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지배하는 세상
마틴 바인만 지음 | 해바라기
손이 지배하는 세상
마틴 바인만 엮음/박규호 옮김
해바라기/2002년 6월/511쪽/18,000원
1. 왼손과 오른손
인간을 다른 생명체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장의 사용, 언어, 문화, 감정이입 능력, 자아성찰 능력 등 수많은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특성은 무엇보다도 유전적인 오른손잡이 성향이다. 이제가지의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는 한결같이 전체 인간의 90%는 오른손잡이였으며, 다른 어떤 동물들에게도 이런 정도의 형태적 비대칭이 나타난 예는 없다. 손 사용의 편중성은 역사적, 문화적인 차원과 관련이 있다. 모든 문화권에서 오른손이 선하고, 강하고, 활동적이고, 깨끗하고, 고귀하고, 성스럽고, 남자다운 손으로 여겨진 반면 왼손은 모든 측면에서 그 반대였다.
그렇다면 손의 편중된 사용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다른 심리학적 가설들이 그렇듯 흔히 말하는 왼손잡이나 오른손잡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손의 편중된 사용은 손의 선호도와 능력, 속도와 정확도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능력과 관련된 손의 편중성에 대한 기능적 정의는 대개 정확도를 기초로 하고 있다. 손의 편중된 사용 문제는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실행기관으로서의 손보다는 신경조직, 즉 뇌의 특성과 관련해 생각하는 측면이 많다. 어떤 손이 순간적으로 더 빠르게 어떤 일을 처리한다거나 또는 장기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능력을 보인다거나 하는 것 모두 뇌의 기능성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다.
일련의 실험을 통해 살펴본 결과 손의 편중된 사용은(선호도를 기준으로 측정했을 때)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학습과 경험, 즉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반복을 통해 익숙해지고 효율적으로 된 일상적 행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떤 손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하고 사고하고 계획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그 동안 가장 효과적이었던 손을 즉각적으로 사용한다. 손을 많이 사용하는 다른 동물의 경우 이와 같은 일반적인 선호는 관찰되지 않는다. 동물들을 관찰해 보면 선호도는 매 순간의 상황에 크게 종속되어 있다. 상황을 바꾸어 주면 손의 선호도 역시 바뀌는 것이다.
이미 100년 전부터 한쪽 뇌가 손상된 환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찰을 토대로 양쪽 뇌의 기능적 차이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이 발표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좌뇌가 손상되면 언어 영역에, 우뇌가 손상되면 방향 감각에 장애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쪽 뇌 기능과 관련된 이런 이분법적 분류 경향은 이분법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이분법적 해석은 실제로 확보된 학문적 데이터들의 검증 능력 한계를 넘어서 우리 자신의 이원론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말하지만 우리 가슴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영혼을 두뇌 영역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이분법 해석은 우리 뇌의 양쪽 반구에 각각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건강한 두뇌에서 양쪽 뇌반구의 인지 기능 차이나 양손의 실행 능력 차이는 미약하다. 손 사용의 편중성과 뇌 기능 비대칭은 모두 신체조직의 균형 상태를 나타낼 뿐이다. 손 사용 문제의 경우 사용 습관이나 훈련을 통해서, 신경심리학적 문제의 경우 뇌 손상을 통해서 균형이 무너질 수 있으며, 그 결과 비대칭이 발생한다. 이런 비대칭은 결코 신체조직에 내재된 현상이 아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이들에게 있어서 손 사용의 발달은 신경조직의 발달을 반영한다. 손 사용의 발달과 인지 능력의 발달 사이에는 어떤 직접적인 상호작용도 입증되지 않았다. 물론 이 연구 또한 수많은 세부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손 사용의 편중성에 대한 개념 정의가 전혀 통일되지 않았으며, 또 대부분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란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발달 과정에 대한 통시적인 연구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통시적 연구들도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난다는 점이다. 손 사용의 편중성 정도를 결정하는 기준의 타당성에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그런 관련성이 명백하게 입증된 바 없음에도 이 연구가 오직 왼손잡이와 지능 발달 사이의 관련성에만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아이들의 정신적 발달과 관련해서는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사이에 아직까지 어떤 차이도 입증된 바 없다.
직업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비율 문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저런 논쟁의 단골 메뉴였으며, 그 결과도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9개 직업군을 대상으로 손 사용의 편중성을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건축가와 변호사에게서 왼손잡이의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고 외과의사, 수학자, 도서관 사서는 오른손잡이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연구자들은 이런 조사 결과를 손 사용의 편중성과 언어적, 시공간적 능력 사이의 관련성을 통해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인지 능력이나 언어 능력과 관련해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왼손잡이와 관련된 신화에 가까운 믿음이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수의 왼손잡이가 건축가와 예술가 그룹에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왼손잡이들은 더 창조적이거나 그들의 개성이나 사고방식이 특이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손 사용의 편중성과 개인적 특성 사이의 관련성 문제는 좀더 폭넓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연구성과들은 앞서 살펴본 다른 관련성 연구와 마찬가지로 서로 엇갈린 주장들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편리함 위주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왼손잡이들은 불리함을 감수하며 생활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에게 다수를 정상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어린아이들도 이런 경향을 직감적으로 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손의 사용과 뇌 기능 비대칭 문제 연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학문적 성찰보다도 오히려 일반의 편견을 없애는 일일 것이다.
2. 손 노동자와 입 노동자
고대 그리스는 서양 문화에 가장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고전적인 그리스의 유산에 속하는 것 중의 하나가 유클리드의 기하학에서 완벽한 학문적 이론을 발견하고자 하는 공리적 사고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처음으로 발명해 낸 이런 공리적 사고의 유산은 지식을 더 이상 근거 제시가 필요 없는 명료한 제1원칙의 논증적 토대 위에 수립하고자 하는, 2500년 이상 지속된 이론적 사고의 모범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공리적 사고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정당화나 논거를 뒷받침해 주는 근간으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이것은 시대와 직업에 관계없이 말하기를 즐기는 사람들, 즉 입 노동자들인 지식인들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다. 인식이 획득되는 것은 그것이 theoria(단어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올림픽 경기의 공식적 관중을 뜻하는 theoros들의 견해)의 형태를 띠었을 때이다. 즉 실제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경기장에서 땀 흘리는 선수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판단하는 구경꾼들인 것이다. ‘참’과 ‘거짓’은 언어적 진술을 판단하는 속성으로 자리잡았고 인식은 이제 현대 자연과학에 있어서조차도 현실을 이론적으로 ‘구경’하고 모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기술 문명, 수공예품, 도구, 건축물, 기계, 악기 등과 같은 손의 작품들은 이들 입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물론 이들 중 누구도 이런 손의 작품들을 거부하지는 않으며 누구나 다 이용한다. 하지만 손으로 만드는 행위, 즉 포이에시스(poiesis : '제작하다‘란 뜻의 그리스어)에 자유로운 행위(이론적 행위)에 못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나은 합리성과 도덕성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의하려 하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사용된 용어를 보면 그것이 ‘그리기’와 같은 손의 행위에서 연유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선’을 뜻하는 그리스어 gramme는 ‘그리다’, ‘쓰다’를 뜻하는 동사 graphein의 명사형이다. 또 기하학의 중요한 경계들은 경계짓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원과 구에 대한 유클리드의 정의를 보면 포이에시스와 관련된 기하학적 대상들의 기원이 더 분명해진다. 원은 하나의 선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형상이며, ‘내부에 위치한 한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길이가 모두 똑같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특별한 도구 없이 원을 그리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정의가 분명하다. 구는 ‘반원이 지름의 크기를 유지한 채 한 바퀴 돌아서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때 만들어지는 입체’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는 단단한 재질의 구형을 제작할 때 사용했을 법한 정의이다. 원과 구에 대한 이런 정의는 그것이 수공업적인 제작 과정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수공업적 유산은 입 노동자였던 유클리드에게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유클리드 기하학 이론의 전체 구조는 평면 기하학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법은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려서 도형을 만들어 내려면 이미 어떤 입체적 형태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제도판은 이미 평평한 표면의 입체이고, 자는 가장자리가 직선인 입체이다. 컴퍼스는 길이가 일정하면서 유동적인 입체를 표현해 주는 도구다. 손 노동자의 연장이라는 형태로 이룩된 기하학의 성과를 입 노동자들은 은밀하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했지만 실제로 이들의 ‘순수한 개념 정의’는 결코 자체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기하학에서 말하는 ‘기본 형태’는 손 노동자들이 입체적 재료를 가지고 면, 모서리, 꼭지점 등을 만들면서 생겨났다. 이런 형태들을 공간적 입체에서 항상 똑같이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와 컴퍼스를 이용하여 제도판 위에 도형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클리드는 무지 때문에 자신의 이론이 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유클리드는 점에서 시작하여 선과 직선을 거쳐 면과 평면으로, 그리고 다시 공간적 도형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개념 정의를 만들었지만 유클리드의 개념 정의 순서는 이런 형태들을 실제로 제작하는 기술적 공정의 순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클리드의 개념 체계는 손 노동을 혐오하는, 말하기 좋아하는 입 노동자에게 나온 것이다.
손 노동자는 손으로 일을 하면서 그 일과 관련된 단어들을 배우게 된다. 실제로 이것은 말하는 존재인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명증성을 제공해 준다. 입 노동자나 이론가들이 하는 말도 그것이 의식적인 진술이라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행위에 대한 정보, 즉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목적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손 노동이 실제로(성공적으로) 행해졌을 때 비로소 실제적인 작용력을 갖게 되는 ‘말’일 뿐이다. 목적은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입 노동자들이 지식과 진리와 과학성의 최상위 기준으로 생각하는 무목적성의 이상이 더렵혀진 상태도 아니다. 문화와 문명,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는 모든 자연과학은 행위자, 그것도 손을 가지고 행위하는 자들이 그들의 목적을 추구하고 달성해 내지 못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일이다.
어떠한 손 노동도 사려 깊게 행해져야 한다. 일을 ‘올바로’ 하지 못한 사람이면 누구나 실패의 벌을 피할 수 없다. 추구해야 할 목적의 방향은 바로 이 ‘올바로’이다. 코르크 마개를 뽑기 ‘위해서’ 포도주를 따르는 행위, 편지를 뜯기 ‘위해서’ 읽으려는 행위 등은 모두 실패하고 만다. 이것은 관습이나 자연법칙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연속 행위의 목적이 잘못 정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실현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 부분 행위들의 ‘올바른’ 순서를 지켜야 한다. 인류의 문화적 업적들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생산품들도 모두 이런 순서를 지킴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손 노동의 합목적성은 입 노동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인으로서의 인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세계’의 대부분은 이런 합목적적인 제작 행위(포이에시스)의 결과물이다.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음식을 먹으려 하거나 개봉되지도 않은 병 속에 든 음료수를 마시려 한다면 입 노동자는 굶거나 갈증으로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노동자들은 아무런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전환, 관습이나 자연법칙과의 마찰도 없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음식을 향유하고 아직 개봉되지 않은 병 속에 든 음료수를 마신 것처럼 말한다. 성공적 행위의 합리성은 합리적으로 말을 하는 데 달려 있지 않다. 입 노동자는 언어 진술의 타당성을 가능하게 하는 학문적 합리성, 즉 개인적 주관을 초월하여 진술의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손 노동자에게 빚지고 있다. 손 노동자 덕분에 입 노동자는 항상 똑같은 형태에 도달하게 하는 설명서를 가질 수 있었다.
오늘날 학문 안팎으로 패러다임의 전환과 관련된 인식의 역사성에 대해서 모두들 입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패러다임이 아무리 전화되어도 이들 학문의 손 노동 및 기술과 관련된 부분들은 전혀 전환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이론과 개념, 새로운 규범과 표본, 새로운 사조와 학파 등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와 함께 측정도구나 실험도구 등도 용도 폐기되었다거나, 실험실의 기술자나 기계공이 해고되었다거나, 이전까지는 측정 가능하던 물체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거나, 어떤 기술적 방법이 쓸모 없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입 노동자들이 흔히 말하는 과학 공동체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손 노동이 잊혀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술적 응용 지식이란 의미의 손 노동은 오늘날 널리 신봉되고 있는 과학 혁명의 신앙적 태도에 반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입 노동자들로 구성된 지식인 국가는 현재 그들의 영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손 노동과 입 노동의 화해는 십중팔구 불가능할 것이다. 입 노동자들이 개념과 논의에 혼동을 일으켜 자신들의 이론을 뒤바꾼다고 해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입 노동자들은 손 노동자들이 그 동안 지켜왔던 침묵을 깨고 입 노동자들에게 일갈을 가할 날이 조만간 다가올 사실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것 같다.
3. 손의 상징적 의미
문학에서의 손
문학에서 손의 기능은 묘사에서 일반적 상징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손은 개인의 성격을 특징지으며, 연애시 등에서 여성의 우아함을 형상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은유적으로 쓰일 때는 간청과 용서, 에너지, 권력, 유희적 충동, 예술가의 창의력 등 많은 것을 표현한다. ‘손’은 다양한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던 손동작은 무의식이나 불투명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자기 확신을 표현한다. 손과 ‘정신’, 혹은 손과 ‘영혼’의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손은 인간 의지의 실천적 측면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반대로 ‘마음’, ‘정신’, ‘영혼’ 등의 모티프와 결합해 사람들의 정서적이거나 정신적인 기질을 나타내기도 한다.
문학에서 손의 기능은 첫째, 대상을 지시하는 기능이다. 이런 종류의 문학적 표현은 언어에 담긴 상징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게 한다. 둘째, 문학적 표현은 비감각적이고 전이적인 언어를 다시 감각적이고 말 그대로의 원천으로 되돌려 상징성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셋째, 문학적 표현은 메타적 차원에서 언어의 매개성 자체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다음은 문학 텍스트에 나타나는 ‘손’의 기능에 대한 세 가지 예를 든 것이다.
도와주는 손은 영웅이나 모범적 인물의 상징이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괴물들을 퇴치하고, 치명적인 위험이나 폭군의 압제에서 사람들을 구해낸다. 이들은 주로 현명한 군주, 은혜로운 귀족, 헌신적인 신하, 진실한 친구로 표현된다. 쉴러의 『빌헬름 텔』이나 에밀 졸라의 『파리』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이런 모티프의 사용은 인물의 성격이나 개별적 사건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위의 두 작품에서 ‘손’의 모티프는 도와주는 손과 억압하는 손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이런 모티프의 사용은 『빌헬름 텔』에서 태수가 제거되고 텔이 자신의 순결한 손을 하늘을 향해 뻗을 때, 그리고 『파리』에서 기욤이 격렬한 무정부주의자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기계공으로 변신할 때 절정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