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지음 | 뜨인돌
프랑스 대혁명은 근대사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적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미국에서 먼저 독립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식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미국이 독립에 성공하자 자유, 평등의 개념이 백성들에게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반감이 프랑스 백성들의 마음 속에 축적되기 시작했으며, 그들도 미국과 같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대혁명도 사실은 돈과 관련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대혁명 전 프랑스는 유럽의 부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는 왕과 귀족의 손에 쥐어져 있는 반면에 백성들은 가난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막상 돈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에 가난한 백성들은 세금을 꼬박꼬박 부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의 무분별한 국고 소비로 극심한 빚더미에 올라앉은 프랑스는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이자 상환을 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었다. 국고가 바닥나고 더 이상 다른 나라로부터 차관을 끌어다 쓰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프랑스는 국내 세금을 인상한다. 당시에 먹을 빵도 없어서 빵을 달라는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백성들에게 세금을 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내어먹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국민들이 세금을 인상해야 하는 근본 요인이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낭비가 어찌나 심했던지 '적자 부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녀의 사치는 사실 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인들이 처형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들이 외국의 보수 세력만이 왕정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치밀한 탈출 계획을 세운 후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발각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이 탈출극으로 왕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결국 죽음을 자초했는데 그들의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데는 앙투아네트의 왕비병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38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구설수로 군주제에 내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바스티유 함락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바스티유 공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유명한 '공격자'의 한 사람인 에리라는 장교는 "바스티유는 결코 무력으로 공략되지 않았다. 공격받기 전에 항복했기 때문이다."라고 시인했다. 1806년 나폴레옹 밑에서 장군으로 승진한 유란도 같은 발언을 했으며, 바스티유 수비대 소속 하사관도 이를 수긍했다.
나중에 민중의 혁명적인 영웅 행위를 조사하는 상설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역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원래 요새인 바스티유는 그 당시 감옥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신분 높은 사람들을 위한 호화로운 설비의 감옥이었다. 파리의 시내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은 정치범 등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관련되었던 사람들만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420년이나 되는 바스티유 성은 5.5미터나 되는 높이에 견고하게 축조되어 외부에서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82명의 수비병과 31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떠한 공격에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바스티유 성 안에 단 1일분의 식량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봉기한 민중도 당시 7명이던 죄수를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화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바스티유 사령관 드 로네이 후작과 몇 차례 교섭을 가졌고 드 로네이는 최종적으로 수비대 전원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바스티유를 넘겨주는 데 동의하고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바스티유 성의 수비병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군중들은 혁명기간 동안에 사망한 동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스위스 용병들은 시청에 끌려가 총살되었고 드 로네이 사령관은 시청으로 끌려가는 도중 군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며, 파리 시민의 봉기는 '앙시앵 레짐(낡은 제도)'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스티유 감옥이 혁명의 와중에 민중에 의해서 공격당한 후 점령되었다고 설명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바스티유의 점령이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믿는 것에는 그 사실이 진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것이 일반인들의 구미에 어떻게 잘 부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굳이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항상 값비싼 정보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시민들이 믿고자 하는 상황,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진실과는 전혀 다른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가 되는 것이다.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갈릴레이가 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피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현대와 같은 과학시대가 열리진 못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원래부터 과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사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하지만 그는 이 대학의 교육방법에 실망한다. 사물을 차분히 관찰하고 근본 이치를 깨닫게 되는 학업방식이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한 갈릴레이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과학과 수학 공부를 시작한다.
갈릴레이는 매우 머리가 좋은 학생으로 새로운 학문에 입문하자마자 천재성을 발휘한다. 겨우 18세에 유명한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다. 1592년에 갈릴레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파도바대학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그의 생애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놓는 전기가 생긴다. 1608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는데 샘플 하나가 1609년 7월에 파도바에 도착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천재성은 곧바로 발휘되어 이 망원경을 바탕으로 눈으로 볼 때와 비교해서 약 1천 배로 확대되고 30배 이상 가깝게 보이는 개량된 망원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망원경으로 본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던 갈릴레이는 달은 미끈하지도 않고, 완전한 구형도 아니며, 바다와 깊은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뿐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은하수가 사실은 무수히 많은 별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목성을 관측하여 목성의 달, 즉 4개의 위성들이 그 둘레를 돌고 있음을 알아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발견한 천체의 현상을 연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이론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때부터 갈릴레이의 수난이 시작된다. 그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갈릴레이 자신이었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들이 목성의 둘레를 돌고 있는 것과 같이 달도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고, 지구도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고 생각한다. 망원경으로 발견한 현상들을 과감히 발표한 갈릴레이의 주장은 즉각적인 반박을 받는다. 그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하는 전통적인 생각이 뒤집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신이 의도한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갈릴레이는 자연적 현상에 의한 지동설을 주장했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발견 사실을 고집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부정하는 언사를 자행하자 1605년에 피렌체의 성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갈릴레이에 대한 고발장을 두 번에 걸쳐 교황청에 보낸다. 물론 교황청은 공소기각 결정을 내린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갈릴레이는 자신이 고발되었다는 사실에 동요하여 예수회파 장군이며 성청(이단을 결정하는 교황청의 부서)의 심판위원장인 벨라르민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낸다. 벨라르민은 한때 천문학을 강의한 적도 있었으므로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인 편지를 쓴다.땅이 넓고 기름진 남부는 식민지 시대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고 노동력은 흑인 노예를 이용했다. 특히 그들은 대농장에서 면화 등을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필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반면 북부는 철과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적 공업이 발달했으므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것은 남부와 북부에서의 노동력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노예제도는 남부에서 먼저 폐지하려고 생각했었다.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전부 영국으로 수출했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목화씨를 빼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려서 실제로 농장주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3년 엘리 휘트니라는 미국 발명가가 목화의 씨를 뽑아 솜을 타는 조면기를 발명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마침 영국도 산업혁명 덕택에 수많은 기계로 많은 옷감을 짤 수 있는 대량생산체제로 돌입했다.
노예제 확대는 세계적으로 보아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1833년에, 프랑스는 184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미국은 이 골머리 아픈 문제를 각 주의 자치에 맡겼고 그 결과 남부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북부는 이를 금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다. 흑인도 인간이라는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는 이들이 세를 점점 불려 가고 있는 도중인 1848년 캘리포니아의 한 물레방앗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바로 이 골드러시는 노예제도 폐지의 기점이 된다. 이런 와중에 1852년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발간되었다.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인 면을 반영하여 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한 것인데 놀랍게도 미국 전역을 강타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노예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다.
1860년 11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바로 노예제도 폐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은 취임식에서 미합중국의 헌법은 각 주의 자치는 인정하되 합중국에서 빠져나가 새 나라를 세우진 못하게 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7개 주가 합중국에서 탈퇴하는 것은 미합중국의 헌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이를 막을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주의 문제는 계속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에게 노예제 문제는 연방의 통일이라는 문제보다 항상 뒷전이었다.
링컨의 노예 해방에 대한 소신은 여러 번 오락가락했다. 링컨은 1858년 7월에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벨라르민이 갈릴레이에게 쓴 편지에서 보듯 교황청에서도 지동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교황청에서도 명확한 증거를 보여 준다면 지동설에 대해서 신축성 있는 견해를 보이겠다고 적은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지동설에 대한 완벽한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자 교황청은 1616년에 판결을 내린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철학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이단"이라는 것이다.
1618년에는 갈릴레이가 또다시 큰 실수를 저지른다. 1613년 예수회 수사인 그라시 신부가 세 개의 혜성을 발견했는데 갈릴레이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혜성이 착시현상에서 비롯되었고 땅에서 나오는 증기가 반사되어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 간의 논쟁은 그 후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며, 예수회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적이 되어 갔다. 이때 갈릴레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울 5세가 1623년에 사망하자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었던 우르바누스 8세가 새 교황으로 임명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태양계에 대한 정확한 책을 쓰겠다고 밝히자 교황은 잘 해보라고 격려까지 했다. 갈릴레이가 교황과의 약속으로 저술한 책이 1632년 2월에 발간된 『우주의 커다란 두 가지 체계에 관한 대화』이다. 이 책을 찍은 것이 갈릴레이로서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칭찬을 받을 줄 알았으나 교황청에서는 그의 책에 대해 판매 금지를 시키고 책을 압수하더니 갈릴레이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 책에서 우회적으로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가설들이 옛 가설들보다 현실을 더 잘 설명해 준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성스러운 사람들이 새 가설들을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적었다. 그것은 교황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갈릴레이의 선의의 표현이었으나 문제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그 대목을 갈릴레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신성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이성의 무능함을 꼬집었는데 바로 그 무능한 자가 교황 자신을 빗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르바누스 8세는 굉장히 진노했고 갈릴레이가 죽은 후에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목성과 금성, 수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을 발견한 갈릴레이가 모든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 발견으로 박해를 받기는커녕 1611년에 교황 바울 5세를 알현하고 예수회 회의에서 표창까지 받는다. 이때 이미 교황청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론은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이미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는 지동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세 군데를 바꾸면 금서 목록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첨부했고, 1620년에 이렇게 정정된 이론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학자인 갈릴레이는 1616년에도 교황을 접견했다. 교황은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대해 반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레이가 자연 현상을 엄밀하게 증명하는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절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유지했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여러 해를 거쳐 증명도 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자 학자들이 그에게 증거를 대라고 다그쳤다. 결국 갈릴레이는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1633년의 재판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 열린 것이다. 그때의 재판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갈릴레이가 유죄가 된 것은 불복종이라는 죄목에 따른 것이지 이단이라는 죄목 때문은 아니었다. 갈릴레이는 추후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진실이라고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으나 천문학적, 수학적 연구로서의 가정을 논의하고 부연하는 것까지 금지 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갈릴레이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갈릴레이가 재판 기간 중 감옥에 있었고 고문을 받았다는 말은 다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갈릴레이는 교황청에 의해 소환되자 처음에는 생탱쥐 성에 있는 종교재판소 감옥 대신 토스카나 대사관이 자리잡은 메디치 관에서 묵었다. 물론 첫 번째 심문을 받은 뒤에 수감되었지만 그는 독방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주거를 할당받은 데다가 집사와 하인이 각각 한 명씩 딸려 있었다. 법정은 갈릴레이에게 형식적인 금고형을 선고했으며, 놀랍게도 감옥에 들어가지도 않고 재판이 끝나자마자 로마를 떠났다.
갈릴레이의 재판 결과가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변질된 것은 갈릴레이와 같은 대학자가 이단 심문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가 진정으로 사면된 것은 그가 교황과 잘 알고 있으며 힘이 있는 추기경과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원래 이단 심문에 걸리면 그 어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나 대학자들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가 근신이라는 처분을 받은 것은 교황청에서조차 이미 천동설은 폐기되어야 할 학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이 불공정했고 그가 비록 교황청의 이단 심문 재판에 순종하는 서약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