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를 입은 부처
수미 런던 지음 | 해바라기
청바지를 입은 부처
수미 런던 엮음/임진숙 옮김
해바라기/2002년 5월/287쪽/8,000원
제1부 깨달음의 세계
완벽한 애인의 조건 -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불자의 조건
대학시절 나는 사랑이 종교를 비롯해 모든 것들을 초월한다고 믿고 있었고 당시 남자친구는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도덕 운운하던 기독교 신자인 친구들보다 더 정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불교수행을 할 때 그가 옆에 있으면 수행을 하는 데에 있어 소극적으로 되거나 어색함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나의 아침 예불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그가 옆에 있을 때면 거의 예불을 올리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에도 우리는 계속 만나기로 했지만 어느 비영리 단체에서 내가 불자를 만나게 되어 금세 멀어지고 말았다.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불자 애인이었는데 참선 수행, 독송(讀誦), 요가를 함께 하며 밤늦도록 불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만나면서부터 수행에도 진전이 있었다. 그는 내게 커다란 힘과 든든한 지주였다. 그때부터 나는 종교가 같은 상대를 만나야 하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엔 반드시 종교가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 도나는 자기 애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애인도 불자라면 좋겠다는 뜻밖의 말을 했다. 도나는 내가 참선을 많이 해서 매우 침착하고, 평온하고, 현명하고, 남을 배려하려고 애쓰고, 자아의 존재도 믿지 않으니 그리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고, 감정도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루었다면 우린 이미 부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나에게 그건 오해라고 말해 주었다. 애인과 나 사이는 물리적인 폭력은 전혀 없었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수도 없이 저버리곤 했다.
전날 저녁에 그의 방에 공책을 놓고 와 내가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참선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공책을 들고 나가려던 나를 보자 제스퍼는 감정이 폭발해 나를 다그쳤다. 난 사과하려고 했지만 사실은 기분이 무척 상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결국 내가 제일 꺼리는 욕을 내뱉는 것으로 우리 싸움은 끝이 났다.
3년 동안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다투고 나서 보니 상대가 불자라는 사실이 무의미하게 생각되었다. 제스퍼와 내가 원했던 것은 원숙한 관계를 위한 내면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존재, 불자로 인식했던 것이 오히려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말았다. ‘어진 불자’라는 가면 속에 뿌리 깊은 고민과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종교가 같은 상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만한 관계가 각자의 영성(靈性) 계발을 위한 지렛대가 된다는 점을 이제야 깨달았다. 불교가 인간관계의 기본이 아니라 사랑, 배려, 애정, 존중, 정직 등과 같은 인간관계의 기본 요건들이 바로 불자의 밑거름인 것이다.
출가한 후 찾은 안식처 - 비구니의 삶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 특히 나이 든 베트남 사람들은 내가 왜 스님이 되었는지를 궁금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가난하지도, 사랑에 번민하거나 이 생에서의 삶을 증오하지도 않지만 멋진 집과 차를 소유하고, 가족들을 부양하며, 쇼핑센터에서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급급한 삶도 살고 싶지 않다.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마음 속의 평화와 평정을 항상 유지함으로써 이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출가하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여덟 형제의 맏이로서 할 일이 무척 많았다. 그 후로도 출가에 대한 꿈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출가를 하려고 불교 공부를 위해 승가와 스승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출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나의 출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셨지만 이제는 가족 모두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후원해 준다.
사원에서의 생활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모든 것을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단체로 한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독경과 참선으로 하루를 시작해 아침 공양 후에 일주일에 세 번씩 은사(恩師) 스님과 근처 사원에서 온 강사(講師) 스님들이 강의하는 불법을 공부한다. 강의가 없는 날은 공부하고, 경전을 외우고, 사원의 운영과 관련된 행정업무를 처리한다. 청소하고, 쓸고, 정원을 손질하고, 편지를 접는 등의 울력을 한 후에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나서 저녁 7시에 다시 독경하고 참선한다.
난 사원생활에 만족한다. 드디어 안식처를 발견한 것이다. 사원에서 생활하니 물질적인 욕망에 지배되지 않고, 악업(惡業 : 불교에서 말하는 몸과 입, 마음으로 행하는 악한 행위)을 짓는 것도 피할 수 있다. 수행자들이 적게 해야 할 세 가지는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이고, 많이 해야 할 한 가지는 바로 수행이다. 사원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욕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욕망이 줄어들면 고통도 줄어든다. 욕망을 줄이고 평화로운 마음을 키워야만 피안(彼岸 :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에 더 가까이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나를 발견한 기쁨 - 나만의 스승을 찾아서
훌륭한 스승이란 있는 그대로를 비춰주는 맑은 거울과 같다. 우리의 정신적 소질이 어떤 지를 보고자 한다면 스승은 이를 보여줄 수 있는 방편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스승의 언어와 행동, 모범과 충고라는 거울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스스로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스승을 찾는다, 정신 수행의 길잡이를 찾는다는 생각 자체가 내게는 어색하기만 했다. 교사, 코치, 고문, 조언자, 상담사, 친구들을 찾는 데는 익숙하지만 망상을 없애고 마음을 활짝 열도록 도와줄 사람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산타 크루즈에 있는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닐 때 정신적인 스승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고등학생이 47명에 불과한 대안학교로 바바 하리 다스(람 다스의 스승들 중 한 분)라고 하는 유명한 인도 요기를 중심으로 결성된 공동체의 하나였다. 바라 하리 다스는 약 45년 전에 묵언을 맹세하고 작은 칠판에 글을 써서 가르침을 펴나갔는데 학생들은 물론 부모들도 그를 스승으로 깊이 존경했다. 이 공동체에서 나는 정신적인 의미의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나는 바바 하리 다스가 권위나 과시하고 다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1년간 이 학교에 다니면서 그에게서는 거짓이나 해가 될 만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70세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랑 파는 일에서부터 건물 짓는 일에 이르는 모든 공사에 팔을 걷고 나섰다.
나는 바바 하디 다스와 만나고 난 후 지금껏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내 마음을 그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질문들을 통해 나의 심적, 정신적 변화 과정을 자극하고 내면의 파괴적 성향을 스스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나 자신을 좀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은 그의 이런 능력은 과거에 시도해 본 어떤 심리치료보다도 더 효과적이었다.
그 후 나는 정신적, 철학적 문제를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환경이 필요한 것 같아 1년 동안 머물 생각으로 인도로 떠났다. 그러나 인도에 머무는 동안 정신적인 답을 찾으면 찾을수록 나의 철학적 견해는 의미를 잃어갔다. 신을 찾기 위해서 갔는데 찾을수록 신에 대한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그렇게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어머니와 함께 호주에 가서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의외로 너무나 일상적이고, 실천가능하고, 단순한 것이어서 나는 그 사실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드디어 나는 왜 태어나서 고통을 겪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에 만족할 수 있었고,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불교에 귀의하여 정식으로 불자가 되었다.
한편으론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스승을 포함한 여러 가지 복잡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보통’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데 낙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의 지도와 배려로 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때보다도 타고난 나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가 이런 성과를 거뒀으며, 스승은 다만 명확한 방법을 제시하고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주었을 뿐이다. 스승은 가르침을 실천한다. 나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정신적인 스승과 함께 하는 길에도 예상치 못했던 기쁨과 모험, 어려움과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면에서는 산다는 게 다 그렇겠지만 스승과 함께라면 행복과 깨달음을 향해 가는 나의 진전 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외면적 스승은 내면적 스승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내가 착한 사람이 되고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날마다 최선을 다한다면, 그리고 스승과 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스승이 지니고 있는 훌륭한 품성을 자신의 내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이런 본보기가 없었더라면 나도 그 분들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제2부 불자로서 살아가기
불행은 행복의 씨앗 - 중환자를 둔 가족의 또 다른 삶
부모님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지만 나는 불교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불교에 대한 나의 무관심은 1988년 비행기 폭발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바뀌게 되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돌아가신 후에는 어떻게 되셨는지를 알고 싶었다. 난생 처음으로 불교에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불교에서 힘을 얻었다.
그 당시 아버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나를 위해 어머니는 스님 한 분을 소개해 주셨는데 나는 곧 이 스님과 가까워졌다. 혜종 스님은 살다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으므로 좋은 소식이 있다고 너무 좋아하지도 말고, 나쁜 소식에 지나치게 실망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 후로도 종종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심한 불안증세를 보일 때 스님의 말씀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몇 년 후에 혜종 스님은 내가 가장 지루해하고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독경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놀랍게도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던 독경이 불안을 해소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더 열심히 독경하면서 기도했다. 그제야 스님들이 장시간 독경하는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내가 생활 속의 불교를 이해하기 시작할 즈음 형이 럭비 경기 중 상대방과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었다. 왜 우리 가족이 또 이런 비극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고로 인해 불교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형이 전생의 악업 때문에 몸이 마비되는 사고를 당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혜종 스님이 내 의심에 대답해 주기를 바랐지만 스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답을 얻지 못한 채 나는 평생동안 형을 돌봐주기로 결심했고, 어머니는 엄청난 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홍콩으로 돌아가 사업에 전념해야 했다.
형을 간호하느라 꼬박 2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나는 내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계속해서 형을 돌봐주기를 원했지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형과 나와의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다. 항상 같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잦았다. 형과 나와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형과 어머니에 대한 분노도 치밀었다. 이 모든 것들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 무렵에 나는 일미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고통을 알아챈 일미 스님과 떠난 낚시 여행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나의 어려움을 토로할 수 있었다. 일미 스님은 내 인생을 찾으라고 권했다.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허비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인생과 행복을 찾지 않고서는 형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불행이 가족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형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두 분 다 만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운명을 바꿔보도록 하십시오.”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나는 아주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스님의 충고에 힘입어 나는 간호사를 두어 형을 돌보게 하고 대학에 복학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또 정기적으로 하기 시작한 참선을 통해 내가 과거의 고통에 집착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는 이들이 비극적인 사고를 당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나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나였으며 내 문제가 누구에게나 흔히 있을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자 인생의 나아갈 길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형을 돌보아 온 경험을 활용하여 형을 간호하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가정간호 대행업체인 엑스트림(X-Treme) 간호에 대한 구상은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엑스트림 간호는 전문적인 가정간호 서비스를 제공한다. 욕창 방지를 위해 저녁에 환자의 몸을 움직여 주거나 관절이 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다리 운동을 시켜 주는 등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일이다. 뛰어난 간호사들에게서 받는 특수교육 외에도 우리 회사의 간병인들은 심리학에 대한 교육도 받는다.
이 회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나는 행복한 삶을 되찾았고 형에게는 만족스러운 간호를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척수 손상 환자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해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가족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해 나 자신은 물론 가족과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나는 마음의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오랫동안 아무 것도 모르는 불자였던 나는 가족의 비극을 통해 신앙을 의심했지만 이로 인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제3부 생활 속의 불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세상을 변화시키는 조용한 용기
내가 일고여덟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아버지는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 협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셨다. 교외의 주택가를 다니며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핵무기 감축 협정의 정당성을 호소하셨고, 이웃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때는 우리의 운명이 여기서 끝장나고 곧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지?”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 협정을 요구하는 서명을 정부계약으로 링컨 연구소에서 연구개발업무를 맡고 있어 할 수 없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새들에게 모이를 주기 위해 나무에 매달아 놓은 나무상자를 가리키며 나름대로 애쓰면서 살고 있으니 원망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을 이처럼 인간적으로 만드는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10대부터 동물보호운동을 시작하면서 20대 초반에는 아동장애와 학대, 정신미숙아 문제에 대한 시민단체 운동까지 다양했다. 그런 후에 나는 불교를 만나게 되었다. 좌선을 통해 나는 마음 속의 번뇌를 명확히 느끼게 되었다. 또한 남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정화되어야 하며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자신이 불행했기에 봉사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오히려 이런 현실은 봉사를 위한 강력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나의 역할과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다는 근원적인 욕구가 있어서 더욱 열심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건부의 감정에 점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즉 행동으로 보였을 때만 이해되고 수용되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자선을 베푼 유일한 동기가 나 자신의 정당화와 마음속의 영원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자 이런 행동의 한계는 더욱 분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