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를 키운 나라 네덜란드
박영신 지음 | 사과나무
네덜란드 하면 풍차와 더불어 튤립이 떠오른다. 그러나 튤립의 원산지는 네덜란드가 아니라 지중해 쪽이다. 터키에서 들여와 네덜란드에서 아름다운 품종들을 계속 개발함으로써 튤립은 아름다운 꽃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난 17세기 네덜란드가 온통 튤립 투기 열풍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튤립의 변종이 유행하여 온 국민이 튤립 투기에 몰두하여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 무려 37년 동안 지속된 이 튤립 거품기간 중 한때는 튤립 한 뿌리가 마차 1대, 말 2필과 맞교환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튤립의 '팔자' 주문이 쇄도하고 가격이 폭락하면서 투기자들이 속속 파산하고 국민경제마저 파국을 맞는 상황까지 갔다.
세계적인 알스미어 화훼 경매장 지역은 꽃으로도 유명하지만 영화 산업으로도 각광받는 네덜란드의 할리우드이다. 또한 스키폴 국제 공항이 10분 거리에 있어서 오늘 새벽 이 화훼 경매장에서 팔린 신선한 꽃은 다음날 아침이며 이미 뉴욕의 일류 호텔 방에 꽂힌다. 이 꽃들은 세계 시장에 팔려나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네덜란드는 한국 국토의 1/3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광활한 대륙에 비하면 젖소의 마릿수도 너무나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값싼 우유를 많이 들여와 네덜란드식의 치즈를 만들어 전 세계에 비싼 값으로 수출한다. 이 같은 교역은 묘미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 값싸게 사와서 일정한 가공을 하여 부가가치를 높인 후 이윤을 덧붙여 다른 나라에 파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 세계의 꽃시장과 유가공 제품의 무역은 네덜란드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다.얼마 전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네덜란드 대법원장이 되었다. 그는 대학교수로서 지적권리, 상표법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생각건대 "어떻게 지적소유권 및 상표법의 권위자가 한 나라의 대법원장이 되었는가?"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인의 나라 네덜란드에는 국제상인들이 많기 때문에 MS와 같은 세계의 유수 기업들과 지적재산권을 놓고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적재산권은 돈과 직결되므로 지적재산권이나 상표법의 세계적인 권위자들이 대법원장을 하면서 국부를 지켜 나가자는 것이 바로 '국제상인의 나라 네덜란드의 법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네덜란드는 실익을 중시하는 나라인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기차나 전철을 탈 때 이용자가 알아서 요금을 지불한다. 가끔 기차 안에서 검표원이 무작위로 승객의 표 소지 여부를 확인할 뿐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사회가 신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대변해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네덜란드는 매우 작은 나라이면서도 유럽연합(EU)의 탄생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유명한 베네룩스 경제 공동체 시장이 오늘의 EU의 전신이며, 10여년 간 네덜란드 중앙은행 총재로 있으면서 1992년 유로화 통화를 창설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뒤젠버그 씨가 유럽중앙은행의 총재를 맡고 있다. 조그마한 나라 네덜란드인이 유럽의 강대국들을 제치고 유럽중앙은행의 총재가 될 수 있는 것은 네덜란드인들이 전통적으로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음을 주변국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80년대 초, 네덜란드 경제는 최악의 상태였다. 실업률은 거의 20%에 육박하였고, 달러 환율도 3배 가까이 폭등했다. 당시 러버스 총리는 네덜란드의 경제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위기극복을 위해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였다. 암스테르담의 몇 배 넓이의 플레볼랜드 주의 땅을 간척사업으로 확장한 다음 그곳에 여러 신도시를 세우고 새로운 공장, 목장, 농장, 주택단지, 원예낙농연구소, 학교 등을 세웠다. 이곳으로 이전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정부가 재정지원을 했으며, 실업자 고용시에는 정부보조금을 주어 수많은 실업자들을 흡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네덜란드 정부는 북쪽 미개발 지역이었던 그로닝겐으로 중앙 정부 조직 일부를 이전하고 우수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그로닝겐 국립대학을 세웠다. 이 대학 교수 출신들이 앞장서서 수많은 국제기업들을 유치하고, 여러 도시의 실업자들이 이곳에 취업하면서 이제는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바로 이 사업이 네덜란드인이 자랑하고 있는 '폴더 모델'이다.
네덜란드는 세계 다국적 기업의 본부가 가장 많이 위치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로테르담이라는 세계 최고의 물류 전진기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네덜란드인만이 가진 개방적인 세계관과 언어능력 덕분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인은 외국어에 대한 능력이 출중하다. 또한 네덜란드와 독일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처럼 역사적으로 침략과 지배로 얽혀 있는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은 유럽 최대 시장의 하나인 독일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하이네켄 맥주가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맥주로 자리잡았고, 네덜란드 치즈와 낙농품, 그리고 채소와 꽃들이 독일시장을 거의 점령할 수 있었다.네덜란드의 명문 축구 클럽들네덜란드에는 대표적인 축구 클럽이 3개 있다. 암스테르담 시의 대표 클럽 아약스(Ajax), 로테르담 시의 대표 클럽 페예노르트(Feyenoord), 히딩크 감독이 감독을 맡은 아인트호벤(Eindhoven) 시의 PSV 클럽이 그것이다. 2002년 5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유럽컵(UEFA) 대회에서 로테르담의 페예노르트 팀이 우승함으로써 현재 가장 사기가 충천해 있다. 선수들은 물론 감독은 비싼 몸값을 제시하며 유럽과 세계 각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월드컵에 출전할 때는 아약스, PSV는 물론 여러 클럽에서 대표팀을 뽑아 나가지만 유럽컵 대회에는 각 클럽별로 출전한다.
네덜란드는 경상남북도를 합친 크기일 정도로 작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오렌지군단 네덜란드 축구팀이 이처럼 강한 것은 두터운 선수층과 어릴 적부터 다져온 기초 체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축구대표 선수들은 명문 세 클럽인 아약스, 페예노르트, PSV에서 주로 배출된다. 이 세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 팀과 연결된 수많은 주니어 클럽 등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북홀란드 등의 주니어 클럽 소년 선수들은 당연히 아약스가 최종 목표이고, 로테르담 근처는 페예노르트, 그리고 아인트호벤 및 동남부 주니어 클럽 등에서는 PSV를 최종 목표로 어려서부터 열심히 뛴다. 세 곳의 메이저 팀들도 미래의 선수들을 기르기 위해 많은 주니어 클럽들을 지원하고 있다.
네덜란드 남학생들에게는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는 게 가장 큰 꿈이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초, 중, 고에 다니면서 방과 후 매주 2∼3회 자기 집 근처의 클럽에 다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축구 연습을 하고 실력을 인정받아 이 세 군데 클럽에 추천되면 일약 스타가 된다.
현재 네덜란드 축구팀은 2004년에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유럽컵 대회에서 어떤 성적이 나오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팀의 성공 방향이 정해질 것 같다. 현재 한창 사기가 치솟고 있는 페예노르트, 네덜란드 최고 팀의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아약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영웅 거스 히딩크를 영입하여 과거의 전성기를 되찾으려는 PSV팀, 이 세 클럽의 각축이 기대되고 있다. 지금 아인트호벤 주민들은 히딩크 감독의 복귀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고, 이적하려던 선수들도 히딩크의 부임 소식에 잔류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들은 히딩크가 "숙적 아약스 암스테르담을 무너뜨릴 아인트호벤의 구세주"라고 들떠 있다. 이제 히딩크가 한국 국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월드컵 본선 진출 좌절로 슬픔에 잠겨 있던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날을 기대해 본다.네덜란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홀드'라는 유통체인이 있다. 아홀드의 모기업은 잔담이라는 기업인데 바닷물에 뚫린 댐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았다는 어린이의 얘기가 전설로 남아 있는 잔다르크 지방의 잔담이라는 도시 이름을 따서 회사를 세웠다. 아홀드는 미국과 중국 등 세계 전역에 약 3천여 개의 체인을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유통업체이다. 약 100년 전에 이 잔담이라는 도시에서 시작한 아홀드는 네덜란드의 많은 어린이에서부터 대학생들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아홀드의 슈퍼체인에서 일을 하며 소비자 문제라든가 회계법 등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갖는다.
이 아홀드는 비록 네덜란드계 회사지만 전문 경영인을 뽑을 때는 국적을 따지지 않고, 전 세계에서 유능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선출한다. 그러고 보니 스웨덴 사람이 사장을 하기도 하고, 남미 출신이 전문경영인을 맡기도 할 만큼 개방적인 회사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 때문에 사원들의 국적도 30여개 국에 이를 만큼 다양하다. 이런 아홀드의 최대 장점은 인력관리에 있다. 아홀드는 중학생부터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다. 중학교 3학년 이상이면 누구나 그곳에 아르바이트 신청을 할 수 있는데 중학교 3학년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홀드에서 일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시간당 네덜란드 돈으로 10길더(약 6천원) 미만의 매우 박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노동량이 결코 만만한 것도 아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하루에 약 8시간 가량 일을 하는데 한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노동을 한다. 복지국가여서 세금이 엄청난 네덜란드에서는 이들이 받는 보수에서 높은 세금까지 원천징수하고 나면 실수령액은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은 땀의 대가를 소중히 하고 경제의 흐름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홀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에 아홀드의 사원으로 입사한다. 그런 다음 아홀드에서 승진해서 전문경영인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 전문경영인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젖먹이 시절부터 아홀드에 가서 보모들의 손에서 우유를 먹고 커왔으며, 결국에 가서는 아홀드에서 퇴직을 하게 되므로 아홀드의 사원이 되면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책임지는 회사나 다름없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그 학생의 능력과 실적 등을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어 신입사원 채용부터 아홀드가 원하는 사람을 뽑을 수 있고, 또 뽑힌 사원들은 어릴 적부터 아홀드를 자신의 가정처럼 느끼며 성장해왔기 때문에 업무처리에 있어서도 거의 어려움 없이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훈련된 유능한 인재들이 결국은 동유럽, 중국, 남미 등 세계 각국에 가서 아홀드의 철학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니 세계 어느 유통업체가 이 아홀드를 따라갈 수 있겠는가.제2장 국제상인의 나라 네덜란드
세계적인 유통 체인 아홀드 이야기튤립은 어떻게 투기의 대상이 되었나제4장 꿈★은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편한 도시를 꿈꾸며젊은이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다나는 80년대부터 시작해 20년 가까이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 여러 국가들, 즉 중국,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인도, 말레이시아, 대만, 홍콩 등으로부터 많은 물건을 사왔다. 싱가포르, 홍콩 등과 거래하면서 보니 중국계 상인들은 비교적 약속을 잘 지키고 장점이 많았다. 중국 상인들은 예로부터 실크로드를 거쳐 동서 무역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잘 다루고 파악할 수 있어야만 세계적인 상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10년 이상 중국인들과 교역하며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섭렵하면서 느낀 점은 중국의 훌륭한 20∼30대 젊은이들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현재 주요 도시마다 국제무역학교를 설치해 두고 수출만이 국부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70년대 초,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한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정신으로 12억 인구 중 똑똑한 젊은이들을 뽑아 국제무역학교에서 훈련시키는데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것만큼 선망의 대상이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정열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신이 나서 열심히 일한다. 그들도 나처럼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여 이윤을 남긴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 쉽게 공감대가 형성된다.제5장 네덜란드는 제2의 나의 고향
골드러시에는 청바지를 팔아라이곳에 와서 내가 알게된 네덜란드의 유태 상인들 중 내가 매우 존경하면서 양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있다. 시몬 미슈밤 영감님인데 그는 항상 새로운 고객을 만날 때마다 한국에서 온 아들이라고 나를 소개한다. 나와는 매우 친밀한 친분을 가지게 되어 그가 아프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꼭 나를 불러 상의도 한다. 8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지혜롭고 계산력, 기억력, 판단력이 뛰어나 얼마 전까지도 직접 동남아까지 다니며 물건을 구매했다. 그는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네덜란드는 날씨가 안 좋듯이 네덜란드 상인도 변화무쌍하다. 그리고 이 조그만 시장에서 안주하지 말고 미국 같은 큰 나라에 가서 사업을 하면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조언하곤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언뜻 "내가 이곳 네덜란드 상인들과 경쟁하여 자꾸 이기니까 나를 간접적으로 회유해서 네덜란드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그의 조언은 진심이었다. 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나를 위해 해준 충고였다.
미슈밤 영감님은 네덜란드 수입상으로는 최고 상인이다.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 훈장도 많이 받았고,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유태계의 대부이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네덜란드에 선경 주재원으로 나와 있을 때인 1975년이었다. 그때 미슈밤 씨는 이미 대우와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대우 지사장은 아주 유능한 세일즈맨으로 알려져 있었다. 미슈밤 씨와 거래를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우연히 이루어진 식당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그를 찾아갔다. 이미 홍콩과 동남아 등지에서 거래를 많이 하고 있었던 그는 마침 떠오르는 나라인 한국과 거래를 더 많이 늘리고 싶어하던 참이었다. 먼저 거래하던 대우는 와이셔츠 전문이었지만 나는 점퍼 전문이어서 다행히도 물건이 중복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미술품을 선물하고 점퍼를 구입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 수십만 달러의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많은 양의 거래를 시작했다.
미슈밤 씨는 주문한 전체 물량 중 50%를 사주고, 나머지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에 팔았다. 물건이 생산되기도 전에 이미 다 팔려 있었고, 자금 운용 계획까지도 완벽하게 세워놓았다. 또한 약속대로 물건을 정확히 공급하자 그는 주는 대로 팔면서 물건이 가는 즉시 송금해 주었다. 1년간 그렇게 많은 물량을 다 어디다 파는지 놀랄 정도였다. 장사가 이렇게 잘 되자 그도 신이 나서 재미를 붙이면서 밥도 사주고 다른 유태 거상들에게 나를 소개해주면서 내 이름이 네덜란드의 유태계 사회에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마음 깊숙이 우러나오는 친절과 우정에 감동받아 연말 연시에는 항상 찾아 뵙고 인사를 한다. 유태인들의 중요한 의식이 시나고그(유태인 회당)에서 열리게 되면 그는 꼭 나를 초대하곤 했다. 저녁도 먹고 파티에도 참석하는데 그러한 파티에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유태인들이 다 모이는 자리이다. 동양인으로서 유일하게 끼어있는 나를 보고 다른 이들이 일본 사람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는 나를 한국에서 온 양아들이라고 소개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27년간 네덜란드에서 장사하면서 큰 실수하지 않고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나는 항상 미슈밤 영감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한국은 전통적으로 제조업을 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웃 일본이 제조업을 일으켜 나라의 부를 이룬 영향도 있지만 또 다른 측면은 그 동안 위정자들이 개발독재라는 형태의 경제발전을 해오면서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제개발을 해왔기 때문이다.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제조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