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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평전

김탁환 지음 | 휴머니스트
독도평전

- 다큐멘터리와 소설을 넘어선 역사 읽기 -

김탁환 지음

휴머니스트/2001년 12월/272쪽/8,000원



1장 도생

독도 탄생의 장관을 접하기 위해서는 모태처럼 독도를 잉태하고 있는 동해의 시작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기 원생대인 17억 년 전 대륙들은 단 하나의 거대한 대륙 판게아(pangaea)를 이루고 있었다. 그 때부터 마지막 첫 대륙이 존재한 중생대 트라이아스기까지 훗날 한반도를 이루는 지각은 주로 적도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이렇게 떠다니던 지각이 지금의 위치에 정착한 시대는 공룡들의 천국 쥐라기였다. 티라노사우루스를 비롯한 공룡들이 쿵쾅거리며 대지를 달리고, 활화산이 미친 듯이 불을 뿜던 쥐라기와 백악기 동안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한 덩어리였다. 그리고 동해가 만들어진 것은 대략 2000만 년에서 2500만 년 전이다. 대륙판(유라시아판)과 해양판(태평양판)이 충돌한 후 해양판이 대륙판 밑으로 침강하는 과정에서 일본 열도가 생겨나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지각이 맨틀의 상승운동에 의해 쪼개지면서 틈이 생겼다. 이 틈이 점점 벌어져 바다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생대 3기인 460만 년 전에서 250만 년 전까지 화산 폭발을 통해 서른네 개의 바위섬인 독도가 탄생하게 된다. 그 후 울릉도(205만~1만 년 전)와 제주도(120만~1만 년 전)가 그 뒤를 잇게 된다. 독도의 두 섬 동도와 서도의 높이는 각각 해발 88m와 168m에 불과하지만 해저면에서부터 그 높이가 2,000m를 넘어 한라산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독도는 거대한 화산의 마지막 꼭대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 거대한 화산도 시초에는 고요 그 자체였다. 그러나 바닷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고, 그 흔적으로 베게 용암과 파쇄 각력암이 차츰 쌓여갔다. 이윽고 그 바위들이 해수면 가까이에 이르자 수면 아래만 흔들며 조용히 사라지던 마그마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푸른 바다를 모조리 태워 버릴 듯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바다는 소용돌이를 쳤고 하늘은 검은 구름을 모아 화산 비를 뿌렸으며 하늘로 솟구쳤던 마그마는 바다로 다시 떨어지며 큰 파도를 일으켰다. 처음에 솟은 섬은 하나였다. 오랜 세월을 두고 푸른 파도와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 섬을 식히는 동안 동해는 그 섬을 둘로 나누어 수면 아래로만 손잡게 했다. 따로 또 같이 독도의 탄생이 마무리된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의 나날

뜨거운 암석들이 식고 사람이 섬에 올라서기까지 250만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 동안 독도를 어머니처럼 의지하며 살아간 생물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다. 이 많은 생명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1989년 독도에 나무심기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봄에는 댕댕이덩굴과 왜젓가락나물의 황백색 꽃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소루쟁이의 연한 녹색 꽃과 술패랭이의 연한 홍색 꽃, 날개하늘나리의 황적색 꽃이 봉오리를 틔우며 늦가을까지 왕해국의 자줏빛이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곤충들도 다양하고, 뭍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종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와 같은 새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화산섬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전복과 소라, 게뿐만 아니라 165종의 해조류와 더불어 섬 위로 올라오는 강치도 있다. 100여 년 전만 해도 독도는 강치(물개와 흡사하나 물개보다 작다)들의 천국이었다. 그리고 옛날부터 독도를 둘러싼 동해에는 고래가 긴 물줄기를 뿜어 올리며 자신의 영역을 유유자적 활보하고 있었다.

우산국을 세우다

이렇듯 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사이좋게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는 독도와 울릉도에 사람이 왕래하게 된 시기는 고대국가 때부터로 확인된다. 청동기 시대의 반구대 암각화에서 고래를 잡는 통나무배가 발견되었고, 고조선 시대의 뗏목도 정동진 항에서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우리의 선조 때부터 동해로의 출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더욱 확실한 고증은 울릉도에서 발견된 승문토기로 3세기 무렵 이 섬에서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추측컨대 여기에 살았던 이들은 능숙한 어부이자 농부였다는 것과 함께 버림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육지에서 살 수 없는 저마다의 아픔을 품고 있는 것이다. 도주하는 자들과 가난에 지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희망의 땅이 동해의 화산섬이었을 것이다.

울릉도나 독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들이 곧바로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중에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이 나라를 세웠을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뛰어난 문명을 가진 집단이 한꺼번에 섬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사라(신라의 옛 이름)와 지방 소국들의 전쟁은 오래 전부터 전개되어 왔는데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자리잡은 이서국은 유례이사금 14년(297)에 사라의 도읍지인 금성을 공격할 만큼 군사력을 갖춘 강국이었다. 미추마립간(262~284)대 이후 이서국에 대한 명칭이 사라진 것을 보면 이서국은 이 단 한 번의 패배로 국운이 쇠락하는 길로 접어든 것으로 짐작된다. 나라를 잃은 이서국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대부분은 망국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사라에 복속될 수도 있고, 끝까지 사라에 저항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무리도 있지 않았을까? 사라군의 추격을 피해 동쪽으로 달아나던 왕족과 신하들 중 때마침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향하는 뱃사람들을 만났을 수도 있다.

배를 끌어들이던 어부들은 갑옷으로 무장한 장졸들 앞에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린다. “우리는 이서국에서 왔다. 우르뫼섬까지 뱃길을 안내해다오.“ 뱃사람들은 더 이상 항변을 못한 채 이서국인들을 태우고 우르뫼섬으로 향한다. “저기 해가 뜨는 방향으로 곧장 사흘밤낮을 가면 섬에 닿게 됩지요.” 우르뫼섬으로 향한 첫날, 저물 무렵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면서 높은 파도와 함께 배가 전후로 심하게 흔들리고, 어선 10척 중에서 3척이 침몰되고 만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나라

우산국을 세운 이들이 신라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이 나라가 신라 지증왕 13년(512) 이사부에게 강제로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우산국인들은 힘으로 제압당하기 전까지는 결코 신라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기회만 되면 동해안으로 접근하여 신라의 사정을 엿보고 필요한 곡물과 재물을 빼앗았다. 이를 통해 우산국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게 된다.

신라가 지금의 강원도까지 영토를 확장한 5세기 후반 고구려와 맞서기 위해서는 실직(삼척)이나 하슬라(강릉)를 완전히 점령하여 민심을 얻어야 했는데 그곳 백성들은 우산국의 침탈을 두려워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 늘어나고, 그곳을 지키는 장졸들의 거주도 어려운 지경이 되어갔다. 우산국의 위협을 잠재우고 동해안에 평화를 정착시킨 장본인은 신라의 전성시대를 여는 데 초석을 놓은 지증왕이었다.

신라의 이찬 이사부가 왕명을 받고 하슬라에서 금성으로 돌아온 것은 늦봄의 기운이 감도는 지증왕 13년 4월이었다. 지증왕은 정벌이 실패했을 경우 돌아올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직접적으로 정벌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부는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우산국 정벌

전의가 충천한 이사부의 함대가 천천히 우르뫼섬으로 접근하였으나 곧 제비처럼 빠른 우산국 군선들의 기습을 받고 장졸을 절반이나 잃었다. 부장들은 하슬라로 귀향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하였으나 이사부는 뜻을 꺾지 않았다. 이사부는 싣고 온 악공과 나무사자를 이용해 적장이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여 우산국의 적장을 항복시킬 계략을 짰다.

이사부의 함대가 천천히 우르뫼섬으로 접근하였고, 섬을 살피고 돌아온 척후는 “마을이 텅 비었고 쌀 한 톨 남아있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래도 한 두 명은 어딘가에 숨어 우리를 지켜볼 것이라며 시작을 명하는 이사부의 군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언덕을 향해 나무사자 50여 마리를 나란히 세웠다. 사자들의 입에서 황색 연기와 유황불이 피어오르는 순간 악공들이 일제히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각을 불기 시작했다. 천지가 요란하게 십여 대의 용고를 두드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군사들은 큰소리로 외쳤다. “항복하라! 새벽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입에서 불을 뿜는 사자들을 우르뫼섬에 풀어놓고 돌아가겠다. 이 사자들을 창으로도 칼로도 죽지 않는다. 항복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는 하슬라의 이사부 장군님의 명령이시다!" 그 날 밤 악공들은 입이 부르트도록 나각을 불고 손바닥이 헤질 정도로 용고를 두드렸다. 이사부는 어둠을 노려보며 말했다. "세상 이치에 밝고 병법에 능한 우산국의 왕이라면 내가 나무사자를 싣고 와서 위협을 하는 까닭을 알 것이다. 우르뫼를 불바다로 만들려는 뜻을."

유황불이 꺼지고 병사들과 악공들이 지쳐갈 무렵 동쪽 수평선에서 희미한 물체들이 나타났다. 우르뫼섬을 피해 돌섬으로 피신했던 우산국 사람들이었다. 이사부는 직접 배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맞았다. 우산국의 왕과 신하들은 지증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2장 속국이란 무엇인가

신라의 속국으로 400년을 지내왔다고 해서 우산국이 신라와 운명을 같이 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책을 폈지만 우산국인들은 배제시켰다. 우산국인들은 관례와 체념으로 지내다가도 굴종을 몰랐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천년왕국 신라의 국력이 쇠락의 운명을 맞이한 9세기 말, 지금이 우산국인들에게는 속국의 치욕을 씻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우산국인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거병에 실패할 경우 멸국의 길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13년(930)은 삼국 간의 다툼에서 고려가 확실히 우위를 점한 시기로 명주(강릉)부터 홍례부(울산)에 이르기까지 신라 동쪽 해안의 100여 개의 성이 앞다투어 항복과 더불어 왕건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해안이 전부 고려의 영토가 되자 우산국도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정해야 했다.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8월, 갖은 패물과 어패류를 싣고 송악으로 들어간 우산국의 백길과 토두는 고려에 투항하였다. 신라를 버리고 고려를 택한 우산국의 선택은 또 다른 굴종이었고, 옛 지역을 관장하는 신라 왕족과 대신들의 멸시와 보복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고려는 우산국이 육지에서 사들이는 무기와 철의 양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우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우산국의 왕자 해청은 두만강을 지나 동해까지 넘보는 여진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우산국의 왕과 신하들은 해청의 우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라가 패망할 때도 우르뫼섬에는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해청은 뜻 있는 장정들과 힘을 합쳐 섬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1018년, 당시 망루의 파수병이던 고의 손자, 속수가 할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저기 바다를 새까맣게 덮은 것이 배가 아닌가요?” 고는 작으면서도 폭이 넓은 배를 두만강 하류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진이다! 당장 해청왕자께 아뢰라." 속수가 산길을 뛰어내려가고, 여진의 침입을 알리는 굵고 긴 울음이 우르뫼섬을 감쌌다.

1018년 7, 8월은 우산국 역사에서 가장 처절한 날들이었다. 해청의 예상대로 동북 여진의 무리는 두 달은 족히 버틸 양식과 의복을 준비해 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해청의 주장에 못 이겨 우산국에 머물렀던 왕과 대신들은 어느새 우산국을 빠져나갔다. 해청은 우르뫼의 백성들 중에서 노약자와 여인네들을 섬 밖으로 내보냈고, 우르뫼섬에는 해청과 그를 따르는 정예병들만이 남았다.

여진의 침략을 알리는 우산국의 급보가 송악에 닿은 것은 8월 중순이었다. 고려 조정은 8월과 9월 두 달 동안 우산국에서 벌어진 일을 흔히 있는 여진의 노략질로 간주하여 우산국에 원군을 파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북 여진이 우르뫼섬에 잔존해 있으며, 섬의 밭을 불태웠다는 급보를 전해 듣고는 남은 병사들의 형편과 우르뫼섬의 상황을 세밀히 살폈을 뿐이었다.

멸망의 날

우산국을 지킬 사람은 우산국인 뿐이라는 사실을 해청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여진은 우르뫼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고려의 입장을 눈치채고, 1018년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우산국을 공격했다. 장졸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겨우 쉰 명만이 남았을 때 고와 속수가 처음으로 목격했던 여진의 대선단이 수평선으로 올라왔다. 해청은 마지막 결전을 위해 검을 빼어 들었다.

열 명을 한 조로 묶어 우르뫼섬 곳곳에 배치한 다음 섬으로 올라오는 해적들을 습격하는 게릴라 전술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해적들은 고려의 개입이 없다는 전제 아래 장기전을 각오하고 우르뫼섬을 조금씩 점령해 들어왔던 것이다. 열흘 남짓 버티는 동안 30여 명의 장졸들이 목숨을 잃어 이제 우산국의 장정은 해청을 합쳐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산국인들은 여진의 해적선을 피해 동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날에는 유난히 짙은 안개에 역풍까지 불었다. 아침 해가 수평선을 물들이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해청 일행은 돌섬에 닿았다.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여진의 배들이 섬으로 다가섰다. 해청은 “오늘부터 이 돌섬을 우산도라 부르겠다. 우산도가 있는 한 우산국도 영원할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예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한 우산국의 백성들에게 우르뫼섬의 항전과 돌섬에서의 마지막을 알리라는 해청의 명을 받은 속수가 떠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동북 여진의 배들이 섬으로 다가섰다. 적선이 섬에 닿기 전 해청 일행은 검을 빼어 자결함으로써 우산국의 최후를 지켰다.



3장 공도(空島)

우산국의 멸망 후 고려는 우르뫼섬을 울릉도라 고쳐 불렀는데 울릉과 우산을 향한 육지인들에 대한 멸시와 천대는 우산국에 대한 고려 조정의 태도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조선대에 들어와 울릉이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태종 7년이었다. 울릉과 우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당시 공조판서 황희의 건의가 받아들여지게 된다. “신라와 고려가 그들을 방관한 것은 그만큼 공을 들여 울릉과 우산을 돌보는 일이 나라의 힘을 헛되이 쓰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즉시 울릉과 우산으로 다시 가서 그곳 주민들을 모두 거두어 육지로 나오게 하소서. 섬을 비우게 하시되 1년에 두 차례씩 섬의 상황을 살피게 하소서.” 세종 31년 황희는 여든일곱 살로 영의정에서 물러났고, 황희가 건의한 공도정책(空島定策)은 울릉과 우산을 바라보는 조선의 관점으로 굳어지게 된다.

울릉과 우산에 대한 조정의 관심이 희박해지는 동안 강원도와 함경도의 어부들이 이 섬을 지키고 가꾸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찍부터 울릉과 우산을 탐내던 대마도주와 일본의 어부들은 철저하게 고립된 울릉과 우산에 들어가 섬의 조선인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위험을 모르고 찾아오는 조선인들에게 그 때마다 찾아든 것은 왜구의 칼날이었다. 죽음의 섬! 울릉과 우산이었다. 여진 이후 잠시 번창하던 두 섬은 다시 무인도가 된 것이다.

안용복의 등장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조정의 입장은 변함없이 공도정책이었다. 왜적과의 7년 전쟁을 치른 후 전쟁의 상흔을 씻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느라 조정은 울릉과 독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이 틈을 타서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광해군 6년(1614) 대마도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죽도를 탐견하겠다는 서필을 보내고 동래 쪽으로 건너온 것이다. 이 때 동래부사는『동국여지승람』등의 기록에 근거하여 죽도가 곧 울릉이며, 울릉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확인시켜서 왜인들을 돌려보낸다. 다른 하나는 광해군 10년 도쿠가와 막부에서 죽도에서의 어업을 허락하는 죽도 도해면허를 무라가와와 오타니에게 준 것이다. 두 가문은 1661년 송도(독도)도해면허까지 따냈다. 그리하여 일본의 어부들은 17세기 내내 울릉과 우산 근처에서 조업을 하였고 조선과 일본 어부 사이에 빈번한 다툼이 오간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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