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돈
볼프 C. 슈바르츠벨러 지음 | 참솔
1933년 2월 7일자 「민중의 눈」이라는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수상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연봉 29,200마르크와 수당 18,000마르크 전액을 전투에서 사망한 나치스 돌격대와 나치스 친위대의 유가족에게 지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작가로서 돈을 벌고 있으며 히틀러 자신은 직책을 일종의 명예직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그를 은근히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히틀러는 그 같은 결정으로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세금부담을 줄일 수 있었지만 속사정을 알 턱이 없는 일반 시민들은 히틀러의 용기와 희생정신에 당연히 감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믿고 있는 히틀러의 신화가 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 히틀러는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와 난폭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신화! 하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우선 히틀러는 이 발표를 한 지 2년 후에 월급과 수당을 자신의 구좌로 송금시켰으며, 이런 뻔뻔스러운 행동을 통해서 세금을 완전히 면제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직 큰 힘이 없던 그는 세금을 면제받기 위해서 재무부 차관과 친한 부관에게 세금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한다.
부관에게 청탁받은 재무부차관 프리츠 라인르트는 세무서에 연락하여 "앞으로는 어떠한 소득세도 낼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받아 내어 그에게 전해 준다. 그 후 한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고 수상이었던 히틀러가 대통령직도 맡게 되자 앞으로는 물론 지금까지 연체된 세금 모두를 면제받게 만들었으며, 수상 월급과 대통령의 월급까지 모두 자신의 구좌로 입금시켰다. 히틀러의 생활비 또한 대부분 독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었기에 세금과 생활비가 면제된 히틀러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히틀러의 주변에는 그와 공생하며 억만장자가 된 동시에 히틀러에게 수백만 마르크를 벌게 해 준 두 남자가 있었다. 히틀러는 욕심이 많고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부를 축적할 만한 타고난 재능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상술을 지닌 파트너가 필요했고 이들은 히틀러의 보호와 그늘 아래서 자신의 욕심을 채웠을 뿐 아니라 지도자와 그의 후원자에게까지 이득을 안겨 주는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두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은 막스 아만으로 히틀러가 만든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또 다른 남자는 하인리히 호프만이었다. 히틀러가 그에게 내려준 공식적인 직분은 '국정보도국 사진 담당'이었으니 국가는 물론 당에서조차도 그럴듯한 직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직 그는 부자가 되고 지도자에게 부를 안겨 주기 위해서 봉사할 따름이었다. 호프만이 히틀러를 알게 된 1922년, 당시 서른일곱 살이었던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사진기자였으며, 가게도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호프만과 친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사진 찍히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호프만은 앞으로 히틀러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진사이며, 그의 사진을 공개할 시에는 히틀러가 반드시 서명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또한 사진을 팔 경우 호프만은 자신이 받는 금액의 10%를 히틀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호프만은 금광을 발견한 셈이고, 히틀러는 나름대로 적지 않은 수입을 얻게 된다. 1923년 이후에 국내외의 많은 신문사와 잡지사들이 다투어서 히틀러의 사진을 구하려고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히틀러와의 친분 덕분에 호프만은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또 다른 특혜도 누릴 수 있었다. 정권을 잡은 뒤 히틀러는 그에게 '제국정보국 사진 담당'이라는 직분 외에도 그를 교수로 임명했으니까 말이다. 히틀러가 토지등기를 할 때에도 호프만은 허수아비 노릇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에바 브라운이 이사간 집의 땅주인은 히틀러가 아니고 하인리히 호프만으로 되어 있었다.
화가가 되려다 실패한 히틀러는 물론 그의 강력한 측근 괴링이나 괴벨스를 비롯한 여러 실세들은 광적으로 예술품을 수집했다. 히틀러는 마음에 드는 물건일 경우 값에 연연하지 않았는데 예술품 수집을 담당한 깃털 호프만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두둑이 채웠다. 적당한 값에 그림을 마구 사들여 이를 비싸게 되파는 수법으로 호프만은 큰 돈을 만든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측근들이 아주 파렴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1936년 이즈음 히틀러는 돈 때문에 불만을 터뜨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우선 『나의 투쟁』으로 매년 최소한 150만에서 200만 마르크를 받았는데 당연히 이로부터 세금은 한 푼도 떼이지 않았다.
1934년 6월 30일 '나치스 돌격대원들의 피 비린내 나는 금요일' 폭동이 터지는 바람에 히틀러는 당 내에 잔존해 있던 사회주의 혁명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이후 히틀러는 독일을 자본주의라는 틀에 안착시켰다. 더 이상 노조의 파업도 임금협약조차 독일에서는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으니 고용주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낙원이 어디 있겠는가? 독일의 기업가들은 예외 없이 히틀러에게 기부금을 주기를 바랐으며 이는 실행에 옮겨졌다. 이러한 기부금은 세금을 내지 않는 알짜배기 돈이었다.린츠의 미래를 두고 펼친 히틀러의 구상은 어쩌면 과대망상에 가까웠다. 조용하기만 했던 소도시를 유럽 문화의 전당으로 만들겠다는 착상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린츠는 히틀러가 싫어했던 빈을 압도하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주민 수도 늘어나야겠지만 무엇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고향이 굉장한 건물과 널따란 가로수길이 있는 현대적인 도시계획을 가장 혁명적으로 완성해 낸 모범적인 도시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이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은 당연히 여러 개의 건물로 구성된 '지도자 박물관'이 차지하게 된다. 이 가운데 미술관이 건물을 대표하고 1층에는 축구장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밖에 무기박물관, 구하기 힘든 책과 서류들을 갖춘 도서실, 값비싼 고블랭직과 양탄자를 구비한 융단박물관, 마지막으로 가구와 실내장식박물관이 각각 들어서게 될 예정이었다.
히틀러가 가장 애정을 가졌던 것은 물론 미술관이었는데 그는 이곳에 전 유럽에서 최고로 훌륭하고 가장 유명한 그림들을 전시해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술품 가운데 어느 하나도 린츠에 가지 않았다. 이곳에 자신의 기념비이자 거대한 그림궁전을 만들고자 했던 히틀러의 야심에 찬 계획은 결국 과대망상가의 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폭군 히틀러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을 세상 사람들 몰래 숨겨두었던 장소인 지하 깊은 곳에 파두었던 방공호에서 삶을 마감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1913년 히틀러는 뮌헨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히틀러는 슈바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한동안 히틀러는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고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냈다. 유일하게 서로 왕래한 사람은 집주인이었던 재단사였는데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면 거실에서 정치적인 토론을 벌이는 정도였다. 그 외에는 술친구가 약간 있을 뿐이었다.뮌헨에서 히틀러의 직업은 화가였으나 화가들과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림엽 서 형태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지저분한 옷을 입었지만 외출을 할 때면 어김없이 멋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특히 양복 입기를 좋아하였는데 주인집이 다림질 은 물론 손질까지 잘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 심지어 사람이 북적대는 맥주집 안에서도 사람은 그리지 않았다.8. 몸통, 독일 제국의 수상9. 깃털, 황금손을 가진 사진사10. 히틀러의 가족과 친척들11. 미다스 왕12. 특명 '린츠'그러던 중 오스트리아에서는 병역문제로 히틀러를 찾고 있었다. 그로 인해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로 소환되는 위기를 맞게 되나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공무원들을 설득하게 되어 뮌헨에서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인 프란츠 베르디난트와 그의 아내가 살해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후 사건은 '세계대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황태자 부부가 살해되자 오스트리아는 군을 모으기 위한 선동을 벌였는데 이 때 히틀러는 한 장교의 선동에 감명을 받게 되어 군 입대를 신청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4년이 지난 1918년 11월 11일, 군 병원에 누워 있던 히틀러는 화가나 건축가가 아니라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이로부터 히틀러는 독일노동당의 위원회 모임에 초청을 받았다. 결과 555번이 찍혀 있는 당증을 받았고 더불어 노동당의 일곱 번째 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선전 담당이었다. 정치적인 경력을 쌓기 위한 발판으로 히틀러는 왜 그토록 별 볼일이 없는 작은 당을 택했던 것일까?
당시 정보국에 몸담고 있었던 히틀러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사실 소위 단골손님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노동당의 배후에는 막강한 정치적·사회적·재정적인 후견인이 있었던 것이다. 바이에른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조직인 툴레단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결국 겉으로 군소정당에 불과해 보이지만 당을 뒤에서 조종하는 단체가 누구인지 히틀러가 모를 리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에서도 이 툴레단은 강경한 범게르만 운동을 펼쳤다. 구체적으로 이 단체는 게르만 민족이라는 인종적 우월감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강력한 힘을 지닌 위대한 독일국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툴레단원의 소개로 알게 된 에카르트를 통해서 히틀러는 신비주의에 입문하게 된다. 에카르트로부터 모종의 기술을 터득한 이후로 히틀러는 대중들 앞에서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자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흥분해서 떠들어 대기만 하던 연설가가 이제는 명실상부한 청중을 사로잡는 웅변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1903년 1월 3일 아버지 알로이스가 술집에서 와인을 마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게 되었을 때 당시 열네 살이었던 아돌프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통곡하다가 그만 탈진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돌프의 어머니만은 아들의 그 같은 감정표현이 과장된 제스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격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오히려 아들에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아돌프는 장교도, 공무원도 되고 싶지 않았다. 예술가가 천직이라고 생각한 그는 화가의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돌프는 고등학교 생활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05년 가을에 아돌프는 대학에 진학하려는 결심을 어머니에게 내비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건강이 나빠지게 되어 고향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아돌프는 건강이 나빠지자 어쩔 수 없는 척하면서 린츠로 돌아와 얼마 동안 휴식을 취했다.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폐렴 환자처럼 굴면서 학교 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는 병이 나으면 곧 빈에 있는 미술대학에 지원하겠노라고 말해 두었다.
그리고 아돌프는 인생에 있어 가장 멋들어진 백수생활을 영위하였다. 당시 아돌프는 그를 추종하는 몇몇 무리들을 이끌고 린츠 시에 대한 청사진을 풀어 내며 어느 정도 고위 공무원의 아들이자 장차 예술가로서 누려야 할 사치를 향유하였다.
아돌프의 어머니는 린츠에서 빈둥거리고만 있는 아들의 장래가 아무래도 걱정되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대입준비를 시키기 위해 빈으로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때가 1906년 여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백수생활은 빈에서도 계속되었으며, 1년 동안 허송세월만 보내다 다시 린츠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돌프의 어머니는 아들 걱정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가슴근육의 악성 종양'으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아들을 다시 빈으로 보내게 된다. 그때가 1907년 9월이었다.
열여덟 살이 된 아돌프는 마침내 빈에 있는 미술대학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돌프는 입학시험에서 낙방을 하게 된다. 두말할 필요 없이 대학시험 낙방은 열여덟 살이었던 히틀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때 빈 미술대학 총장이 유태인이었는데 훗날 히틀러는 대학에 떨어진 게 모두 '유태인이 나를 중상모략한 결과'라고 합리화시켰다.
대학에 낙방하고 빈에 머물던 아돌프는 11월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린츠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뒤이은 어머니의 죽음은 아돌프에게 있어 제일 큰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돈 걱정을 하던 아돌프는 유산과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빈에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상속금이 해결되자 히틀러는 빈으로 갔다. 물론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았지만 유명한 예술가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을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던 무대미술가인 알프레드 롤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빈의 분리파 창립위원이었으며, 당시 공예학교의 선생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일하고 있던 궁정오페라의 무대장치가로 구스타프 말러를 불러들였던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바쁜 롤러는 히틀러의 개인교습을 할 짬이 나지 않아 노련한 교육자이자 조각가인 판홀처에게 히틀러를 소개해 주었다. 이 시기부터 히틀러는 그의 방탕한 생활을 절제하지 못해 국가에서 주는 고아위로금 25크로네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가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끝내 그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부랑자 숙박시설을 기웃거리는 이로 전락하고 만다. 당시 그에게는 부랑자 숙박시설을 찾아다니는 것도 힘들었지만 수치심 때문에 더 괴로워했다.
그리고 아돌프는 무료숙박소에서 그에게 있어 두 번째 친구인 하니쉬를 알게 되었는데 무료숙박소에서 그들의 우정은 깊어졌다. 부랑자의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하니쉬의 입담과 기지를 무기삼아 그들은 엽서를 파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사업은 점차 커져 아돌프는 처음에는 엽서에 조그만 습작정도에서 시작해 이제 30 40cm 크기의 그림을 그리는 일도 다반사가 되었다.
이제 그는 매달 평균 50에서 60크로네 정도를 버는 안정적인 삶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이를 어쩌지 못하는 샐러리맨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날로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아돌프, 그리고 하니쉬는 서로의 감정을 극한으로 몰아 붙여 끝내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아돌프는 홀로서기를 결심하고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 고아위로금조차 동생 파울라에게 이전하였고 이모에게 받았던 돈도 아껴 쓰며 무엇보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그전과 같은 방탕한 생활의 청산이었다. 그 후 아돌프는 빈에서의 생활을 접고 뮌헨으로 적을 옮겼다.나치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처럼 냉철한 경제적·사회적 분석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블라바츠키 부인, 휴스턴 스튜어트 챔벌레인, 구이도 폰 리스트, 란츠 폰 리 벤펠스와 테오도르 프리취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저서에서 풍기는 경향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신비주의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력을 과소평가한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헤르만 라우시닝은 한때 이렇게 말했다. "나치즘의 가장 깊은 뿌리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어 있다."비록 히틀러가 드러내 놓고 신비주의자들을 조롱거리로 삼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에게 신비주의를 전수한 선생 에카르트에게 『나의 투쟁』을 헌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1919년 9월 10일, 바이에른 제국군 병장이었던 히틀러는 사단장으로부터 참모장 직속 부하인 한 중대장에게 편지를 전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그의 소속 부서는 '선전부' 또는 '보도부'라는 명칭을