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역사의 건널목
안정효 지음 | 들녘
신화와 역사의 건널목
- 헐리우드 키드의 20세기 영화 그리고 문학과 역사 -
안정효 지음
들녘/2002년 6월/327쪽/12,000원
트로이아 전쟁
초기 역사는 정복과 전쟁의 기록이고, 문학에서는 정복자의 전설이 영웅 서사시와 영웅소설의 틀을 마련하고 갖춘다. 『전설의 시대』에서 우리는 4세기경 민족 대이동 시대의 영웅을 중심으로 한 전설이 음유시인에 의해 전승되고 전 유럽에 퍼져 영웅 서사시로 정착된 작품인 『니벨룽겐의 노래』를 이미 살펴보았는데 설화와 역사 그리고 때로는 신화까지 뒤엉킨 이러한 문학 전통은 영웅의 사적을 읊었던 기나긴 24장 구조의 서사시는 물론이요, 캠벨의 짧은 영웅시 「발트해의 전투」, 그리고 『잔 다르끄』, 『르 씨드』, 『장 크리스또프』와 같은 영웅소설로 이어진다. 따라서 초기 역사 노릇을 하는 서사 문학에서부터 역사 영화를 살펴야 하는데 서사시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리스의 호메로스이다.
그리스의 문학적 유산으로서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신들의 이야기(신화)와 서사시뿐 아니라 희곡을 손꼽아야 한다. 우선 시를 볼 것 같으면 고대 그리스의 시문학은 혼자서 읽으며 즐기는 예술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판소리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신화라든가 영웅호걸의 일대기를 전해 주는 형태의 집단오락적 성격이 강했다. 이런 전통은 중세로 내려와 봉건 영주의 식객 노릇을 하거나 여기저기 방랑하며 각설이 품바처럼 얘기노래를 불러 주던 음유시인으로 이어진다.
그리스 서사시의 대표작인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역시 방랑시인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영웅 전설을 호메로스가 수집, 정리하여 24장으로 이루어진 형식으로 엮어 놓은 것이다. 셰익스피어나 마찬가지로 호메로스도 실존했던 한 사람이냐 아니면 여러 명이었느냐 하는 논란이 오고가기는 하지만 어쨌든 「일리아스」는 “일리온(트로이아의 그리스 이름)의 노래”라는 뜻으로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오뒷세우스 같은 장군들이 등장하여 파란만장한 얘기를 엮어 내고, 특히 오뒷세우스의 목마 작전은 더없이 좋은 영화거리이다.
『일리아스』를 소재로 삼은 대표적인 영화로는 1955년 로버트 와이즈 감독이 1950년대 사극 제작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치네치타로 원정을 가서 촬영한 <트로이의 헬렌>이 있다. 트로이아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파리스가 세계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유부녀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고 바람난 헬레네가 남편 메넬라오스와 조국을 버리고는 파리스와 함께 도망쳐 버리자 아카이아 연합군이 트로이아를 공격해서 벌어진 전쟁이 『일리아스』의 기둥 줄거리를 이룬다. 오랜 전쟁에 지친 연합군이 후퇴하는 체하며 바닷가에 남겨 놓은 거대한 목마를 트로이아 사람들이 전리품 삼아 성 안으로 끌어들이고, 목마 속에 숨은 오뒷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이 트로이아를 함락시키는 대목이 전설의 핵심이다.
아무리 희대의 미인이라고는 하지만 헬레네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참으로 엄청난 전쟁이 벌어졌다니까 얼핏 들으면 무척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겠지만 역사가 C. 노드코트 파킨슨이 쓴 『동양과 서양』을 읽어 보면 트로이아 전쟁은 도자기 수출 문제를 둘러싼 지중해 지역의 패권다툼, 그러니까 무역 전쟁이었다고 한다. 도자기가 미녀로 둔갑하는 결과를 가져 온 <트로이의 헬렌> 얘기에서도 우리는 전설이 역사를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트로이아의 목마>는 『일리아스』를 1962년에 죠르지오 페로니가 스티브 리브스를 주연시켜 만든 이탈리아 영화인데 미국 배우 존 드루 배리모어가 오뒷세우스로 맹활약을 한다. 스티브 리브스는 다음 해 비슷한 주제를 담은 <트로이아 전쟁>에도 출연했는데 이탈리아 사극의 전성기에 신화와 역사가 얼마나 많이 화면으로 옮아갔는지 쉽게 짐작이 가게 만드는 사실이다. 아마도 1950~60년대의 관객이라면 이탈리아 사극이 어찌나 많이 서울의 여러 극장에 내걸렸었는지 지금은 제목과 내용이 너무 헷갈려 잘 기억이 나지도 않으리라는 짐작이고, 그래서 장 뤽 고다르의 <경멸> 도입부에서 폐허처럼 쓸쓸한 이탈리아 영화사 치네치타의 텅 빈 마당에 서서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자(잭 팰런스)가 “어제만 해도 이곳에는 왕들이 왔다갔다 했었는데.”라고 조소하는 장면이 사양길에 접어든 당시 유럽 영화의 현장을 꼬집는 듯 통렬하다.
‘영화의 도시’라는 뜻인 치네치타는 정권 홍보를 위한 가장 훌륭한 무기가 영화라고 생각한 베니또 무쏠리니가 1932년 베네치아 영화제를 설립하고 3년 후 영화학교의 문을 연 다음 착수한 주요 문화 사업이었다. 475일간의 공사 과정을 거쳐 1937년 4월 28일 문을 연 치네치타에서는 2년 사이에 60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1940년대 초에는 해마다 무려 1백 편 가량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이 이곳을 폭격하여 파괴함으로써 헐리우드는 독일과 더불어 이탈리아의 영화 산업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길거리로 나가 영화를 촬영하면서 신사실주의 시대를 시작한다.
우리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던 당시 치네치타는 부활에 성공하지만 미국의 자본에 잠식당하고 1960년부터 1965년까지 <왕자의 검>, <쿠오 바디스>, <클레오파트라>, <벤허>, <무기여 잘 있거라>, <로마의 휴일>, <로마 제국의 멸망>, <전쟁과 평화> 등 27편의 헐리우드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그리고 <경멸>이 제작되었던 1960년대 후반기에 텔레비전과 경쟁하기 위해 영화의 제작 규모를 대형화하던 헐리우드 자본이 물러가자 치네치타는 부채에 시달리며 암흑기를 맞았고, 1980년대에 와서야 <마지막 황제>나 <장미의 이름>과 같은 영화의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재기하지만 지금은 영화가 아니라 텔레비전 제작현장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실정이다.
치네치타가 이렇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나가는 동안 1953년에 이탈리아에서 만든 <세 여인의 사랑>은 본디 세 시간짜리 영화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을 했다고 믿어지는 세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트로이아의 헬레네 역은 몇 년 전 <삼손과 들릴라>에서 들리라 역을 맡았던 헤디 라마르에게로 돌아갔다. ‘들릴라’는 일본식 표기 ‘데릴라’를 성경의 표기로 바꿔놓은 것인데 자신의 노래가 없이도 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해 온 조영남이 불렀던 서양 노래에 나오는 이름 ‘딜라일라’는 ‘들릴라’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삼손과 들릴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몇 년 후에 제작되었는데 들릴라 역을 맡았던 헤디 라마르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인상과는 달리 무기 개발에도 관심이 많았던 여배우로서 전쟁 중에 유도 어뢰를 고안하여 특허까지 받은 적이 있다.
해적들의 잔치
<바다의 정복자>에서 지미 보이는 처음 만난 전임 총독의 딸에게 “국왕 폐하를 위해 스페인 잔당을 죽이며 더러운 일을 하는 해적이요.”라고 당당하게 자기 소개를 하는가 하면 해적영화 분야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진홍의 도적>에서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해적 선장 발로가 아예 극장 안의 관객을 향해 이렇게 큰소리를 친다. “이리들 모이시오, 신사숙녀 여러분, 이리들 모여. 여러분은 까마득한 옛날(18세기) 진홍의 도적에게 납치되어 마지막 항해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해적의 나라 해적의 바다에서 해적에 관해 아무 질문도 하지 말고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됩니다. (잠시 후에) 그래도 믿기 어려우면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절반만 믿으십시오.”
곡마단에서 함께 일했던 버트 랭카스터와 니크 크라바트가 공연하며 <쾌걸 다르도>에서처럼 온갖 곡예 솜씨를 보이는 영화답게 이런 식으로 시작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무계한 즐거움을 한없이 베푼다. 역병이 휩쓸고 간 유령선으로 위장하여 영국 해군의 전함을 포획하고, 전함에 실린 무기를 노획하여 반란군에게 팔아 넘기고, 돈을 더 준다면 반란 세력이 아니라 당국에 무기를 되팔겠다고 나서기도 하는가 하면 반역죄로 투옥된 엘 리브레를 구출해 주고 돈을 받은 다음 다시 그를 당국에 팔아넘겨 또 돈을 벌겠다는 등 도둑답게 화려한 야망을 펼치던 해적이 혁명가 엘 리브레의 딸에게 반해서 민중 봉기에 합세한다는 빤하디빤한 판박이 내용이지만 “배에 태운 여자를 고스란히 내버려둔다는 것은 해적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식의 장난스러운 논리, 귀족으로 변장하고 적지로 침투하여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핌퍼넬’식 상황, 종횡무진 군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벌이는 통쾌무비 난장판 결투, 선상반란이라는 뒤집기 양념, 거기에다 미래의 개틀링 기관총에 잠수함과 비행선은 물론이요, 007식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민중의 ‘동학란’은 헐리우드 키드 세대를 열광시키고도 남았다.
해적영화는 뭐니뭐니 해도 로빈 후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법자의 자유분방한 삶”이라는 환상과 착각으로 관객을 모은다. 자유분방한 듯 싶으면서도 항상 위험이 뒤따르는 불확실성의 모험이 낭만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바다의 정복자> 마지막 장면에서 지미 보이의 심복과 헨리 모건이 낙조가 아름다운 바다를 둘러보며 나누는 대화가 그런 해석의 대표적인 예이다. “거추장스러운 예복에 가발을 쓰고 살아야 하는 자마이카에는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저 바다 얼마나 넓고 시원스러운가요. 온세상의 보물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내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영화에서 재현된 해적은 <황금배>에서 산타 로자가 상상했던 헨리 모건처럼 용감하고 멋진 사나이여서 형틀에 묶여 고문을 당하면서도 호탕하게 웃어 가며 농담을 계속하고, 현대적인 시각으로는 해적질이 정의인지 어쩐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영화 속의 해적이라면 의사였다가 마지못해 해적이 된 피터 블러드, 그리고 무성영화에서도 이미 귀족이었다가 불한당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해적이 된 <검은 해적> 그리고 18세기에 해적이 된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프릿츠 랑의 <월야의 함대>에서처럼 대부분 선량한 인물이었다가 과거에 무슨 모함을 받았던가 해서 억지로 악인이 되었다는 설정이 보통이고, 따라서 최후의 승리를 해적 주인공이 거둔다는 수순을 밟는다.
실존 인물이건 아니건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배경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 해적영화에서는 아예 진실성을 접어두고 봐도 된다는 편안함과 더불어 경쾌한 칼소리와 율동 또한 매력으로 꼽힌다. 다른 검술영화와는 달리 무겁고 육중하고 둔한 검이 아니라 날렵한 레이피어 칼이 주무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적영화에서 빠른 몸놀림의 결투 장면은 안무를 받은 춤과 같다. 거기다가 화려한 의상에 남해의 이국적인 야자수 풍경, 넓고 넓은 바다에서 두 척의 배가 접근하여 모든 포문을 열고 일제사격을 퍼붓는 호탕한 해전, 망망대해의 푸른 하늘과 성난 폭풍, 그리고 틀림없이 끼어드는 미녀와의 낭만적인 사랑, 바로 이런 즐거움 때문에 지금의 공상과학이나 대량학살 주제만큼이나 한때는 해양활극이 서양 영화의 큰 흐름을 이루며 인기를 누렸다. 해적물이 참으로 많고도 많았던 시절, <진홍의 도적>이나 <바다의 정복자>처럼 카리브해를 무대로 삼았던 작품을 찾아보면 아예 제목이 <카리브해>였던 18세기 해적 토벌 영화, 17세기 해적 선장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유혈선>, 그리고 역시 지명을 제목으로 삼은 <스페니시 메인>이 있다. 무대를 유럽과 지중해로 옮겨 보면 해적왕 드레이크에게 무적함대가 궤멸한 줄도 모르고 낙오된 에스파냐 배들이 영국의 시골 마을을 점령하는 내용의 <악마선>, 나폴리의 백성이 폭군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시끄러운 활극 <카프리의 해적>,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을 배경에 깐 <해적의 왕자>, 바바리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에서 준동하던 해적을 주인공으로 <트리폴리의 해적>과 바바리 해적을 무찔러 미 해병 역사상 손꼽히는 승전으로 알려진 1805년의 트리폴리 전투를 담은 <풍운의 요새>, 해적의 소굴로 침투하는 18세기 영국 군인의 활약상을 그린 <마다가스칼의 해적> 그리고 같은 내용을 다시 영화로 만든 <폐하의 해적>이 나왔다.
해적왕 털보와 해적 키드까지 북아메리카로 진출했으니 미국도 이미 식민지 시절부터 해적의 손아귀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했고 그래서 대서양 연안 역시 해적영화의 무대가 된다. <몬트레이의 해적>은 1880년대 캘리포니아를 수중에 넣으려던 멕시코와의 투쟁을 다루었으며, <해적의 연인>은 뉴올리언스의 여가수가 투옥된 해적 애인을 구해내는 내용이고, <철갑선>에서는 19세기 초 미국의 상선단이 해적들과 대결한다.
해적영화란 황당무계한 과장이 많이 본디 희극적인 요소를 지니지만 본격적인 해적 희극도 심심치 않게 나왔으니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쭈그렁 얼굴의 명배우 월터 매타우가 주연한 프랑스와 튜니시아 합작 영화 <해적>이 그런 예가 되겠다. 줄거리조차 별로 없으면서도 요란하게 재미있다는 사실 자체가 해적영화의 특징을 잘 꼬집는다. <노랑수염>은 물론 제목부터가 “해적왕 털보”를 겨냥한 영화이고, <털보 대소동>은 카지노로 만들려 집을 빼앗으려는 범죄자들로부터 자손들을 보호해 주는 털보의 착한 유령 얘기이고, 장래 희망이 해적인 주인공이 관리의 부패상을 폭로하는 도날드 오코너의 <백골기>는 해적 사회에 대한 풍자이며, <백주의 유령>은 대표적인 실패작 희극인 반면에 바브 호프와 버지니아 메이요가 해적으로부터 정신없이 도망다녀야 하는 <공주와 해적>은 본격적인 성공작 희극영화였다.
짐 호킨스와 롱 존 실버
헐리우드 키드의 성장기는 전쟁으로 인해 유엔군이 진주하면서(사실은 미국 문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서양 문화’가 처음 대규모로 이 나라에 유입되던 무렵이었고, 그래서 영화에 자주 나오는 ‘별거’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주치의’ 같은 개념이나 단어가 아직 우리들의 귀에 퍽 생소했다. 하지만 외국 삽화를 그대로 베껴 넣은 아동 소설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만화, 그리고 변두리 동네 극장 화면에서 필름이 너무 낡아 비가 쏟아지는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여러 서양 이름을 잘 알았는데 “흑기사” 아이반호와 “삼총사”의 친구 다르따냥, “괴도‘ 아르센 루뺑, 소년 탐정단의 에밀이 그런 주인공이었고, 사내아이들이라면 짐 호킨스와 롱 존 실버가 누구인지도 대부분 잘 알았다.
마지막 두 사람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린이들, 특히 사내아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문학작품 가운데 하나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의 주인공이다. 스코틀랜드 작가 스티븐슨은 평생 폐결핵에 시달릴 만큼 병약했으면서도 널리 항해를 하며 모험에 찬 삶을 보냈으며, 『신 천일야화』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보물섬』의 대단한 성공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었다. 아들이 그려 놓은 섬 지도에 장난삼아 여기저기 지명을 적어 넣다가 착상이 떠올라 1881년 9월부터 잡지 「청년(Young Folks)」에 『바다의 요리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가 앞에 제1편 『노해적』을 붙이고 전 6편으로 엮어 1883년 단행본으로 출판한 소설이 『보물섬』이다. 짐 호킨스 소년이 어머니의 여관에 투숙한 늙은 해적 빌리 본스에게서 얻은 보물섬 지도를 가지고 해적이 숨겨둔 보물을 찾아 항해를 떠나는 얘기가 환상을 자극하고, 배에 탄 선원 대부분이 사실은 평범한 뱃사람이 아니라 보물을 찾아낸 다음 가로채려는 해적단이어서 그들의 흉악한 반란 음모가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보물섬』은 영화로도 더할 나위 없는 소재여서 무성영화로 네 번이나 제작되었고, 1934년 영화에서는 훗날 서부극 <악한 바스콤>으로 우리 나라에 널리 알려졌으며, 참으로 지저분하게 생긴 월레스 비어리가 앵무새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외다리 롱 존 실버 역을 맡았으며, 아역배우로 유명했던 재키 쿠퍼가 출연했다. 웰레스 비어리의 롱 존 실버 연기도 유명했지만 1950년 월트 디즈니의 <보물섬>에 발탁된 무대 출신 영구 배우 로버트 뉴턴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희극적인 의미에서 롱 존 실버와 동의어로 통한다. 짝짝이 퉁방울눈에 지저분할 정도로 탁한 목소리, 큼직한 주먹코에 전반적으로 못생긴 얼굴, 그리고 술이 모자라는 듯 걸핏하면 입맛을 다시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55년에도 역시 바이런 해스킨 감독의 <롱 존 실버>에서 주연을 맡았고, 이듬해 이 영화는 30분짜리 26회분의 오스트렐리아 텔레비전 연속물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