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과 육아의 풍속사
카트린 롤레 지음 | 사람과사람
프랑스에서는 아기가 마이요에 싸여 있을 때부터 청결교육을 시켰다. 마이요를 갈아줄 때면 아기의 발을 차가운 돌 위에 대고 오줌을 누게 하고, 대변을 보게 하기 위하여 작은 비누 조각 또는 참소리쟁이란 풀을 기름에 담갔다가 항문을 자극한다. 아기가 좀 더 크면 집밖에 나가서 보게 하고, 용변용 의자는 부유한 집에서만 정해진 시간에 앉혔다. 엄마들의 너무 일찍 시작한 청결교육으로 야뇨증을 일으키는 아기들이 많았는데 쥐나 쥐똥을 넣고 우려낸 물을 마시도록 하는 방법이 가장 흔했다. 말하자면 우연한 효과를 노리는 기대심리인 셈이다.놀이가 어린아이에게 중요한 기본 욕구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고 소공동체 사회를 배운다. 20세기 초 만들어진 플러시 봉제 인형은 유아기에 필수적인 장난감이 되었다. 인형 외에 걷기 시작한 아기에게 주는 장난감으로 이집트나 로마의 고분에서는 바퀴가 달린 개나 말, 또는 수레처럼 끌고 다닐 수 있는 장난감이 발굴되기도 했다.
18세기 말 교육자들은 놀이가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정했다. 놀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조화로운 발달을 도모하며, 사회생활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신체발달은 장난감에 의해 촉진된다. 사실 어린 시절은 모든 것이 교육이지만 교육내용과 방식은 문화와 사회계층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레고, 플레이 모빌을 이용한 수많은 장난감이 옛날 잡다한 물건이나 폐품을 이용한 장난감을 밀어냈다. 또 세발 자전거, 미끄럼틀, 그네, 장난감 자동차, 회전목마 등이 아기가 커가면서 아기의 나이에 맞게끔 만들어졌다. 교육자들은 아이와 주위 환경간에 긍정적이고 부드러운 상호작용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비교육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엉덩이를 때릴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또 실제 행동에 옮김으로써 아이들로 하여금 투정과 변덕을 멈추게 할 필요성도 강조한다.아주 작은 아기들이 푸르스름한 옷을 입고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아이들을 보면 어떤 습 관에 길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나 조용해 보였다. 장롱문에 커다란 광대를 매 달아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이란 특히 예민한 존재여서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금 방 창백해지고 기력이 떨어지고 쇠약해 진다. 그런데도 어른들의 팔 위에서 춤춰본 적이 없고 엄마의 잔잔한 미소를 본적이 없고, 잠재우는 순수하고 부드러운 자장가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제 비정상적인 휴지 상태에 빠져버린 아이들은 우울하고 시들어가며 죽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장난감의 역사제9장 유아 보호기관과 육아전문가들1870년대 프랑스의 작가 뒤캉은 파리의 아기구제병원을 방문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가정탁아소를 어떻게 부를까볼커 후커넨에 따르면 1780년부터 1868년까지 22만 명이 넘는 아기들이 밀라노의 산타 카타리나 알라 루오타를 거쳐갔다고 한다. 한 살 이하의 사망률은 50%에 달했다.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은 아이 중 살아남은 아기들은 10% 뿐이었다. 1844년 피르멩 마르보의 탁아소 설립에는 근본적으로 아기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어 신체적인 면뿐 아니라 정서적, 심리적인 면까지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러한 탁아소는 현실적으로 몇 되지 않았다.오늘날 탁아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코르쟈크의 말대로 '아이들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진정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프랑스 랑스지롱드 지방의 가정탁아소와 보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전문 육아인들은 많은 것을 연구한다. 그러나 전문 육아인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요소도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충분한 공간확보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에이즈는 확대가족체계의 약화를 보여주며 가난한 나라의 위생적, 사회적 약점을 보여준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15세 미만의 아이들 중에 5백만 명이 고아이다. 이들을 수용하는 문제가 절박하지만 그 해결책은 아직도 요원하다. 현대사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세계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정서적, 신체적으로 올바른 환경과 도움을 받아야만 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참다운 성장을 이루도록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함무라비 법전 등의 자료는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지난 날 유모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회적인 이유로 유모를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분이 높은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행동은 점잖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모의 집에 맡기는 경우도 많았다. 넓은 광장이나 야채시장 같은 곳에 '락타리아'라는 곳은 일종의 유모 대용기관이었다.
10∼14세기, 특히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아기를 유모에게 맡기는 관행이 대단히 넓게 확산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일반화되어 유모는 성품이 매우 강한 여자라는 인식까지 자리잡아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여자는 뭇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남편이나 부모, 의사들의 권고를 물리칠 수 있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했다.
한편 런던의 가난한 사람들도 아기를 유모에게 맡겼지만 그 결과는 매우 비참했다. 유모들 역시 대부분 가난했기에 젖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한 번에 여러 아이를 맡아서 키우다 보니 죽이나 빵을 먹이는 일이 많았다. 때로는 조금이라도 쉴 시간을 마련하고자 아편을 섞은 음료를 먹이기도 했다. 유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한 마디로 산업화된 사육과도 같았고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어 많은 아기들이 죽어갔다. 18세기 중반 이후 아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일 자체가 새롭게 비판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갓난아기의 사망률은 점점 높아져 감에 따라 마침내 1874년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초의 법령인 루셀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는 유모를 비롯하여 의탁된 2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의 상태를 감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1880년대 초기에 시행된 법이 적용된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 아기를 홀대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경우 유모들은 헌신적으로 아기들을 돌본다는 것이 의사들의 기록이다.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형태로 젖병을 이용한 방식이 있다. 중세 시대에는 고대와 마찬가지로 토기로 된 젖병을 사용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금제 젖병을 만들어 사용하고 이른바 공갈 젖꼭지라는 인조 젖꼭지를 발명했는데 인조 젖꼭지와 코르네 젖병은 그 수요가 급증했다. 이것은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기관에서 필요했는데 유모가 부족함에 따라 수요가 더욱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젖병으로 수유를 받은 아기들은 대부분 죽었다. 젖병이나 동물을 이용한 인위적 수유방식을 집단적 차원에서 사용한 이 실험적 수유의 불행은 파스퇴르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51년 유아용품 국제전시회에 끝 부분이 상아로 된 나선형 젖병이 전시되었을 때 영국의 의학잡지 「랜셋(lancet)」의 기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보도했다. 이 젖병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는데 우유를 쉽게 담을 수 있도록 내부에 유리 튜브가 들어 있는 게 특징이었다. 그 유리 튜브에는 고무 밸브가 달려 있어서 사람들은 '튜브 젖병', '밸브 젖병'이라고 불렀다. 1869년 로베르가 상품화한 튜브식 젖병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재료들은 하나같이 씻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젖병을 청결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퇴적물이 생기고, 세균이 급속도로 번식할 뿐 아니라 우유가 쉽게 상해서 썩은 냄새가 났다. 더구나 어른들은 대개 변질되거나 상한 우유를 사용하고 끓이지 않은 오염된 물을 섞었다. 튜브식 젖병은 결국 19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유아 콜레라의 원인이 되어 수많은 아기들이 죽어갔다.
젖병 사용과 인위적 수유방식은 독일의 세균학자 파스퇴르가 저온살균법을 개발하면서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파스퇴르의 해결은 젖을 담는 그릇과 젖꼭지, 내용물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1910년 프랑스에서 젖병 사용이 금지됨에 따라 당시 젖병을 둘러싸고 유모와 부모들, 의사들 사이에 일종의 전쟁이 벌어졌다. 수유기와 이유기에 해당되거나 사회적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보호하는 업무를 맡고 있던 의료감독관들은 아기들에게 치명적인 튜브식 젖병을 자기 관할구역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일일이 집안을 뒤져서 젖병을 찾아 내는 일까지 벌였다.
한편 튜브식 젖병을 개발한 로베르 사는 상황변화에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 주었다. 로베르 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튜브식 젖병 대신 이른바 '구세주 젖병'이란 이름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생산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산업체들, 특히 독일 기업들은 우유를 인간화시키는 일에 매달려 마침내 분유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분유를 사용하는 인공수유 방식을 택하게 된다. 품질이 뛰어난 젖병이 대량생산되고 멸균처리된 우유와 분유의 등장이 그 동기로 작용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아기의 육체적인 생존이 위협받는 일은 줄어들게 되었다. 반면 아기에게 정작 필요한 것, 얼러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살과 살을 맞대는 아기의 심리적 정서적 요구가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유럽에서는 아기의 몸을 동여매는 배내옷으로 '마이요'라는 독특한 옷이 있다. 다소 몸을 조이게 만든 일종의 봉투 같은 것으로 실용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난방이 잘 되지 않고 여름에도 습기가 남아 있는 집에서 아기를 키우려면 마이요가 필수품이었다.
일하러 갈 때 당나귀에 매단 바구니 또는 아버지가 등에 맨 채롱에 넣을 수 있어서 편리했을 뿐 아니라 마이요에 싼 아기를 벽에 걸어 놓은 자루에 넣어두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바닥의 습기나 동물이나 가축의 주둥이나 발톱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농촌에서는 거실을 외양관과 직접 연결하여 사용하는 집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애용된 마이요가 비판을 받은 것은 1740년대 이후였다. 18세기 의사들에 의하면 마이요는 몸을 꼭꼭 묶어 놓음으로 해서 호흡과 소화, 혈액순환과 같은 모든 신진대사 기능을 막아버리는 방해물로 아기의 정상적인 성장을 저해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계몽주의 의사들의 적극적인 대변인 역할을 했던 루소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청결교육에 집착하는 유럽인목받침대도 필요없고 띠나 마이요도 필요없습니다. 넓고 헐렁한 천으로 싸서 팔다리를 자 유롭게 움직이도록 해 주십시오. 공기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더운 것도 좋지 않습 니다. 커다랗고 푹신한 요람에 넣어 안전한 상태에서 편안한 상태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그러나 프랑스의 일부 지방에서는 20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마이요를 사용했다.
옛날 아기들은 자연보호에 대단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예전의 아기들은 20세기 초 서구의 문명사회 아기들처럼 일회용 기저귀를 쓰지 않고 집안에 있는 천은 모조리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사용하였다. 아기들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색깔과 아기의 성별의 구분도 없었다. 신생아 기성복이 백화점에 등장한 것은 1870년대부터였다. 비슷한 시기에는 뜨개질로 짜서 입히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1930년대 들어서자 마이요가 사라지고 아이들의 내리닫이 옷이 등장했다.
한편 18세기 말부터 또 다른 아기 의상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옷은 블루마린 바탕에 흰 줄을 대고 커다란 깃에 술이 달린 모자를 쓰는 선원 복장의 아기 옷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프리카나 더운 지방의 아기들은 거의 옷을 입지 않았고 허리에 파늬 한 장이면 되었다. 여자아이에게는 풀로 만든 치마를 입히는데 심하게 움직이면 치마가 금방 망가졌다.고대사회 이래 집단사회에는 아기를 효과적으로 달래는 방법과 여러 가지 아기를 보호하는 도구들이 존재해 왔다. 아기들은 엄마의 등에 업히거나 허리에 매달린 채 잠을 자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야말로 몸은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였다. 엄마가 낮에 아기를 업고 있으면 신체적으로 밀착된 상태이기에 아기로서는 더할 나위없이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오늘날 소아과 의사들이나 인류학자들은 신체적 접촉이 어린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매우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확실히 엄마의 등에 매달린 자세는 아기의 정신신경발달에 도움을 주고 높이 올려진 자세, 엄마의 몸에 접해 있으면서 독립적인 자세는 아기가 주변을 조망하는데 유익하다.
요람과 같은 기구를 사용하는 사회도 많았다. 요람을 사용하면 엄마와 아기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지역이나 민족, 또는 부족에 따라 요람을 만드는 방법은 다양했다. 자주 여행을 하는 부족은 '모이즈'라고 하는 작은 아기침대를 사용한다. 아기를 요람에 넣은 채 나뭇가지에 걸어 놓는 경우도 있다. 이 방법은 동물이나 벌레로부터 아기를 보호한다는 장점이 있다.
아기를 달래고 재우는 것은 과거와 현대 사이에 상호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 있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에 대해 지난 날의 엄마들은 수면용 시럽을 사용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아기가 빨아먹을 수 있도록 만든 진정제로 양귀비 시럽에 적신 식빵을 헝겊에 싸서 실로 매어 사용했는데 영국의 의사인 언더우드는 이와 같은 빠는 것들 즉 쉬세트의 사용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요람을 흔들어 주거나 팔에 안고 흔들어 주는 자연적인 방식을 따를 것을 주장했다.인도 남부의 타밀족은 일주일에 두 차례 기름으로 아기를 목욕시킨다. 먼저 아기의 몸에 기름을 바른 후 살구가루와 참외가루를 섞어서 만든 반죽으로 피부를 닦아 내고, 마지막으로 머리와 몸에 물을 뿌린다. 몸을 물에 담그는 것이 아니라 물을 뿌리는 목욕법인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종려나무 기름이나 올리브유로 마사지하는 목욕법이 보편화되어 있다.
오늘날 프랑스의 산모·유아보호기구에서 활동하는 소아과 의사들 중 올리브유가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고 소독과 진통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올리브유의 풍부한 비타민과 단백질, 지방산 등이 아기의 피부로 흡수되며 마시지를 하는 동안 엄마와 아기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반면 유럽에서는 14∼15세기경 물을 많이 사용하는 목욕습관, 특히 위생을 위한 목욕이 점차 금지되었다. 물에 들어가면 생명력이 녹아버린다고 생각하여 목욕을 금기시했다. 대신 속옷을 자주 갈아입고 향수를 뿌려서 냄새를 감췄다. 한증탕이나 그 밖의 목욕시설도 사라졌다. 경제적으로 살기 힘들었던 일반 농민층에서는 물이 귀해 씻기도 어려웠지만 목욕 자체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어린아이일 경우는 약하다는 이유로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어린아이의 더러움은 몸을 보호한다고 해서 오히려 좋게 여겼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아기의 정수리가 굳지 않아서 '모자'라고 부르는 때를 보호막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했다. 머리 속에 이도 몇 마리 남겨 놓아야만 나쁜 피를 빨아 낸다고 생각했다.
같은 이유로 기저귀도 전혀 빨지 않고 말려서 사용했다. 오줌이 피부병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기들의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기저귀는 늘 젖어 있으며, 얼굴과 몸은 습진과 피부병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알 수 없는 녹청 같은 것을 뒤집어 쓴 아기들이 많았다. 왕족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 루이 13세가 어린아이였을 때 버터나 부드러운 아몬드 기름으로 닦아줄 뿐이어서 붉은 반점들과 수포들이 온몸에 생겼다. 당시의 주치의인 에로아르의 기록은 "배와 다리에 매일 수포가 생김, 눈두덩이가 붓고 테가 생겼음, 이마위에 붉은 점, 눈 주위에 단독성 붉은 얼룩, 머리 뒤에 큰 습진, 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