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써로우의 중국기행
폴 써로우 지음 | 푸른솔
폴 써로우의 중국 기행
폴 써로우 지음/서계순 옮김
푸른솔/2001년 9월/656쪽/18,000원
몽고로 가는 기차
1980년 겨울, 나는 중국에 갔다. 런던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여행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내 시나리오는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간 후 폴란드와 독일,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뒤, 몽고횡단열차를 갈아타고 울란바토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는 것이었다.
도버해협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피카르디에 사나운 눈보라를 뿌렸다. 파리의 세느 강변 근처의 한 미술관에는 인상파 화가인 시즐레의 그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날 아침 파리는 비에 젖어 어스름했고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거리 청소부와 우유 배달부가 외롭게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벨기에를 지날 때 나는 루이스의 『엘머 갠트리』를 읽으며 책 여백에 끄적였고, 긴 하루가 다 갈 무렵 우리는 부페르탈을 지났다.
독일 뮨스터란트의 누런 하늘 아래에는 ‘드루프 운트 라인’과 ’앤들러 운트 쿰푸트‘라는 숙명적인 공장들이 서 있었다. 베를린은 나치 치하에 손상되었고 전후 그 이념은 어리석음으로 전락했다. 나는 도이체 오퍼하우스에 갔다. 돈 지오반니가 허풍을 떨 때 혹은 돈나가 안나의 노래를 부를 때 내 옆자리의 여자는 여러 차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나는 그때까지 여행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은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기차 밖으로 보이는 폴란드는 모든 것이 노쇠한 상황이었다. 황폐한 들판, 쓰러져 가는 아파트, 먼지에 휩싸인 거대한 공장들, 폴란드는 쇠퇴한 국가의 모습이었으나 사람들은 내가 만난 누구보다도 예의바르고 인간미가 넘쳤다. 폴란드 상인들은 모두 내 팔을 잡아당기며 “돈 바꾸실래요?”라고 말했다. 가난은 사람들의 수치심을 없애고 지치게 만든다. 바르샤바의 이런 빈궁함은 그들의 표정에도 나타났다. 경직되고 사기가 꺾이고, 고독하며 약간은 절망적이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고통의 모습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조소 섞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품위를 지니며 예의바르고 친절할 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민스크와 스몰렌스크를 지나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관람한 서커스는 나를 불편하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값싼 전율과 재주넘기, 애국심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러시아인 사자 조련사만큼 소련인의 사상을 드러내는 것은 없으며, 큰 갈색 곰의 이상야릇한 춤 뒤에 가려진 과정은 소련의 정치체제에 관해 많은 것을 암시해 주는 듯 했다. 여인들은 솔깃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달러를 가진 남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젊은 남자와 여자가 나를 바라보더니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를 파시겠어요?” 그들은 내가 입고 있는 청바지나 티셔츠, 운동화, 시계, 스웨터, 라이터 따위를 사고 싶어했다.
야로슬라브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눈 덮인 작은 언덕의 자작나무들, 까마귀 둥지 그리고 나무에 앉았거나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하늘을 나는 검은 새들이 만들어 내는 흑백의 스케치, 이런 것들이 자아내는 풍경처럼 쓸쓸한 광경은 없을 것이다. 나는 주전자의 더운 물로 차를 만들었다. 그날 밤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자작나무는 녹은 눈에 잠겨 있는 듯했다. 날씨는 추워졌다. 눈과 푸른 호수를 낀 거대한 시베리아 삼림에는 늑대와 들개들이 서성댔다.
광활한 스텝지대를 4일 반 동안 달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몽고를 향했다. 우란우데에서 기차는 몽고 횡단열차로 바뀌었고, 우리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칼 호수 남산악지대를 지나 얼음 낚시꾼들을 바라보며 호수를 끼고 달렸다. 기차는 남쪽으로 향해 달리다 황량한 갈색 언덕을 기어올랐다. 울란우데에서 남쪽으로 수 킬로 떨어진 그곳은 메마른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중국의 고비사막까지 이어졌다. 나무라기보다는 조금 큰 관목들, 모래가 섞인 거친 목초지, 정착지는 비참하게 보였다. 털모자와 솜으로 누빈 옷을 입은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외로이 서 있어 거의 표적처럼 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일까?
기차는 거대하고 광활한 목초지를 달렸고 간간이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곳은 몽고인의 원형 텐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과 사람과 텐트가 드문드문 있는 광경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목장이었다. 멀리 울란바토르시가 보였다. 몽고인은 남녀 모두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몽고인의 35%가 텐트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울란바토르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대지는 메마르고 먼지가 많았다. 소련의 권한, 간섭, 경제 원조는 몽고인들을 어린아이로 바꾸어 놓았다. 이 나라는 너무나 변해 버려서 소련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날씨는 청명했다. 불모지처럼 보이는 고비사막은 사실은 살아 있는 생물들로 가득했다. 회색 빛의 학, 야생낙타, 독수리, 매, 말똥가리, 마멋들을 볼 수 있었다. 석양의 정경은 장관으로 붉은 불덩어리가 미끄러지며 대지 속으로 들어갔다. 멀리 사막 가운데 보이는 작고 푸른 물건은 중국 기관차였다.
따퉁으로 가는 급행열차와 베이징행 밤차
내몽고를 통과했다. 쿠빌라이칸의 위풍당당한 궁전은 몇 에이커의 부서진 흙담으로 남아 있었다. 거대한 목초로 덮여 있는 내몽고는 너무나 조용한 곳이어서 기차가 도착하자 몽고인들은 놀라서 기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몽고 지방의 경계선은 샨시 지방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만리장성으로 구분된다.
따퉁 시의 거리에 있는 ‘마오쩌뚱 사상이여 영원하라’라고 쓰여 있는 벽보가 고의로 절반쯤 찢어져 있었다. 이렇게 손상되고 고갈된 곳이 어떻게 이렇게 북적거릴 수 있는지! 베를린 이후 지나온 모든 도시들과 이 중국 도시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가게에 음식과 물건들이 가득하며 시장에는 과일과 야채가 지천이라는 점이다. 나는 바르샤바, 모스크바, 이르쿠츠크, 울란바토르에서 본 텅 빈 가게 선반과 찌그러진 통조림 깡통을 떠올렸고, 검은 숄을 두른 여자들이 시장바구니를 들고 한 자루의 쭈글쭈글한 감자와 말라빠진 소시지를 사려고 간청하던 모습, 모스크바에서 토마토를 사기 위해 30명 이상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던 광경들을 떠올렸다.
따퉁 공장은 거대한 대장간 같은 곳으로 이곳이 아수라장이 아니라 조립공장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제철소의 불기운을 들이마시며 일하는 당나귀는 비참하게 보였지만 체념한 듯 순순했다. 그곳의 직원인 탄과 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통계에 의하면 이곳에는 3,500만 명이 동굴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돈 있는 중국인들을 중고품 장사라고 불러요.” 그것은 매춘업자, 행상인, 넝마쟁이를 뜻했다. “그들에겐 단지 돈이 전부죠.” 나는 탄에게 ‘속물’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다.
한밤 중 따퉁역의 철도 공무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케르베로스(저승문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처럼 보였다. 게다가 전등을 꺼버려 대합실을 암흑으로 만들었다. 내가 간신히 개찰한 후에도 3분 전에 다시 개찰구를 닫아버려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게 만들었다. 새벽 5시 30분 중국 공무원은 또 다시 나를 깨워 불을 켜고 문을 활짝 연 다음 내 엉덩이 밑에 손을 넣더니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내 침구를 휙 벗겨 내고 푸른 파자마를 입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나를 어둠 속에 남겨둔 채 가버렸다.
베이징은 어느 도시보다 크고 북적대고 번창해 보여 나는 그것을 보고 놀랐다. 러시아의 암울함, 몽고의 결핍, 폴란드의 분노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금성이었다. 베이징은 이제 황제의 도시가 아닌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다.
주미 중국대사 부인인 베트 바오 로드는 미국과 중국에서 남편보다 더 알려져 있다. 그녀의 소설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이고 중국에서는 영화로 제작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감히 “No”라고 말한 적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중국 미녀 특유의 눈부신 우아함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엄격하고 선량한 사람이었고, 피부는 연한 벨벳 같았다. 그녀는 또한 사려깊게 보였고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할 수 있는 사람 특유의 넉넉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로드의 만찬에 참석한 손님들은 문필가들이나 학자들로 나는 내 옆에 앉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저는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녀의 억양은 영국식 영어로 좋은 가문에서 교육받은 상류층 영어였다. “그들은 ‘절대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죠. 어디를 보나 표어였습니다. 정말 모욕적이고 지긋지긋했어요.” 그녀는 조용하고 약간 피곤한 듯한 억양으로 말했다.
동 루오산 교수는 최근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번역했다. “왜 문화혁명에 대해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요?” 나는 물었다. “아직도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문제지요.” 루오산 교수는 말했다. 한 젊은 남자는 “중국 작가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만 다룹니다. 그러나 지금은 변하고 있어요.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어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번째 독자를 만족시켜야만 합니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정치적인 검열을 뜻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설명했다.
로드의 집을 나오면서 한 남자가 내게 죽음의 철도를 말해 주었다. “문화혁명 당시 그 노선에서 자살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죽음의 철도라고 부릅니다.” 그 장소에 가보았다. 그곳은 육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커브길이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참상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베이징의 어떤 고층 아파트 단지를 기웃거리다가 9층에 사는 짼두완 씨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짼두완 씨는 말했다. ”여름에는 물이 5층까지밖에 공급이 안 되고 있지요. 이 건물은 15층짜리인데 5층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양동이로 물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그는 베이징에서 지난 6년간 강우량이 평균치를 밑돌았고 올해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고 말했다(강우량은 적었지만 빌딩은 계속 올라갔다).나는 베이징을 떠나기 전에 야간학교 교사로 봉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밤이 되자 베이징 중앙의 크고 유령집 같은 음침한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야간학교 학생들은 새벽이 되어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 유령 같아 보였다. 수위가 밤늦게 남아 있던 우리를 밖으로 밀어냈다.
상하이 특급열차
11시가 막 지났을 때 승객들이 몰려나와 창문에 달라붙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들은 곧 양쯔강을 횡단한다고 말해 주었다. 양쯔강은 중국의 남북을 가르는 적도와 같기에 횡단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이벤트였다. 상하이는 중국에서 모종의 변화가 있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으로 중국에서 갈등이 있을 때 가장 시끄럽고 난폭한 곳도 상하이였다. 상하이는 유령이 출몰할 것만 같은 도시였다. 그곳은 온갖 폭력적인 암시와 속삭임으로 가득했다. 기울어질 듯한 건물의 좁은 방에서뿐만 아니라 거리나 골목 심지어 공원과 화단에서도 살인이 벌어졌다.
상하이의 인파 속에 섞여 있으니 서서히 밀려났다. 그래도 걷는 것이 버스를 타는 것보다 나았다. 중국에서 가볼 만한 장소에는 수백만의 인파가 몰린다. 나는 푸단대학에서 ‘문화혁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는 입학시험이 없었다. 대신 불온한 교수들을 박해하기 위해 적합한 광적이고 난폭한 젊은이들이 선발되어 대학으로 보내졌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들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행진을 시켰다.
그것은 참으로 기괴한 착상이었다. 사회를 뒤집어엎고, 아이들에게 책임을 맡기고, 10년간의 휴가를 선포하고, 부자와 권력가진 자를 고문하며 감옥에 보내고, 도로를 붉은 색으로 칠하고, 오랜 적수였던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며, 공부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러나 마침내 그 일이 위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란 사실이 드러나고야 말았는데 어떤 사회라도 그런 일을 감수하게 된다면 사회는 더욱 더 무감각해지고 야만적이며, 퇴보하며 보다 더 불안정해질 것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근대에 이르면서 퇴보하고 더러워졌다. 중국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프라이버시를 다루듯 그들의 과거를 다뤘다. 지난 10년, 15년 전에 일어난 중국의 역사는 베일에 싸여 있다.
광저우행 급행
중국에서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음식과 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심고, 가꾸고, 추수했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 있는데 그것은 식량을 얻는 일이다. 정신역사학자인 쑨룽지에 의하면 그들은 발달과정 중 구강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야채 밭에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본 중국에는 개간되지 않은 땅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현상에는 강박관념 같은 것들이 있었다. 기차가 남쪽으로 향하면서 한 소년이 물소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중국의 거대한 시장이자 광뚱의 자존심인 무역전시관에서 미국인 은행가인 아더 프리글을 만났다. “그들은 외국인 투자자들을 원합니다. 석유, 산업, 합작회사들을 보세요. 미국은 내가 있는 홍콩은행을 통해서 합작회사들과 거래를 하고 있어요. 그 200개의 합작회사들이 실제로 몇 개나 가동되는지 아세요?” 그는 손가락 두 개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두 개, 그것이 전부예요.” “그렇지만 모두들 합작회사 얘기를 하던데요.“ ”망하고 있으면서도 침착한 체 하는 겁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투자가들의 자신감입니다. 이미 많은 회사들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지금 중국은 확장주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회수된 자금은 별로 없어요. 크게 기대를 걸거나 투자할만한 근거는 없다는 얘기지요. 거품이 터져 버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이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광저우를 떠나기 며칠 전 리사 페카드라는 여성을 만났다. “오늘날 사람들의 변명은 무엇이든지 가능할 때 쟁취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 자유를 맛본 지 겨우 몇 년이었지만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음을 알고 있어요. 이 시기가 언제 끝날지 누구도 예상 못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는 거예요.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 입으로 ‘때를 놓치면 다시는 잡지 못해요.’라고 말하고 있어요.”
후허하오터와 란저우로 가는 기차
야생 들소가 철로 위에 진을 치고 있거나 모래폭풍이 일어 서부 철도노선의 열차가 지연되는 일이 발생했던 운 나쁜 달이었다. 떠나기 전 날 「차이나 데일리」는 20년 만에 최악의 모래폭풍이 닥쳤다고 보도했다. ‘46시간 동안 맹위를 떨친 강풍’으로 깐쑤의 넓은 현과 신장은 고립되었다. 중국인들에게 그것은 아주 미미한 뉴스거리에 불과했다. 1976년 말 지진으로 25만 명이 사망했으며, 1950년 기근으로 1,600만 명이 사망했던 일도 있었다. 중국은 정치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었고 기술 수준은 엉망진창이었으나 그들의 곤경이 땅을 열심히 파기만 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일 경우 그들은 그 일을 눈부시게 해냈다. 철로가 복구되자 나는 내몽고의 후허하오터로 출발했으나 혼자가 아니었다. 팡은 철도국에서 파견된 사람으로 ‘중요한 인물’의 여행에 동반할 사람이었다.
후허하오터는 사실상 도시가 아니었다. 차라리 몽고평원에 던져진 요새라고 하는 게 옳았다. 모든 건물은 공장 같았다. 도착하여 왕소군의 무덤을 구경한 후 이튿날 몰래 호텔 정문을 나가려 하자 팡이 소란을 떨며 다가왔다. 이제 나는 중국인들의 다양한 웃음소리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한 20가지쯤 되는데 유머라고 할 수 있는 웃음은 하나도 없었다. 크게 소리내어 웃는 웃음은 불안이나 초조를 뜻했고, 기운차게 킥킥거리는 웃음은 무엇인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 아침 팡의 웃음은 물개가 짖는 소리 같았다. 그것은 약간의 감탄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미묘하게 섞인 웃음이었다. 팡은 그의 부관과 협의한 후 산보를 할 수 있도록 공식허가를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