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규의 우리고향산책
김선규 지음 | 생각의나무
김선규의 우리고향산책
김선규 지음․사진
생각의나무/2002년 5월/278쪽/17,000원
경남 남해군 남편 가천마을 - 해안 절벽에 걸린 마을
한반도 남쪽 끝자락은 봄이 한창이다. 양지 바른 논두렁에서 아직은 한가한 아낙들이 아기 손만큼 올라온 냉이를 캐고 있고, 고른 봄볕이 고인 들녘에는 시금치와 마늘 등 풋것들이 이미 움을 틔우고 있다. 질긴 겨울의 꼬리를 자르고 봄이 한껏 기지개를 피우는 남녘의 해안 구석구석은 그야말로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남해는 통영과 여수로 이어진 한려수도의 중심지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하는 남해대교를 지나 남쪽으로 갈수록 봄빛은 더욱 파래진다. 풋내가 가득한 봄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섬 끝 벼랑 굽잇길, 그 아래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그림 같은 다도해를 품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아래를 굽어보니 벼랑에 마을이 하나 걸려 있다. 남해군 남면 가천마을이다. 바닷가 산비탈에 붙은 동네가 마치 절벽에 붙은 제비집 같다. 파도가 바로 들이칠 것 같은 절벽 바로 위로부터 한 계단식 올라가는 층층 다랑이 논밭이 산중턱까지 100여 층, 그 틈틈이 작은 집들이 움을 파고 들어서 있다. 논밭이 하도 작아 트랙터로 농사지을 염도 못 내고 소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곳. 그곳에서 밭갈이하기 위해 오랜만에 나온 소는 늙은 농부의 호령에도 아랑곳없이 딴청이다. “아따, 이 동네 좀 보소. 여기도 사람이 사는가 봅네.” “우얄라꼬 이런 곳에 터를 잡았는기요. 바닷가 산비탈도 명당인기요.” 남해 해안도로를 따라 봄마중 나온 상춘객들이 가천마을을 바라보곤 입을 짝 벌리고 한 마디씩 한다.
망망대해와 맞닿아 있는 가천마을은 거센 파도와 암반으로 둘러싸여 조각배 한 척 대기도 힘들어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다. 그래서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린 주민들은 바다로 내리지르는 소울산과 응봉산 비탈을 깎고 주먹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어 조각밭을 일궜다. 바다부터 산중턱까지 층층이 놓인 다랑이 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위 남해 사람의 ‘깡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깡치란 평지가 많은 남해 사람들이 불가능할 것 같은 산비탈 절벽에 돌담을 쌓아 논과 밭을 일군 데서 나온 말이다. 그 깡치 정신이 가천마을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대를 한번 보이소, 마. 깡이 안 세면 살 수 없는 기라.” 지게에 마늘을 한 짐 지고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던 한 주민의 말이다. 논과 밭은 위에서부터 고루 물을 댈 수 있게 수로가 각 논으로 연결되었고, 한 뼘이라도 더 땅을 넓히기 위해 축대는 어느 것 하나 안으로 기운 것 없이 바짝 곧추 서 있다. 돌축을 따라 유연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논 모양새가 다양하다.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논이라 하여 삿갓배미라 부르는 달갱이 논부터 봇물이 실한 세 마지기 가웃 논도 있다.
가천마을에는 계단식 다랑이 논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버섯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그 주인공이다. 그 쭉 뻗어 오른 위용이 뭇 남성을 압도할 만큼 대단하다. 바로 가천 암수바위(일명 미륵바위)다. “깊은 땅 속에 묻혀 있던 미륵이 일어나면서부터 마을이 번창했다는 기라. 그 말대로 마 한때는 7백 명도 넘게 살지 않았능교.” 마을 이장 권정도(56) 씨가 구수한 입담으로 암수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들려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이 고을 원님이었던 조광징의 꿈에 백발을 휘날리며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사람과 짐승의 통행이 잦아 일신이 불편해 견디기가 어려우니 나를 일으켜주면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고을 원님이 아전을 데리고 가천으로 가보니 꿈에 본 것과 똑같은 지세가 있어 땅을 파자 남자의 성기를 닮은 형상인 높이 5.8미터 거대한 수바위와 아기를 밴 배부른 여인의 형상인 높이 3.9미터 암바위가 나왔다. 원님은 암바위는 누운 그대로 두고 수바위는 일으켜 세워 바위 이름을 미륵이라 붙이고 논 다섯 마지기를 제답으로 바쳐 해마다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 후 오늘날까지 마을 사람들은 미륵이 발견된 음력 10월 23일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빌기 위해 이 풍속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마, 한때는 미륵바위에 소원 빌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이 귀찮을 정도였는 기라.” 멀리 부산이나 대구에서 아들을 못 낳는 여자들이 소문을 듣고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러 대개 오며 개중에는 무당을 데리고 와서 아예 푸닥거리까지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권 이장이 바위의 전설을 들려주는 동안 미륵바위를 바라보는 여행객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바라보는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아저씨, 아예 넋을 빼고 수바위를 바라보는 아주머니도 있다.
가천 암수바위에서 더 내려가면 벼랑이다. 벼랑과 맞닿은 다랑이 논배미에 서니 오랜 세월을 대물림하며 살았던 가천 주민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직접 피부에 닿는 듯하다. 풍요로운 바다가 코앞에 있다지만 가천 주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었을 뿐이다. 가파른 벼랑이라 배 한 척 댈 수 없고, 배를 댈 수 없는 어촌이니 살기가 어려운 것은 자명한 일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천마을을 바라보던 관광객들의 표정이 이내 감동의 눈빛으로 바뀐다. 봄빛으로 가득한 가천마을의 은빛 바다와 산비탈의 푸른빛이 여행객들의 얼굴에도 옮겨지는 듯하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중대마을 - 빨치산들의 아픔을 간직한 대나무가 있는 마을
백두대간은 남으로 달려오다 남해를 내려다보고 섬진강을 토해냈다. 그 푸른 혈맥의 끝자락에서 지리산은 어느 산줄기보다 깊은 골짜기를 거느리며 웅크리듯 앉아 있다. 지리산의 수많은 능선과 골짜기 가운데 가장 배어난 풍수지를 뽑는다면 단연 문수계곡이다. 이곳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비롯, 숱한 고승들의 불도를 더한 생문수도량의 영지이기도 하다. 특히 문수라는 이름은 석가여래의 왼편에서 지혜를 맡고 있는 보살의 산세란 의미에서 온 것으로 땅에 文殊(문수)라는 자격을 주었으니 그 기품의 깊이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문수골의 초입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서 시작한다. 마을 뒤편 저수지를 지나면 지리산 형제봉과 왕시루봉이 이루어낸 장중한 계곡이 30여 리다. 계곡은 질매제를 넘어 노고단까지 이어진다. 그 천길 낭떠러지 같은 벼랑길을 마음 졸이며 오르다 보면 왕시루봉 쪽에 지붕 9개가 옹기종기 다랑이 논 위에 얹어져 있는 신기한 광경이 발길을 붙잡는다. 바로 문수리 중대마을이다. 영암에서 이주한 장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영암촌이라 불렸다가 문수리와 계곡 끝 마을 밤재와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고 대나무가 많이 난다고 해서 이제는 중대마을이라고 불린다.
지난 여름 게릴라 호우로 망가진 계곡 다리를 아슬아슬 건너다 이곳에서 5대째 살고 있다는 장진현(64) 씨를 처음 만났다. 지게에 짚단을 가득 지고 다랑이 논 굴곡을 곡예하듯 걸어가는 모습이 시간이 흐름을 멈춘 듯 그림과 같이 다가온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삶의 고단함에 불과하다. 지형상 농기계를 사용하지 못하고 모든 농사일을 자신들의 근력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씨는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는 지리산의 넉넉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 이방인을 “쉬어가라.”며 선뜻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장씨 집 뒤뜰에는 마을 이름에 걸맞게 수십 년 된 대나무가 하늘을 가렸다. “나가 어릴 적엔 말도 못하게 대나무가 굴거부렀어. 근데 여순반란사건이 나면서 빨치산 잡는다고 몽땅 불을 질러버렸지. 긍개 지금 대가 굵게 자라지 못해.”
1949년 이곳에서는 빨치산 소탕을 위해 ‘거점분쇄작전’이란 토벌작전을 벌였다. 굵은 대나무가 불에 타들어 사라져갔으며 빨치산도 이념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대나무는 다시 자라났지만 예전의 곧고 푸른 기상은 실종된 것이다. 여순사건이 발생하면서 1948년 10월 토지면 문수리 일대는 지리산을 오르내리는 빨치산들의 출입통로로 이용됐다.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패잔병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너 이곳 문수계곡을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1955년 5월까지 기나긴 7년간의 빨치산 투쟁은 막이 올랐다.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치열한 반격…. 정작 힘들었던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지리산의 민초들이었다. 이념에 의한 전장은 결국 지리산 자락의 오지마을을 모조리 소개하거나 파괴해 버렸다. 36가구가 살고 있었던 중대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삼남(83) 할머니에게 당시 상황을 묻자 “왜 나 잡아가려고 물어보는 거요.”라며 몸서리를 친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조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당시의 악몽이 생생한 모양이다. “말로는 못해. 몸서리나요 몸서리. 대밭이고 집이고 다 불을 질러부렀어, 기가 막히제.”
2만 명의 고귀한 생명들을 앗아간 7년간의 이념 대립이 종말을 고하고 중대마을 주민들도 하나 둘씩 돌아왔다. 그러나 세간밑천은 물론 온 동네를 뒤덮던 대밭조차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리 영감이 다랑이 논을 일구며 죽도록 고생했구먼.” 조 할머니의 회상에서 전쟁 세대가 겪은 파괴와 복구의 아픈 고통이 전해왔다. 다랑이 논처럼 얽히고 설킨 조 할머니의 얼굴의 잔주름이 마치 지나간 세월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여 마음이 쓰라려왔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웅도리 - 바다 위의 소달구지 행렬
소의 밭갈이와 우마차가 무형문화재만큼이나 보기 드물어진 요즘 소달구지를 이동수단으로 살아가는 풋풋한 어촌마을이 있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웅도리 웅도. 세계가 하루 생활권으로 접어든 21세기에 느릿느릿한 소달구지를 기계에 대신하여 살아가는 ‘소달구지 어촌’을 찾아가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정겹다.
웅도는 충남 서산시와 태안군 사이의 바다인 가로림만 동쪽에 들어앉았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한 번은 육지가 됐다가 다시 섬이 되는 곳이다. 갯벌 위로 놓여 있는 폭 3미터, 길이 250미터의 시멘트길이 웅도를 썰물 때마다 육지와 이어준다. 경기도 화성의 제부도가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웅도 바닷길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운치가 있다. 웅도리(웅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곰이 웅크리고 앉은 형태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55가구 19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다. 탁 트인 해안의 갯벌에는 바닷게들이 육지 사람을 신기한 듯 곁눈질하며 쫓아온다. 석화(굴)와 바지락도 지천에 널려 있다. 낙지 구멍도 곳곳에 보인다.
마을과 3킬로미터 떨어진 갯벌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어장이 있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함께 채취한 갯것들을 공동으로 판매한다. 물론 수익은 공동분배다. 바닷길이 열흘 만에 열려 일을 시작한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찾아 나선 웅도의 새벽 날씨는 고약했다. 사람을 날려버릴 듯한 비바람에 과연 갯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사람 모습을 기다린 지 한 시간여 만에 느릿느릿한 우마차의 삐거덕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십여 대의 우마차 행렬이 꼬리를 물고 바닷가에 나타났다. “날도 구질구질한데 새벽에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시유.” 미리 연락을 받은 조산호(55) 이장이 우마차에서 내려 인사말을 건넨다. “오랜만에 물길이 열려 구진 날씨에도 주민들이 많이 나왔시유.” 주민들은 세찬 비바람을 막기 위해 두툼한 옷을 껴입고 그 위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비옷을 걸쳤다. 이장과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마을 주민의 모습이 저만치 멀어져간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 한 켤레를 이쪽으로 던져주곤 이장도 서둘러 바다로 향한다. 멀리서 먼동이 소달구지를 뒤쫓아 따라오고 있다. 시간은 오래된 기록영화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공동 어장으로 향하는 길은 뻘밭으로 마차 바퀴가 빠지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 경운기를 이용해도 충분히 오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민들의 생각은 확고하다. “속도가 좀 느리긴 해도 소달구지가 최고지유.” “경운기나 트랙터를 사용하면 기름이 흘러나와 어장을 망칠 수 있구먼유.” 초등학생인 딸아이 재롱 맛에 살아간다는 김문규(51) 씨의 말이다. 한때는 마을 젊은이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다’며 경운기를 채취작업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뻘에 흐른 기름이 어장을 죽이는 것을 보고 다시 소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을 갯벌을 지키기 위해 경운기를 버렸다. 바닷물 염분에 젖어 기계가 잦은 고장이 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는 세 가구당 두 마리꼴로 소를 키우고 있다.
“소는 한 식구여유. 조그만 훈련시켜도 사람 말을 잘 알아듣지유.” 어촌계장 윤병일(50) 씨의 말이다. 사실 대부분이 고령의 나이인 마을 주민들에겐 낯선 기계보다 말 잘 듣는 소가 훨씬 편리하다. “소가 심성이 나쁘면 우마차 못해요. 첫 새끼 배었을 때부터 우마차를 끌게 하지유. 근데 둘째 새끼 가지면 소들도 귀신이 되어 일 안 해유. 그럼 할 수 없이 퇴출시키지유.”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어촌계장의 입에서 퇴출이란 말이 나와 웃음을 자아낸다.
바위마다 빼곡히 붙어 있는 석화에 물이 찰랑거릴 만큼 차오르자 한나절 내내 바지락 밭에서 일을 하던 주민들이 비로소 고된 허리를 펴고 돌아갈 준비를 한다. 멀거니 서서 기다리던 소가 바지락 더미를 안고 오는 주인을 반기듯 고개를 젓는다. 뻘에 난 달구지 신작로를 타고 오는 주민들의 표정들이 모두들 흐뭇하다.
그들을 뒤쫓아 나오는데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뻘에서 소달구지를 따라 잡는 일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어서 타유, 여기선 우마차 아니면 꼼짝을 못해유.” 허둥대는 모습을 보다 못한 김효곤(67) 씨가 소 코뚜레를 움켜쥐고 마차를 세워 그 위에 앉게 한다. 갯벌 언덕을 넘어서며 우마차가 덜컹거리자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바지락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장난스레 “아이구! 내 조개 다 깨져유.”라며 소리치자 소달구지 행렬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난다.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 귀여리, 검천리 - 물안개 피어나는 이 땅의 아침
강물은 인간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물이 일으키는 잔잔한 파장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느꼈던 평안한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은 세상사의 순리를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예로부터 가장 착한 것은 물을 닮는다고 했을까.
새벽 6시, 남한강 자락의 마을에 들어서자 여명 속에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된바람에 물살이 떨리고 강변에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먹이를 찾는 물새 떼의 몸놀림이 분주하다. 분원리에 이르자 물안개는 가히 선경의 세계를 연출한다. 전날 이곳이 흥청대던 관광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개는 모든 것을 감싸안고서 고즈넉한 신비를 만든다. 조선시대 관아 도자기를 굽던 도요지가 있던 이곳은 김장철에 서울 사람을 먹여 살리는 분원 배추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댐 건설로 팔당호가 논밭을 집어삼키며 농사는 끝났다. 대신 토박이들 집에 들어선 수많은 요릿집과 카페, 그 사이로 끝없이 피어나는 물안개가 이곳의 새로운 풍물이 됐다.
오전 8시, 안개를 헤치고 호숫가로 나가니 오리들만 유유히 떠다닌다. 호수 가운데 수몰을 면한 텃밭이 마치 작은 섬처럼 보인다. 안개에 휩싸인 강가를 따라 귀여리로 들어섰다. 귀여리는 분원리보다 큰 마을이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문인 재사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이들이 벼슬에서 물러나면 이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상전벽해’의 분원리와 달리 고향의 풍경을 지키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아침 햇살이 호수를 비치자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안개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서 마을 앞 호수에 ‘상수원 보호구역’이라는 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는 강과 산이 구분이 된다. 부지런한 농부들의 모습도 보인다. 세상만물이 마법에서 깨어난 듯 하나 둘 형체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