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기행 나를 찾아 떠난다
최성민 지음 | 김영사
1부 토속적 삶의 멋과 여유
예산 수덕여관과 환희대사람들은 수덕사에 비구니가 많다고들 한다. 송춘희 씨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 때문에 수덕사는 비구니만의 도량인 줄 안다. 하기야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의 기운과 향취가 여성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안온하다고 하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닐 성싶다. 기가 연한 덕숭산. 그 품안에 우리 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이 있다. 개화기 인텔리 여성이자 시인이며, 해방된 여성의 면모로 유명했던 일엽 스님이 40년 동안 머물던 곳이다.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도 있고 해서 수덕사에 생기는 사람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비구니 견성암 쪽에 쏠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수덕사가 편향되게 알려진 요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수덕사는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어졌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은 한국 목조 건축술의 뛰어남을 보여준다. 6백년이 더 됐는데도 기둥과 기둥 사이에 틈이 전혀 없다. 장식도 전혀 없다. 순수한 자연 그 자체다. 기둥의 나뭇결이 잘게 벌어진 모습이 수덕사의 오랜 세월을 말해 준다. 담백, 소박하고 온화한 백제 불교문화의 멋이 넘치는 수덕사에 몇 해 전 돌연 거대한 흙더미와 돌계단을 갖춘 황화루라는 시멘트 건물이 세워졌다. 중창 불사의 붐이 수덕사까지 밀려왔던 것일까?
다른 절간들이 난리법석을 피워도 수덕사만은 좀 가만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옛 모습 그대로 경허, 만공, 혜월, 벽초, 일엽 스님들이 지나간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서 중생들이 그들 곁에 하나둘 세며 따라갈 수 있도록. 그 황화루는 지은 지 채 2∼3년도 안 되어 송두리째 헐렸다. 30억 원인가 들였다는 건물이다. 하늘에 닿을 듯한 높고 긴 돌계단, 그 아래로 한 마리에 얼마인지 궁금증이 이는 비단잉어가 살이 뒤룩뒤룩 쪄서 득실거리는 연못이 있던 그 건물, 왠지 덕숭산의 온화한 기품과 어울리지 않게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사람을 억누르는 위세로 서 있던 그 건물은 대웅전을 가리고 땅까지 꺼지게 하여 고찰 수덕사의 아름다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방 헐렸다. 그 자리에 다시 60억 원짜리 건물을 지었다던가?
그런데 견성암 비구니들이 컴퓨터 세대로 바뀌어가든 말든, 30억 원짜리 황화루가 폭삭 헐리고 60억 원짜리가 다시 올라가든 말든, 그래서 덕숭산의 기가 바뀌든 어쨌든 수덕사 일주문 안팎에선 정말 비구니 같은 '비구니 아닌 비구니'와 비구니 아닌 것 같은 '정말 비구니'의 얘기가 들을 만하다. 다름 아닌 수덕여관 박귀희 할머니(2001년 작고하셨다. 이 이야기는 1995년에 취재한 내용이다)와 오래 전에 입적한 일엽 스님에 관한 얘기다.
박귀희 할머니는 파리에서 이름을 날리다 1989년에 타계한 이응로 화백과의 만남으로부터 '비구니 같은 삶'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응로 화백을 향한 박 할머니의 일편단심은 꾸며낸 춘향이 이야기보다 가슴에 와 닿는다. 박 할머니는 경기도 이천에서 수덕사 쪽 어딘가가 고향인 이응로 화백에게 시집을 왔다. 이 화백은 6·25때 피난생활을 했던 지금의 수덕여관 집을 1994년에 샀다. 그때 그린 암각화가 수덕여관 입구 오른쪽 장독대 옆 두 개의 바위에 남아 있다. 그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 번씩 와서 만져보고 감탄하는 그림이다. 도둑놈들이 군침깨나 흘렸을 것이지만 옮길 도리가 없어 여태 남겨 놓은 것 같다.
그림 그리는 이응로 선생은 스케치하러 다니는 날이 집에 있는 날보다 많았고 집에는 어쩌다 한 번씩 여관 들르듯 했단다. 박 할머니는 그림 그리는 사람은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고 자나깨나 솥단지 앞에서나 채전밭 맬 때나 남편이 그림 잘 그리기를 빌고 또 빌면서 남편이 심신의 부담과 물질적 궁핍을 느끼지 않도록 온 정성을 쏟았단다. 이 화백도 그걸 알고 박 할머니가 있는 수덕여관 집을 기둥처럼 여기고 그림에 전념하는 것 같더란다. 박 할머니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것이고, 그 정도는 부부 간에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사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응로 화백이 그때 수덕사 환희대에 기거하던 한 보살인가 비구니인가를 사귀게 됐다고 한다. 그건 박귀희 할머니 곁에서 수덕여관을 관리해온 이창주 씨의 설명이다. 이씨는 이응로 화백의 친척이라고 한다.
이 화백은 이 여인을 데리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박 할머니에게는 이혼 수속을 밟아주고, 박 할머니는 그때도 "내가 잘 몰라서 그분 그림 하시는 데 이것저것 도와줄 수도 없고 하니…."하면서 체념 반 기도 반으로 이 화백을 보냈다고 한다. 그 뒤 박 할머니가 다시 화백을 만나게 된 것은 1969년 이 화백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박통의 취임식에 초청 형식으로 입국한 뒤 감옥 신세를 지게 되면서다. 이창주 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화백은 자식이 없어 양자로 두 아들을 들였는데 장남이 6·25때 납북됐다. 파리에 있을 때 북한 쪽에서 그 아들을 만나게 해준다는 것을 미끼로 접촉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박 할머니는 이때부터 옥바라지를 하느라 교도소와 집을 오갔다. 그리고 밤마다 수덕여관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빌었다고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삭풍이 휘몰아치나 가리지 않고…. 1년 만에 이 화백은 풀려났다. 그리고 수덕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거기서 딱 한 달을 지내고 다시 아비엥또(프랑스말로 "잘 있어. 곧 올게.")! 그러나 정나미 떨어지는 '고국'에 어떻게 다시 오겠는가, 윤이상 씨도 그러했듯이. 1989년에 이 화백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내가 박귀희 할머니를 만난 것은 1995년 1월 13일의 일이다. 박 할머니의 방은 두 평 남짓했다. 벽에는 이응로 화백의 그림이 두 점 걸려 있었다. 박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추상화 같은 것은 문자 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러기를 그린 동양화였다. 그런데 그 기러기 그림은 외기러기였다. 방 뒤쪽 봉창으로는 환희대에서 두드리는 목탁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환희대는 수덕여관에서 수덕사 쪽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박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환희대가 거기 있음은 앞서 말한 사연 때문에 참으로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환희대는 수덕사 비구니들의 보배요, 상징이다. 그곳은 김일엽 스님이 기거하다 돌아간 곳이다.
나는 수덕여관에서 나오는 길로 바로 환희대로 올라갔다. 우리가 환희대에 들어섰을 때 월송 스님은 외출 중이었다. 환희대의 비구니들은 우리들을 안내하면서도 연신 "노스님이 곧 오신다."며 바삐 왔다갔다 했다. 조금 있으니 키가 작달막하지만 머리는 커다란 목탁처럼 생기고, 예쁘디예쁜 세 살배기가 이제 막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 같은 눈빛을 한 비구승 한 분이 아장아장 들어왔다. 알고보니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이었다. 절에 가면 가끔 보통 사람과 다른 분위기를 휘감고 다니는 스님을 만날 수가 있다. 분명히 해탈의 경지에 든 스님일 텐데 어떻게 보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완전히 자연화한 인간 본연의 자세를 보여주는 경우다. 원담 스님의 경우도 거동만 약간 불편해 보였을 뿐 눈빛도 용모도 때묻음이 없었고, 입술도 담배, 커피에 절은 스무 살 처녀의 것보다 훨씬 청초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몸과 마음의 속진을 다 털어 버린 실증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원담 스님께 송춘희 씨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 얘기를 하며 일엽 스님에 대한 그분의 회상을 일부러 끌어내려 애썼다. "그 스님이 타계했다고 해서 누가 별나게 슬퍼한 것도 아니고, 그분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누가 특별히 반가워하지도 않을 것이구먼요. 수덕사 사람덜이 다 그런 사람덜이지요." 원담 스님의 대답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평범한 내용이면서도 심오한 깊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당연한 공자님 말씀 같기도 하고, 수덕사 사람들이 무심하기 짝이 없다는 원망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정답은 크게 슬퍼하거나 깜짝스럽게 반가워하는 등의 감정 표현이 부질없다는 것이다. 그저 죽고 사는 것이 자연의 섭리요, 없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의 이어짐이요, 이심전심으로 조용한 가운데 슬픔과 반가움이 나눠지는 것이니 그 또한 찰나적인 것이요, 없는 것과 다름없느니라(그러니 세상을 아등바등 살지 말고 겸허하고 느긋하고 바르게 살아라) 하는 선답을 사려 깊게 쉬운 말로 일러준 것이리라. 원담 스님 제 말씀이 맞습니껴?
2부 선조의 지혜가 낳은 삶의 얼개
어란한국 서해안에는 개펄이 많고 그 개펄은 기름져서 거기에 근거하여 사는 갯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서해안 개펄이 갯것들의 보금자리가 된 이유가 있다. 충청, 호남지방에 많은 황토가 흘러 내려와 바닷물에 우려져 된 것이기에 갯것들의 건강 유지에 좋다. 물고기들이 병에 걸리면 황토를 먹는데 예로부터 황톳물을 걸러내 민간에서 음용되어온 지장수 역시 건강 음료로 알려지고 있다. 또 황하, 압록, 한강, 금강 유역에서 영양분이 흘러 내려와 집산된 곳이 바로 서해 개펄이다.
한국의 동·서·남해에서 나는 어패류를 비교해 보면 동·남해에서 나는 것은 서해에 다 있으나 서해에서 나는 것이 동·남해에서는 나지 않는 것도 있어 개펄을 두른 서해의 물산이 무척 풍부함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종류일지라도 서해에서 나는 것과 동·남해에서 나는 것은 맛이 다르다. 낙지를 예로 들면 서해 개펄에서 나는 '뻘낙지'는 한국 낙지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깊은 맛이 있다. 그러나 남해에서 나는 '바위낙지'는 색깔도 바위처럼 불그스레하고 맛도 문어와 구별이 안 될 정도다.
4∼7월의 산란기를 전후해서 서해 개펄 주위에서 일 년 중 가장 맛있는 고기가 많이 난다. 알을 낳기 위해 영양분을 몸 안 가득 안고 밭이 되어줄 개펄이 있는 만으로 몰려오기 때문이다. 이때쯤 서해에서 나는 기름기 철철 넘치는 물고기로는 민어, 농어, 준치, 숭어, 병어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숭어는 다른 지방에서는 별로 대접을 못 받지만 호남지방 해안에서는 횟감과 매운탕감에다가 그가 품고 오는 알의 쓰임새로 귀빈 대접을 받는다.
예로부터 임금님 진상품으로 '어란'이라는 게 있었다. 숭어나 민어의 알을 빼내어 소금이나 간장에 절여 햇볕에 반쯤 말린 것인데 밥반찬이나 술안줏감으로 애용되던 별미거리였다. 워낙 귀하고 질 높은 먹을거리여서 밥반찬보다는 조금씩 얇게 썰어 술안주로서 효용이 더 컸다. 그런데 어란은 민어알보다는 숭어알로 만든 것이 정통파였다. 해마다 숭어가 알을 싣는 4∼6월 서해안 호남지역 포구엔 고깃배가 들어올 무렵 바구니를 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부둣가에 바구니를 놓아둔 대로 배부른 숭어의 순서가 정해져 담겨진다. 상하기 전에 얼른 집에 가져가 배를 가르고 알을 꺼내 간장에 한나절쯤 넣어두었다가 건져내 초가지붕 위에 휙 던져둔다. 쉬파리가 붙을세라 가끔 이파리가 붙은 대나무 가지로 휘저어준다. 해질녘에 거두어들였다가 이튿날 하루를 반그늘에서 더 말리면 말랑말랑한 밤색 어란이 된다.
어란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군것질거리로 조금씩 떼어먹거나 친한 사람을 만났을 때 술을 권하는 핑계거리로 삼곤 했다.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어느 것과도 비교가 안 된다. 수만 개의 생명체를 기를 영양분이 농축된 것이어서 그럴 것이다. 요즘은 숭어보다는 민어나 도미류의 알로 만든 어란 또는 수입품이 백화점에서 한 덩어리9300∼500g 정도)에 10만 원 남짓 한다.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선암리 김광자 씨는 이 시대의 마지막 어란 만드는 아낙네로서 2000년 11월 해양수산부로부터 '수산물 식품명인 1호'로 지정받았다. 김씨는 해마다 4월부터 6월까지 알 잘 든 숭어만을 골라 어란을 만드는 데 알을 잘 고르는 방법과 참기름을 여러 겹 고르게 바르고 방망이로 잘 두들겨가며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말리는 과정에 어란의 질을 가름하는 비결이 있다고 한다.
3부 매우 인상적인 한국인의 풍습 여섯
평창 차항리 눈세상눈, 눈, 눈, 새하얀 꿈의 세상.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는 집도 하얗고 길도 하얗고 들과 산도 온통 두터운 눈 이불에 덮여 있다. 이 눈 사막 속에서 사람과 들짐승들은 하얀 적막을 어떻게 지새고 있을까? 흰 도화지 위에 봄을 그리는 겨울잠 꿈을 꾸고 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도회지에서 눈을 잃어버렸다. 눈을 밟으며, 눈에 빠지며 거닐던 덕수궁 돌담길이나 남산 오솔길에 관한 추억은 빛 바랜 사진에 갇혀버린 지 오래다. 어쩌다 눈이 내리더라도 쌓이기가 무섭게 잿빛 도시 색깔에 오염되어 버린다. 그래서 시골에 함박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가운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평창에 가면 눈에 관한 한 우리의 그리움을 듬뿍 속채워줄 눈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토종 눈, 우리 민속 스키인 산형썰매, 전통 눈신 '설피', 강원도 전래의 겨울철 사냥 유물인 '멧돼지창' 등이 눈과 더불어 옛이야기를 들려줄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평창군 도암면 차항2리는 강원도에서도 유달리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이곳엔 허리까지 내린 폭설이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 겨우내 전혀 녹지 않는다. 이런 눈 덕분에 예전엔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자주 열리곤 했다. 지금도 해마다 해병대와 육군 특전사가 스키 훈련 캠프를 연다.
차항2리 사람들은 예전의 전국체전 스키대회장 자리에 '자연눈썰매장'을 만들어 겨울 손님들을 맞고 있다. 이름은 '대관령 자연설썰매장'. 이름 그대로 우리 나라 최대·유일의 신토불이 천연눈썰매장이다. 이 썰매장에 들어서면 우선 가슴이 확 열리는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 1만여 평의 고랭지 채소밭에 들어선 '채전백해(菜田白海) 썰매장', 그 주위 흰 산등성이와 파란 하늘이 만나는 곡선의 신선한 아름다움, 그리고 발바닥에 와 닿는 자연설의 부드러운 감촉과 귀에 익숙한 "뽀드득∼" 소리, 이들은 우리 정서의 한 자투리에 억눌려 있던 '토종 겨울'을 끄집어 내주기에 충분하다.
차항2리 사람들은 이 자연설썰매장에 토속적 분위기를 더욱 불어넣기 위해 겨울철 전통 생활도구들을 가져다 놓고 모범을 보여준다. 강원도 지방의 눈살이 필수품인 설피, 산형썰매(현지에서는 '사형썰매'라고 부른다), 멧돼지창 등이 그것이다. 이 마을 50대 이상 남성들은 모두 설피 및 산형썰매 타기와 멧돼지 창사냥의 명수들이다. 이들은 당번을 정해 번갈아 썰매장에 나와서 예전 자신들의 겨울철 일상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자연설썰매장에서 썰피와 산형썰매는 정말 진가를 발휘한다. 거기에는 플라스틱 현대 썰매와 훈련 중인 군부대의 서양 스키가 있어서 비교가 잘 된다. 산형썰매는 이름은 '썰매'지만 폭이 넓고 길이가 비교적 짧아서 스키와 썰매의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선 자세에서 '스키'로 타기도 하고 앉은 자세에서 '썰매'로 타기도 한다. 리프트가 없는 썰매장에서 서양 스키와 플라스틱 썰매는 한번 내려왔다가 출발점으로 다시 올라가려면 여간 애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썰피와 산형썰매, 그리고 멧돼지창은 삼위일체로 조화를 이뤄 기동성을 발휘한다. 산형썰매를 타고 일단 미끄럼길을 질주해 내려온 다음 다시 출발점으로 오를 때에는 설피로 갈아신는다. 푹푹 빠지는 옆길이나 미끄럼길을 바로 오르는 데도 보통길을 가듯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멧돼지창은 출발점으로 오를 때나 하강을 할 때 '스틱' 노릇을 해준다. 이처럼 눈 속에서 살던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오늘날 그 눈과 더불어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것을 되돌아보는 일의 흐뭇함을 일깨워줄 것이다.
4부 보배로운 한국 토종들
선암매해마다 2월 하순부터 3월 초 무렵이면 남녘 방방곡곡에 매화가 피어난다. 그런데 봄의 시작이자 한 해 생명의 열림이 곧 매화일진대 이 땅의 진정한 토종 매화를 찾아 삶의 향취 한 가닥을 일궈내 보는 것은 어떨까?
매화는 고결, 단아, 아름다움이 '꽃 중의 꽃'이요, '군자 중의 군자'여서 기개와 절개의 표상이었다. 선조들은 해마다 이 무렵 그런 매화의 미덕을 좇아 혼탁한 세상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요즘 남녘 지방 매실 산지에서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재배되는 매화는 선조들이 흠모하던 '사군자 매화'와는 거리가 먼 일본산 개량종이 많다. 게다가 지방자치시대의 축제 경쟁 및 매화 상업주의에 2000년 인기를 누린 드라마 <허준>의 영향까지 더해져 매화에 대한 왜곡이 심해질 우려가 있다. 선조들이 좋아하고 외경했던 참매화, 우리 토종 매화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평생을 토종 매화인 '선암매'와 더불어 살아온 선암사 주지 지허 스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