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풍물기행 나를 찾아 떠난다

최성민 지음 | 김영사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영혼을 '창귀'라고 한다. 『청우기담(聽雨寄談)』이라는 책에 "창귀는 호식당한 사람의 영혼으로 감히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호랑이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창귀에는 여러 이름이 있는데 박지원의 『호질』에는 '굴각(屈閣)' 등의 이름이 보이고, 민간에서는 '홍살이 귀신', 특히 태백 지역에서는 좀더 토속적으로 '가문글기'라 한다.



창귀는 지옥 같은 호랑이의 위세권에서 탈출하려고 '사다리' 또는 '다리'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것으로 물귀신과 흡사한 행위다. 창귀는 늘 사돈네 팔촌까지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새 창귀감을 구하는데 반드시 사람을 불러내거나 유인하여 범에게 데려간다. 그래서 호식되어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막아도 창귀가 씌어 자꾸 나가는 등 이상행동을 한다. 창귀가 이처럼 끈질기고 무섭다는 데서 호식총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분묘가 유래한다. 호랑이가 먹다 남긴 유구를 태우는 것은 모든 화근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창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다.



주검을 화장해 그 위에 돌을 쌓는 것은 '신성한 곳'이라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창귀'의 발호를 막기 위함이다. 창귀는 호식된 사람의 귀신으로 범의 호위병 노릇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불러내어 먹잇감으로 만든 뒤 범위 굴레를 벗어나는 악질이다. 돌로 무덤을 쌓아 이 귀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동시에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도록 해 벌초하려다 창귀에 걸리는 피해를 막자는 것이다.



시루는 '철옹성'임을 뜻하는 동시에 솥 위에 올라앉은 형국으로 뚫린 구멍과 함께 하늘을 상징한다. 사악함과 불결함, 모든 것을 찌고 삶아 죽이는 시루를 엎어놓으면 창귀도 그 안에서 꼼짝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아홉 개의 시루 구멍으로 귀신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벼락을 의미하는 쇠가락도 꽂았다. 쇠가락을 꽂았던 또 다른 이유는 물레에서 가락의 용도처럼 창귀도 묘 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 가장 접근하기 쉬운 호식총은 태백시 철암동 버들골 설통바우 밑에 있는 것과 태백시 동점동 구무안 우물둔치골 업둔어미 호식총이다. 철암동에서 1km 떨어진 산골짜기 바위 틈새에 있는 설통바우 호식총은 시루가 깨어진 채 가락은 녹슬어서 내려앉았다. 업둔어미 호식총은 산 속 잡목 사이에 돌무덤 형태로 되어 있고 시루는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근 마을 사람들이 간혹 명절 때 뫼 앞에 제물을 차려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찾는 이도, 찾을 일도 없어 호식총은 버려진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면 왜 하필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 밥이 되었을까? 우리 나라에는 그리 험하지 않은 산에 숲이 울창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다. 그 마당에 느리고 힘 약한 동물인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례가 무수히 많았다. 호랑이를 무서워해 "범에 물려갈 놈"이라는 악담이 생겼고, 악독한 전염병(콜레라) 이름을 '호열자'라고 짓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2년에 경상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라는 기록이 있고, 중종 19년에는 황해도에서 호랑이에게 상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된다고 하고 있다. 영조 19년에는 평안도 강계에서 20여 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고, 영조 30년에는 경기도에서 한 달 동안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한양의 백성들을 물고 갈 정도라면 산골마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 밥이 되었을까?



태백산맥의 어미산인 태백산을 중심으로 사방 200∼300리 안에는 예로부터 화전민이 많이 살았다. 김강산 씨에 따르면 태백산 기슭에 들어선 모든 산간마을에 호환의 사례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태백시 철암동 버들골 설통바우 밑 화장터 등 태백에 33곳,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범든골 호식터를 비롯해서 삼척에 53곳, 정선군 북면 유천리 송천 건너 개금벌 속골 호식터 등 정선에 33곳,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 연애골 호식터 등 영월에 5곳 등 강원도에서 경상북도 일대 산간마을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파악된 곳만 해도 158곳에 이른다. 이런 곳에는 영락없이 호식총이 들어서 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호식되어간 상황 목격담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촌로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태백산 일대 사람들은 호랑이 밥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호랑이골에 눌러 살았을까? 김강산 씨는 호식터 답사와 촌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숙명론을 주장한다. "혹독한 정치와 관리의 횡포, 과중한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공자 시절의 말처럼 태백산맥 안으로 들어와 살던 화전민 가운데는 학정에 쫓겨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차라리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더라도 숙명으로 알고 묵묵히 화전을 일구며 마음의 평정을 구했으며, 호식된 상황을 신성한 경지로 격상시켜 슬픔을 미화하려 했다.



태백시 문곡동 등 태백산 일대 산당(山堂)에는 으레 산신령이 호랑이 등을 타고 나타난다. 또 호랑이 자체를 '우습고 착하고 인자한' 산신으로 받드는 곳도 많다. 이는 호랑이를 격하시켜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고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의지 표현임과 함께 절대적 강자에 대한 불가항력적 좌절감을 '신과 인간의 관계' 설정을 통해 '굴복의 숙명론'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눈, 눈, 눈, 새하얀 꿈의 세상.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는 집도 하얗고 길도 하얗고 들과 산도 온통 두터운 눈 이불에 덮여 있다. 이 눈 사막 속에서 사람과 들짐승들은 하얀 적막을 어떻게 지새고 있을까? 흰 도화지 위에 봄을 그리는 겨울잠 꿈을 꾸고 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도회지에서 눈을 잃어버렸다. 눈을 밟으며, 눈에 빠지며 거닐던 덕수궁 돌담길이나 남산 오솔길에 관한 추억은 빛 바랜 사진에 갇혀버린 지 오래다. 어쩌다 눈이 내리더라도 쌓이기가 무섭게 잿빛 도시 색깔에 오염되어 버린다. 그래서 시골에 함박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가운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평창에 가면 눈에 관한 한 우리의 그리움을 듬뿍 속채워줄 눈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토종 눈, 우리 민속 스키인 산형썰매, 전통 눈신 '설피', 강원도 전래의 겨울철 사냥 유물인 '멧돼지창' 등이 눈과 더불어 옛이야기를 들려줄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평창군 도암면 차항2리는 강원도에서도 유달리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이곳엔 허리까지 내린 폭설이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 겨우내 전혀 녹지 않는다. 이런 눈 덕분에 예전엔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자주 열리곤 했다. 지금도 해마다 해병대와 육군 특전사가 스키 훈련 캠프를 연다.



차항2리 사람들은 예전의 전국체전 스키대회장 자리에 '자연눈썰매장'을 만들어 겨울 손님들을 맞고 있다. 이름은 '대관령 자연설썰매장'. 이름 그대로 우리 나라 최대·유일의 신토불이 천연눈썰매장이다. 이 썰매장에 들어서면 우선 가슴이 확 열리는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 1만여 평의 고랭지 채소밭에 들어선 '채전백해(菜田白海) 썰매장', 그 주위 흰 산등성이와 파란 하늘이 만나는 곡선의 신선한 아름다움, 그리고 발바닥에 와 닿는 자연설의 부드러운 감촉과 귀에 익숙한 "뽀드득∼" 소리, 이들은 우리 정서의 한 자투리에 억눌려 있던 '토종 겨울'을 끄집어 내주기에 충분하다.



차항2리 사람들은 이 자연설썰매장에 토속적 분위기를 더욱 불어넣기 위해 겨울철 전통 생활도구들을 가져다 놓고 모범을 보여준다. 강원도 지방의 눈살이 필수품인 설피, 산형썰매(현지에서는 '사형썰매'라고 부른다), 멧돼지창 등이 그것이다. 이 마을 50대 이상 남성들은 모두 설피 및 산형썰매 타기와 멧돼지 창사냥의 명수들이다. 이들은 당번을 정해 번갈아 썰매장에 나와서 예전 자신들의 겨울철 일상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자연설썰매장에서 썰피와 산형썰매는 정말 진가를 발휘한다. 거기에는 플라스틱 현대 썰매와 훈련 중인 군부대의 서양 스키가 있어서 비교가 잘 된다. 산형썰매는 이름은 '썰매'지만 폭이 넓고 길이가 비교적 짧아서 스키와 썰매의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선 자세에서 '스키'로 타기도 하고 앉은 자세에서 '썰매'로 타기도 한다. 리프트가 없는 썰매장에서 서양 스키와 플라스틱 썰매는 한번 내려왔다가 출발점으로 다시 올라가려면 여간 애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썰피와 산형썰매, 그리고 멧돼지창은 삼위일체로 조화를 이뤄 기동성을 발휘한다. 산형썰매를 타고 일단 미끄럼길을 질주해 내려온 다음 다시 출발점으로 오를 때에는 설피로 갈아신는다. 푹푹 빠지는 옆길이나 미끄럼길을 바로 오르는 데도 보통길을 가듯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멧돼지창은 출발점으로 오를 때나 하강을 할 때 '스틱' 노릇을 해준다. 이처럼 눈 속에서 살던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오늘날 그 눈과 더불어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것을 되돌아보는 일의 흐뭇함을 일깨워줄 것이다.한국인들이 가장 고맙게 생각해야 할 가축이 있다면 무엇일까? "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을 잘 따르고 '보신탕'이라는 조상 전래의 훌륭한 음식까지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눈물겹도록 고마운 개를 보신탕용으로 잡을 때는 왜 잘 데리고 다리를 건너다 난간 아래로 걷어차 목 매달아 죽이고 그슬려서(예전에 일부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도살했다는 말이다) 브리지드 바르도 같은 서양인들에게 빌미를 주는가 말이다. 그리고 요즘 보신탕이 과연 전래의 토종 똥개로 만든 한국의 토종 음식인지 서구식 사료를 먹인 외국종 도사견으로 만든 무국적 음식인지 살펴봐야 한다. 가둬 길러서 악이 오를 대로 오른 도사견과 제맘대로 룰루랄라 시골길 헤치고 다니며 똥 주워 먹고 자란 토종 똥개 중 어느 것이 그 육질에 엔톨핀이 많을까?



조상 대대로 우리의 식생활에 크게 기여해온 돼지는 우리가 정말 돼지머리 올려놓고 수백 번 큰절을 올려도 될 만큼 고마운 가축이다. 오늘날 돼지가 없었더라면 돈 없는 우리들이 어떻게 고기 맛을 보며 동물성 단백질을 넉넉히 섭취할 수 있었을까. 별 생각 없이 한낱 자고 먹기에만 급급한 동물이지만 돼지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순국 돼지에 대한 묵념'을 올려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돼지 알기를 돼지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쳐주니 돼지의 눈빛이 늘 사람을 째려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 나무란다.", "그슬린 돼지가 달아맨 돼지 타령한다."에서부터 "돼지 멱 따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힘없고 약한 돼지를 능멸하는 사람들의 언사는 그칠 줄 모른다. 얼마 전에는 '공포의 삼겹살'이니 뭐니 하여 사람의 못난 생김새를 돼지의 구체적인 부위에 비유하더니 김영삼 정권 때는 머리 나쁘고 편협한 정치인을 가리켜 '삶은 돼지머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예로부터 돼지는 단지 고기만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모로 사람과 가까웠다. 지신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상해일(上亥日)에 궁중에서는 젊고 지위가 낮은 환관 수백 명을 동원해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며 "돼지 주둥이 지진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니게 했다. 이는 풍년을 비는 뜻이었다고 한다. 산모가 돼지 족발을 삶아 먹으면 젖이 많이 나고, 돼지 꼬리를 먹으면 글씨를 잘 쓰고,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오고 재수가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우리 민족이 2천 년 넘게 돼지 덕을 보면서 살아왔으니 전국 땅 이름에도 돼지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돼지를 많이 길렀던 제주 지역에서 그런 땅 이름이 많은데 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리 '돝귀둥'은 돼지귀처럼 생긴 곳이고, 제주시 회천동 '돝 죽은 산밭'은 멧돼지가 많이 잡혀 죽은 곳이다. 대전 유성구 학하동 골짜기의 '도야지 궁그러 죽은 골'은 산이 험해 굴러 떨어져 죽은 돼지들이 많은 곳이고, 경상남도 창녕의 '돼지 목 자른 만댕이'나 전라북도 남원의 '돼지 무덤' 등은 제사용으로 돼지를 희생시킨 곳이다.해마다 2월 하순부터 3월 초 무렵이면 남녘 방방곡곡에 매화가 피어난다. 그런데 봄의 시작이자 한 해 생명의 열림이 곧 매화일진대 이 땅의 진정한 토종 매화를 찾아 삶의 향취 한 가닥을 일궈내 보는 것은 어떨까?



매화는 고결, 단아, 아름다움이 '꽃 중의 꽃'이요, '군자 중의 군자'여서 기개와 절개의 표상이었다. 선조들은 해마다 이 무렵 그런 매화의 미덕을 좇아 혼탁한 세상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요즘 남녘 지방 매실 산지에서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재배되는 매화는 선조들이 흠모하던 '사군자 매화'와는 거리가 먼 일본산 개량종이 많다. 게다가 지방자치시대의 축제 경쟁 및 매화 상업주의에 2000년 인기를 누린 드라마 <허준>의 영향까지 더해져 매화에 대한 왜곡이 심해질 우려가 있다. 선조들이 좋아하고 외경했던 참매화, 우리 토종 매화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평생을 토종 매화인 '선암매'와 더불어 살아온 선암사 주지 지허 스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살펴본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이른바 왜매는 일본인들의 매실 제품 수요에 맞춰 대량생산 위주로 개량된 것이다. 이 개량매는 꽃이 많이 피고 열매(매실)가 많이 열려야 함을 전제로 한다. 개량 방법은 매화나무끼리 접을 붙이거나 복숭아나무와 삽목을 한다. 그렇게 하면 복숭아나무의 성질대로 빨리 자라고 꽃과 열매를 많이 달지만 복숭아나무의 수명만큼 길어야 수십 년밖에 살지 못한다. 이에 비해 토종 매화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수백 년을 산다.



개량종 '일본 매화'는 꽃과 열매가 덕지덕지 붙어 산출이 많고 열매 또한 토종보다 굵다. 그러나 꽃의 향기가 토종에 비해 옅고 매실의 육질이 무르기 짝이 없다. 이에 비해 토종 매화는 꽃과 열매가 약간 작고 적게 달리지만 꽃의 향기가 매우 깊고 두터워 개량종의 많은 꽃을 매향으로 제압하는 힘을 지녔다. 예전 선조들이 그린 사군자의 매화는 가지 중간중간에 띄엄띄엄 꽃을 얹어놓았음을 볼 수 있다. 혹 매화를 흐드러지게 붙여놓은 그림이라면 최근에 일본산 매화를 보고 그렸거나 매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 그린 것이다.



꽃이 질 때도 토종은 꽃잎이 나무에 끝까지 붙어 있는 힘이 강해 거의 말라버린 지경에 이르러서야 바람에 한잎 두잎 흩날려 지지만 상업매는 핀 지 얼마 가지 못해 통째로 나무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우리 풍토에 맞지 않는 것이기에 제대로 수명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토종매의 매실은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짙고 쓴맛이 더 난다. 토종매 중에서도 홍매실은 굵기가 현저하게 작다. 홍매, 청매, 백매의 순으로 꽃과 매실의 향과 맛이 좋다. 약으로 쓸 토종 매실은 신맛이 가장 충만했을 때인 5월 말에 딴다. 개량종은 1∼2주 늦게 딴다. 2000년 드라마 <허준>의 영향으로 매실 값이 폭등하고 일부 시장에서 비슷한 살구를 매실로 속여 팔거나 중국산 수입 매실이 국산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매실은 살구에 비해 색깔이 곱고, 살구는 살이 물렁하고 매실은 단단해 보인다.



우리 토종매와 왜매는 나무의 모양에서도 차이가 난다. 토종은 나무 전체의 때깔이 단아하고 같은 나무 안에서 가지들이 잘 얽혀 자란다. 어린 가지에 가시가 있다가 나이가 100년이 넘으면 몸통에 묻혀버리는 점도 특이하다. 개량종이 불과 수십 년인 데 비해 토종 매화는 수명이 수백 년이다. 왜매는 가지가 주뼛주뼛하고 얽힘이 덜하다. 가을에 잎이 질 때 재래종은 분홍 빛깔로 가을 빛을 띠지만 왜매는 파랗게 말라버린다. 토종 매화는 입춘 절기부터 좁쌀만한 꽃봉오리가 굵어지다가 춘분 무렵부터 꽃이 핀다. 수백 년 묵은 고목등걸에 고매하게 꽃이 달린 자태, 추운 겨울일수록 더욱 짙은 향기. 아무리 좋은 꽃도 매화를 당할 게 없다. 오후 해질 무렵 이끼 낀 기와 담장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매화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