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 지음 | 창해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 지음
창해/2001년 9월/384쪽/13,000원
비운의 왕자 호동
서기 32년, 대무신왕 15년의 일이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는 숲이 많은 옥저지방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호동왕자의 무리는 사냥하던 도중에 낙랑국의 왕 최리를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아무래도 낙랑국에 가까운 곳이었다. 호동왕자는 사냥도 사냥이지만 적국을 염탐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낙랑국의 최리왕은 호동의 모습을 보자 그가 여느 사냥꾼과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아하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 한데. 혹 북쪽나라의 신왕의 아들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저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라고 합니다.” 최리왕은 한참 부여국을 물리치고 성장하고 있는 고구려를 주목하고 있었다. 최리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사전에 막고자 했고 그 방법은 혼인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최리왕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국력이 강한 나라의 잘생긴 호동왕자라면 훌륭한 사윗감이자 딸에게도 좋은 배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리왕은 궁궐로 돌아오자 아예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결혼시켰다. 당시 결혼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먼저 식을 올리고 나중에 여자를 남자의 집에 데려오는 것이었다. 호동은 먼저 고구려로 돌아가 결혼사실을 대무신왕에게 알리고 낙랑공주를 고구려로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호동은 낙랑공주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호동은 비밀리에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뜻을 보였다. “나는 고구려 왕자요. 그대가 낙랑국의 무기고에 들어가 보물인 북과 나팔을 부수어 준다면 나는 그대를 예의를 다하여 아내로 맞아들이겠소. 그러나 나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대와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하겠소“ 조건이 달린 결혼, 낙랑공주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낙담했을까?
낙랑국은 넓은 평야지대와 해안의 항구를 지닌 동방지역의 요충지였다. 고구려의 입장에선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나라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쉽게 낙랑국을 공격하지 못했다. 낙랑국에 놀라운 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외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북과 나팔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 낙랑공주는 자신의 배필인 호동왕자로부터 그 신기한 북과 나팔을 깨뜨려야만 자신을 정식 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통고를 받았으니 그녀의 심정은 찢어질 듯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호동왕자인가? 아니면 조국 낙랑국인가?
낙랑공주는 마침내 사랑하는 호동을 위해 남몰래 무기고로 들어가 잘 드는 칼로 북의 가죽을 찢고 나팔의 주둥아리를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급히 호동에게 알렸다. 그러자 호동은 즉시 대무신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곧 군사를 이끌고 낙랑국을 공격했다.
낙랑국의 최리왕은 고구려군이 낙랑국의 수도에 도달한 이후에 비로소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알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리왕은 너무나 화가 나서 자기 딸을 죽이고 항복했다. 낙랑국의 수도는 서기 32년 함락되고 말았다.그렇다면 호동왕자는 낙랑국을 붕괴시켰다는 공을 세워서 왕이 되었을까? 호동은 대무신왕의 사랑을 듬뿍 받는 왕자였다. 게다가 큰 공을 세웠기에 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컸다. 하지만 호동의 외가 세력은 고구려 내에서 아주 미약했다. 호동왕자의 어머니가 작은 나라인 갈사국의 공주였던 것에 반해,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는 고구려에서 강한 세력을 가진 자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해우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대무신왕이 적자인 해우를 제치고 호동으로 태자를 삼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호동이 태자가 되지 못하도록 왕에게 갖은 모함을 해대기 시작했다. 호동이 어머니인 자신을 능멸하려고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모함이었다. 처음엔 그 말을 믿지 않았던 왕도 마침내 호동에게 벌을 내리려고 했다. 호동 역시 왕이 자신을 의심하여 벌을 주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대무신왕을 설득할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만일 변명한다면 어머니가 못된 마음을 가졌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대왕께서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입으시겠는가? 이는 효도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칼을 꽂아 놓고 엎드려 죽었다. 고구려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왕과 왕자들의 불행.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누린 그들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이렇게 괴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왕을 선택한 우씨 황후
우씨 황후는 서기 180년 고구려 9대 왕인 고국천왕의 왕후가 되었다.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강력한 연나부의 유력한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덕분에 그녀는 왕과 신하들 앞에서 당당하게 큰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190년, 그녀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녀의 친척인 좌가려와 어비류 등이 권력을 믿고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고국천왕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그들은 4월,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이들은 왕성까지 공격했지만 왕의 군대에 토벌당해 모두 죽거나 귀양을 가고 말았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후에서 쓸쓸한 처지가 된 우씨 왕후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새 왕후를 얻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신하들 사이에서 나왔음직하다. 그런데 고국천왕이 재위 19년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 왕의 병세를 잘 알고 있던 우씨 왕후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대왕께서 돌아가시면 나는 어찌 되는가? 이대로 앉아서 내 운명이 비참해지는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어차피 내가 낳은 아이가 없으니 다음 왕은 대왕의 동생들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왕을 선택하면 되지 않겠는가?‘
왕이 죽은 날 밤 우씨 왕후는 몰래 궁궐을 빠져 나와 대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발기의 집을 찾아갔다. 우씨 왕후는 발기가 왕이 되는데 도움을 줄 터이니 그 대가를 달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발기는 우씨 왕후의 참뜻을 몰랐다. 발기는 자신이 왕위 계승 1위 순위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 우씨 왕후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때문에 발기는 무심코 우씨 왕후에게 창피를 줄 수 있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우씨 왕후는 곧장 발기의 동생 연우의 집을 찾았다. 연우는 발기와 달랐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연우는 왕후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것을 알자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어 그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우씨 왕후는 연우가 잘 대해 주자 그에게 의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의 유언이라 꾸며서 신하들로 하여금 연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연우는 고구려 10대 산상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발기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궁성 앞에서 무력시위를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그는 요동 땅으로 갔다. 발기는 그 곳에서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군사 3만 명을 빌렸다. 산상왕은 발기가 후한의 군대를 빌려서 고구려를 공격해 오자 계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대항케 했다.
발기의 군대에 맞선 고구려 장군 계수는 고국천왕, 발기, 연우와 형제로 가장 막내였다. 계수는 뛰어난 장군답게 후한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계수는 적들 가운데 궁지에 몰린 발기를 발견했다. “네가 지금 늙은 형을 죽이려 하느냐?” 발기가 말하자 계수는 형제 간의 우애 때문에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 “연우 형님의 행동은 의로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님이 분을 참지 못해 저지른 나라를 멸망시키는 행동은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들을 뵈려고 합니까?“ 발기는 이 말을 듣고 심히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렇다면 산상왕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우씨 왕후를 어떻게 대접했을까? 산상왕은 놀랍게도 형수인 우씨 왕후를 자신의 왕후로 삼았다. 그리하여 우씨 왕후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산상왕이 죽은 후 주통부인에게서 난 교체가 동천왕이 되었지만 우씨 왕후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동천왕에게도 못된 짓을 많이 했다. 그녀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남성보다 더 대담하고 당찬 여성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답답함이 질투로 나타난 것이다. 하여튼 우씨 왕후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 여성들이 남성들 못지 않게 적극적인 삶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금장수에서 왕이 된 미천왕
고구려 15대 왕인 미천왕은 왕이 되기 전에 소금장수를 했던 사람이다. 어떻게 소금장수를 하던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고구려 14대 왕 봉상왕은 어렸을 때 연이어 터진 왕의 동생들의 반란사건을 지켜보며 왕이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형제의 우애마저 버릴 수 있음을 절실히 느껴왔다.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작은 아버지인 안국군 달가를 의심하여 사람을 시켜 몰래 죽였다. 다음 해 9월엔 동생인 돌고가 반역의 뜻을 품었다하여 죽였으니 봉상왕의 의심이 동생까지 죽여버린 것이다.
돌고가 죽기 전 그의 아들 을불은 궁궐을 빠져 나와 도망쳤다. 봉상왕은 자신의 조카마저 죽이려한 것이다. 을불은 궁궐은 나왔지만 당장 갈 곳이 없어 처음에 수실촌에 사는 음모란 사람의 집에서 머슴일을 했다. 을불이 왕의 조카인줄 알지 못했던 음모는 그에게 심한 일을 시켰다. 너무나 일이 고되자 을불은 괴로워서 1년만에 그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 뒤 을불은 동촌 출신의 재모와 함께 소금장수를 했다. 서해안에 있는 염전에서 소금을 받아다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 마을 저 마을로 소금을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을불은 소금을 팔던 중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리는 수난을 당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마을을 떠난 을불은 제대로 장사도 못하게 됐고 여러 번 굶주리기도 했다.
한편 사치를 즐기는 봉상왕은 백성들의 굶주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모아 궁궐 짓는 일을 시켰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그 당시 백성들은 봉상왕을 대신할 임금으로 을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봉상왕은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내 죽이려고 했으나 찾지를 못했다.
봉상왕이 악행을 일삼는 동안 천재지변도 계속 일어났다. 지진과 가뭄에 백성들은 굶주리다 못해 서로 잡아먹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왕은 그 해 8월에도 15세 이상의 남녀를 끌어 모아 궁궐을 수리하게 했다. 그러자 굶주림과 고달픔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백성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봉상왕 3년에 국상이 된 창조리는 고구려를 잘 다스리고자 했다. 창조리는 고구려의 가장 큰 문제가 왕이 백성을 돌보지 않는 정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창조리는 봉상왕에게 여러 차례 건의를 했다. “대왕이시여!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집을 떠나 떠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우선 먹고 살 수 있도록 창고 문을 열고 그들을 구해 주어야 합니다.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다 궁궐공사를 짓게 하는 것은 임금된 도리가 아니옵니다. 부디 대왕께서는 생각을 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봉상왕은 창조리의 말을 듣지 않고 화를 벌컥 냈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도저히 반성할 기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창조리는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봉상왕을 몰아 내고 다음 왕으로 을불을 모셔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숙우등을 시켜 을불을 찾아 내게 했다. 당시 을불은 거지와 같은 몰골로 비류하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처음에 을불은 그들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 전에 여러 차례 봉상왕의 무리들에게 쫓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을불은 이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이고 고구려 수도 국내성으로 왔다. 창조리는 여러 대신들과 뜻을 합하여 봉상왕을 왕위에서 몰아 냈다.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어 두고 군사들로 그 주위를 지키게 하자 봉상왕은 분명 신하들이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창조리는 을불을 모셔다 옥새를 바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기 300년, 소금장수였던 을불이 마침내 고구려 제15대 왕 미천왕이 된 것이다. 미천왕은 왕위에 오른 뒤 영토를 넓히는 일에 열심이었다. 미천왕은 힘든 시절을 겪으면서도 왕실의 자손이라는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숙우와 조불이 그의 남루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신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미천왕의 이러한 자존심은 그가 왕이 됐을 때 고구려를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국가적 자존심으로 나타났다.
미천왕은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했기에 백성에게 필요한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왕이었다. 그의 노력은 고구려의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발전시켰다. 또 미천왕은 요동지역을 확보하 기 위해 국력을 쏟았다. 비록 그 계획은 제대로 성취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서방진출 노력은 증손자인 광개토대왕을 만나 결실을 보게 된다.
제국의 건설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서기 374년 고구려 왕실에선 큰 경사가 났다. 소수림왕의 동생인 이연 부부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담덕이라 했다. 소수림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담덕은 왕실에서 더욱 소중한 아이로 자랐다. 384년 소수림왕이 죽자 동생 이연이 왕위에 올라 고국양왕이 되었고 담덕은 13살에 태자가 되었다. 담덕은 태자시절에 전쟁에 참여하여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용병술을 익혔다. 그 후 담덕은 18살의 나이에 고구려 제19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고구려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광개토대왕이다.
담덕이 처음 말을 배울 무렵 본 것은 고구려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러 가는 장면들이었다.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사건은 고구려인에게 그 얼마나 큰 수치였는가? 또 모용 선비에게 고구려의 수도가 점령당했던 아픈 경험도 있었다.
담덕은 고국원왕의 비극에 대해 아버지 고국양왕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고국원왕의 비극이야말로 광개토대왕의 영역확장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와 지표가 되어준 것이다. 따라서 그가 왕위에 오른 뒤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거듭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고국원왕의 수모를 씻어 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에게는 선왕들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두 왕들이 백제 후연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왕의 노력이 있었기에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밖으로 팽창정책을 펼 수 있었다.
즉위한 다음 해 광개토 대왕은 백제의 북쪽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까지 밀고 나갔다. 396년엔 친히 해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번엔 백제의 수도가 목표였다. 백제의 수도 풍납토성은 고구려의 총공격을 받아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백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고구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비록 고구려에게 항복했지만 결코 쉽게 굴복할 약소국이 아니었다. 백제는 재기를 꿈꾸며 왜, 가야와 연합하여 먼저 신라를 공격했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려는 백제의 작전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에 복종하고 있는 신라를 공격한 것은 백제가 곧 고구려에게 공격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음 해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냈다. 그리하여 고구려군은 신라에 가서 왜군을 물리쳤으며, 이때 금관가야가 고구려군에 의해 멸망했다. 백제는 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에 몇 번 더 저항을 했지만 번번이 광개토대왕의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에게 수십 년간 저항하지 못했다.
남쪽을 정벌하는 도중에도 광개토대왕은 북으로 눈을 돌려 거란을 공격했다. 또한 410년엔 동부여를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후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이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07년에 5만 명의 군대로 사방에서 적을 공격했다. 후연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이렇게 되자 후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풍발이란 자가 고구려 사람인 고운을 왕으로 추대하여 대북이란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러자 광개토대왕은 고운을 고구려의 제후왕으로 인정하고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