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日 3국인 여기가 다르다
김문학 지음 | 한일문화교류센터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여자가 백화점에 속옷을 사러 갔다. 일본 여자는 "팬티 7장 주 세요."라고 했다. "일 주일 동안 갈아입으려면 7장은 있어야지." 다음은 한국 여자로 그 녀는 다섯 장을 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한 장씩이면 충분해. 주말은 애인과 함께 보내니까 입을 필요가 없지." 마지막으로 중국 여자. 그런데 그녀는 한꺼번에 열두 장씩 이나 샀다. 영문을 모르는 한국과 일본 여성은 눈만 깜빡거렸다. "예. 12장이요. 1월, 2 월, 3월… 1년은 열두 달이니까."한편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내 친구 Y(한국인)가 외모가 수려한 중국인 여자 유학생과 열애 끝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결혼하였다. 처음엔 무얼 해도 예뻐만 보이던 아내에게 이상스런 버릇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Y의 미인 아내는 Y가 벗어 놓은 속옷이 쌓이고 쌓여도 도무지 빨아 줄 생각을 안 한다. 참다못해 Y가 버럭 화를 냈다. "이봐, 도대체 빨래는 언제 할거야? 갈아입을 속옷이 없잖아!" 그랬더니 아내의 대답이 더 걸작이다. "빨면 뭐해, 또 더러워질 건데. 좀 참으면 안 돼?"4. 종횡무진 3국5. 좋아도 3국, 싫어도 3국일본인의 성급함은 국제적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세계 제일의 쾌속 리듬을 자랑하는 그들의 시간 감각은 놀라울 정도이다. 우선 걸음걸이만 봐도 그렇다. 일본인은 마치 경보 선수들처럼 빠르다. 일본인 중에서도 가장 빠른 사람은 오사카 사람이다. 그들은 어딜 가도 티가 난다. 횡단보도에서 미처 신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오사카 사람이다. 젊은이는 물론이고 60대 노인들도 신호가 바뀌자마자 건너는데 그 걸음걸이가 20대 뺨칠 정도이다.
이번에는 한국인을 보기로 하자. 한국인 역시 만만치 않은 성급함의 소유자들이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한국말은 '빨리빨리'다. 그런데 한국인의 성급함과 일본인의 성급함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다. 일본인은 더러운 환경이나 시간 감각에서 성급함이 드러나는 반면 한국인은 지저분한 환경엔 좀 무신경하고 주로 대인관계에서 성급한 면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일본은 예부터 '산자수명의 섬나라'라는 깨끗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 그런 환경을 만끽했으므로 더러운 것에 예민하고 인내력이 부족하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인내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일본인들은 타인에 대한 감정을 억제하여 감정노출을 삼가는 것을 큰 미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환경에 대한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환경에 대한 인내력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부족한 편이다. 그것은 한국의 문화 속엔 감정의 분방한 노출, 발산이 하나의 미의식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자유분방함이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고,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 이면에 타인과 의견 차이가 생겼을 때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아집이 있어 곧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게 중국의 '만만디'다. 이 '만만디'는 중국인들의 국민성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다. 무엇에든 쉽게 놀라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여유만만한 성품과 그 끝없는 인내력은 세계 제일을 자랑한다. 일본 한학계(漢學界)의 대부 모로하시 데츠지는 중국인의 인내력에 경탄한 나머지 '불사신의 국민'이라고 격찬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쓴 바 있다.반면 일본은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조용히 메모를 하면서 협력해 주기 때문에 질서정연하고 시간 약속도 잘 지킨다고 덧붙인다.
동양 3국인 중에서 감정표현이 가장 서툰 민족은 바로 일본인이다. 한국인처럼 능숙한 표현력도, 중국인처럼 표현과 은폐의 밸런스를 맞추며 적당히 조절하는 능력도 없기에 그들은 '수신(受身)'이란 처세술을 쓴다. 지나치게 신중하고 수동적인 일본인은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눈엔 여리고 친절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이면에는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교활한' 이미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일본에 건너왔을 무렵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토록 겸손한 민족이 과거에 어떻게 한국을 지배하고, 중국까지 침략해 온갖 만행을 저질렀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민족성의 차이이므로 우선은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고 '무조건 틀리다'라고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중국인은 불친절하며 서비스 매너가 자기 중심적으로 되어 있어 뻔뻔스럽게 행동한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한국의 서비스 매너는 중국보다는 좋더라도 일본보다는 못하다는 것 역시 정평이다. 한국인은 가족이나 마을과 같은 동족, 또는 자기가 사는 작은 집단 안에서는 괜찮으나 그 밖의 타인에 대한 태도는 냉정하고 차갑다.
내 친구가 중국에서 겪은 일이다. 중국 대련의 한 백화점에서 여점원이 내주는 바지를 사들고 세심히 점검하다가 바지에 얼룩이 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기 얼룩이 있네요" "난 또 무슨 일이라고! 밑에 있으니깐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인다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대조적으로 일본인의 친절은 세계적으로 '넘버원'의 위치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
어쩌면 친절은 일본인이 타고난 성미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매사에 꼼꼼하고 정확성을 따지며, 상대방에게 피해나 싫어하는 것을 하고 살 수 없는 섬나라 속에서 살면서 그 같은 풍토의 소산으로서,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서 남을 우선시하는 친절성이 일본인의 성격으로 자리매김하였을 것이다. 대조적으로 중국인과 한국인은 대륙과 반도에서 살아 왔으므로 느긋하고 대범한 성미였기에 꼭 친절을 몸에 배고 살 필요는 없었던 여건이 있었다. 오랫동안 전란과 난세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보전하기 위해서는 타인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자기 중심의 사고가 몸에 푹 배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친절하다고 그것에 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친절하든, 뻔뻔스럽든 다 이유가 있다. 나름대로 고유한 문화 풍토가 그 배경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비교를 통해 상대방과의 거리감,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가 생긴 원인을 알아냄으로써 거리감을 축소하기 위해 분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 아닐까.공공장소에서 어느 사람이 갑자기 한 방 내쏘았다. 이때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못 들은 척 하고 침묵을 지킨다. 당사자만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힌다. 침묵을 지키는 주위 사람들 중 에는 오히려 자기가 의심받을까봐 얼굴을 붉히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이라면 얼굴을 붉히 면서 계면쩍게 웃어 보인다. 주위의 사람들도 악의 없이 씩 웃는다. 중국인이라면 당사자 가 웃으면서 여럿을 향해 '도대체 누가 뀌었어?'하며 반죽 좋게 떠들어댄다.첫눈에 동양 3국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공항에서 그들을 구별해 보자. 만약 10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이라면 한 사람이 말을 하고 9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싱글벙글하는 것은 틀림없이 일본인이다. 그리고 10명 중 8∼9명이 큰 소리로 떠드는 건 한국인. 5∼6명이 서로 얘기하고 나머지는 얘기를 들으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면 십중팔구 중국인이 틀림없다. 어떻게 이렇게 단정하는가?
일본 문화는 집단주의 문화로서 개인보다는 집단에 각별히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을 위해서라면 개인은 자신의 희생도 불사한다. 만약 화자가 그룹의 책임자가 아니더라도 자기 주장을 억제하고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게 일본인의 행동 패턴이다. 한국인이라면 대표자가 말을 해도 각자가 그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 자기 주장을 앞세운다. 중국인 역시 '개인주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인들보다 자기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있어 노련하다. 자신이 할 말이 있어도 일단은 자제할 줄 알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성숙함(?)이 있다. 상대방에게 일부러 자신의 허점을 보여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강한 개성을 숨김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보다는 스스로 바보인 체하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언어의 특색이나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그 언어가 어느 직종, 어느 상황에 적합한가를 따져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다. 애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는 중국어, 물건을 팔 때는 일본어, 그리고 싸움을 할 때는 한국어가 적합하다. 중국어는 사성이 있으므로 음악적이어서 사랑을 속삭이는 데 알맞고, 일본어는 늘 상대의 입장을 우선하여 이쪽을 낮추는 수신의 언어이므로 장사하는 데 적합하다. 그리고 한국어는 직설적인 표현과 억양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분명해 입싸움에 사용하면 좋은 무기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억양의 차이는 대화를 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동양 3국을 두루 돌면서 내가 느낀 감상을 정리하면, 중국인과 한국인은 달변가들이며 요설이 많고, 반대로 일본인은 과묵하고 언어 표현이 서툴다. 변설(弁說)을 미덕으로 아는 중국인들은 떠드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큰 소리로 말을 해 싸우는 건지 대화를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도 있다.
한국인의 달변과 관계된 것으로 독특한 명물 하나가 있다. 스트레스 해소법이기도 한 '험담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동양 3국인 중에서도 유일하게 한국인에게만 있는 것이 '씹는 문화'이다. 두 사람만 모여도 제3자의 험담을 한다. 험담을 하면서도 별 죄책감이 없다. 같이 있던 사람이 화제에 올랐던 당사자에게 고자질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나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짚어보면 이러한 험담문화 속에서 한국인의 깊은 인정을 느낄 수 있다. 애정이 있으면 관심도 따라가는 법이니까.동양 3국 중 유일하게 일본만이 '와리캉(각자 부담)' 문화를 갖고 있다. 공자의 75대손으로 일본에 건너와 살고 있는 공건은 『일본인의 발상 중국인의 발상』속에서 와리캉 문화에서 받는 불쾌한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와리캉은 친구를 잃는다.', '우정은 돈으로 절대 사지 못한다.'는 중국인의 우정관을 소개하였다. 이처럼 와리캉은 같은 동양인들에게 예외 없이 부정적인 비판을 받기가 쉽다.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와리캉은 인정보다는 금전을 우선하는 몰인정한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와리캉은 일본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 나온 산물일 뿐이다. 문화는 서로 다른 민족과 지역적인 차이 때문에 비로소 문화의 역할을 한다. 각양각색의 개성과 차이가 존재하기에 인류 문화의 재단은 보다 풍성하고 다채로워지며, 또한 그 토대 위에서 서로 공존하며 변화와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생각해 볼 때 일본의 와리캉 문화를 '좋다, 나쁘다'고 속단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진정한 이해와 공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면 우선 상대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차이점을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3국인이 싸우는 모습을 보자. 일본인의 우상은 사무라이다. 그래서인지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편이다. 평소 묘한 웃음기를 머금고 다니며 점잔을 빼던 것과는 달리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어느새 주먹이 오가는데 이것도 잠깐, 상대방이 '졌어!'하고 꼬리를 내리면 승자는 의기양양하게 손을 뗀다. 이것으로 싸움은 끝. 왠지 심심한 것도 같지만 섬뜩한 데가 있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한국인의 싸움. 한국인들은 주로 주먹다짐보다는 입씨름을 많이 한다. 젊은층이나 어린아이들은 서로 치고 받고 싸우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그야말로 농담을 주고받듯 걸쭉한 욕설로 맞상대를 한다. 한국의 욕이 발달한 이유를 알듯하다. 이러한 한국의 싸움 형식을 '유교식'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자고로 군자는 입만 놀리고 손을 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중국인의 싸움은 격렬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요소가 많다. 무시무시한 욕설과 때리고 차는 구타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말싸움의 단계와 구타의 단계로 나누어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여전히 입은 바쁘다. 중국 한자 중 모든 쌍욕을 총동원하여 욕을 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 진전되면 당연히 구경꾼이 모이기 마련이어서 구경꾼들의 동정을 사기 위해 과격한 언행을 보이게 되는데 그 정도가 마치 배우가 연기를 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우는 소리를 내며, 살며시 발 밑의 돌멩이를 집어 자신의 이마를 마구 짓찧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괸다. 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여기에는 구경꾼에게 자신은 약자라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동정을 얻어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놓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렇게 중국인의 싸움엔 유니크한 술수가 들어 있다. 중국인의 싸움은 그야말로 술수가 깃들인 '모략'의 싸움이라 하겠다.이제 3국 여성들의 일반적인 성향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한, 중, 일 3국의 대표적인 향신료로 그 나라 여성의 성향을 견주어 봄은 어떨까? 우선 한국 여성은 고추, 일본 여성은 와사비 그리고 중국 여성은 마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추는 그 겉모양만 봐도 자극적인 느낌이 든다. 눈으로 다가오는 새빨간 색깔의 선명함이 그러하고, 보는 순간 아찔한 매운 맛이 혀끝에 묻어난다. 일단 한 입 깨물면 입안 가득 고이는 침과 목구멍이 짜릿짜릿 저려올 만큼 아릴 뿐만 아니라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위장이 따끔거리며 엄청난 열의 자극까지 느낀다. 정말이지 한국 여성의 특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겉 모양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이미지가 그러하고 감정표현의 격심함이 절묘하게 닮아 있다. 그러나 한국 여성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따스한 인정과 진실함이 열을 발산한다.
눈에 착착 와 감기는 연하고 부드러운 녹색, 황색의 와사비. 그것은 시선을 자극하지 않는 따스함이 있긴 하나 먹는 순간 머리끝까지 치닫는 격신(激辛)이 짜르르 느껴진다. 그러나 그 매운 맛은 입이나 콧마루 등 표피적인 감각기관에만 자극을 줄 뿐 내장기관에까지 영향을 주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일본 여성의 패턴을 극명히 드러내는 일면이다. 겉으로 내비치는 일본 여성의 모습은 유순하며 친절하다. 그렇지만 그녀들에게는 뱃속까지 스며드는 맵싸한 고추 같은 인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곧 '마음에도 없는 친절'로 나타난다. 그녀들이 짓는 친절한 미소와 귀여운 행동의 뒤에는 '냉정'과 '차가움'이 웅크리고 있다고 봐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마늘은 고추나 와사비가 가지고 있는 격신의 종합적인 맛이라고나 할까? 자극을 받는 장소는 뱃속의 내장기관이다. 생 마늘을 먹으면 그 자극으로 인해 위가 타는 듯한 아픔마저 느낀다. 또 마늘을 먹으면 며칠 동안이나 냄새가 입안에서 가시지를 않는다. 중국 여성은 한국 여성 이상으로 감정의 노출이 격렬하고, 인정 또한 유별난 데가 있다. 동시에 일본 여성과 같이 머릿속으로는 점치지 못 할 속내가 엇갈려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일본에 수 년간 살면서 나는 일본인이 방귀 뀌는 걸 거의 듣지도 보지도 맡아보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인은 방귀를 잘 뀌지 않네요."하고 얘기하기도 했지만 그 친구는 묵묵히 웃기만 하였다(실상은 소리 없는 방귀였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방귀 뀌는 사람은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해도 중국인에게는 이길 수 없다.
중국에서는 길거리, 버스, 전철, 극장, 교실, 대중목욕탕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방귀를 뀐다. 특히 무더운 여름날 만원 전철에 타고 있노라면 체취, 땀 냄새, 입 냄새, 발 고린내에 방귀 냄새까지 짬뽕이 돼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중국 대중목욕탕의 방귀 풍속도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아 혼탁한 공기 속에서 아무런 구애 없이 방귀를 뀌어댄다. 욕탕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