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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긷는 샘물여행

최성민 지음 | 김영사
1부 정말 물맛 좋은 샘



구례 상사마을 당물샘




샘물과 건강장수의 관계가 훤하게 드러나는 곳이 이른바 '장수마을'이다. 보건복지부나 예산기획처 통계국은 해마다 한국의 장수마을들을 뽑아 발표한다. 마을의 모든 인구에서 노인 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큰 곳이 장수마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청년들은 다 도회지로 나가고 노인들만 남아서 된 '장수촌'도 있을 수 있다는 서글픈 사연도 있다. 어쨌든 당국이 이런저런 사유를 다 고려하여 뽑은 장수촌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좋은 샘물이 우선이고, 채식 위주의 식생활과 즐겁고 끊임없는 노동,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넉넉하고 여유 있는 마음씨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이다.

이 가운데 장수촌의 샘물은 일명 '오래살이 물'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맑고, 차고, 가볍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무색, 무취, 무미에 샘의 자연미도 뛰어나다. 전국 최장수마을로 여러 번 뽑힌 적이 있는 전남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 '당물샘'은 오래살이 물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안 죽는 물'로 소문이 나서 일제 때 콜레라가 남부 지방을 휩쓸었을 때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샘가로 피난 겸 물동냥을 왔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장수마을들과는 달리 상사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병장수의 으뜸 요인을 오로지 당물샘이라고 믿고 있다. 상사마을에선 70객은 장년이고 환갑 노인은 아직 청년 취급을 받는다. 100살이 다 된 이양순 할머니는 논둑길을 지나갈 때 건장한 다리로 마파람을 일으키고 고희 지난 아들의 건사는 물론 그 며느리에게 바늘귀를 다 꿰어서 준다.

상사마을은 는개구름에 덮여 있는 지리산 왕시루봉 자락에 안겨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리산 산삼 뿌리에 씻겨 온 물이 당물샘으로 모인다고 믿고 있다. 당물샘은 상사마을의 생명수다. 10여 년 전 고려대 예방의학팀이 당물샘물의 수질을 분석했을 때 대장균이 한 마리도 없는 '전국 최상의 급수원'으로 판명되었다. 이 마을 토박이인 의성 김씨의 선조가 조선시대 말엽 남원, 구례 등 전라도 일대의 고을들을 돌아다니며 명당을 찾던 중 당물샘물을 약저울로 달아보니 무게가 가장 무겁고 물이 맑아서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좋은 샘이 다 그렇듯이 당물샘은 늘 수량이 일정하다. 삼년대한이나 6월 장마에도 줄거나 넘치지 않는다. 또 길어다가 한 달 넘게 독에 담아두어도 물때가 끼지 않는다. 샘가에는 좀개구리 한두 마리가 간혹 물을 찾아오지만 자기들이 오래 있을 곳이 아님을 깨닫고 곧 물러난다.

상사마을 노인들은 당물샘이 아니더라도 천성적으로 장수의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당물샘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외지인들이 물을 길러 오거나 텔레비전 카메라가 줄지어 찾아와 들이대어도 허허 웃을 뿐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화를 내거나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당물샘의 넉넉한 기운을 받아 심성이 모두 후덕해진 탓일 것이다. 당물샘은 언제나 지리산 여행길에 물 길러 들르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가까이에 있는 지리산 플라자 호텔에서는 트럭으로 물을 퍼 가기도 한다. 이양순 할머니를 비롯한 상사마을 노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진 모델 주문을 받으면서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사람에 치여 명대로 못 살겠다."고 가끔 농담 섞인 아우성을 치신다.

2부 다성(茶聖)·차인(茶人)들의 이름높은 찻물



해남 대둔사 일지암 유천




차(茶)는 동양이 자랑하는 마실거리다. 동양의 정신문화가 그윽하기 그지없는 것은 차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치통이나 두통을 앓을 때 할머니들이 대밭에서 훑어다가 우려 주시던 그 '만병통치약' 또한 찻잎이었다. 서구의 커피의 카페인 중독성 문제와는 달리 동양 차의 카페인은 중독성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찍이 서양인들이 동양의 식민지에서 눈독 들여 가져간 것 가운데 하나가 차다. 홍차는 영국이 인도에서 차를 실어가던 항해길 도중에 떠서(발효) 된 것이다. 아편전쟁도 사실은 동양의 차를 확보해 가져가기 위한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도 일찍이 차가 전래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통일신라시대 때 김대렴이 당에서 씨앗을 가져다가 심은 것이 퍼진 것이라고 알고 있으나 차는 백제 때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왔다는 게 오랜 세월 차와 더불어 온 스님들의 판단이다. 따라서 한국 차의 시배지(처음 심은 곳)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 지리산 일대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도 하동 쌍계사 주위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순천(승주) 선암사 주지 지허 스님에 따르면 백제 때 들여온 차는 벌교 가마금 징광사 주변에 심어져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퍼졌다고 한다.

우리 차가 언제 들어와 어디로부터 퍼졌는지 확실하게 정리하고 있지 못한 터에 우리에게서 차를 배워간 일본은 '다도(茶道)'를 창출해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써먹고 있다. 일본인 야부기타가 일본 풍토에 맞게 개량한 차나무 야부기타종이 일제 때 한국에 역수입되어 보성다원이나 oo화학 설록차 단지 같은 곳에 진을 치고 있다. 차나무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몇몇 다도 유파들이 한국에 지부를 두고 사범수료증을 발급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국보로 숭상한다는 '이도챠완'이라는 찻잔은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이 만들었거나 조선에서 들여간 것이라고 하는데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새미골이라는 곳에 가면 이 이도챠완의 본고장임을 입증하고자 유적(도자기 파편과 몇몇 무덤)들을 발굴해 두고 있고, 이도챠완을 복원·생산하는 가마들이 차려져 있다. 그곳 도예가들의 일부는 일본에 유학 가서 이도챠완을 배워왔다는 경력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조상들의 뛰어난 예술혼을 전승·발전시키는 일이 왜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본인들의 구미에 호응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우리 선조들은 "차는 차일 뿐"이라고 해서 다도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다도라는 것은 일본의 형식주의와 상업주의가 낳은 말이다. 또 인삼차니 유자차니 하는 것도 일본 쪽에서 요새 나온 말이다. 차는 차 한 가지일 뿐 인삼차니 유자차니 하는 것은 '인삼탕'이나 '유자즙'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 일지암은 '한국 차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일지암을 찾는 사람들은 늘 끊이질 않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드높여진 우리 차의 향취를 음비해본다든가 초의 선사의 '선다일미(禪茶一味)' 사상의 참뜻을 되새겨보고자 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일지암 차밭에 대한 관심보다 유선여관 진돗개가 따라오는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그것이 바로 한 '베스트셀러'가 퍼뜨린 지적 허위의식의 정체다. 일지암에 들른 발길을 가장 뜻깊게 하는 것은 일지암 차밭에서 찻잎 몇 개를 따서 씹은 뒤 일지암 초당 뒤란에 있는 젖샘(유천) 물을 한 모금 마셔보는 일이다. 한국 전통차의 상큼한 내음과 우리 샘물의 젖 같은 단맛에 새삼 놀랄 것이다.

강진 다산초당(와당)의 경우가 그렇듯이 일지암에서도 초의 선사의 체취와 혼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는 유일한 물건은 차나무와 젖샘이다. 일지암 초당은 복원한다고는 하지만 상상해서 예쁘게 지어놓은 인위적 기념물에 불과하다. 일지암은 초의 선사(1786∼1866)가 41살 때 들어와 입적할 때까지 반평생을 보낸 곳이다. 초의 선사는 이곳에서 차밭을 일구며 『동다송』과 『다신전』 등 차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백제 때 불교에 묻어(백제 때 최초의 불교 전래지는 전남 영광 법성포다) 들어와서 고려시대엔 차례(다례, 茶禮)를 관장하던 관청인 '다방(茶房)'이 생길 정도로 꽃을 피웠던 한국 차는 차의 각성 효능 때문에 승가에서 특히 유지·발전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 숭유억불책으로 차도 쇠퇴의 길을 걷기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초의 선사라는 차인(茶人)이 불씨가 꺼져가던 이 땅의 차를 되살려 오늘에 이어주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초의 선사가 오늘날 차인들로부터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 몸이 서구의 커피, 콜라에 절임당할 대로 당하고 에비앙 같은 외제 물까지 들어온 마당에 우리가 일지암을 찾는 이유는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세계화니 뭐니 새앙쥐 뻐드렁니 가는 소리라 난무하는 이때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로운 길이기도 하다. 그 길에 유선여관의 개가 따라오느냐 마느냐가 그토록 중요한 일인가 말이다.

초의 선사가 일지암에서 저술한 『동다송』과 『다신전』은 이 땅 최초의 본격적인 차 관련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다산의 『경세유표(經世遺表)』「각다고」 등에 차에 관한 편린들이 나오긴 하지만 초의 선사의 책처럼 단행본으로 정리된 것은 드물다. 중국의 경우 당의 육우(陸羽, 733∼804)가 지은 『다경(茶經)』이라는 차에 관한 고전이 있다.

다도(茶道)란 바로 일지암에서의 초의 선사의 일상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솔가지 불을 잘 지피고 좋은 샘물을 잘 끓여서 성깔 좋은 찻잎을 간 맞게 우려내는 일, 이것을 자연의 섭리와 삶의 소박한 의미를 생각하며 정갈한 마음으로 음미하는 일, 궁핍한 가운데 겸허하고 평범한 일체의 차 마시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에서 말하는 정신수련의 방법과 맥이 상통해 있다는 것, 바로 선다일미 사상이다. 차의 기본인 겸손과 덕행이 불가수행의 정신적 내용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초의 선사는 일지암에 머물면서 강진 다산초당에 유배객으로 와 있던 정약용 선생과 친분을 쌓는다. 그 두 사람은 진도의 허소치를 발굴해서 한양의 추사에게 천거해 대화가로 키우기도 한다. 다산의 나이가 초의 선사보다 스무 살이나 위인 아버지격이었으나 두 사람은 차를 매개로 품격 높은 사상을 논하며 격의없이 어울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날 일지암의 모습은 다산초당의 경우처럼 실물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 근거는 이렇다. 다산초당에는 초의 선사가 직접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초당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이로 봐서 다산 선생이 초당에 들어간 한참 뒤에 일지암에 들었을 초의 선사가 건방지게(?) 다산초당보다 크고 호화스럽고 지금처럼 짜임새 있는 초가를 일지암 자리에 지었을 리 없다. 다산초당의 초췌한 모습을 애정 있게 그림에 직접 담기까지 한 사람이 말이다. 해남차인회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일지암은 땅에 홈을 파고 그 위에 거적을 걸친 정도의 움막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산초당의 약천처럼 오늘날 일지암에서 초의 정신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문화유산은 차나무와 유천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일지암 유천은 초의 선사가 "나에게는 유천이 있다!"고 자랑할 만큼 보배였다고 한다. 『동다송』과 『다신전』에서 물을 말하고 품천을 얘기한 분이니 그가 남긴 젖샘이야말로 좋은 샘의 전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샘을 젖샘이라 하는 것은 물맛이 젖처럼 단맛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은 일지암의 차밭에서 싱싱한 찻잎을 한 잎 따서 씹다가 젖샘 물을 마셔보면 곧 실감하게 될 것이다.

3부 샘에도 품격이 있다



해남 달마산 금샘




샘이 아름답다. 물맛뿐만 아니라 황홀의 극치를 보여주는 생김새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전남 해남 달마산 봉우리 아랫녘 바위벽에 움을 파고들어선 '금샘'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 이렇게 눈부신 모습을 갖춘 샘이 또 있을까? 금샘은 달마산 미황사 뒤쪽 신령스럽게 생긴 바위 봉우리 아래에 멧새가 둥지를 틀듯 앙증스레 들어앉아 있다. 산중 바위 굴 속에서 광채를 발산하는 그 모습은 속세를 떠나 석굴 안에서 오롯한 우주를 가꾸어 가는 수도승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금샘은 땅바닥으로부터 어른의 가슴 높이쯤에서 바위벽이 수평으로 1m 정도 둥글게 패어 들어간 자리에 20∼30cm 깊이의 석간수가 고여 있고, 남은 물은 조금씩 이끼 긴 돌 틈새로 흘려 내보낸다. 수면은 온통 샛노란 '황금물질'로 덮여 있다. '금샘'이란 이름은 이처럼 샘물 위에 가득 노란 황금 광채를 두르고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샘 위쪽으로는 또 100m가 넘는 높이의 수직 바위 벼랑이 이어진다. 금샘은 누군가가 일부러 파놓은 것 같기도 하고 저절로 생긴 듯하기도 하지만 일부러 파놓은 것이라면 바위 벼랑 속에 이처럼 신기한 물줄기가 흐르는 줄 어떻게 알아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아마도 '금생수(金生水)', 즉 "돌은 물을 낳는다."는 이치에 밝은 어느 스님이 산중 수도길에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금샘 안은 해가 비추는 방향에 따라 늘 조금씩 광채의 밝기와 황금 빛깔이 달라진다. 물은 밖에서 볼 때 오른쪽 천장 가까운 곳에서 방울방울 떨어진다. 밑에서 솟는 샘이 아니라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고인 것이다. 물구멍 둘레엔 그 외진 곳에서도 작은 고사리 몇 포기가 움트고 있어서 생명력의 왕성함을 보여준다.

금샘의 샛노란 거죽은 금가루가 덮여 있는 것이라고도 하고 유황 성분이 햇빛에 반사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불처럼 이 황금(?) 거죽은 샘 주위에 난 대이파리로 걷어내면 묻어 나오거나 바가지로 뜨면 물에 섞여 나오지만 밖에서는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더욱 신기하다. 그 물맛은 유난히 차갑다거나 독특한 점은 없으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질감은 무척 부드럽다. 오랜 세월 이 금샘을 알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마셨을 것이나 탈이 났다는 말은 없다. 금샘물은 감히 음료수로 마신다기보다는 샘 앞에 서는 순간 그 황금빛 광채가 주는 자연의 기에 제압되어 신령스런 기운을 마신다는 기분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금샘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다.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수는 아침 햇살의 정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는 샘이다. 지금까지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흥왕사의 '세진천'이 우리 나라 제일의 서출동류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금샘은 작은 산등성이 숲 속에 묻힌 채 가는 물줄기를 근근히 흘려 내보내고 있지만 큰 바위 봉우리의 거대한 기운 속에 아침 햇살의 정기를 정면에서 받아들여 샘 안에 농축해 담고 있는 듯하다. 아침 햇발이 들면서 달아오른 금샘 안의 찬란한 황금빛 세상은 해질녘까지 그 정기를 끊임없이 발산한다.

이 금샘을 찾아가는 길은 길이 아닌 길이다. 이끼 낀 바위 등걸들을 넘고 산죽 우거진 틈새를 헤치며 나가는데 그 주위엔 콩난과 동백숲 속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몸을 섞고 피어서 신비스런 향내를 자아낸다. 꾀꼬리와 휘파람새들의 꿈결 같은 목소리가 없다면 그 길은 음침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 정도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금샘을 몇 번이나 다녀간 사람도 다시 금샘을 찾을 때는 몇 시간씩 헤매거나 아예 못 찾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나도 그랬다) 마음씨가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금샘의 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속설이다. 또 살생을 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나 개고기를 먹은 사람, 생리를 하는 여성이 접근을 해도 금샘은 금빛을 감춘다고 한다.

나는 8년 전 6월 초 어느 날 금샘을 찾아갔다. 오전 11시쯤 더위를 뚫고 산에 이르니 숲에서 불어 나오는 바람이 오히려 한기를 느끼게 했다. 미황사 공양주 보살과 서울에서 출판업을 하는 이재숙 씨와 이영림 씨가 먼저 내려와 있다가 합류했다. 우리 네 사람은 금샘을 서너 번 가봤다는 그 보살님을 앞장세우고 산대밭을 가르기 시작했다. 공양주 보살님은 한여름에 무더운 중바지(승복)를 치렁치렁 걸치고서도 "옷을 얇게 입어 앞장서기 민망하다."면서 자주 뒤를 돌아봤다. 30분쯤 뒤에 높다란 벼랑에 길이 막혔는데 벼랑 깊숙이 컴컴한 굴이 하나 있었고 박쥐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휘젓고 다녔다. 더 이상 길은 없었다. "금샘을 찾기가 이리 어려운가?" 굴 속 벼랑을 기어오르던 참에 주위 대숲을 헤집고 다니던 이영림 씨가 "길을 찾았다!"고 악을 썼다.

우리가 산봉우리에 오른 것은 출발한 지 2시간쯤 뒤였다. 사진기를 두 대나 걸치고 갔던 나는 지쳐서 바위 봉우리에 누워버렸다. 나머지 세 여성들은 기가 철철 넘쳐 보였다. 자연에 들면 여자들이 더 지독하다. 여자가 기가 강한 모양이다. 남자보다 오래 사는 것을 보면…. 그들은 금샘이 있을 법한 자리를 중심으로 지름 100m 정도의 원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풀섶도 들춰보고 돌 틈새도 들춰보고…. 그러나 1시간이 지나도록 금샘은 나와주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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