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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의 야만 2

이광일 지음 | 일빛
20세기 한국의 야만 2

이병천 이광일 공편

일빛/2001년 9월/456쪽/1,4000원



서장 야만의 세기로서의 20세기

연대기적으로 볼 때 야만의 세기로서의 20세기는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그 야만의 종식성을 알리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아직 울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반이성, 야만의 극복을 위한 새로운 근본적 반성과 노력, 그리고 실천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냉전분단체제, 성장 제일주의 아래 사회 거의 전 영역을 지배한 반이성, 야만성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민주화로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형태를 달리하며 의연히 작동되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사회관계가 정치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야만성의 원인을 국가의 폭력이나 억압에만 돌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이면에는 이를 추동하는 억압적 사회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의 여러 양상과 표현들은 여전히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 군부독재 시대의 각종 의문사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리조차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현장 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인 실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군대 내의 인권유린 속에서, 그리고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화석화된 제도교육 속에서 야만성은 그 짙은 그늘을 드리우면서 지금도 우리의 주변을 옥죄고 있다.

공개적 독재체제로부터 연유하는 반민주성의 극복은 말할 것도 없고 분단의 문제, 성장 제일주의의 문제는 중장기적으로 민주주의라는 통로를 우회해서는 한치도 진전될 수 없다. 우리 시대 ‘야만의 극복은’ 자연상태에서 오는 그 어떤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의 극복 - 이성에 의한 근대 ‘문명’의 구축 - 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문명으로부터 초래된, 그 문명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야만’의 극복에서 그 핵심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민간인 학살

전선이 따로 없는 전쟁에서 당신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 상황과 마주친다. 이 동네 사람들이 게릴라를 지원한다는 정보에 의존하여 ‘물과 물고기를 분리한다’는 차원에서 동네 자체를 없애버리고 마을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베트남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야만과 광기의 실체를 마주하는 일이다. 한국전 당시의 양민학살에 대한 은폐와 망각이 베트남전에서의 비극을 초래했고, 베트남전의 성격 규명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완벽하고 철저한 기억의 은폐는 광주학살로 이어졌다. 왜곡된 기억은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 낸다. 억눌려온 기억들에 대해 말할 수 없을 때, 말하지 않았을 때 또 하나의 새로운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을 한국의 현대사는 잘 보여준다.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시인하는 일부의 참전군인들은 말한다. “우리는 군인들이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 말은 나치대원들, 그리고 1980년 광주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했던 말과 똑같다. 국가가, 그 국가를 구성한 개인의 행복과 권리를 보장하는 수단적 장치로 보는 가치체계가 결여된 것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기원과 전근대적 성격의 결합에 기인한다. 국가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국가주의는 이미 우리 의식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무오류성, 국가의 무조건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 봉쇄되어 있는 한 앞으로도 개인의 몸과 꿈과 상상력은 늘 국가의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다.

폭력은 우리의 일상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일상의 폭력, 일상의 파시즘을 직시하고 싸우지 않는 한 나는 언제 베트남 사람들을 죽일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소수자를 박해하는데 일조하고 그 일에 대한 반성조차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릴지 알 수 없다. 폭력은 교육과 언론, 다양한 상징을 통해 우리의 내부로 들어온다. 일상의 폭압적 시스템 속에서 살아온 우리 몸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 논리들을 내면화한다. 제도교육과 미디어와 권력은 개인의 일상을 치밀하게 파고 들어와 삶 자체를 권력자들의 논리로 내재화한다. 일상의 폭력에 대한 의심과 훈련이 개인의 인권을 지키고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긴급조치의 시대

현재의 한국 사회는 1960, 70년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집권세력의 민주주의 파괴, 공권력의 유린, 자본측의 노동기본권 억압 등은 박 정권 시기의 또 다른 부정적 모습이다. 따라서 이 장은 박 정권의 반민주성과 반인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김대중 납치사건, 그리고 긴급조치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박 정권의 실체에 대해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긴급조치는 이른바 공개적 독재체제로서의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박 정권이 자행한 것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1959년 진보당 당수이며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을 죽음으로 몰고 간 냉전체제가 의연히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치적 반대세력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김대중을 납치한 사건은 냉전․반공을 빌미로 더 이상 정치적 경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박 정권의 파시스트적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이와 비교해 유신헌법 개정운동을 계기로 발동된 긴급조치는 시민사회의 어떠한 자율성, 생기발랄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박정권의 대중 억압용 조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 뒤에는 군과 정보부, 경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가 버티고 있었다. 긴급조치는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릴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1천명 이상의 전과자를 양산하며 시민들의 자유와 권력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긴급조치는 1979년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박정희 살해사건 이후 종지부를 찍게 된다. 결국 긴급조치는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유신체제를 유지하는 마지막 보루로서 한국정치사의 어두운 기록으로 기억될 것이다.





야만의 권력미학, ‘인혁당 사건‘

한국의 근대사는 야만스러운 물리적 폭력만을 지배권력의 통치기제이자 국민적인 동의기제의 토대로 삼으면서 민주주의를 억압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거나 야만스럽게 학살함으로써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황폐화시켰다.

제1차 인민혁명당재건 단체(이하 인혁당) 사건의 주체들은 한국전쟁이 종결된 1953년 이후에 점차 소멸, 단절되어가는 민족민주운동을 복원하려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8.15 민족해방운동과 4.19 항쟁 이후에 지속적으로 추구되었던 ‘민주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계승하려 하였던 것이다. 제1차 인혁당 사건의 핵심주체들은 기본적으로 민주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활동가였던 도예종은 1961년 2월 11일자 「영남일보」에 기고한 ‘노동운동과 통일’이라는 글에서 ‘노동조합의 필요성,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문제, 노동자들의 최저생활의 보장, 임금인상의 정당성, 노동시간의 단축’ 등을, 2월 22일자 「영남일보」에 기고한 ‘경제적으로 본 통일의 필요성’이라는 글에서는 ‘자주경제의 지향, 민족해방의 지향’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원조경제정책의 문제, 반민족주의자들의 미청산 문제, 민주적 통일의 문제, 가난의 해방 및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동시지향의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이러한 투쟁기구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에게 반유신투쟁에 대한 정치적 조언을 하였고, 광범위하게 분산된 민주세력을 결집시키려 하였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관련 주체들 간에 정세토론을 일상적으로 수행, 선진적인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전위조직의 건설에 대한 의지를 실현하려 한 점 등 일상적이고 다양한 생활영역 속에서 한국사회의 제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역사적 의식을 제고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생활공간을 확장시키려 하였다.

J. Ogle 목사와 J. Sinot 신부가 폭로한 바 대로 대법원의 사형 확정이 내려진 8명에 대해서 바로 그 다음 날 형을 집행한 것은 국제사법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야만적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민주정부의 수립과 민족통일의 달성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학살되었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과제가 학살된 것이고, 민족민주변혁운동의 이념적 좌표가 학살된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주체들은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학살되었지만 그들의 정신만은 현재까지 살아 숨쉬면서 한국 사회의 권력블록을 교체하는 과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과제, 그리고 실질적인 민주변혁과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 등 한국 사회의 제반 모순을 지양하는 과제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5.18에서의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

1980년 5월 광주지역에서 행해진 학살은 당시 신군부가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공포정치’의 창출을 기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계엄군의 공격목표는 시위대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다수의 일반 대중을 목표로 하였다.

5.18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학살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저항의 문제이다. 5.18 당시 계엄군의 진압방식은 시위의 참여여부에 관계없이 보이는 모든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며, 체포된 사람에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폭력을 행사했다.남녀를 불문하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팬 다음 쓰러진 사람을 지질 끌고 가 트럭에 짐짝을 싣듯 집어던졌다. 총격 이전까지는 군화발과 대검으로 학살하였다.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곤죽을 만들었다.

“5월 21일 오후 3시 15분쯤 광주 영공에 몇 대의 전투용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무장시위대에 대한 집단발포는 그 자체가 질적인 의미에서나 양적인 의미에서나 민간인 학살의 절정이었다. 또한 전시에도 공격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적십자사 구호대원들에게조차 사격이 가해졌다. 부상자를 싣기 위해 적십자사 표시를 단 차를 몰아 부상자에게 접근하던 적십자 구호대원들이 공수대원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차에 탔던 5명 중 2명은 즉사하고, 2명은 부상당하였다.

결국 그 날 학살극의 실질적인 주도자들은 1997년 4월 유죄가 인정되어 사법처리되었다. 5.18 당시 흘린 피와 눈물이 당시 신군부 세력을 몰락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5.18은 복권되었지만 무엇을 복권시킬지 모르는 상태이며, 학살극을 자행했던 사람들은 처벌되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복권과 처벌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5.18의 현실이다.

더욱이 학살은 있었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자료들, 여전히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여기는 일부 군인들, 특정 지역문제이거나 지역 이기주의로 폄하하는 사고방식들, 이러한 문제들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이렇게 미결된 지배권력의 억압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겪어오고 있다.

여기서 5.18 당시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정리하면 첫째 당시의 학살이 의도적인 학살인가 하는 점이다. 당시 비상계엄의 확대는 전국적인 현상이었으며, 군부대가 대학 구내에 진주한 것 역시 전국적으로 동일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광주지역에만 계엄군의 ‘화려한 휴가가’ 이루어졌는가? 둘째, 수많은 민간인의 살상을 야기한 발포명령은 누가 내렸는가? 셋째, 암매장은 실재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5.18 직후부터 계속해서 나도는 소문은 암매장이 실재하며, 대부분의 광주시민들 역시 그렇다고 믿고 있다. 또한 실제로 암매장되었다가 시신이 발굴된 사례도 있다. 이 소문은 무엇보다도 광주시민들이 생각하는 사망자 수와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국가보안법과 공안정권의 폭력

국가보안법이 생겨난 이후 이 법의 제단에 바쳐진 무고한 국민의 눈물과 피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처음 태어날 당시의 국가보안법은 단 6개의 조문으로 구성된 간단한 것이었다. 내용은 더 단순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모이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단촐한 조항은 거의 헌법을 무시한 채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누구라도 체포하여 처벌할 수 있을 정도의 괴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법사위가 만든 국가보안법 초안에는 국회의원들뿐만 아니라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까지 법률상 문제점을 지적했다. 조국현 의원은 ‘자손만대에 죄를 짓고 말 것’이라며 정치적 악용가능성을 경고했다. ‘헌법정신을 몰각하고 인민을 극도로 속박하는 법‘, 심지어 ’유태인 학살을 위한 히틀러의 법‘이란 비난도 퍼부어졌다. ’사상은 사상으로 극복해야지 완력으로 막아낼 수 없다.‘든가 ’이런 악법으로 좌익을 강압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력의 부족‘이라는 논리도 펼쳐졌다. 놀랍게도 제정 당시 국가보안법폐기론의 주장은 지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와 같이 국가보안법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국가 공안권력의 자의적 도구화, 사건과 증거의 조작,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동되는 국가폭력과 같은 암울한 징표를 드러낸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할 공산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함이 아니라 반정부세력을 공산당으로 조작하여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테러도구로 사용했다.

반공법의 시대, 공포정치의 계절에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전 기간을 통해 정보의 독점과 반대세력에 대한 사찰과 규제 등 국내외 정치에서 실질적인 비밀경찰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 사찰과 규제의 도구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었다.

광주민주항쟁으로 인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 부재라는 치명적 상처는 물리력에 의한 강압통치의 방식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집권과정의 물리적 탄압 조치를 법제화하고 정당화하는데 필요한 악법을 생산해 내기 위해 만든 기구가 국가보위입법회의이다.

국가보안법이 정권유지의 도구가 되고, 정당성이나 도덕성이 없거나 부족한 정권을 가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역사의 악순환에는 검찰과 법원도 충실하게 협력하였으며, 수사기관은 정권의 시녀 노릇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권유린적인 국가형벌권의 행사에는 항상 동반되는 것은 국가폭력에 철저한 손발 역할을 한 고문기술자들이었다. 이들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일삼으며 사건의 증거들을 조작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영장 없이 끌려간 피의자들은 그들로부터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당하였다.

대상이 정해지면 사건을 국가보안법의 잣대에 가져다 맞춘다. 그리고 고문과 불법수사로 사건 조작을 일삼는다. 법원은 국가보안법이 지시하는 방향으로만 눈을 돌린다. 한 때는 이렇게 재판한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앞줄 사형! 둘째 줄 무기! 셋째 줄 20년!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화가 이응로는 방청객이 보는 법정에서 큰소리로 울었다. 슬퍼서 운 것이 아니었다. ‘이전 일제시대에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우리의 선배가 바로 이렇게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와 ‘죽음의 정치’

이 글의 주제는 1980년대 이후 이 땅에서 발생한 정치적 의문사와 ‘강요된 자살’로서의 분신에 대한 것이다. 정치적 의문사와 분신, 그것은 국가의 직․간접적인 개입 의혹이 있는, 즉 ‘사인이 명백히 자연사로 확인되지 아니하고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타살당했음이 분명한 심적 및 물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어 사인조차 철저하게 묻혀져 버린‘ 많은 죽음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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