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거 블루스
윌리엄 더프티 지음 | 북라인
·슈거 블루스 - 설탕이라 불리는 수크로오스의 섭취로 인해 발생하는 육체·정신의 복합적인 질환
1. 누구나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오래 전 나는 뉴욕변호사협회의 5번가 사무실에서 열린 오찬 모임 겸 기자 간담회에 가게 되었다. 음식을 맡은 요식 업체의 직원이 양념한 훈제 쇠고기를 얹은 검은 호밀 빵, 살라미 소시지를 얹은 거친 호밀 빵, 카드 보드지 잔에 담긴 커피, 각설탕 등 간단한 먹거리를 내왔다. 나는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 커피잔 뚜껑을 열고는 각설탕을 하나 집었다. 각설탕 포장을 막 벗기려는데 여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이 단호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건 독약이에요. 난 설탕을 먹지도 않고 집에 두지도 않아요."
나는 벼랑 끝에서 끌어당겨진 사람처럼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가지런한 흰 이를 보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쿠키 통에서 한줌 쿠키를 꺼내다 걸린 아이처럼 나는 그만 각설탕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직접 준비해 온 점심 식사를 들고 있었다. "흰 설탕을 드시는 건 자살 행위예요. 내가 신경 쓰는 건 그거랍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이를 빛내며 미소지었다.
그 기억이 며칠간 나를 사로잡았다. 각설탕 집게에 손을 뻗칠 때마다 뒤로 물러나 그녀의 단호한 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무언가 좀더 나은 것을 해보려고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후에야 우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는 설탕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심각한 정도였다. 그만두고 싶어도 어찌해야 할지 방법도 몰랐다. 수십 년간이나 그런 습관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부엌 곁의 식품 저장고에 항상 100파운드짜리 고급 설탕 포대를 보관해 두셨고, 그 위에 큼직한 양철 국자를 놓아 두셨다. 나는 할머니가 체리와 사과 파이, 쿠키와 케이크에 설탕을 뿌리던 것과 가을에 통조림을 만들 때 복숭아와 자두를 끓이면서 엄청난 양의 설탕을 넣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나는 설탕이 든 음료수를 구입하기 위해 어머니의 지갑에서 처음으로 돈을 훔치던 때를 기억한다. 사춘기 때는 무서운 공포를 몰고 왔다. 얼굴, 목 등이 보기 흉한 여드름으로 뒤덮인 것이다. 지금에야 나는 그게 다 내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 당시 어떻게 내 여드름을 몰래 먹던 설탕 제품과 연결지을 수 있었으랴? 고등학교 때는 몰트 초콜릿에 시달렸다. 차비를 아껴 초콜릿을 사먹기 위해 걸어서 통학할 정도였다. 피부병은 나날이 더 심해졌다.
대학 생활 때도 나의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도 단 것이 더 좋았고 '운동' 과목을 가장 지겨워했다. 여름이면 수천 마일을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며 5센트짜리 펩시콜라에 절어 살았다. 남부를 처음 여행했을 때 만난 어떤 여자로 인해 이른바 '약'이라는 것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부에서는 그것을 코카콜라라고 불렀다. 설탕과 관련된 일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징집되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잘 먹은 군대였지만 나는 군수품 중에 맥아 분유와 설탕 넣은 커피, 빵, 캔디, 초콜릿, 코카콜라를 찾아 군 매점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출혈성 치질을 앓으며 죽음의 공포를 헤매게 되었다.
잠깐 나에게 의미 있는 일도 있었다. 제1프랑스 군에 합류한 후 그곳은 식량 배급이나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약 18개월 동안 나는 설탕을 제외하고 말고기나 토끼, 다람쥐, 검은 빵 같은 것들만 먹었다. 그 동안 감기에 걸리거나 재채기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그것의 의미를 나는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했다. 미국에 돌아온 후 나는 다시 흥청거리며 설탕 제품을 먹어댔다. 몇 주 후 나는 이상한 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치질이 재발했고, 매일 열이 오르내렸다. 검사 결과 전염성 단구 증가증, 비전형적 말라리아, 간염, 대상포진, 피부 이상, 귀 감염 등의 소견이 나왔다. 의사와 병원의 진찰, 처방으로 이어지는 검사와 약물 투약 속에서 끊임없이 15년 동안 허우적댔다.
글로리아 스완슨을 만난 이후 나는 부엌에서 설탕이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자 선반과 냉장고가 금새 텅 비어 버린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약 48시간 정도 지난 후 나는 엄청난 고통과 메스꺼움, 깨질 것 같은 편두통을 견뎌내야 했다. 만약 고통이 어떤 신호라면 이는 길고도 의미심장하며 강렬한 암호였다. 그리고 약 24시간 동안 더 고통을 겪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5개월 후 92킬로그램에서 61킬로그램으로 날씬하게 살을 뺐고 그 결과 새 몸과 새 정신,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인가 나는 「뉴욕 타임스」에서 글로리아 스완슨의 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당신 말이 맞았다고요. 그때는 당신 말뜻을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2. 설탕의 역사고대인들은 사탕수수를 긁어 내어 차파티 빵과 수프와 곁들여 먹었다. 경험이 쌓이자 미국 인디언들이 단풍나무에 홈을 파 수액을 채취해 메이플 시럽을 만들 듯 인도 사탕수수의 즙을 짜서 마셨다. 그리스인들은 사탕수수를 부르는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인 네아코스 장군은 기원전 325년 인더스 강을 따라 인도 동부 지역을 답사한 후 수수와 갈대에서 '꿀 같은 것'이 자란다고 기록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당시의 기본 식품이었던 꿀과 소금에 빗대어 설탕을 설명했다. 그들은 '인도 소금' 혹은 '꿀벌이 만들지 않은 꿀'이라 불렀고, 극소량에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자존심이었던 존디사푸르대학의 의약학부는 사탕수수의 즙을 응고, 정제하여 발효를 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 개발하여 명성을 얻었는데 이는 사탕수수즙의 운반과 무역이 가능해진 것을 의미했다. 때는 바야흐로 서기 600년 페르시아의 땅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모든 제국의 그러하듯 페르시아 역시 부질없이 무너졌고, 그들을 괴멸시킨 이슬람 세계는 승전의 전리품으로 페르시아의 제조 비법을 챙겨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분야의 사업을 모두 장악했다. 그러나 설탕이 들어온 후 이슬람 세계에는 갖가지 새로운 질병이 창궐했다. "투르크인과 무어인은 설탕을 한 조각씩 잘라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먹어댔다. 탐식에 길들여진 이들은 더 이상 예전의 용맹한 전사가 아니었다." 술탄 군대의 설탕 중독은 월남전 당시 미군이 헤로인과 마리화나에 중독된 것과 아주 흡사했다.
설탕의 마수는 아랍을 굴복시킨 기독교 문명 역시 예외를 두지 않았다. 정벌에 나선 십자군이 사라센 음식의 맛을 알게 된 후 그들 중 일부는 사탕수수 발효액과 설탕 사탕을 찾아 성지를 정신 없이 헤매고 다녔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손대지 말아야 할 금단의 과일에 손을 뻗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700년 동안 세계에는 사악한 범죄가 떠돌았고, 노예와 대량 학살, 조직화된 범죄가 남게 되었다.
3.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말할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설탕 퍼지를 먹이면 어떻게 될까? 버나드 퍼거슨은 『친드윈 강 너머』에 이렇게 기록했다. "결과가 너무 빨리 나타나 경악했다. 성령을 받은 것 같았다. 굳었던 혀가 자연스럽게 풀리며 발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한 사람의 뇌에 이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꼬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어도 되는 걸까? 설탕은 두뇌에 작용하는 환각제이다. 섭취하는 즉시 마음이 나른해지면서 환각에 이르는 과정을 경험한다.
현대 내분비학에서 밝히는 작용 메커니즘을 들어 보자. "우리 몸에서 가장 민감한 기관은 뇌일 것이다. 몸 전체를 가능한 원활히 움직이려면 혈액 속의 포도당의 양이 혈액 속의 산소의 양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신진대사가 원활한 몸은 부신의 지휘 하에 정확히 균형을 이루며 작동한다. 당은 소화 과정을 거쳐 단당류의 형태로 몸에 흡수되는데 설탕은 이당류이므로 정제 설탕을 먹게 되면 몸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생화학적 소화 반응을 겪지 않고 곧장 장에 도달하여 혈액 속으로 바로 흡수된다. 그 결과 혈당치가 급격히 증가하여 체내 균형이 깨지고 몸은 위기에 빠진다. 제일 먼저 위기를 알아채는 곳은 뇌이다. 뇌는 부신(副腎)에 명령하여 당을 처리할 호르몬과 화학물질을 쏟아내도록 한다. 몇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살면 부신이 손상된다. 과로 때문이 아니라 거듭되는 충격 탓에 망가지는 것이다. 결국 기능이 감퇴하고 호르몬의 균형이 깨진 결과 내분비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뇌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니 마약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시대를 앞서가는 내분비학파의 전위적인 주장은 암흑 시대의 이른바 민간 치료자들이 경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터득했던 내용과 같다. 이들 민간 치료자들은 식물과 음식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제된 설탕은 온전한 식품이 아니었다. 민간 치료자들에게 우울증이나 편두통, 광증을 호소하면 먹는 음식과 관련된 증세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마도 설탕 때문이리라. 그들은 따끔하게 충고하고 뇌를 진정시키는 물약이나 탕약을 줬다. 그러나 유럽이 설탕이 널리 보급되던 당시 그들은 느닷없이 교회와 정부의 공공연한 적이 되었다. 마녀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마녀는 설탕에 반하는 사악한 이야기를 퍼뜨려 교회의 축복을 받고 나라에 이익을 줄 새로운 국가적 사업에 해악을 끼치려 하는 존재가 되었다. 슈거 블루스의 본질을 꿰뚫었던 현명한 사람들은 지하로 숨었다. 사람의 몸과 두뇌는 설탕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누누이 말하던 주장도 이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은 수백 년이 지나야 다시 주목받을 진리였다.
4. 우리가 설탕을 믿사오니종교 재판관과 마녀 사냥꾼이 급증하면서 자연히 반발이 일어나 공포와 혐오감이 넘쳐났다. 이 참극에 출연한 의사와 카톨릭 사제들은 이제 서로 불편한 동반 관계로 변했고 사람들은 그들의 피묻은 손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이전의 이단적 가르침이 새롭고 다양한 분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되어 제도권에 진입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교회를 떠나자 왕은 일요일 예배에 불참하면 법률 위반으로 무거운 벌금을 물렸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마구잡이로 마녀를 불에 태우고 엑소시즘 의식을 벌였음에도 신들림과 광기가 해결되지 않자 의사와 사제는 압력을 받았다. 사람의 두뇌를 괴롭히고 정신 장애를 일으키는 슈거 블루스 증세가 왜 생기는지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710년 익명의 사제 겸 의사가 그 해답을 제시했다. 간단하고 확실한 설명에 의사와 사제들은 열광했다. 덕분에 이들은 계속 행복하고 바쁘고 부유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의 해답은 '자위행위'였다.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약간의 종교적 위협을 가미하며 행동에 들어갔다. 게다가 자위행위를 해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성공 사례를 제시해 이 이론을 뒤엎으려면 수년 동안 자위를 했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미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감히 누가 이런 시도를 하겠는가.
시간이 흐르자 의사들이 합세하여 구약성서의 의식인 할례를 되살리고, 급기야 1850년대에는 여성의 음핵을 도려내는 수술을 개발했다. 자위행위는 의료인에게 완벽한 안전 밸브 역할을 했다. "당신을 고칠 수 있지만 만일 자위 행위를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한다면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병이 낫지 않으면 정신 병원에 갇혀 자위행위를 치료하기 위해 구속복을 착용하고 낮에는 정조대를, 밤에는 가시 달린 바지를 착용해야 했다.
이렇듯 의료계의 역사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보고 있으면 속이 불편해진다. 수세기에 걸쳐 고통받는 영혼을 마녀라고 불에 태우고,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엑소시즘을 행하고, 미쳤다고 감금하고, 자위행위 때문에 정신병에 걸렸다고 고문을 가하고, 정신 이상이라며 정신병 치료를 하는가 하면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는 전두엽 절제수술까지 행했던 것이다.
5. 누명을 쓴 꿀벌1662년이 되자 영국의 설탕 소비량은 겨우 2세기만에 영(0)에서 1,60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 그 후인 1665년 역병이 런던을 휩쓸었다. 같은 해 9월까지 역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3만을 헤아렸다. 다른 이들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모든 것이 절반으로 줄었다. 다만 설탕을 먹을 일이 없었던 시골 사람들은 역병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이 전염병을 '도시 설탕병'이라고 불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왕권과 무역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을 게 분명하다.
역병이 유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 윌리스(해부학자이자 영국 왕립 학회 최초 멤버 중 한 명이며 왕립의대의 명예 회원)는 런던의 세인트 마틴 가에 병원을 개업하여 당대 최고의 의사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윌리스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유한 유명 인사들의 소변이 전에 없이 달짝지근해졌다는 사실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두 번째 의서인 『이론 약리학』에서는 이 증후에 '당뇨병(diabetes mellitu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어인 디아베테스(diabetes)는 단순히 소변이 많이 배출된다는 뜻이고, 이 단어에 결합시킨 라틴어 멜리투스(mellitus)는 '꿀의 달콤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윌리스가 라틴어로 '설탕으로 인한 염증'이라는 의미의 '폴리우레아 사카리티스(polyuria saccharitis)'라고 명명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영국은 국왕을 참수형에 처하고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은 참이었다. 윌리스는 의회파에 맞서는 열렬한 왕당파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찰스 2세의 주치의가 된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1세 이래의 모든 왕족처럼 찰스 2세도 수지 맞는 설탕 무역에 목을 매고 있었다.
왕과 고위 관리들이 당신의 환자이며 이들이 설탕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돈줄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써가며 설탕이 새로운 병의 원인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함으로써 단골 손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겠는가? 그래서 토마스 윌리스는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이다. 설상가상인 것은 꿀벌을 비난했다는 점. 꿀은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벌을 쳐서 막대한 돈을 버는 사람은 없었다. 벌에 책임을 둘려 꿀로 인한 염증이라는 뜻의 난해한 이름을 붙이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의학 역사상에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의학적 신망도 두터이 할 터였다.
6. 젖병에서 주사기까지"분유를 먹고 큰 아이는 엄마보다 젖병을 좋아하게 된다." 흑인 무슬림 예언자 엘리야 무하마드의 말이다. 키 크고 잘생긴 백인 조지가 그 좋은 사례이다. 그 역시 분유를 먹고 컸다. 고무 젖꼭지를 통해 난생 처음 설탕을 먹었다. 이빨이 난 후에는 시리얼과 오렌지 주스, 달걀과 케첩에 든 설탕을 먹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는 케첩에 설탕이 들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폴란드인인 외할머니는 특별한 식이요법을 한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다른 사람들만큼 초콜릿 도넛을 드셨다. 조지는 외할머니가 꽃무늬 드레스 치마를 걷어올리고 허벅지에 주사바늘을 꽂던 것을 기억한다. 조지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쉰아홉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설탕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던 중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가족의 죽음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조지는 이모와 함께 교회 성가대석에 앉아 딱딱한 사탕을 먹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해 당뇨병을 앓는 식구가 또 한 명 생겼다. 어린 조지였다. 체중은 금세 74킬로그램에서 63킬로그램으로 떨어졌고, 부모와 함께 병원에 가서 소변 샘플을 제출하고 2분 뒤 당뇨병 판정을 받았다. "차리리 내게 일어난 일이면 좋겠어!" 조지의 어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조지는 주사기, 주사바늘, 알코올, 솜, 클리니스틱스, 인슐린, 각설탕을 완비하고 다녔다. 소변을 볼 때는 오줌 줄기에 클리니스틱스를 대고 흔들었다. 빨간색으로 변하면 혈당이 높으니 빨리 인슐린을 투여하라는 신호였다. 슈퍼마켓에서 일할 때 생긴 일이다. 각설탕을 담은 비닐 박스가 바닥에 쏟아졌다. 옆에 지나가던 노인이 "당뇨병인가 보지?"라고 말했다. 동족은 서로를 알아본다. 비밀스런 동지 의식. 조지는 그 노인과 같은 신세라는 생각에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