부른 이름) 장수 아저씨도 환대를 받았다. 어쩌다 등잔이나 남포등 기름이 떨어지면 당장 읍내까지 나갈 수도 없고 난감할 때마다 골목을 돌며 "석유지름 사세유" 외치던 반가운 손님. 어른들은 기름병을 마루 기둥에 끄낵기로 매달아놓고 아껴 썼다.
이렇게 보따리 장수는 마을을 돌며 잔치, 초상, 시집간 재 너머 딸 소식 등 얘기 보따리를 함께 이고 다녔다. 변변히 차편도 없었고 늘 다리품을 팔아야 요긴한 물품을 구할 수 있었던 시절. 보따리 장수는 기다릴 사람 없는 무료한 시골 살림의 낭만이었고 반가운 손님이었다. 인기척 없이 사립에 불쑥 들어서도 탓하는 이 없었고, 끼니 때 들르면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맞았던 인정. 아지랑이 가물대는 둔덕길을 남실남실 넘던 꿀장수 아짐니가 아련한 추억 속에 피어오른다.운동회 날. 아, 찬란한 햇살. 아이들 맘은 풍선처럼 떠다녔다. 새벽부터 지단을 부치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고샅을 휘돌았다. 노인들도 참빗에 물을 발라 쪽을 찌고, 부엌 곤로엔 달걀 두어 줄이 익어가고, 김밥이 뚝뚝 잘려 찬합에 담겼다. 아이들은 도마를 노려보며 김밥 꽁지를 눈치껏 나눠먹었다. 또 이틀 전 바늘로 흠집을 내어 소금물에 담가 아랫목에 우려둔 땡감도 건져내고 밤도 한 됫박이나 삶았다. 뙤약볕에서 밭만 매던 엄마한테도 그 날은 분 냄새가 났다.
학교에 도착하면 귀빈석 천막이 잔칫집처럼 세워지고, 선생님은 하얀 모자에 운동복, 호루라기 하나씩을 걸고 대통령처럼 호령했다. 전교생이 흰 티셔츠에 검정 반바지, 그리고 청군 백군을 나눈 모자를 하나씩 썼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운동복이었지만 날개 단 듯 신바람이 났다. 상고머리 여자아이들은 머리띠 색깔로 청백을 나눴다. 교문 주변은 꼬마 손님들을 유혹하는 장사치들로 일찌감치 성시를 이뤘다. 흔치 않던 손나팔 삑삑이며 빨간 닭털이 달린 풍선 등 조악한 플라스틱 장난감들이 펼쳐지고 뽑기 판이며 먹을 것들이 지천으로 들어섰다.
"탕!" 총소리가 울리고 화약 냄새가 하늘로 번지면 함성이 운동장을 흔들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또 응원 점수를 겨냥한 재주꾼들의 춤 솜씨가 현란하게 목소리를 조율하고 삼삼칠박수는 물결처럼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도토리 아우들의 100m 달리기선 꼭 무릎 깨져 우는 아이가 있었고, 고학년 언니들의 부채춤엔 모처럼 마실 나온 구들지기 노인들도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모자를 거꾸로 쓴 형들의 기마전 호령이 하늘을 가르고, 텀블링 시범 후 밀가루에 얼굴을 박고 엿을 고르면 말간 웃음이 깨알 튀듯 했다. 쪽지 속 손님 모셔 달리기 땐 제일 예쁜 선생님 손을 빼앗듯 잡고 뛰면 선생님도 무조건 달려줬다.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줄꼬리에 순자 엄마, 복순이 아버지 모두 달라붙어 나중엔 그쪽 사람이 많네, 이쪽이 많네 삿대질이 벌어지기도 했다. 숯검정 칠에 짚을 엮어 치마를 두르고 바가지에 물감을 칠해 여장을 한 사내아이들의 가장행렬이 지나가면 폭소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여기저기 아이들 부르는 소리, 달그락 달그락 찬합 여닫는 소리 그리고 김밥 냄새. 선생님은 이곳저곳 불려다니며 한 잔 두 잔 거절할 수 없는 탁배기 권유에 얼굴이 발개졌다. 먹성 좋은 아이들은 찐 달걀을 그 자리서 여남은 개씩 까먹으며 욕심을 채웠다. 그 때 마시는 톡 쏘는 사이다 맛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 뒤편엔 가난 탓에 배를 곯으며 수돗가 주변을 빙빙 도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존심 상할까봐 몰래 김밥 몇 개를 건네면 그 아이들의 눈엔 말간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오후의 하이라이트는 계주. 대부분 어깨가 쩍 벌어진 5, 6학년 오빠들은 콧김을 씩씩대며 줄 앞에 섰다. 총소리가 나기 무섭게 바지게만한 걸음이 성큼성큼 뛰기 시작하면 뒤로 물러섰던 어른들이 일제히 몰려들고 아수라장이 됐다. 이땐 꼭 배턴을 떨어뜨리는 아이가 한두 명씩 있었는데 그래도 아랑곳 않고 다시 주워 팔을 내두르며 마치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뭐니뭐니 해도 상이 있어 아이들은 더 즐거웠다. 보라색 인주로 '賞(상)'자와 1등, 2등, 3등 도장이 찍힌 공책이나 연필을 받았는데 계주며 개인전을 휩쓸어 많이 받은 아이들은 1년 내내 공책 걱정하지 않고 쓸 만큼 쏠쏠했다.
운동장서 제일 높은 미끄럼틀 위에 올려놓았던 게시판에 마지막 점수가 올라가면 이긴 쪽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아이들의 땀과 마을의 축제로 흥겹던 그 시절 운동회. 우린 늘 그 벅차던 기다림의 축제가 그립고, 시간의 저편이 부스럼처럼 가렵다.보따리 장수6월 25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아이들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똑같게 그리는 것은 북괴의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도깨비처럼 뿔을 그려야 했고, 얼굴과 팔엔 빨간색을 칠했다. 왜? 빨갱이니까. 또 팔뚝엔 온통 고슴도치 가시같이 뻣뻣한 털을 그려넣어야 비로소 북괴의 모습이 됐다. 그리고 북괴가 남한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모습이나 용감한 아이가 북괴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을 그리든지.
우리 나라 지도도 북한은 빨갛게 칠했다. 북한이 빨갱이라면 남한은 그 반대로 파랭이라고 해서 아이들은 남한을 파랗게 칠했다. 빨강과 파랑이 칠해진 우리 나라 지도는 남한 국기의 태극과 모습이 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포스터 아래나 위에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반공 방첩"과 같은 구호를 써넣었다. 반공 표어 짓기도 거의 의무적으로 해가야 했다. 잘 된 포스터와 표어를 뽑아 6·25날 운동장 조회시간에 상을 줬다.
반공 웅변 대회도 해마다 열렸다. 그런데 반공 웅변은 어찌된 일인지 가난한 애들은 잘 못했다. 못 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가난한 탓에 아이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을 거다. 학교에서는 웅변반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웅변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반공 웅변 대회도 학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대회, 전국 대회가 있어 학교끼리 경쟁을 했기 때문이다.
웅변 원고의 단골 메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의 절규와 '일천구백오십년 유월 이십오일, 새벽 네시'로 시작하는 전쟁 이야기였다. 또 한 오른손과 왼손을 치켜든 뒤 허공에서 양손을 부르르 떨며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도 단골 메뉴였다. 듣는 사람은 딴청을 하다가도 그 소리만 나오면 박수를 쳤다. 그러나 웅변 원고는 아이들이 썼다기보다 선생님의 작품인 경우가 더 많았다.
길거리에도 그런 구호는 많이 붙어 있었다. 반공 구호의 베스트셀러인 '의심나면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같은 것이었다. 양철판에 써서 전봇대 같은 데다 묶어놓기도 했고, 동네 반장 집이나 통장 집 대문 한쪽에 꼭 붙여 놨었다. 빨간 삐라를 주워오면 학교에서 상품을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상품으로 주는 연필을 타려고 동네 뒤 돌산을 뒤지기도 했다. 재수가 좋으면 남산이나 한강이나 기찻길 주변에서 뭉텅이째 불온삐라를 줍기도 했는데 한 사람이 여러 장을 내도 상품은 하나 뿐이라 아이들은 서로 나눠서 학교에 냈다. 물론 아이들이 주워온 삐라의 장수를 합산해 1년에 한번 6·25날 많이 주워온 아이들에게 '삐라상'을 주기도 했지만.가겟집에서 물건 배달하는 데 쓰는 짐빠자전거는 윗동네에는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짐을 싣고 다니는 자전거라 아랫동네 시장통 가겟집에서도 쌀가게나 야채가게, 막걸리 도매상같이 무거운 짐을 배달해야 하는 가게에만 있었다. 윗마을 돌산 동네 아이들에겐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시장통 아이들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그 짐빠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웠다. 당시 조금 큰 가게에서는 배달원을 두고 장사를 했는데 아이들은 그 '배달 형'들을 졸라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배달 형들은 달동네 아이들의 부모들처럼 쌀밥을 꿈꾸며 무작정 상경해 떠돌다 가겟집에 취직한 20대들이었다. 당시 무작정 상경한 시골 형들은 공장의 공돌이나 가겟집 배달꾼으로 취직했다. 짐빠자전거 뒤 짐 싣는 곳에 자기 키보다도 더 높게 물건을 쌓고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배달 형들의 모습은 아이들이 보기엔 신기에 가까웠다.
짐빠자전거보다 작고 가벼웠지만 짐빠자전거에 없는 뒷거울이 핸들 양쪽에 달려 있던 신사용 자전거는 동네에 몇 대밖에 없었다. 달동네 아버지들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돈을 모아 자전거를 샀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파는 게 주업이 아니고 '빵꾸' 때워주고 바퀴에 바람도 넣어주는 자전거포가 있었다. 지금 보면 별로 고장날 곳이 없고 연장만 있으면 아무나 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엔 시골서 올라온 형들이 봉급도 몇 푼 못 받고 매맞아가며 자전거포에서 수리를 배웠다. 그들의 꿈은 빨리 기술을 배우고 돈도 모아 자신의 자전거포를 차리는 거였다. 그래서 무작정 상경해 서울에서 자전거포를 냈다고 하면 고향 사람들이 "그놈 서울 가서 출세했네."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60년대 중순부터는 버스가 대중교통 수단이 됐다. 당시 버스는 타는 문 쪽에 돈통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운전사 외에도 차장이 탔다. 차장은 요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거슬러주고, 요즘은 녹음해서 틀어주는 정류장 안내도 했다. 차장은 처음엔 남자가 했는데 점차 시골에서 상경한 누나들로 바뀌었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누나들은 시골 형들처럼 공순이가 되거나 차장이 됐다. 차장 누나들은 코맹맹이 소리로 정류장 안내를 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에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 가요."가 있었다. 차장 누나들이 "청량리 중량교 망우리 가요."를 코맹맹이 소리로 하면 그렇게 들린다나.
차장 누나들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긴 끈이 달린 손가방을 앞으로 메고 차비를 받았다. 대중교통 수단이 된 만큼 버스는 늘 만원이었는데 몸 전체를 버스 안으로 디밀지 못한 승객들은 늘 버스 문짝에 매달려 가야 했다. 그러니 말로 해서는 운전사와 차장 간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무전을 치듯 차체를 두르려 보내는 신호였다. 차장이 버스 차체를 두 번 두드리면 '가시오'이고, 한 번 두드리면 '서시오'였다. 운전사는 승객들이 문짝에 매달린 채로 출발하게 되면 지그재그 운전을 해 승객들을 버스 안으로 우겨넣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승객들이 안쪽으로 쏠리면 신기하게도 발 하나 디딜 틈이 없을 것 같은 버스 속으로 승객들이 모두 들어갔다. 물론 이 곡예운전 통에 매달려가던 차장 누나들이 손잡이를 놓쳐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신문에 났다. 차장 누나들은 그렇게 번 돈을 모아 고향에 있는 남동생의 학비를 댔다.장다리꽃 지천으로 널린 초여름, 보리 타작을 시작으로 농가는 거둬들이는 기쁨을 맛본다. 탈곡기가 요란하게 돌기 시작하면 꺼럭(벼, 보리 등의 낟알 겉껍질에 붙은 수염. 까끄라기의 사투리)이 꽃가루 날리듯 했고, 댓돌 위에 올려놓은 요강에도 미숫가루처럼 뽀얗게 올라앉았다. 품앗이 일꾼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벌겋게 충혈된 눈만 빠끔 열어놨다. 손 잘 맞는 두세 명이 박자를 타며 탈곡기 수레 보릿단을 밀어넣으면 맨송맨송한 알곡이 바닥에 소복이 쌓이고, 보릿짚은 머리 깎은 중마냥 개운하게 검불 속에 던져졌다. 바심이 끝나면 일꾼들은 땅바닥에 빙 둘러앉아 농주를 돌리고 갓 담가낸 김치를 흙 묻은 손으로 나눠먹으며 꺼끌한 목을 축였다.
그렇게 타작한 보리는 주린 보릿고개를 넘기는 고마운 주식이었다. 새벽이면 가마솥이 덜컹덜컹 끓고 구수한 밥 냄새가 창호지를 밀치고 들어오면 뱃속은 요동을 쳤다. 여름에 구들을 달궈가며 밥짓는 일은 고통이었다. 가능하면 아침에 밥을 지어 점심까지 해결했다. 그래서 그 시절 부엌 천장엔 흔들흔들 밥고리(새끼줄로 삼각형 틀을 만들어 삼베로 기운 소쿠리를 얹고 밥을 퍼담으면 밥이 쉬지 않는다)가 풍경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밥소쿠리를 베보자기로 덮어 열무김치와 함께 들밥으로 내가면 꿀맛이었다.
콧속이 콰하게 밤 공기가 싸늘해지면 콩밭도 누렇게 주저앉았다. 날 잡아 볕 뉘엿뉘엿한 저녁 무렵 온 가족이 낫을 들고 비탈밭으로 간다. 아이들도 따라나서 콩대 묶는 일을 도왔다. 콩대는 마당에 눕혀 익은 볕에 사나흘 바싹 말린 후 타작을 했다. 도리깨는 쉴새없이 돌아 깍지 속 콩이 다 퉁겨나가도록 매질을 했다. 훗날 고향을 찾았을 때 완행버스에서 내려 집 쪽을 돌아보면 담장 너머로 도리깨가 올라갔다 내려오는 풍경이 어머니 손짓하는 모습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 기억이 있다. 콩 타작이 끝나면 바람 좋은 날 키 내림을 했다. 키에 콩을 담아 살랑살랑 까부르면 알갱이는 소복이 쌓이고 잡물은 날아갔다. 동네에 서너 대밖에 없는 풍구를 빌리면 일이 좀 쉽기도 했다. 콩 한 알만 버려도 죄 된다고 여겼던 시절, 아이들은 풀숲, 나무 밑동으로 퉁겨나간 콩을 찾아 됫박을 들고 온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