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중국 문학사 上
지세화 지음 | 일빛
이야기 중국 문학사 上
지세화 편저
일빛/2002년 4월/382쪽/13,000원
제1장 주․진의 문학
중국 제일의 재자(才子) - 장주와 그의 문학적 업적
공자가 편집한 『시경』이 중국 원시 문학의 가무를 엄격한 의미에서 문학으로 끌어올렸다면 다른 또 한 사람은 원시 문학의 신화를 정형화된 문학으로 끌어올렸다. 그가 바로 전국 시대의 대사상가인 장자(莊子)이다. 장자의 문장에는 중국의 고대신화를 소재로 하는 신기하고 놀랄 만한 상상력이 들어 있다. 또한 예리한 필봉 속에는 기이한 궤변과 극도의 형상성이 담겨 있어 독자가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한다. 예를 들면 그는 한 우언(寓言)에서 자신이 꿈을 꾸다 나비로 변해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꿈에서 깬 장자는 자신이 본래 사람인데 꿈에서 나비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나비인데 꿈속에서 장주로 변한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주가 나비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구나”라 한탄하며, 인생은 허황된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냈다. 이처럼 강렬한 상상력과 기묘한 형상성은 실로 보기 드문 것이며, 자유분방하며 풍부하고 짙은 서정성을 담고 있는 그의 문장은 전국 시대 제자 산문 중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장자는 대작가일 뿐만 아니라 전국 시대 사상계에서도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의 학술 사상은 도가(道家)와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노장(老莊)으로 병칭되었다. 그는 방임과 자연을 주창하고, 인위적이며 사회적인 모든 구속에 반대했다. 비록 불만의 근원을 발견하지 못하고 현실적 개혁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반기를 들고 더러운 세속과 함께하지 않으려 했던 점은 위대하다 하겠다. 또한 그는 세상의 모든 생사와 화복을 자연적으로 생기는 변화의 일종으로 보아 희로애락을 등한시했다. 그래서인지 아내가 죽었을 때 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땅에 앉아 질항아리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세상에는 원래 ‘그녀’라는 존재가 없었다가 후에 생겨난 것으로 지금 그녀가 죽은 것은 단지 무(無)로 다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니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장자의 아내는 평소 장자와 금슬이 좋았다. 그녀는 남편이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장자가 남편 무덤의 흙이 마르도록 부채질하던 여인의 일을 말했더니 아내는 그 여인의 행동을 나무라면서 장자의 아내는 만일 남편을 잃게 된다면 평생 수절하겠다고 했다. 장자는 아내의 진심을 시험하기 위해 3일 후 급한 병에 걸려 죽은 것처럼 가장했다. 장자가 죽은 뒤 찾아오는 조문객 중에 잘 생긴 데다가 돈이 많은 초나라의 왕손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쫓아다니자 장자의 아내는 변심하여 사랑을 맹세하였고, 그날 왕손에게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했다. 시체의 오장을 써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말에 아내는 직접 도끼를 들고 장자의 관을 쪼개 내장을 꺼내 약에 쓰려 하자 장자는 살아났다.
원래 장자는 신선으로 생사와 음양의 조화를 시험해본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그의 아내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살하였다 한다. 장자는 그녀가 죽은 뒤 질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고, 인간 세상을 뒤로 한 채 신선 세계로 돌아갔다 한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이지만 인정의 속절없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장자가 쓴 『장자』는 훗날 『남화경』으로 추존되어 노자의 『도덕경』과 함께 도교의 최고 경전으로 불리고 있다.
제2장 양한 문단의 풍격과 면모
동방삭의 뛰어난 재능 - 새로운 문학 품격의 창립
한부(漢賦)가 발전하여 황금시대로 들어서기까지 새로 일어난 많은 문체는 다양한 유파를 형성시켰다. 이들은 주로 세 파로 나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로 동방삭을 대표로 하는 골계파가 있는데 재치를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골계파는 기지를 드러내어 세태와 인정에 조소를 보내면서 제도 혹은 인간성의 약점을 파헤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런 문학 풍조는 비단 중국 문학사뿐 아니라 세계 다른 국가에서도 발생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하․상․주 3대에서부터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문학은 엄숙함이나 진지함이 많고, 우스꽝스럽거나 유머러스한 부분은 매우 적다. 서한 중엽이 되어 천하가 태평하고 통일과 안정을 이루며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비로소 동방삭이 등장했다. 그는 문학에서 해학적인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여 인간 생활에 재미를 불어넣었다. 이렇게 볼 때 골계파의 탄생은 바로 중국 고대 사회가 황금기에 접어들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동방삭은 본래 익살스럽고 괴팍하며, 속세를 탈피한 듯한 시원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서는 그를 언제나 유유자적하며 걱정 없이 생활하는 신선과 같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리고 동방삭은 무제의 시중(황제의 기밀 비서) 직책을 맡기도 했는데 그의 유머러스한 말투 중에는 종종 국가와 백성을 염두에 두고 충고하는 뜻이 담겨 있어 무제 역시 감동받곤 했다. 하루는 무제가 명령을 내려 정기적으로 제사 고기를 조정 대신에게 나누어 주라 했다. 그러나 고기를 분배하기로 되어 있던 신하가 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동방삭은 기다리다 못해 직접 칼을 빼 한 조각을 떼어 돌아가버렸다. 다음날 관원이 이 사실을 아뢰자 무제는 동방삭에게 잘못을 반성하라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책했다.
“동방삭아! 이놈의 동방삭아! 하사품을 받으면서 천자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예의에 벗어나는 일인가? 검을 뽑아 고기를 자르니 이 얼마나 용감한 행위인가? 고기를 잘라갔으니 또 얼마나 청렴한가? 고기를 가져다 아내에게 주었으니 또 얼마나 자애로운 일인가?”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다가 나중엔 오히려 자신을 추켜세운 것인데 무제는 그의 궤변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고, 도리어 술과 음식을 내려 아내에게 전하라 했다. 이후 ‘귀유세군(歸遺細君 :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준다)’이라는 말이 습관처럼 사용되는 속담이 되었다.
동방삭의 뛰어난 재능과 민첩한 두뇌는 후세에 많은 과장이 더해진 점이 있다. 동방삭이 유머의 대가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살아 있는 신선으로 승격되었다는 점을 통해 중국 민족이 역사상 겪었던 불행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사회는 장기간 답보 상태에 놓여 봉건제도가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따라서 역대로 셀 수 없이 많은 황제들이 주마등처럼 등장했다 사라졌는데 이는 결국 내우외환의 정치적 문란과 군사적 투쟁을 조성하여 주기적으로 중국 사회에 상처를 입혔다.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시대는 극히 드물었고 계속되는 우환은 이들의 정신에 크나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유머러스하고 가벼운 문학 풍조는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문학사상 다양한 천재들이 등장했지만 위대한 유머의 대가는 실로 부족했다. 따라서 중국 문학의 토양이 본래 유머와 해학적인 품격에 불리했기 때문에 동방삭과 같은 귀재를 신선의 대열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동방삭이 창조한 문학 세계는 바위 틈 사이에서 피어난 기적적인 꽃처럼 그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제3장 삼국 시대의 문학
수수께끼에 싸인 조식 - 시단의 새로운 풍격
동한 말 중국 사회는 지역마다 천하의 군웅이 할거하여 혼전을 거듭하다 점차 위, 촉, 오 삼국이 정립하는 국면으로 변해갔다. 이 불안하고 혼란했던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첫째, 종전의 사회주도 계층이 분열하여 신흥 사민(士民) 계층이 이를 대신하였으며, 둘째, 전란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이 통일을 염원하여 반전 사상이 보편화되었다. 이런 사회구조와 의식의 변화는 당시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중 시단에 새로운 풍격의 등장은 가장 중요한 현상이었다.
시는 본래 탄력 있고 예리한 문학 양식으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동한 말 사회의 해체와 삼국 시대 정권의 각축 기간 동안 많은 시인들은 신흥 사회세력을 대표했다. 이 신흥 세력을 대표하던 삼국 시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바로 조식이다. 그는 일생 동안 정치적으로 불우했기에 대신 온 정력을 문학활동에 쏟아부었다. 그래서 5언 고시의 기초를 닦았고, 사부에 있어서는 탁월한 문체로 특징되는 ‘변려부체’를 열었다. 이러한 성취만 보아도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조식은 위나라 무제 조조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학을 애호하는 부친과 형 덕택에 문학과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조는 조식을 세자로 세워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중국의 전통 법제에 따르면 제위는 물론 왕작까지도 모두 장자에게 계승되도록 되어 있었다. 조식의 큰형 조비는 부친이 장자를 폐하고 동생을 세우려는 뜻을 알아채고는 세자의 자리를 쟁취하고자 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친 앞에서 조식을 헐뜯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동생을 공격했다. 조조는 원래 온갖 정치적 수단과 음모에 능통했기 때문에 형제가 총애를 다투느라 적지 않은 날조가 있을 것이라 보고 조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두 아들이 서로 양보하지 않는 데다 각자 장단점이 있었던 까닭에 조조는 능력과 재능을 시험하기 위해 각자 성을 나서 모종의 공무를 처리하도록 시켰다. 결국 세자의 자격은 조비에게 돌아갔고 그후 조조가 세상을 떠난 뒤 조비는 위왕의 작위를 계승했다. 모반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형의 의심을 받으면서 살아야했던 조식은 평생 우울하게 지내다 41세의 젊은 나이에 천재적 재능을 펴보지도 못하고 한을 품고 죽어갔다.
‘칠보시(七步時)’,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 등 조식이 평생 지은 시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낙관 정신을 담고 있어 자유분방하고 거리낌 없는 신흥세력의 호탕하고 담박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조식은 형제 상쟁의 비극적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동정을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떤 이는 조식에 대한 이러한 세평은 모두 허명이고 조식은 그저 실속 없는 부잣집 아들에 불과하며, 형 조비야말로 높은 인품과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조식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참으로 궁금하기만 하다.
제4장 동․서 양진의 문풍
왕희지의 호방한 정-소품문의 흥기
동진 초기의 문학 경향은 비분강개한 격정보다는 광달청허(曠達淸虛)한 신선기에 있었다. 이는 왕조 초기 시대적 혼란으로 인한 사회적 정서인데 사회가 안정을 되찾은 이후 서서히 가라않았다. 이때 북방 중원은 호족이 난립하여 서로 싸우느라 남침의 여력이 없었고, 동진도 일련의 참담한 경험을 겪은 후 자체의 국력을 쌓아 장강 이남은 잠시 안정세를 취할 수 있었다. 안정감이 보편화되자 문학에서도 새로운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과거 역동적이던 영웅 기질은 이제 거칠고 촌스러운 것이 되었고, 세상을 피해 은거하던 신선 사상도 실상 침체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문학의 새로운 탈출구는 거칠고 촌스러운 것을 정교하게, 침체를 새롭고 참신하게 하는 것이었다. 맑고 영롱하며 참신한 소품문(小品文)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 위진 대의 죽림칠현은 모두 ‘소품문’의 대가인 셈이다. 소품문은 동진의 평화 시기에 이르러 혼란 후 정신적 안정을 희구하려는 풍조 아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소품문의 전성기 중 특히 주목해야 할 작가는 왕희지이다. 왕희지는 총명하고 학문에 뜻이 깊었으며, 청년 시절 정치적 권세와 헛된 명성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고, 줄곧 세상의 영리에 담담한 태도를 견지하며 세도가들을 우습게 보았다. 문학가이자 서예가이기도 했던 그의 서예 분야에서의 업적은 소품문을 능가한다. 그의 문학적 명성은 줄곧 이에 가려져 후세에 전하는 이야기도 대부분 서예와 관련된 것들이다.
한번은 왕희지가 시내에서 평복 차림으로 한가롭게 거닐다 우연히 한 부채 상점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상점에 노파가 할 일 없이 처량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상점으로 들어가 부채를 가져오도록 하여 그 자리에서 몇 자 써주었다. 노파는 그가 부채에 낙서를 하고 사지도 않자 불쾌히 여기며 돈을 요구했다. 그러자 왕희지가 물었다. “부채 값이 얼마입니까?” 노파는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하나에 일문(一文)이오.” 그러자 왕희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 부채를 문 앞에 내거시오. 1백 전은 받을 수 있을 테니.” 왕희지가 상점을 나간 다음 노파는 영문을 모른 채 재수 없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손님이 왕희지의 글씨가 씌어 있는 부채를 보자 급히 들어와 1백 전을 내는 것이었다. 이에 노파는 황급히 부채를 팔아치웠다. 다음 날 왕희지가 다시 상점 앞을 지나자 노파는 급히 나와 다시 글씨를 청했지만 이번엔 응하지 않았다.
왕희지의 대표적 문집으로는 『난정집서』가 있는데 이 책의 전반부는 매우 명쾌하고 활달하며, 후반부는 생사의 변화와 이합집산의 감개를 섞어 도가적 색채가 농후하다. 이것이 바로 왕희지의 사상적 특색이다. 더욱이 비단에 쥐 수염 붓으로 쓴 글씨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정교하고 기이하여 문장과 함께 서로를 빛내는 고금의 명작이 되었다. 후인이 정밀하게 감상한 결과 이 서문에는 총 19개의 ‘지(之)’ 자가 나오는데 각각 나름의 특징과 풍격을 지닌 데다 그 기세와 형태 역시 제각각이라 그 가치는 성(成)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정도라 하였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이 원고를 손에 넣고 ‘계첩(禊帖)’이라 이름하여 늘 가까이 두고 감상했다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 함께 부장하도록 하여 현재는 모사본만 남아 그 대략의 면모만 엿볼 수 있다.
제5장 남북조의 문학
중국 문학의 발전은 남북조 시대(420~589)에 이르러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남과 북의 장기간에 걸친 분할 통치와 싸움은 남북간에 서로 다른 문학적 풍격을 낳았다. 남방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점을 중시하고, 북방은 호방하고 웅장한 점을 중시하여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당대의 현실 생활과 사회 상황을 표현하였다. 이렇듯 서로 다른 풍격은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는데 특히 악부시(樂府時)에서 두드러진다.
서한 중엽 무제는 악부를 세우고 이연년을 협율도위로 삼았는데 그의 임무는 민간에 유행하는 가요를 수집하여 음악을 지어 배합하여 궁정에서 연주하도록 하는 것과 우수한 문인을 선발하여 시를 쓰게 하고 여기에 음악을 붙여서 궁정 예식이나 연회에 사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음악으로 연주될 수 있는 온갖 시가는 그것이 민간의 창작이건 문인의 창작이건 일률적으로 ‘악부시’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시는 남북조에 이르러 매우 보편화되어 번성하게 되었는데 남조의 악부시는 온유하고 완곡하며 감정이 세밀하고 음조도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특징을 지녔다. 반면에 북조의 악부시는 호방하고 웅건하며 감정이 중후하고 기백이 씩씩하며 음조는 격앙되어 높다.
이 악부시 중 무명 시인의 걸작이 매우 많은데 단연 북조의 ‘목란사(목란의 노래)’와 남조의 ‘공작동남비(공작새가 동남으로 날다)’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시를 통해 남북 악부시의 특징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북방의 풍격을 대표하는 ‘목란사’의 내용은 목란이라는 이름의 소녀의 영웅상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시는 목란이 집에서 베를 짜는 광경에서 시작된다. 조정에서 연로한 아버지에게 내린 징병서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해 출병하기로 결심한다. 시내로 나가 날랜 말과 마구를 사서 군대를 좇아 전장에 도착한 목란은 용감하게 적과 10년을 싸워 승리를 거둔 후 개선가를 들으면 돌아온다. 임금은 온갖 재물을 내리나 목란은 이를 사양하고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길 희망한다. 갑옷을 벗고 집에 도착한 목란을 보고 그녀를 따라왔던 전쟁 동료들은 놀라게 된다.
이 시는 영웅적 자태를 지닌 북방 소녀의 인물상을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목란의 출병 전후, 그리고 승리를 거두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일관된 심리 묘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 작품은 문학적 성공 이외에도 목란을 중국 민족의 영웅으로 깊이 각인시켰다. ‘목란사’의 시원스럽과 경쾌한 문장은 진실되고 질박하며 또 호방한 풍격을 형성하였는데 교태가 흐르고 아양을 떠는 아녀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즉 이것이 바로 북조 악부의 중요한 특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